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경 바디매오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7일간의) 낯선 그리스도 Date : 2020. 9. 10. 04:00 Writer : 김홍덕

(마 20장, 막 10장, 눅 18장)

예수님 공생애 마지막에는 기적이라고 할 만한 것이 그리 많지 않다. 변화산 아래에 있던 귀신 들린 아이를 고쳐 주신 것, 베드로가 휘두른 칼에 베여 떨어진 귀를 붙여 주신 것 그리고 굳이 이야기한다면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여 마르게 하신 것 등이 있다. 그리고 소경 바디매오를 고치신 일이다. 소경 바디매오의 믿음은 제자들마저 그리스도가 누구신가에 대해 예수님과 반대로 생각하는 상황에서 십자가를 지러 가는 예수를 좇아가는 온전한 믿음이 어떤 것인지를 바디매오가 보여주고 있다.


바디매오는 소경이다. 눈이 보이지 않아 길을 가지 못하고 길 가에 앉아 있다. 길을 가려면 눈이 보여야 한다. 그 길이 땅 위의 도로 같은 길은 말할 것도 없고, 목적하는 바를 향해 가는 과정도 그 목적에 대한 밝음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바디매오는 길을 가지 못하고 있다. 어디로 갈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바디매오는 육신의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이지만 이 이야기는 육신의 눈을 고친 사건이 아니다. 


이 사건은 육신으로 소경인 바디매오를 중심으로 보면 단순하게 육신의 눈이 보이지 않는 안과적 장애를 예수님께서 고치신 사건으로 보인다. 그렇게 보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잘 믿으면 육신의 질병도 낫게 해 주신다고 설교하고 또 그것을 믿는다. 그러나 이 사건, 아니 성경은 어디까지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이다. 당연하게도 이 사건 역시 예수님 중심으로 보아야 한다.


특히 십자가를 지러 가시는 예수님을 두고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고 간절하게 설명하심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정체성에 대하여 알지 못하는 제자들, 그리고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의 정체성에 대하여 소경이다. 그들은 눈을 뜨고 있지만 그리스도에 대하여 보지 못하고 있다. 바로 앞에 계신 예수님을 육신의 눈으로 분명하게 보고 있지만 그리스도라는 예수님의 온전한 정체성은 보지 못하고 있다. 보지 못할 뿐 아니라 말로 알아듣지 못하고 있다. 심지어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는 예수님을 그리스도가 아니라 선한 것이 날 수 없는 동네 나사렛 예수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 사건은 그리스도에 대하여 온전히 볼 수 있는지, 아닌지에 대한 말씀이다. 육신의 눈으로 세상 만물을 볼 수 있느냐 아니냐가 아니라 세상에 오신 예수님이 하나님께서 정의하고 예수님이 설명하시는 그리스도로 보이느냐 보이지 않느냐에 관한 사건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바디매오는 예수님을 육신의 눈으로 보면서도 그리스도를 온전히 보지 못하는 모든 사람들의 모습인 동시에 예수님을 보지 못하는 상태에서 어떤 믿음이 있어야 예수님을 온전한 그리스도로 볼 수 있게 되는지를 보여주는 말씀이다.


육신의 눈은 멀쩡하여 예수님을 선명하게 볼 수 있지만 선한 것이 나올 수 없는 동네 ‘나사렛 예수’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고, 육신의 눈은 보이지 않기에 예수님을 보지는 못하지만 그가 다윗의 자손 곧 백성들을 구원할 메시아요 그리스도로 믿는 소경 바디매오가 대비되고 있는 이 사건 속의 진정한 소경은 바로 예수님을 나사렛 예수라고 하는 육신의 눈은 멀쩡한 사람들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요 20:29)


바디매오가 길가에 앉았을 때 그 길로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니 많은 사람들이 따랐고 당연히 소란스러웠다. 바디매오는 그 소리를 듣고 무슨 일인가 사람들에게 물었더니 사람들이 대답하기를 “나사렛 예수”가 지나 간다고 했다. 그 소리를 들은 바디매오는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쳤다. 여기에 이 말씀의 핵심이 있다. 사람들은 ‘나사렛 예수’라고 알려 주었는데 바디매오는 ‘다윗의 자손 예수’라고 외친 것이 그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바디매오를 꾸짖어 조용하라고 했다. 그럼에도 바디매오는 멈추지 않고 다시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쳤고 예수님께서는 그를 불렀다. 그러자 바디매오는 예수님을 향해 뛰어 갔다. 눈으로 예수님을 보는 자, 세상의 만물이 보이기에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보는 것에 어떤 장애도 없는 자들은 보지 못하는데, 육신의 눈이 보이지 않기에 뛰는 것은 고사하고 걷는 것조차 힘든, 모든 것이 장애물일 수 있는 바디매오는 뛰어서 예수님께 갔다. 이것은 보통 놀라운 일이 아니다. 소경이 뛰는 것을 볼 수 있을까? 자기 앞에 뭐가 있는 줄 알고 뛴단 말인가? 눈에 보이는 것이 없으면 걷는 것도 힘든데 바디매오는 뛰어갔다. 과연 누가 소경인가? 그리스도에 대하여.


소경이 겉옷을 내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오거늘(막 10:50)


바디매오에게 조용히 하라고 한 사람들은 이중적이다. 예수님을 메시아라 생각하면서 한편으로는 선한 것이 나올 수 없는 나사렛 예수라 여긴다. 예수님을 따르면서 무슨 일인지 묻는 바디매오에는 나사렛의 예수라고 알려 준다. 나사렛에서는 선한 것이 나올 수 없다고 하면서도 그 나사렛 예수를 자신들이 선한 것으로 여기는 독립과 민생의 문제를 해결할 그리스도로 지금 받들고 있다. 그래서 소경 같은 자들을 돌보실 분이 아니니 바디매오를 조용히 하라고 제어한 것이다. 


그러나 바디매오에게 예수님은 나사렛 예수가 아니라 다윗의 자손이었다. 그가 소경임에도 뛰어 가서 만나야 할 분이었다. 바디매오는 그리스도를 그리스도로 보지 못함이 바로 소경이고, 자신이 그 소경이라는 것을 알기에 길을 가지 못하고 길 가에 앉아 있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라는 것이 인정된다면 그리스도를 봐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설사 지금 당장 예수님이 보이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내 앞에 어떤 장애가 있을지 모르고, 보지 못하니 어떤 것에 걸려서 내가 상할 수 있을지라도 예수님을 온전한 그리스도로 보기 위해서는 앞도 보이지 않는 소경이 길거리를 뛰어가듯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보려고 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물으셨고 당연히 보는 것이었다. 그러나 바디매오가 보고자 한 것은 세상이 아니다. 그가 보고자 한 것이 세상이라면 그가 왜 예수님을 따라 갔겠는가? 이때껏 보지 못한 세상 구경을 가야지. 그러니까 그가 보고자 한 것은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이다. 사람들에겐 선한 것이 날 수 없는 나사렛의 예수지만 그에겐 다윗의 자손이고 어두워 보지 못했던 인생이 가야할 길을 예수님을 통해 보고자 했다. 다윗의 자손이자 인생의 길과 빛이 되시는 예수님을 보고자 했다. 


생각해보면 예수님께 기적 같은 치료를 받은 사람들 대부분이 자기 집이나 길로 갔지만 바디매오는 그 길로 예수님을 따라 갔다. 특히 주목할 것은 그가 따라가는 예수님은 오천 명을 먹이시러 가시는 예수가 아니라 십자가를 지러 가시는 예수다. 이것이 중요하다. 그가 보고자 했던 것은 온전한 그리스도가 가는 길, 바로 십자가를 지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간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바라는 참 믿음이다. 예수님께서 “너의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칭찬하신 이유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바디매오의 모습을 그리스도의 정체성이라는 관점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바디매오의 모습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가 예수님을 따라 갔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따라 가는 것이야 이미 거리를 소란스럽게 할 정도로 많은 사람들과 제자들이 따라 가고 있었다. 그렇지만 바디매오가 예수님을 따라 가는 것은 군중들과 완전히 다른 의미다.


군중들은 병고치고, 오천 명을 먹이신 예수를 좇고 있지만 바디매오는 십자가를 지러 가는 예수님을 좇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전혀 다른 길이다. 바디매오를 고치신 예수님의 남은 여정은 십자가를 지는 것 밖에 없었기에 바디매오가 따라 갈 수 있는 것이라고는 십자가 밖에 없었다. 예수님의 그 남은 여정은 오랜 기간 함께 한 제자들에게도 낯설고 감당하기 어려운 길인데 바디매오는 그 길을 따라 간 것이다.


생각해보면 그가 얼마나 오랜 세월 소경으로 살았는지 몰라도 보지 못하다가 보게 되었다면 정말로 세상의 많은 것이 보고 싶었을 것이다. 눈에 보이는 것도 없는데 예수님께서 오라고 하시니 큰 위험을 무릅쓰고 뛰어 가서 고침을 받아 보게 되었을 때, 예수님은 '가라'고 하셨고, 바디매오에게 수많은 선택이 있는데 그 중에서 사람들이 선한 것이 나오지 않는 동네 나사렛 출신의 예수라고 말하는 예수를 좇아가갔다는 것이 이 사건에서 또 하나의 중요한 점이다.


이 바디매오의 모습은 오늘 우리가 어떻게 예수를 믿어야 하는지를 감동적으로 보여준다. 사람들은 인생이 어디로 가야하는지, 인생의 목적이 무엇인지 모르는 소경인데 인생의 목적을 말씀하신 빛이요 길이요 진리이신 예수님의 부르심에 답하지 않는다. 다들 예수님의 능력을 이용해서 육신의 정욕을 추구하려고만 한다. 육신의 눈은 멀쩡하고, 또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나 정작 인생의 목적이 무엇인지 모르고, 구원을 받았다면서 죄 없다 말하지 못한다. 정작 봐야할 것은 보지 못하는 어두움, 곧 소경인 상태로 있다.


그러다 이전에 듣지 못하던 말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나사렛 출신의 천한 신분이라고 말하듯이 세상에서나 종교적 관점에서 보잘 것 없어 보이지만 자신이 보지 못하는 것을 일러주는 어떤 소리를 듣기도 한다. 그러나 바디매오처럼 뛰어가지 못한다.


많은 사람이 얕은 물 가에서 저 큰 바다 가려다가 찰싹거리는 작은 파도 보고 맘이 조려서 못 가네(찬송가 “내 주 하나님 넓고 큰 은혜는" 3절 가사 중에서)


바디매오는 소경이었다. 그는 길을 가지 못해 길 가에 앉아 있었다. 그 모습은 인생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 모르는 사람,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만 신앙의 푯대가 분명하지 않은 모든 사람들의 모습이다. 사람들이 나사렛의 사람이라고 말하는 예수를 자신을 구할 다윗의 자손으로 믿고 지금 당장은 보이지 않기에 예수를 향해 뛰어 간 모습은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좇아가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십자가를 지는 낮은 자리로 가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따라가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구원이라고 하셨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이 낮아지는 것은 패배요 재앙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벌과 저주라고 여기는 지배적 인식 아래에서 낮아지고 종이 되는 것이 온전한 그리스도라는 것을 믿고 자신의 삶을 그것에 드리는 것과 모든 사람들이 나사렛 예수라고 말하는 예수를 다윗의 자손으로 믿고 그 믿음의 소망을 이루기 위하여 소경이 뛰어 간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믿는 그리스도는 모두가 세상에서 성공하고 높아진 그리스도다. 그렇기에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을 하나님의 영광이라 여기고, 교회에 세상에서 이긴 사람이 오면 좋은 교회라 생각하고, 교인들 중에서 세상에서의 이긴 일이 있으면 광고하고 주보에 올린다. 그런 사람들에게 십자가를 지러 가신 예수님, 세상에서 낮아지므로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신앙은 모두 천한 나사렛 예수일 뿐이다.


그리스도에 대한 생각은 이와 같이 다르다. 동(東)에서 서(西)가 먼 것처럼 다르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모두가 높아지는 것, 세상의 가치인 크고 위대하고 이긴 것을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는 가치관 아래서 영광스럽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와 복이며 영광이고 온전한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의 모습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지배적 가치관 속에서 낮아지며 ‘네가 옳다’ 말하므로 자기 육신의 수고를 내어주는 패자의 자리가 온전한 그리스도며 온전한 믿음이고 신앙이라고 따라 가는 것은 소경이 뛰는 것과 같이 위험한 일이다. 그러나 그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온전한 구원이고 온전한 믿음이며 온전한 신앙임을 바디매오가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