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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산 - 2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7일간의) 낯선 그리스도 Date : 2020. 8. 19. 04:00 Writer : 김홍덕

아마도 오늘날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은 자신의 신앙을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예수님 없는 기적이나, 성경 지식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생각하는 신앙이라고 생각진 않겠지만 그것은 착각이다.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 신학이나 영적인 능력이 있으면 <더(more)> 좋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더 좋겠다는 생각이 바로 무엇을 더하는 것이다. 더 좋아진다는 것은 기존의 상태가 온전하지 않다고 생각할 때 하는 생각이다. 가장 온전한 것은 더 좋아질 수 없다. 그것이 정관사 the(Christ)의 개념이고, 최상급의 개념이다.


변화산 위의 베드로도 엘리야와 모세만을 위하여 초막을 만들겠다고 하지 않았다. 예수님이 있어야 하는데 모세와 엘리야가 함께 있으면 <더> 좋겠다는 것이다. 그렇게 <더 좋다> 생각하는 것이 예수님으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이다. 그와 같이 은사와 신학이나 성경에 대하여 더 아는 것, 심지어 목사, 장로, 권사와 같은 직분이 더 그리스도다운 것으로 간주되는 것은 베드로의 생각이자 예수님의 말만 들으라는 하나님의 생각과 다른 생각이다.


베드로의 생각, 예수 믿는 사람이 기왕이면 능력을 행하고 성경에 대하여 잘 알면 더 좋다는 생각은 베드로나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이 처음 가진 생각이 아니다. 메시아 혹은 그리스도는 십자가로 가는 존재가 아니라 세상에서 이기게 하는 자라고 생각한 것은 아담의 때부터 있었던 생각이다. 하나님이 만드신 아담이 에덴동산 곧 만족의 동산에 있으면서 그 만족에 자신이 하나님과 같아지면 좋겠다고 생각한 것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에 성경에 나오는 것이라도 무엇을 더하면 더 좋고, 더 온전해 진다는 생각과 믿음은 죄의 근원이다. 하나님이 만드시고 경영하시는 세상에서 하나님과 다른 생각을 하는 것이 바로 죄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이런 마음과 그 마음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을 잘 보여주는 사건이 바로 노아의 홍수다. 그리스도에 뭔가를 더하면 더 온전하고 좋다고 생각하는 것은 노아의 홍수 직전에 홍수를 유발한 사건(상황)과 동일하다. 홍수 직전에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아내로 삼았더니 위대한 자, 크고 장대한 네피림을 낳았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사람의 딸 곧, 세상의 가치 기준으로 크고, 좋고, 위대하게 여기는 것이 있으면 더 좋다고 생각해서 간음하듯 혼합하여 크고 위대한 것이 나왔는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신 이유다.


십자가를 지신 예수에 무엇을 더할수록 더 나은 그리스도가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네피림과 같은 세상의 위대함을 낳는 현상은 오늘날 종교라는 세계 안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하나님을 믿는 교회의 건물과 시스템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이라고 할 수 있는 크고 화려한 건물, 값비싼 음향시스템과 같은 것을 도입하고 결합하여 위대하고 큰 교회가 나왔다. 그렇게 나온 큰 교회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인 세상 가치를 수용하여 나타난 네피림이다. 예수 믿는 사람이 세상에서 성공하고 잘 되면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여기는 것도 궤를 같이 한다.


무엇보다 그런 생각은 그리스도에, 또 하나님의 의에 사람들이 좋다고 여기는 것을 더하는 것이 더 좋은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것은 참 충성스러운 생각인 것 같지만 이미 온전할 뿐 아니라 나를 조성하시고 경영하시는 하나님과 그 아들에 대하여 피조물이 더 나은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기본논리에 모순이고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것이며 여호와의 이름 곧 정체성을 만홀히 여기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예수님의 말씀만 들으라고 하신 것과 동일하게 세상의 위대한 것을 더해서 더 온전한 그리스도가 되고 더 온전한 신앙이 된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홍수로 다 쓸어버렸다. 위대함이 더해지면 더 좋은 신앙, 더 온전한 그리스도가 된다는 생각은 하나님께서 유래 없는 홍수로 심판하시는 죄라는 뜻이다. 변화산에서 엘리야와 모세가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 좋겠다고 했더니 예수님만 있으면 된다고 하신 하나님의 마음이나 네피림이 나왔을 때 홍수로 쓸어버리신 마음이나 같은 것이다.


그런데 더 극적인 사건은 변화산 아래에 있었다. 예수님과 세 제자가 산에 올라갔지만 산 밑에는 사람들이 모였고 그 중에서 귀신들린 한 아이를 데려와서 제자들에게 고쳐 주기를 원했다. 그 아이는 귀신 들려서 물에도 넘어지고 불에도 넘어졌다. 산 위에서는 물로 상징되는 선지자 모세와 불로 상징되는 선지자 엘리야가 나타난 것이 좋아서 함께 하겠다는 생각에 하나님께서 예수만 있으면 된다고 말씀하시고 있을 때 산 아래에서는 불에도 넘어지고 물에도 넘어지는 아이가 낫기를 바라고 있었다. 불과 물에 넘어지는 것이 오히려 귀신 들린 것임을 말씀하고 있음이다.


귀신 들렸다는 것은 머리를 빼앗겼다는 의미다. 자기 몸을 주관하는 주권을 상실했다는 것이다. 머리를 빼앗긴 것이 바로 귀신 들린 것이다. 한 마디로 왜 사는지 모르는 모든 인생은 다 귀신 들린 것이다. 예수님께서 귀신 들린 자를 고치신 것은 인생의 목적을 모르는 사람에게 인생의 목적을 보이시므로 알지 못했던 하나님이 자신을 지은 목적을 알게 하시고 그 의가 자기 삶을 주관하게 하심을 말씀하신 것이다. 


귀신 들린 아이가 불에도 넘어지고 물에도 넘어진다는 것은 사람이 말씀에도 빠지고 기적을 사모하는 것에도 빠지기도 하는 것이다. 자기 삶의 목적도 모르고 자기가 원치 않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 때로는 율법적 생활에 기대보고, 또 그것으로 부족하면 기적에도 인생을 의탁하려 하는 모습을 귀신 들린 아이가 보여주고 있다. 그리스도 외에 불과 물, 말씀에 능통한 것과 기적을 일으키는 능력이 있다면 더 좋은 그리스도가 되고, 더 나은 예수 믿는 사람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온전한 그리스도, 하나님께서 정하신 그리스도의 정체성이 자기 삶을 주관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런 상태가 귀신 들린 상태이고, 율법과 기적에 빠지기도 하는 것은 귀신 들려서 그렇다는 말씀이다.


그 아이를 데려온 부모는 제자들이 기도하면 나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렇지 못했다. 그때 예수님께서 내려오셔서 아이를 고치시면서 제자들을 꾸짖었다. 믿음이 적은 연고라고 했다. 제자들이 불에도 넘어지고 물에도 넘어지는 아이를 고치지 못한 것은 그들도 모세와 엘리야가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좋다는 베드로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도 율법과 기적이 있으면 더 좋은 그리스도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인생의 목적을 몰라 행위로 의로워져 보겠다는 마음에 율법에 기대어도 여의치 않고, 기적에 의탁해 보아도 인생이 여의치 않는 사람을 율법과 기적이 있으면 더 좋은 그리스도라고 생각하는 같은 부류가 고칠 수 없는 것이다. 기적과 율법이 있으면 더 좋을 것이라는 마음으로 인생의 존재 목적을 알려 줄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인생의 목적인 그리스도의 본질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믿음이 적은 것이라고 했다. 그리스도의 정체성에 대한 순종이 부족하다는 말씀이다. 믿음은 순종이고 믿어야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전하시는 그리스도의 정체성이다. 


예수님께서 전하시는 그리스도의 정체성은 제자들이 알고 기대하는 그리스도와는 너무 달라서 수용하기 어렵고, 그것을 전하시는 예수님은 너무 낯설고,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도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렇게 예수님의 말씀에 완전히 순종이 안 되는 제자들의 상태는 믿음이 적은 것이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이다. 


이렇게 변화산 사건을 통해 예수님과 제자들을 비롯한 사람들이 가진 그리스도에 대한 다른 견해가 점점 부각되었다. 그리고 변화산 사건 이후에 예수님께서는 다시 죽임을 당하신다는 말씀을 하신다. 두 번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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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산 - 1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7일간의) 낯선 그리스도 Date : 2020. 8. 18. 04:00 Writer : 김홍덕

(마 17장, 막 9장, 눅 9장)


예수님께서는 죽임을 당할 것이라는 말씀을 하시고 산 위에서 영광스럽게 변하셨다. 예수님께서 영광스럽게 변하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영광스럽게 여기신다는 뜻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영광스럽게 되기 전에 하신 말씀은 이제 제사장들과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죽임을 당할 것이라는 말씀이었다. 하나님은 제사장과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죽임을 당하는 그리스도가 영광스럽다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고 뜻이란 의미다.


변화산에서는 모세와 엘리야도 영광스럽게 변한 예수님과 함께 나타나 예수님과 말씀을 나누었다. 이를 본 베드로는 이곳에 초막 셋을 지어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가 거하고 자신들도 이곳에 거하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런데 그때 하늘에 저희를 덮은 빛난 구름이 나타나고 그 속에서 소리가 나서 말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고 말씀하셨다.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마 17:5)


이를 본 제자들은 두려워 엎드렸는데 예수님께서 손을 대시면서 “일어나라 두려워 말라”고 하셔서 일어나보니 <예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저의 말을 들으라”는 소리에 고개를 들어보니 엘리야와 모세는 사라지고 예수님만 있었으니 당연히 예수님의 말을 들으라는 것이다.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이 좋겠다는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모세, 엘리야가 함께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이면 족하다는 것이다.


십자가로 가는 것이 그리스도가 아니라는 베드로와 제자들의 생각에 대하여 하나님은 예수의 말을 들으라고 하시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올바른 정체성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러 가겠다고 했을 때 제자들은 말렸는데, 하나님은 죽임을 당하는 예수님의 말을 들으라고 하신 것이다. 베드로의 생각, 사람들이 가진 그리스도에 대한 생각이 온전한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겠다는 예수님이 보이시는 그리스도의 정체성이 온전한 것이라고 하나님이 보증하시는 것이다.


모세는 하나님께 율법을 받은 사람이다. 모세는 율법의 대명사다. 그리고 모세는 물과 관련이 있다. 또 성경에서 말씀은 늘 물로 비유된다. 반면에 엘리야는 불의 선지자다. 그리고 능력과 기적의 상징이다. 그는 갈멜산에서 불로 제단을 태웠고, 자신도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산체로 들려 올라갔다. 모세는 율법을 엘리야는 기적과 능력을 상징한다.


모세와 엘리야를 보자 베드로는 예수님과 함께 거하도록 초막 셋을 지어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있는 곳에 자신도 있었으면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율법과 능력이 함께 공존하는 것이 더 좋은 그리스도라는 생각이다. 같은 값이라면 다홍치마라는 말과 같다. 사람들이 교회에서 흔히 하는 말인, ‘예수 믿는 사람이 기왕이면 잘살고 세상에서 성공하면 좋지’, ‘기왕이면 방언도 하고 성경에 밝으면 <더> 좋지’라는 생각들이 궤를 같이 하는 생각이다. 엘리야와 모세가 함께 있는 것이 더 좋은 그리스도라고 생각한 마음은 비단 베드로만의 마음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모든 사람의 마음이다.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 기뻐하는 예수님의 말을 듣지 않는 것이다.


베드로의 말과 같은 사람들의 생각은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 그 자체도 좋지만 그리스도로 좋지만 더 나아가서 율법과 말씀에 능통하고 기적을 행하는 능력이 있으면 더 온전한 그리스도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오늘 신앙인들의 마음을 대변한다. 그리스도에게 말씀의 지식과 기적의 능력이 있으면 좋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그런 능력은 세상의 가치 기준으로 경쟁에서 이길 수 있게 해 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교회 안에서도 성경에 더 능통하고, 신비한 능력을 행하면 교회에서 더 권위 있는 사람이 된다. 성경에 대한 지식과 기적을 일으키는 능력을 가지면 신앙의 세계에서도 더 높은 곳으로 간다. 사람들의 이러한 생각은 그리스도는 높은 곳에 있고, 위대하고 능력 있는 존재로 믿는 증거다. 그래서 목사는 항상 상석이고, 누군가 기도를 해야 한다면 소위 말하는 영발 있는 사람이 하는 것이 맞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변화산에서 사람들의 생각과 전혀 다른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다. 하나님이 가지신 그리스도에 대한 생각을 밝히셨다. 하나님을 믿는다면 당연히 하나님의 생각이 기준이 되어야 한다. 예수님을 “기뻐하는 자요, 아들”이라고 정리하셨다. 그래서 제자들이 고개 들고 눈을 떠보니 엘리야와 모세는 간데없고 <오직> 예수님만 보였다. 모세의 율법과 엘리야의 능력이 함께 하는 예수가 아니라, 십자가를 지겠다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그리스도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님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예수님 그 자체면 된다는 말씀이다. 예수님이 말씀하고 보여주시는 그리스도가 바로 온전한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논리적으로 봐도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설명하는 말씀이고 모세와 엘리야는 그 목적의 한 과정이고 도구고 그리스도의 예표다. 모세도 엘리야도 모두 그리스도 안에 수렴하는 것이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이 말씀은 예수님을 믿어 그리스도로 거듭난 하나님 아들이 되기를 바라는 사람들에게 아주 중요한 말씀이다. 그리스도로 거듭나 예수님이 보이신 그리스도의 본성을 가진 구원 받은 하나님 아들이 되는 것에 말씀의 지식이나 율법이나 기적이나 세상의 가치 기준에서 이긴 자가 되는 능력은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 다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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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제자와 가룟 유다의 차이, 11제자와 유대인들의 차이는 예수님이 하나님 아들이라는 것을 믿는 믿음의 차이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인 것은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반면에 유대인들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보고 사람들은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면?”이라고 말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믿지 않았다. 그러나 베드로와 제자들의 갈등은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십자가를 지는 예수님의 모습은 “왜?”, “하나님의 아들이 왜 저런가?”였다. “저 모습이 그리스도라고?”라는 이루 말할 수 없는 혼돈 중에 있었다. 이것은 둘 다 예수님을 부인하는 것 같아도 근원적으로 정말로 다른 세계다. 


제자들도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보잘 것 없는 존재라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들이 더 잘 알았다. 심지어 자신들은 그 삶의 일부였다. 죄인과 창녀와 세리와 먹고 마시는 예수님의 곁에 늘 그들이 있었다. 그런 제자들이 죄인과 창녀와 세리와 함께 먹고 마시는 예수, 그 출신마저 선한 것이 나올 수 없다는 나사렛 출신의 예수, 그리고 자신들과 같은 성정을 가진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인정하는 것과 그것조차 인정하지 않는 것은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실 때 가룟 유다 외에는 다 목욕한 자와 그렇지 않은 자로 구분하신 근거도 이것이다. 성령이 오시기 전까지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에 대하여 다 밝아지지는 않았지만 자신들과 같은 사람, 육신을 가진 존재가 그리스도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믿는다는 것은 거듭나지 않으면, 목욕하지 않은 자는 절대로 범접할 수 없는 낮은 자리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믿는 것은 오늘날 기독교 신앙 안에서도 보편적인 일이다. 그러나 바다 위를 걷고 죽은 자를 살리신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것과, 나와 같은 육신을 가지고 있고, 세리와 창녀들과 함께 먹는 예수, 다른 사람의 주장 앞에 자신을 내어 놓는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것은 완전히 다르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선지자’, ‘엘리야’, ‘세례요한의 환생’이라고 여긴다고 했다.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는 존재로 보았다. 예수님을 보지 않고 예수님이 행하시는 이적만 본 적이다. 본질이 아니라 나타난 것을 보았다. 그들이 그렇게 본 것은 예수님이 보이신 것이 자신들의 소망이고 믿음이었기 때문이다.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을 행하는 신적인 존재, 아니면 초능력을 가진 존재와 그 능력을 사모하고 그 힘을 빌어서 자신들도 세상에서 이긴 자가 되려는 소망이 나타난 것만 본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나를 누구라 하느냐?” 물으실 때 <나>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신적인 존재가 아니다. 지난 세월동안 죄인과 세리와 창녀와 함께 먹고 마신 너희 제자들과 동일한 육신을 가진 예수, 배도 고프고, 화도 내며, 울기도 했던 인간 예수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물으신 것이다. 베드로의 고백을 칭찬하신 것은 바로 베드로와 동일한 육신을 가진 나를 그리스도로 또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했다는 것이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칭찬하신 이유다. 


베드로와 같이 제자들은 육신을 가진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이제 그들에게 남은 것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모든 것, 하나님이 주신 육신 가진 인생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인데 어떤 그리스도인지, 왜 하나님의 아들인지가 열리는 일이 앞에 있다. 예수님께서 “내가 가는 것이 유익이고, 성령이 오시면 모든 것을 알게 하실 것”이라고 하신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다는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은 베드로와 다른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또 그리스도로 믿는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 대부분이 가진 믿음은 세상에서 겪고 있고 도모하는 일들을 기도하면 더 뛰어난 결과를 낼 수 있는 그리스도다. 바로 “나를 누구라 하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에 “당신은 엘리야요, 선지자요, 세례 요한의 환생”이라고 답하고 있는 것이다. 그 믿음이 사람들의 기도에 함축되어 있다. 세상에서 이기게 해 달라고 기도한다. 육신의 평안과 세상에서의 성공을 바라며 예수님께 기도하는 것은 예수님은 그런 능력을 가진 존재라고 믿는다는 증거다. 그리고 그 기도와 소망을 이루어주심으로 나타난 결과는 하나님께 영광이 될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신 것은 사람이 상의 능력을 가진 분이라는 믿음이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님께서 그렇게 간절하게 전하신 그리스도가 아니다. 오히려 그런 믿음,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이 예수를 믿는 믿음은 예수님을 십자가로 끌고 가는 믿음이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보고 열렬히 환호 했지만 십자가에 못 박히는 그리스도임을 알았을 때 차라리 강도를 풀어 달라고 외친 이들의 가치관이고 믿음이다. TV에 나오는 사람을 대중이 안다고 그 사람이 대중을 아는 것이 아니듯 자신들은 예수님을 믿는다고 생각하지만 그리스도는 고사하고 예수님이 누구신지 모르고 있다는 말이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예수님을 보고는 환호했다. 하지만 십자가에 달린 예수는 조롱의 대상이었고, 죽은 사람을 살리는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었지만 십자가에 달린 예수는 그냥 죄인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위중한 병을 고쳐주고, 경제적 위기를 이겨내게 하시는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육신의 문제를 세상의 가치 기준으로 볼 때 더 나은 것으로 해결해 주지 않는 예수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존재로 여긴다. 다들 그런 이유로 교회를 떠나고 믿음을 버린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라고 물으신 예수님의 질문은 오늘도 여상하다. 성경에 있다는 것은 오늘도 물으신다는 의미다. 그리고 오늘도 물으신다는 것은 오늘도 답해야 한다는 의미고, 오늘도 누군가는 앞서 설명한 것처럼 “엘리야, 선지나, 세례 요한의 환생”이라고 답하고 있고, 또 누군가는 “그리스도”라고 답하고 있다는 의미다. 그리고 여전히 예수님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말씀하신다.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지는 존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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