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10장에는 바디매오라는 소경이 나옵니다. 이 기사는 마태복음 20장과 누가복음 18장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공관복음에는 모두 기록된 예수님의 기적입니다. 그렇다는 것은 이 기적은 예수님의 행적을 중심으로 기록한 기자들에게 있어 아주 중요한 의미로 다가왔었다는 의미입니다.


특히 이 기적이 의미를 가지는 것은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의 정체성에 대한 말씀을 심도 있게 시작하신 변화산 사건 이후에 나오는 몇 안 되는 기적 중의 하나라는 것과, 예수님께서 고쳐주신 병자 중에 거의 유일하게 고침 받은 바디매오가 예수님을 따라나선 특이한 케이스입니다. 


특히 고침을 받은 바디매오가 예수님을 따라 나섰다는 것은 아주 의미 있는 것입니다. 따라나선 예수님이 사람들이 기대하는 영광을 향하여 가신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시러 가는 마지막 길인데 그 길을 따라 나섰기 때문입니다. 제자들마저 예수님께서 세상에서 영광을 얻으면 그 영광을 누리려고 하는 마당에 이 바디매오는 죽으러 가는 예수님을 따라 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고치신 병자 중에 거의 유일하게 예수님을 따라 나선 바디매오


특히 바디매오가 따라나선 예수님은 영광의 자리가 아닌 십자가의 자리



바디매오는 길가에 앉아 있었습니다. 마태복음에는 2명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앉아 있었던 곳이 바로 ‘길가’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자기 목적을 가지고 육신의 눈을 뜨고 걸아가고 있는 길에서 길을 가지 않고 길가에 앉아 있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바디매오는 육신의 눈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길을 가지 못했겠지만 성경이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바디매오가 평생 길가에 앉아 있었던 것도 아닐 테고.


길은 목적지를 향해 가는 곳입니다. 육신으로 소경이 아닌 사람들은 각자 육신의 필요에 따라 목적지를 정하고 길을 갈 것입니다. 그러나 육신의 눈이 멀쩡하다고 인생이라는 여정의 목적을 알고 있는 것은 전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소경을 고치신 기적도 예수님은 육신의 눈을 뜨게 하실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보이시기 위함이 아니라, 인생의 목적을 알지 못하는 모든 소경 같은 인생들에게 하나님이 정하신 인생의 목적을 알게 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보이심입니다.


이 바디매오의 사건도 같은 맥락에서 봐야 합니다. 눈을 뜬 사람들은 길을 갑니다. 하지만 소경인 바디매오는 길을 갈 수 없기에 길가에 앉았습니다. 하지만 눈을 뜬 사람들은 육신의 목적지로 가기 위해서 길을 가기는 하지만 인생의 목적은 모릅니다. 반면에 바디매오는 육신의 눈이 보이지 않아 길을 가지 못하고 앉아 있는 것 같지만 그는 예수님을 좇아갑니다. 그게 인생의 목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렇게 했다는 것은 그가 보지 못한다고 여긴 것은 육신의 눈으로 보는 길과 목적지가 아니었다는 것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생의 목적을 모릅니다. 말 그대로 태어난 김에 살면서 겪는 문제들을 해결하려고 신을 찾습니다. 결국 하나님께 자기 육신의 문제를 의지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인생의 목적에 대하여는 육신의 눈은 뜨고 있지만 모두 소경인 것입니다. 소경이 자기 길을 가니 이곳저곳에 부딪힙니다. 그게 인생이 겪는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인생의 문제들을 의지할 것이 아니라 인생의 목적만 알면 삶이 평안한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인생의 길이 보이지 않으면 바디매오와 같이 앉아 있는 것이 더 현명한 것입니다. 인생의 목적도 모르면서 자기가 스스로 인생의 목적을 정해서 동분서주하기에 인생이 곤고해지는 늪에서 허우적대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힘들다고 하나님께 인생을 의지합니다. 그러나 인생의 목적을 모르면 그 자리에 서야 합니다. 길이 아닌 길가에 앉아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인생의 목적에 대한 바른 길을 알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다.



인생의 목적이 보이지 않는다면 자기 생각대로 길을 가듯 인생을 살 것이 아니라 바디매오와 같이 앉아 있어야…



그렇게 인생의 목적이 무엇인지 몰라서 바디매오가 멈춰 서 있는 길이 소란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지나가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바디매오는 물었습니다. “무슨 일이냐?”고 그랬더니 사람들이 답하기를 “<나사렛 예수>가 지나간다.”라고 답을 해 주었습니다. 그 말을 들은 바디매오는 갑자기 소리쳤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눈을 뜨고 육신의 목적지를 향해 자기 길을 가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나사렛 예수>였습니다. 하지만 인생의 목적이 보이지 않아 가던 길을 멈추고 있는 바디매오에게 예수님은 <다윗의 자손>이었습니다. 자기 의를 가지고 육신의 정욕을 좇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천한 나사렛 사람이었지만, 인생의 목적을 알고자 하는 사람에게 예수님은 왕이요 메시아라는 것입니다.



육신의 눈을 뜨고서 자기 육신이 바라는 육신의 정욕을 좇는 사람에게 예수님은 천한 <나사렛 사람>이지만 인생의 목적을 구하는 사람에게 예수님은 <왕이요 메시아>



이 바디매오의 모습은 정말로 충격적인 것입니다.(아마 하나님께 육신의 문제를 기도하는 사람들에게는 눈에 띄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분명히 맹인인 바디매오에게 <나사렛 예수>라고 말해 주었는데 보지도 못하는 바디매오는 눈뜬 사람들의 말과 달리 <다윗의 자손>이라고 불렀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바디매오에게 조용히 하라고 했습니다. 길에서 소리친다고 그게 얼마나 사끄럽겠습니까? 사람들이 조용히 하라고 한 것은 시끄러워서라기보다 나사렛 예수를 다윗의 자손이라고 소리쳤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바디매오는 계속 그렇게 외쳤습니다. 맹인이 눈뜬 사람들에게 맞선다는 것은 아주 어리석은 것입니다. 그렇지만 바디매오는 자기 안에 있는 양심에 따라 그렇게 외쳤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 소리를 들으시고 바디매오를 부르셨습니다. 그러자 눈도 보이지 않는 바디매오가 길가에 앉아 있다가 일어서서 뛰어서 예수님께로 갔습니다. 전 재산이라고 할 수 있는 겉옷도 버려두고서. 남들은 하찮은 나사렛 예수라는 사람을 만나려고 맹인이 뛰었다는 것입니다.


맹인이 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없는데 뭘 믿고 뛸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바디매오는 뛰어서 예수님께로 갔습니다. 이것은 너무 놀랍고 감동적인 것입니다. 오늘날의 사람들은 자신의 신앙이 부족하다고, 또 때로는 교회의 가르침이 만족스럽지 못하고 심지어 아닌 것 같다는 느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끊임없이 공부하고 노력하는 자체가 그것을 방증) 어디선가 접한 온전해 보이는 복음을 향하여 가는 것을 그렇게 조심하다 일어서지도 못하는데, 맹인인 바디매오는 엄청난 위험과, 살면서 맹인으로서 급하게 움직이면서 경험한 온갖 아픔의 기억을 뒤로하고 뛰어갔다는 것입니다.



정말로 인생의 목적을 알고 예수님을 바로 믿고자 한다면 소경이 위험을 무릅쓰고 뛰어가는 것 같은 용기와 결단이 필요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바디매오에게 물으셨습니다. “무엇을 원하느냐?”고 그러자 바디매오는 “보기를 원합니다.”라고 대답을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예수님께서는 “너의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답을 하셨습니다. “알겠다 보게 해 주겠다.”가 아니라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말로 시사하는 바가 많습니다. 사람들이 선한 것이 날 수 없다는 나사렛 사람이라고 여기는 예수님을 인생의 목적을 몰라 길가에 앉아 있는 자신을 구원할 메시아로 여기고 아직 보이지 않기에 잘못하면 크게 다칠 수 있는 위험을 무릅쓰고 달려가서 메시아가 알려주는 인생의 목적을 보기 원한다고 했더니 그것이 자신을 구원하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자세히 보면 바디메오가 보고자 한 것은 육신의 눈이라기보다 다윗의 자손을 보기 원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육신의 눈이 보이지 않는 것보다 더 중요하고 본질적인 문제, 인생의 목적이 사람들은 천하게 여기며 나사렛 예수라고 하는 다윗의 자손에게 있다는 그의 믿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믿음이 구원을 준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죄에 빠진 것은 인생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목적을 알지 못하고 자기 육신의 길을 가기 때문입니다. 육신의 눈에 의지하여 육신의 정욕을 좋아 육신의 안목으로 자기 길을 가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정한 자리를 벗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오신 것입니다. 인생의 목적을 바로 보여주시려 오신 것입니다. 바디매오는 그 예수님을 보는 것이 길을 갈 수 있는 광명을 찾는 유일한 것이라고 믿었고, 예수님께서는 그 믿음이야말로 인생을 구원하시는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바디매오가 보고자 한 것은 사람들은 나사렛 예수라고 천히 여기는 예수님을 인생의 목적으로 믿고 보고자 한 것이고 그 믿음이 인생의 목적을 보게 하는 구원으로 이끈 것



그러자 바디매오는 그 예수님을 따라 길을 나섰습니다. 이때까지 인생의 목적이 무엇인지 몰랐기에 아니 보이지 않았기에 길을 가지 못하고 길가에 앉아 있었는데 이제 인생의 목적인 예수님을 보았기에 그 예수님을 따라서 길을 간 것입니다. 그것도 세상이 영광이라 하는 목적지가 아니라 십자가를 지는 예수님을 따라 간 것입니다. 


이 바디매오의 일은 예수님의 이적 중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깊은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어쩌면 십자가를 지러 가시기전까지 보이신 모든 기적의 목적이 함축된 놀라운 기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육신의 눈을 뜨고 이 글을 본다고 소경이 아닌 것이 아닙니다. 인생의 목적을 알지 못하고 있고, 하나님께 인생의 목적을 보지 못하기에 소경이 온갖 것에 부딪히듯 겪는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나님을 믿고 기도하는 사람들, 그들에게 과연 소경인 주제에 위험을 무릅쓰고 예수님의 부르심에 달려 나간 그 믿음과 용기가 얼마나 있을까요?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들조차 예수님께서 세상의 임금이 되어 영광을 누리면 그 영광을 누릴 생각을 하고 있기에 죽으러 간다는 말씀을 이해조차 못하던 시점에 십자가를 지러 가는 예수님을 따라 가는 바디매오와 같은 신앙을 가진 이들이 얼마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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