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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생과 재물 - 2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7일간의) 낯선 그리스도 Date : 2020. 8. 28. 04:00 Writer : 김홍덕

다시 부자와의 대화로 돌아와서 보자. 부자에게 예수님은 율법을 다 지켰는지를 먼저 물으셨다. 그랬더니 어릴 때부터 잘 지켰다고 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가진 것을 팔아서 가난한 자에게 주라”고 하셨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부자는 고민하면서 돌아갔다. 부자의 모습은 재물을 아까워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아까웠겠지만 부자의 모습은 재물을 아까워하는 한 사람의 모습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세상의 가치로 가늠하는 오고가는 모든 인류의 모습이다.


부자에게 재물은 영생의 티켓과도 같은 것이었다. 재물은 행함의 소산이다. 육신의 행함을 가치로 정제한 것이 재물이다. 재물은 행함으로 일군 선한 가치다. 어려서부터 율법을 지킨 것과 그에게 쌓인 재물은 모두 행함의 열매다. 그는 그것에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자신이 영생에 속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어떤 행함이 더 있어야 하는지 예수님께 물었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람을 행함으로 판단하지 않으시므로 사람은 행함으로 영생과 구원을 얻는다는 것을 확신하지 못한다. 행함으로 의로움을 판단하시지 않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셨는데 사람이 스스로 행함으로 영생을 얻는다고 착각하게 두시지는 않는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서 부끄러워한 것도 그 안전장치 때문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이 부자 역시 자신의 부와 율법을 지켜낸 것으로 영생까지 얻는다고 믿지는 못했다.


그는 예수가 영생의 주(主) 하나님 아들이니 영생을 위하여 무엇을 행할지 알려 줄 것이라 생각했다. 그의 예상대로 예수님은 답을 알려 주셨다. 재물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라고. 그러나 그 대답은 부자가 기대한 대답이 아니었다. 지금 예수님의 모습이 사람들이 기대한 그리스도가 아니듯이 그가 기대한 영생의 길이 예수님께서 제시한 길과 달랐다.


그가 영생을 얻는 방향이라고 생각하고 쌓은 것은 세상이 값있다 여기는 재물이다. 경쟁을 이겨낸 육신의 수고가 낳은 열매가 그의 재물이다. 경쟁에서 이겨 재물을 쌓고 쌓으면 영생을 얻는다고 믿었다. 피라미드 꼭대기에 영생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재물을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했다. 영생에 대하여 이때까지 가진 생각과 반대로 가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것은 이 부자에게 전혀 낯선 것이다. 한 번도 그 방향에 영생이 있다고 생각한 적이 없는데 그 쪽으로 가라고 하신 것이다.


부자가 돌아가자 예수님은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보다 어렵다고 하셨다. 바늘귀는 성벽에 있는 개구멍 같은 것인데 낙타가 지나가는 어렵다. 그 정도로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이 어렵다고 하셨다. 그러나 이 말씀에서 주목할 것은 부자가 돌아갔다는 것이나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 힘들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아니라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 어렵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제자들이 놀랐다는 점이다. 


제자들도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쉽다고 생각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것은 믿는 제자들이었다. 그런 그들이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쉽다고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은 그들이 생각하고 있는 그리스도가 어떤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이어서 요한과 야고보를 예수님 좌우에 앉게 해 달라는 말에 모두가 분개한 것 역시 제자들이 그리스도를 어떤 존재로 생각하고 있는지 보여준다. 


그러나 그렇다고 제자들이 비난 받을 일은 아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모든 이들 역시 그리스도를, 영생을 부자와 같이,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 어렵다는 말씀에 놀라는 제자들과 같이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니 더 사실적으로 말하면 제자들보다 못하다. 앞선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부문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제자들은 천한 육신을 가진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것은 확실히 믿고 있었지만 오늘날 사람들이 교회를 치장하고, 교회 갈 때 자신을 치장하는 모습에서 천한 육신의 모습을 가진 예수가 그들에게도 그리스도일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께 영생을 물어온 부자와의 대화는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질 것이라는 말씀에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지면 안 된다고 맞서고 있는 갈등의 한 단면이다. 십자가를 지러 가시는 예수님의 모든 행적은 그리스도의 정체성에 대하여 사람들에게 말씀하고 있고, 그 말씀 앞에 제자들과 사람들이 가진 그리스도에 대한 착각과 환상이 드러나고 있다. 영생을 묻는 부자의 생각은 인류가 가진 그리스도에 대한 정의가 그 바탕이다. 인생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그리스도는 재물과 같이 세상이 귀하게 여기는 것의 궁극에 있는 존재라는 생각을 대변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는 그런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낮아지고, 의인이 죄인들의 주장에 끌려 죄인이 되어 육신을(육신의 수고를) 내어주는 존재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말씀하신다. 그리고 그 그리스도의 본 모습을 보이시려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신 때부터 밝히고 있다. 그 연장선에서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귀에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는 말씀에 이어서 세 번째로 십자가로 가실 것을 말씀하신다. 그러나 제자들에게 그런 모습의 예수님이 감당이 되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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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생과 재물 - 1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7일간의) 낯선 그리스도 Date : 2020. 8. 27. 04:00 Writer : 김홍덕

(마 19장, 막 10장, 눅 18장)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것인지 예수님께 질문한 부자가 있었다. 


 “선한 선생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무엇을 행하느냐(Do)’에 영생이 달려 있다고 믿는 사람의 질문임을 알 수 있다. 어떤 행실은 영생을 주고, 어떤 행실은 영생에서 멀어지게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생각을 대표하는 질문이다. 이 질문과 생각은 영생이 어떻게 주어지느냐의 문제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영생을 얻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에 합당한 존재가 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즉 그리스도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어떻게 영생을 얻는가?’는 곧 하나님께서 온전하게 여기는 ‘그리스도는 어떤 존재인가?’와 같은 문제다. 사람은 영생할 수 없지만 메시아, 곧 그리스도는 영생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질문을 예수님께 했다는 것은 예수님이 그리스도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부자의 질문을 다른 말로 바꾼다면 “어떤 선한 행동을 해야 당신과 같이 선한 사람(그리스도)이 될 수 있겠습니까?”가 된다.


이 질문에 예수님은 반문하신다. 그 반문은 두 가지다. 하나는 “왜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네가 율법을 알지 않느냐? 그것을 지켰느냐?”가 두 번째 질문이다. 질문은 두 가지인데 이 부자는 두 번째 질문에만 답을 한다. “어려서부터 지켰다”라고.


예수님께서는 그의 답을 듣고 영생을 얻으려면 무엇을 하여야 하는지에 대한 답변 같은 말씀을 하신다.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니라(막 10:21)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들은 그는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돌아갔다. 어쩌면 이 행동의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하느냐?”라고 물으신 물음에 대한 답니다. 예수님을 진정 선한 분으로 여겼다면 그는 재산을 다 팔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부자에게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라고 하신 예수님은 더 이상 선한 선생도, 그리스도도, 영생의 길을 알려주는 사람도 아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예수님께서는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보다 어렵다”고 말씀하셨다. 예수님과 부자 사이의 대화는 오히려 여기부터가 본론이다. 


이 말을 들은 제자들은 심히 놀라고 “그럼 누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인가?”라고 서로 말했는데 정말 놀라운 것은 제자들이 놀랐다는 것이다. 늘 가난한 자와 죄인들, 그리고 세리와 창녀들과 함께한 예수님 곁에 있었던 제자들이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 힘들다고 하면 오늘날 사회 정의를 부르짖는 기독교인들처럼 기뻐해야 할 것 같은데 그렇지 않고 오히려 놀랐다는 것이 놀라운 것이다.



영생을 얻는 법

이들의 생각을 살펴보기 전에 먼저 부자가 예수님께 질문한 ‘영생’을 얻는 법은 무엇인지 생각해보자.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시기 전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실 때 영생에 대하여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영생의 조건은 “무슨 선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영생은 어떤 행실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것, 하나님을 바로 아는 것이 곧 영생이라는 말씀이다. 예수님을 바로 아는 것에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면서까지 사람에게 전하시는 그리스도의 정체성이 빠질 수는 없다. 그리고 안다는 것은 체휼되고 본성으로 내재되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과 예수님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의 예수님께서 보이신 하나님의 의와 뜻이 자기 본성이 된 사람이다. 영생은 그리스도가 되어야 얻는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리스도로 거듭난다는 것이 곧 영생이란 말씀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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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신 -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질그릇의 선택 Date : 2020. 8. 26. 04:00 Writer : 김홍덕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셨다. 육신을 가진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 수 있다는 말씀이다. 말씀 그자체가 육신의 삶이 되는 것보다 더 온전하게 말씀을 지키는 삶은 있을 수 없다. 말씀 자체인데 말씀을 지키려 할 것이 무엇이겠 는가? 숨만 쉬어도, 말만 해도 다 말씀을 이룬 것이다. 심지어 화장실에 가 있어도 하나님의 말씀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면 육신의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말씀이다. 예수님께서 우리와 동일한 육신 으로 오신 것은 우리가 이러한 삶을 살도록 지음 받은 존재라는 것을 보여 주고자 하심이다.


스스로 정죄하여 부끄러운 인생을 의롭게 하기 위하여 성경을 지키려는 끝없는 노력을 그치려면 하나님께서 주신 육신에 대한 관점을 회복해야 하기에 우리와 같은 육신, 하나님께서 처음 만드신 육신의 모습으로 구원자인 하나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이다. 무화과 나뭇잎으로 부끄러움을 가릴 수 없음을 아시고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주신 것은 육신을 부정하고 부끄럽게 여기는 어두움에서 구원하신다는 뜻을 보이신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창 3:21)


이 놀라운 것을 보이시려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은 육신으로이 땅에 오셨는데, 오히려 사람들은 선악과를 먹고 어둡게 되어 무화과 나뭇잎으로 자신을 부끄러움을 가리듯 육신으로는 예수님과 같이 될 수 없다며 행위로 성경을 지켜서 의로워지는 법을 좇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서 사람을 구원하시려 한 것은 창조 하실 때 세우신 뜻대로 사람이 회복되기를 바라심이다. 그래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다. 하나님의 아들이 부끄러움을 가리는 가죽옷이 되는 희생의 제물이 되셨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마저도 사람이 먹은 선악과로 인한 벌을 아들에게 대신 내리심 으로 사람들을 구속했다고 생각한다. ‘죄는 사람이, 벌은 예수님 이’라는 식이다.


하지만 그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은 사람 들이 떠난 자기 자리와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을 알게 하시려 함이다. 사람이 그것을 보고 육신의 정체성을 알게 되어 구원을 얻는 것이다. 예수님의 육신을 희생으로 드려 본을 보이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육신을 어떻게 볼 것이며, 육신을 주신 이유가 무엇이며, 육신을 가진 인생의 정체성이 무엇인 지를 자신을 희생으로 드리면서 보이신 것이다. 어떻게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지를 보이시려 교보재와 같이 희생을 드리신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 자신을 위해서 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예수 님은 하나님의 본체이시고,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니 그 육신의 정체성과 삶도 모두 하나님 사람을 창조한 뜻 그 자체였기 때문에 예수님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다. 오직 육신의 삶을 가진 사람에게 보이시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희생이 인생의 구원이 되는 것이다. 죄 없는 자라야 죄인을 구원할 수 있고, 본이 될존재가 본을 보이는 것이기에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것이다.


육신으로 오셨고, 육신이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육신 안에 물과 피 곧 하나님의 말씀과 생명이 옥합이 깨어져 향기가 나듯 드러내시므로 육신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신 것이다. 육신을 희생으로 드려 육신을 부정하게 보는 사람들에게 육신을 온전 하게 보시는 하나님의 의를 보이신 것이다.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육신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며 그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의가 본질임을 보이셨다. 육신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담을 그릇이고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낼 형식이라고 십자가에서 말씀하신 것이다. 십자 가에서 몸이 깨어지심과 같이 육신을 종과 같이 섬기는 것에 드리면 그 안에 거하는 하나님의 뜻이 나타난다는 것이 육신에 대한 하나님의 관점이라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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