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 2603

육신 - 관점의 회복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질그릇의 선택 Date : 2020. 8. 31. 04:00 Writer : 김홍덕

선악과를 먹은 아담의 모습은 육신으로 나서 육신으로 호흡 하고 있으나 하나님의 의를 자기 본성으로 담지 않고 육신을 자기 것으로 삼고 선악을 판단하면서 사는 모든 인생의 모습이다. 그자리는 분명 죄와 사망의 자리다. 하지만 구원은 그 자리에서 시작한다. 자신이 흑암과 혼돈의 땅, 죄와 사망의 자리에 있음을 인정하면서 하나님의 빛이 비취고 하나님의 세계가 창조되는 것이 다. 육신으로 나서 하나님을 만나기 전까지 사람의 삶은 천지창조 이전이고 선악과를 먹은 상태다. 그러나 거기서 하나님의 세계가 시작된다. 그 자리는 이제 막 성경의 표지를 넘긴 자리다.


그 자리에서 하나님께서 펼쳐 놓고 경영하시는 세상과 하나 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와 그 십자가를 보고 하나님의 뜻을 선택하는 것이 질그릇인 사람의 마땅한 선택이고 순종이며 믿음이고 구원이다. 세상에 펼쳐진 하나님의 뜻도 항상 있고, 성경도,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도 늘 있기에 하나님은 영원하고 어제나 오늘 이나 영원 무궁히 사람을 사랑하시는 경영 안에 있는 동안 구원에 이르는 선택의 순종을 해야 하는 것이 사람의 본분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비록 죄와 사망에 놓여 있다고 해서 그 자체로 망한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죄와 사망의 자리에 있는 인생들을 위한 것이다. 죄 많은 곳에 은혜가 많다는 말씀도 여기에 기반을 둔 말씀이다. 육신의 호흡이 있는 삶이 하나님 보시기에 생명이 없다고 하는 시절부터 시작하지만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 선악과가 만족의 동산 가운데 있었던 것은 우리 육신이 그 만족의 핵심이라는 의미다. 육신으로 호흡하는 동안 하나님께서 무궁하게 펼쳐 놓은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이 다. 그 육신의 호흡마저 없으면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 그것이 우리에게 인생을 주신 것을 감사해야 하는 이유다. 우리를 하나님의 세계로 부르시기 위해 육신의 삶을 주셨기 때문이다.


우리 육신은 호흡이 있어도 그리스도로 거듭나기 전까지는 죄와 사망에 속한 존재지만 반대로 그것은 무한한 가능성의 기회 다. 모든 인생에게 구원을 베푸셨다는 것도 이것이다. 육신을 가졌 다면 누구나 받은 기회가 있다. 이것은 사람의 힘으로 한 것이 아니기에 은혜다. 죄 많은 곳에 은혜가 많음 또한 이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의를 선택하기만 하면 된다. 본토 아비 집인 흑암과 혼돈을 떠나는 선택을 하거나 아니면 하나님의 의를 선택하지 않으 므로 영원히 죄와 사망에 있을 것인지 질그릇인 우리의 선택이다.


그러므로 모든 구속은 자신을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자신이 선악과를 먹은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단지 아담이 먹은 것이 유전된 것으로 치부하는 한 이 구속은 자신에게 은혜가 되지 않는다. 성경이 왜 그렇게 자기 죄를 자백하고 시인하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지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이것이 시작인데 이 시작이 없으면 교회에 1,000년을 다니고 예수를 10,000년 믿어도 소용없다.


이렇게 하나님의 구속은 사람 자신이 선악과를 먹은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만족 없는 자기 삶은 에덴에서 쫓겨난 아담의 모습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에서 회개도 구원도 거듭남도 영생도 시작한다. 그렇게 시작해서 육신의 삶에 만족하는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것이 회개고 하나님 창조의 완성이다.


그 자리가 하나님이 창조하고자 한 사람의 모습이고, 지시할 땅이며, 약속하신 땅이다. 회복이란 원래 자리로 돌아간다는 것이 다. 그 시작은 육신을 부정하고 연약하게 보는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낼 거룩한 존재로 예비된 것임을 알고 육신의 호흡이 있는 동안 창조하신 목적의 자리, 사람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다. 육신을 부정하고 부끄러운 존재로 보고 예수님과 자신은 다른 존재로 보면 율법주의와 영지주의와 같은 신앙에 빠지거나 세상 가치 관에 빠져 자신을 정죄하며 영원히 죄와 사망에 속하게 될 뿐이다.

'주제별 성경 보기 > 질그릇의 선택'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육신 - 감사  (0) 2020.09.02
육신 - 육신의 희생  (0) 2020.09.01
육신 - 선악과와 육신  (0) 2020.08.30
육신 -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  (0) 2020.08.26
육신 - 스스로 정죄하는 인생  (0) 2020.08.25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

육신 - 선악과와 육신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질그릇의 선택 Date : 2020. 8. 30. 04:00 Writer : 김홍덕

하나님께서 처음 사람을 만드실 때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 었다고 하셨다. 그런데 ‘왜 그렇게 만든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타락했느냐?’의 문제가 있다. 아담의 타락을 예견하신 것인 지, 아니면 부추기셨는지, 선악과는 미끼였는지, 이런 문제들이 명확하지 않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한 아담은 왜 타락하고, 그로 인하여 아들을 보내야 했다는 것은 일반적인 사람 들의 가치관으로 보면 아주 매끄러운 전개는 분명 아니다.


특히 이 의문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 안에 상존하는 문제다. 누구도 매끄럽게 설명하지 못한다. 특히 예수님의 말씀을 행위로 지키는 것이 신앙생활이라는 관점을 가지고 있다면 더 알 수 없다. 선악과를 먹은 아담을 보는 초점이 그의 행동이기 때문이다. 행동이 불순종이라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에 의문이 해결되지 않는다. 행동은 나타난 것일 뿐 본질이 아닌데, 그것을 죄의 본질로 보는 이상 선악과를 먹은 아담의 행동을 이해할 수는 없다.


이러한 문제에 대한 답을 알려면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고”라고 하실 때 사람이 누구인가를 알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자 한 사람, 창조의 최종 목적인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신 ‘모든 것을 다스릴 존재’인 하나님 창조의 최종 적인 목표 곧 하나님의 생각이 육신과 하나가 된 그리스도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의가 담긴 질그릇이며,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는 성전이며, 하나님의 생명이 육신으로 나타난 아들이며, 세상이 십자가로 끌고 가면 하나님 아들이라는 것이 드러나는 사람이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창 1:26)


이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자 하신 사람은 우리가 눈으로 보는 육신이 아니라 육신으로 사는 동안 그리스도로 거듭나서 하나님의 의가 자기 본성이 된 사람이 창조하시려고 한 사람이라는 의미다. 천지창조의 시작인 태초도 한 사람 개인이 하나님을 인식 하는 시작이듯 하나님께서 창조하고자 하신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살아가는 사람, 곧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이 창조하시고자 한 사람이다.


다시 말해서 사람 창조는 육신 창조가 본질이 아니라 육신으로 난 사람을 그리스도로 나게 하시는 과정이다. 따라서 아직 그리스도로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육신이 창조된 것은 맞지만 하나 님의 창조목적이 달성된 존재는 아니라 혼돈하고 흑암이 짙은 땅일 뿐이다. 육신으로 난 사람이 하나님의 세계가 열리고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생명으로 거듭나서 살아가는 사람이 되는 과정이 하나님 세계의 천지창조고, 그 뜻이 흙으로 지음 받은 사람인 땅에 이루어진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이다.


이것을 나누어서 설명한다면, 하나님께서 흙으로 지은 사람이 있고, 그 존재 중에서 하나님의 생기가 들어 있어 하나님의 본성이 자신의 본성이 된 사람이 있다는 뜻이다. 사람은 육신이 사람인 존재가 있고, 하나님의 의가 본성이 되어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하나님의 아들이자 창조목적이 본성이 된 사람이 있다. 그것을 성경에서는 첫 번째 아담, 두 번째 아담이라고 구분하기도 한다. 또 육에 속한 사람, 영에 속한 사람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하나님의 본성이 자기 생명이 되었다는 것은 아들이라는 의미다. 하나님의 의가 자기 삶의 본성이고, 삶의 목적인 사람은 육신으로 살아가는 모든 순간 하나님의 의를 나타낼 수밖에 없다. 그것이 아들이다. 아버지의 의가 육신이 되어 살아가는 존재가 아들이다. 아들이 있다면 아버지가 있는 것이고, 아들이 살아가면 그모습 속에서 아버지의 성품이 나타난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기대하신 형상대로 만들어진 사람이다.


선악과를 먹은 아담은 당연히 육에 속한 사람이며 첫 번째 아담이다. 육신으로 나서 하나님을 알기 전까지의 사람은 창조의 대상이고 구속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모습은 육신으로는 사람으로 났지만, 아직 하나님의 의가 자기 본성이 되지 않은 모든 사람의 모습이다. 선악과를 먹은 사람은 창세기 1장 2절에 나오는 어둡고 혼돈하는 땅이다. 거기서부터 하나님의 천지창조, 곧구원의 여정이 시작된다. 육신으로 난 모든 사람은 창세기 1장 2 절의 땅이다. 육신이 자라면서 온 세상으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말씀이 생명이 되기 전까지 하나님의 목적에 빚진 상태다. 언제라도 들어갈 수 있는 가능성만 있을 뿐 죄와 사망 가운데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구속은 아담의 범죄에 따른 후속 조치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창조의 과정이며 모든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이다. 이것은 하나님과 같은 안목을 가져야만 이해하고 알 수있다.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거듭난 사람만이 육신과 사람과 하나 님에 대한 관점이 하나님과 동일하다. 거듭나야만 알 수 있는 것이란 뜻이다.


그리고 거듭난 사람이 되는 것은 자신이 선악과를 먹은 존재 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이므로 그 고백 없이 하나 님의 계획 안으로 갈 수 없다.


하나님의 구속은아담의 범죄에 따른 후속 조치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창조의 과정이며 모든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


하나님의 구원은 하나님께서 태어나, 살고, 죽는 존재로 이땅에 보내신 육신 가진 삶을 살 동안 하나님이 사람 만드신 뜻에 순종하는 선택할 때 얻는다. 그렇게 얻는 구원은 하나님이 베푸신 것이고 하나님의 사람 창조다. 그렇기에 사람이 그 선택을 할 수있도록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예비하셨다. 그 예비하심의 결정 체가 예수 그리스도다.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고, 무엇을 먹을지 염려하지 말라고 하심이 여기서 나온다.


육신으로 났을 때 모든 사람은 아직 하나님의 세계가 창조되지 않은 창세기 이전의 상태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육신이 인지하는 세상 곳곳에 하나님의 뜻이 있고, 또 무엇보다 성경과 그리스도가 있다. 그것을 보고 선택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의가 아니라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선악을 판단하며 사는 것을 선택한 것이다.


그 선택이 바로 선악과를 먹은 것이다. 당연히 죄와 사망에서 벗어날 수 없다. 따라서 하나님의 천지가 창조되지 않은 상태나 선악과를 먹은 상태는 육신으로 나서 호흡하며 살고 있지만, 아직 하나님의 의에 순종하지 않아 그리스도로 거듭나지 않은 모든 사람의 상태다.


그러므로 선악과는 하나님의 유혹이나 시험이 아니라 자기 육신이다. 선악과를 먹는다는 것은 자기 육신을 하나님과 같이 주관하면서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스스로 결정하겠다는 선택이다. 이것을 먹지 않고 그냥 두면 에덴동산 중앙에 선악과가 있을 때와 같이 사람은 만족하고 하나님은 뜻이 이루어졌으므로 안식하신다.


그렇지 않고 선악과를 먹으면 자기 육신을 자기 것으로 삼은 것이다. 먹었다는 것이 자기 것으로 삼았다는 것이고, 주관하여 하나님과 같아지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 판단대로 선과 악을 판단하니 선악과다.

'주제별 성경 보기 > 질그릇의 선택'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육신 - 육신의 희생  (0) 2020.09.01
육신 - 관점의 회복  (0) 2020.08.31
육신 -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  (0) 2020.08.26
육신 - 스스로 정죄하는 인생  (0) 2020.08.25
육신 - 영지주의  (0) 2020.08.24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

(마 20장, 막 10장)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기 전, 제자 중 야고보와 요한이 주의 나라에서 자신들을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해 달라고 요구했다. 생각해보면 큰 용기로 예수님께 부탁한 것 같기도 한데, 이런 요구를 했다는 것에서 제자들은 유월절에 예수님께서 왕이 되리라고 거의 확신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말을 들은 다른 제자들이 화를 냈다. 다른 제자들이 화를 냈다는 것은 모두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다. 모두가 예수님은 왕이 될 것이고, 예수님께서 왕이 되면 시쳇말로 한자리씩 차지하게 될 것이고, 자신이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할 것이라고 생각했음을 알 수 있다. 야고보와 요한은 물론 야고보와 요한의 말을 듣고 화를 낸 모든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왕이 된다는 확신에 차 있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제자들은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믿는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시니 자신들이 생각하는 그리스도의 모습 그대로 왕이 되어 독립과 민생을 다 해결할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리스도는 세상의 왕이 되는 가장 온전한 자격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들에게 그리스도는 세상의 문제, 민생과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전능자였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시기는 하겠지만 좌우에 앉는 것은 예비된 자들의 것이라고 하시고 또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종이 되어야 할 것이라는 말씀을 하신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마 20:27)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가 어떤 존재인지, 어떤 왕인지를 다시 설명하신다. 제자들 에게 그리스도는 왕과 같이 높이 올라가는 존재다. 제자들의 그 믿음과 생각 앞에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기까지 낮아지는 그리스도를 말씀하신다. 아울러 ‘너희가 나를 그리스도로 믿는 이상 나와 같은 삶을 살게 될 것’이라는 말씀도 하신다.


사람들에게 메시아, 구세주, 구원자 심지어 영화 속의 히어로조차 사람들이 가지지 못한 능력을 가진 존재다. 그들의 능력은 세상의 기준으로 항상 높은 곳에 있고 더 크고 위대한 것이다. 세상의 그 어느 영웅이나 위인이나 구원자나 히어로나 메시아도 낮아져서, 다른 사람에 잡혀가서 극형을 당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위기를 벗어나야 제대로 된 영웅이자 메시아다. 유대인들이 달리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께 “내려와 보라”고 조롱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보이신 구원자 그리스도는 낮아지고 종이 되는 메시아다. 이것은 완전히 반대다. 높은 곳에 계신 그리스도와 낮은 곳에 있는 그리스도는 완전히 반대다. 그러나 <낯선 그리스도>를 시작하면서 언급한 것과 같이 이 둘의 차이에서 온전한 것은 당연히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그리스도다. 예수님은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의 첫 열매이자 본체이기 때문이다. 본체가 전하는 것이 가장 온전한 것임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면 왕이 될 것이고, 왕이 되신 예수님은 민생과 육신의 문제와 세상의 일을 모든 사람들이 꿈꾸는 이상적인 세계로 만들 것이며, 그 과정에서 자신들도 권세 있는 자리를 누리게 될 것이라 생각한 제자들의 생각이 드러나고 그 생각에 대하여 그리스도는 낮아지고 종이 되는 존재임을 설명하시는 이 대화는 그리스도는 세상의 가치와는 전혀 다른 가치를 가진 존재라는 것을 설명한다.


능력 있고 존귀한 존재일수록 왕과 같이 높아지고, 그에 상응하는 대접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 세상의 가치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존귀한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니 당연히 그런 대접을 받으실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오늘날의 신앙인들뿐 아니라 오고가는 모든 인류 역시 제자들과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귀한 것일수록 더 높고 존귀한 대접을 받는다는 생각은 어쩌면 인류의 보편적 가치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 이유로 오늘날 종교 안에서 목회자나 또 어떤 은사를 행하거나 간증을 하는 사람들을 귀하게 여기고 있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목사가 되는 과정이 지극히 세상적 가치와 경쟁 기준에 의한 것이고, 능력을 행한다는 사람이 행하는 능력의 결과나 귀한 간증들 역시 사람들이 소망하는 것, 육신의 평안과 세상의 성공과 같은 것을 성취하는 것이다. 그런 사람을 대접한다는 것은 존귀한 그리스도는 세상에서도 왕과 같이 존귀한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즉 야고보와 요한이, 그 어머니가 예수님께 예수님이 왕이 되면 좌우에 앉게 되기를 바라는 생각의 연장선  상에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리스도가 존귀한 것은 세상에 없는 가치, 세상과 전혀 다른 가치 기준을 가졌기 때문임을 선언하셨다. 세상 천하고 낮은 사형수의 자리인 십자가로 가는 것이 가장 존귀한 것이고, 가장 존귀한 자는 예수님과 같이 낮아지고 종이 되는 사람이라는 것을 십자가를 지심으로 몸소 보이시고 선언하시고 말씀하셨다. 그것이 하나님의 의가 육신이 된 존재,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 가지신 목적이 삶이 된 존재인 그리스도요 하나님 아들의 온전한 모습임을 말씀하시고 계신다.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