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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신 - 선악과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질그릇의 선택 Date : 2020. 8. 22. 04:00 Writer : 김홍덕

이 글은 아래 책 "질그릇의 선택"을 연재하는 글입니다.



질그릇의 선택
국내도서
저자 : 김홍덕
출판 : 바른북스 2020.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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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신을 하나님과 다른 관점으로 보는 것은 선악과를 인함이다. 선악과를 먹고 눈이 밝아졌는데 그 눈으로 보니 육신을 가진 인생은 하나님 앞에서 의롭지 못함을 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만든 육신은 의롭지 않은데 하나님께서 사람이 발견하지 못하도록 해 놓아서 스스로 부끄러운 줄 모르고 살다가 선악과를 먹으니 뱀의 말과 같이 눈이 밝아져서 보게 되었다는 것일까? 그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신 것을 기억하면 그것이 아니라는 것은 너무 분명하다.


그렇다면 선악과는 왜 사람(아담)이 육신을 부정한 것으로 보게 만드는 것인가? 답은 선악과라는 말 자체에 있다. 선악과를 먹었다는 것은 악한 생각을 품게 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렇다면 선악과가 아니라 악과라고 이름하였을 것이다. 선악과를 먹었다는 것은 선과 악을 함께 먹었다는 의미다. 하나님께서 악하게 여기시는 것을 먹었다는 의미가 아니다. 불순종이라는 악함을 취했 다는 의미도 아니다. 이것은 사람 스스로가 무엇에 대하여 선하다, 악하다 판단하게 되었다는 의미다. 피조물인 사람이 하나님이 만든 사람을, 또 세상을 판단하는 기준을 가지게 되었다는 말이다.


선악과를 먹었다는 것은 사람이 자기가 만들지도 않은 자기 인생과 세상에 대하여 무엇이 선하고 악한지 판단하는 기준을 가졌다는 의미


사람이 자기 눈에 보이는 것과 인식하는 것에 대하여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어떻게 하는 것이 선하고 어떻게 하는 것이 악한 것인지 스스로 판단하게 되었다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선악과를 먹었다는 의미이다.


마가복음 10장에서 예수님을 찾아와서 예수님을 “선한 선생 이여,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까?” 질문한 부자가 있었다. (17절)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선한 선생”이라고 칭송하는 사람에게 냉소적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막 10:18)라고 반문하신다. 이는 네가 무엇이길래 하나님께서 만드 시고 경영하시는 세상에서 어떤 것을 선하다고 판단하는 기준을 가졌냐고 물으시는 것이다. 아담이 숨었을 때 “네가 어디에 있느 냐?”고 물으신 것과 같은 질문이다.


이 말씀은 사람은 하나님께서 선하게 여기시는 것을 표현할 존재지 스스로가 자신을 포함한 세상의 만물과 일에 대하여 옳다 그르다 판단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 이유는 사실 너무 간단하다. 사람이 세상을 만들지 않았고 존재의 선함은 존재하는 목적과 부합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창조하지 않은 존재가 존재 목적에 맞는 선한 모습이 무엇인지 판단할 수 없는 것이다. 무엇이 선한지는 목적을 가진 이가 정하는 것이다.


심지어 사람 자신도 하나님의 피조물이기에 자신의 존재 목적도 모르면서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판단하는 것은 자기 자리를 벗어난 것이다.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 님께서 아담에게 “네가 어디에 있느냐?”고 물으셨다. 죄라는 말이 하말티아(ἁμαρτία)라는 ‘자리를 벗어났다’라는 의미에서 비롯된 이유를 여기서 알 수 있다.


선악과를 먹었다는 것이 그런 의미라는 것을 알면 아담이 왜자신을 부끄럽게 여겼는지를 알 수 있다. 하나님처럼 되려고 해보니 육신을 가진 인생으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래서 무화과로 자신을 가리려 했다. 육신 그 자체로는 하나님 앞에 의롭지 않으니 하나님의 말씀을 행동으로 지켜야 의로워진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사람들이 기도하고, 성경 읽고, 전도하고, 봉사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이라 생각하는 모습의 표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마저 행위로 의로워지려는 것이라고 여기 신다. 예수님께서 율법을 지키는 바리새인들을 회칠한 무덤같이 외식하는 자라고 하신 이유다. 따라서 하나님 앞에서 아담이 무화과 잎으로 하나님같이 되기 어려운 육신을 가리려 했듯 신앙적 행함을 하나님이 기뻐하고 의롭게 여기고 말씀대로 산 것으로 여길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아직 선악과를 먹은 죄의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한 신앙이라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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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그릇의 선택
국내도서
저자 : 김홍덕
출판 : 바른북스 2020.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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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 곧 The Man(사람)은 선악과를 먹음으로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벗어난 안목으로 육신을 보게 되었다. 그 관점 속 육신은 부끄러운 것이었다. 하나님 앞에서 이 육신으로 설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아담이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숨었다는 것이 바로그 의미다. 하나님 앞에 육신을 감추어야 한다고 생각했다는 것은이 육신은 하나님 앞에 의롭지 못한 것이고, 이 육신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간다면 죽게 될 것이라고 두려워했다는 것이다. 주목할 것은 선악과를 먹기 전과 육신은 달라진 것이 없다는 것이다.


육신을 부끄럽다고 여긴 아담은 무화과 나뭇잎으로 치마를 만들어 가렸다. 그리고 숨었다. 하와가 부끄러워 몸을 가린 것이 아니다. 선악과 이전에도 둘이 같이 벌거벗고 있었고, 이후에 둘사이에 아들들이 태어나는 것으로 볼 때 벗은 것이 부끄러운 관계 라고 할 수 없다. 벗은 것이 서로에게 부끄러워 육신을 가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부끄러워 가렸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육신을 하나님께 숨기려는 어리석음을 오히려 마땅히 할 바로 여겼다. 하나님께서 인생을 어리석다고 하시는 뿌리가 여기 있다.


감추고자 한 것은 신체의 일부가 아니라 육신이 하나님 앞에 의롭지 못하다는 것을 감추려 한 것


그렇다면 왜 무화과 나뭇잎인가? 몸을 가릴 목적이라면 잎이더 큰 것들이 많은데 왜 하필이면 손바닥만 한 무화과 잎으로 몸을 가렸을까? (성경이 이런 비상식적인 것을 서술했을 때는 그 표현이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죽도록 사랑한다는 말이 죽자는 이야 기가 아니듯이) 그것은 무화과 나뭇잎으로 신체를 가리려고 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감추고 싶은 것은 육신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지 않다는 것이다. 무화과로 상징되는 것이면 하나님 앞에 부끄 러운 것을 가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무화과로 가렸다고 하시는 이유가 있다. 무화과는 육신으로 율법을 지키면 하나님 앞에 의로워진다고 믿는 유대인들의 나라목(木)이다. 무화과로 부끄러움을 가렸다는 것은 성경이나 율법을 지키면 육신의 안목으로 볼 때 보이는 부끄러움을 가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성경을 지키면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질 것이라 생각하고 성경을 행위로 지키려 노력하면 사람이라는 연약함과 육신의 부정함을 감출 수 있다고 믿는 신앙을 두고 무화과로 부끄 러움을 가렸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무화과 나뭇잎은 성경을 지키면 하나님 앞에 의로워진다는 생각에 성경을 행위로 지키기 위하여 노력하는 신앙 그 자체


많은 사람들이 당연하게 여기는 성경 말씀대로 사는 것이 육신의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한 것이다. 성경대로 살아야 복을 받고 화는 면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성경을 지키려는 것은 가만히 있으면 복을 받을 수 없고, 화를 당하는 의롭지 못한 삶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선악과를 먹은 상태에서 육신을 부끄럽게 여기는 것이다. 아직 선악과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죄와 사망의 상태에서 살고 있는 증거다.


성경 말씀대로 산다는 것은 성경대로 살지 않으려고 해도 어쩔 수 없이 사는 것이다. 거듭났다고 하는 말씀, 생명이라는 말이 성경에 지속적으로 나오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것은 앞으로 계속 반복적으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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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신 - 두 번째 관점의 뿌리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질그릇의 선택 Date : 2020. 8. 20. 04:00 Writer : 김홍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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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김홍덕
출판 : 바른북스 2020.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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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말씀하시는 책이라는 의미다. 하나님이 두 분이거나, 아니면 하나님께서 한 입으로 두 가지 말씀을 하시는 분이 아니라면 같은 것에 대하여 같은 관점만 있어야 한다. 그런데 앞서 보았듯 성경에는 육신에 대한두 가지 관점이 엄연히 존재한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중적인 신이든지, 아니면 하나님과 다른 의견이 있다는 말이 될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근간은 하나 님은 유일하시고,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변함이 없으신 분이라는 것이 뼈대이다. 이것이 흔들리면 신앙은 무의미하다. 무엇보다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같은 것을 다르게 말씀하신 적이 없다. 성경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 그 하나를 말씀하신다. 언제나 같은 관점으로. 같은 생명을 가진 같은 존재의 신이신 하나님의 말씀이 성경이다.


그렇다면 두 가지 관점 중에 하나님과 다른 관점은 이단적인 것이다. 하나님의 의도와 다른 것이 이단적이라는 의미다. 그리고 이 차이는 분명하게 하나님의 뜻을 어긴 사건에서 비롯되었다. 육신을 보는 두 번째 관점은 선악과를 먹는 사건 이후에 생겼다.


선악과를 먹기 전에는 하나님과 사람 모두가 벗었거나 말거나 육신에 만족하였다. 그런데 선악과를 먹은 이후에 육신을 보는 관점은 두 가지로 갈라졌다. 하나님이 보시는 것과 다른 관점이 생겼다. 하나님은 그 두 번째 관점을 죄로 규정한다. 사람이 하나 님이 창조한 육신을 부끄럽게 여기는 것은 하나님의 의에 반하는 죄라고 생각하신다.


육신을 보는 두 번째 관점은 선악과를 먹음으로 비롯된 것


문제의 발단은 선악과다. 하나님께서 만족의 동산인 에덴동산 중앙에 두신 선악과에서 문제가 시작됐다. 하나님께서는 아담 에게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하셨다.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선악과를 먹으면 반드시 죽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선악과를 먹은 아담은 죽지 않았다. 이것은 육신의 죽음이 아니라 사람이 선악의 기준을 가지면 하나님이 보실 때 죽은 존재가 된다는 말씀이다. 성경이 말하는 죄와 사망의 상태가 이것이다.


그런 하나님의 말씀에도 불구하고 아담 곧 사람이 선악과를 먹은 것이다. 그리고 뱀의 유혹과 같이 선악과를 먹어서 밝아진 눈이 발견한 것은 오직 육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다는 것을 보게된 것뿐이었다.


창조된 하나님 뜻에 순종하고 선악과를 먹지 않았을 때는 하나님과 사람 모두 육신 가진 삶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만족했 다. 그런데 사람이 선악과를 먹고 나서 사람과 하나님의 생각이 달라졌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사람의 육신에 대해 하나님과 다른 관점이 사람에게 들어왔다. 선악과와 함께 하나님의 생각이 아닌 사람의 생각과 가치가 사람 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육신을 보는두 번째 관점은 선악과가 원인이자 뿌리며 근원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육신을 부끄럽게 보는 사람은 선악과를 먹은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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