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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 사도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전하면서 

그는 교회의 머리라 그가 근본이요 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고자 하심이요(골 1:18)

이라 하셨다.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가 되신다는 것은 교회의 모든 의와 뜻이 그리스도와 같아야 한다고 먼저 포스팅 했다. 그것은 교회가 하는 모든 일이 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보이고자 하셨던 모든 것을 위하여 있어야 한다는 의미라고 했다. 


이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율법으로나 또한 신념을 가지고 성경말씀을 지켜 행하는 세계나, 많이 드림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는 가치관이 아니라 오히려 그런 것을 주장하는 법 앞에서는 예수님과 같이 죄인이 되는 것이 바로 교회의 머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각이시기에 교회도 역시 그러해야 한다. 그러므로 반대로 신념이 있고, 많이 드리고 기적을 체험할수록 하나님께 인정받는다고 생각한다는 것은 그리스도가 머리가 되시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는 근본이라고 했다. 근본이라 함은 뿌리와 같은 것이다. 그 존재하는 모든 이유와 살아가는 모든 요소가 그것에서 비롯될 때 그것을 근본이라고 한다. 머리에서 모든 몸의 삶이 드러나듯, 어떤 것이든 그 모든 표현과 드러난 것의 뿌리와 같은 근원이 있기 마련이고 교회와 우리 신앙에 있어 머리와 근원되시는 분은 그리스도이신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근본이 그리스도라고 하는 것은 교회는 그 모인 사람들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심과 같이 모든 성도들이 그렇게 고백되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발견할 수 있도록 하고, 그 안에 모인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로 살아갈 때 그때 그리스도가 근본이 되시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로마서에서 우리가 사나 죽으나 다 주의 것(롬 14:8)이라고 했고, 고린도 전서에서는 먹든지 마시던지 주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이라고 하셨다.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고 하시는 말씀이 계시록 22장에 나온다. 그것처럼 바울 사도가 골로새교회에 있는 성도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그리스도가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고(1:16) 또한 근원이 된다고 하시며, 또한 모든 만물보다 먼저 되었다 하시고, 로마서 8장에서는 모든 만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는 것이라고 하셨으니, 이 또한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의 시작이고, 모든 것의 목적이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다.


바울 사도에게 있어 이러한 것을 강조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먼저는 지금의 큰 교회들처럼 당시 골로새교회를 비롯하여 많은 초대교회들이 영지주의나 세상적인 가치관이 가미되면 될수록 더 신앙이 좋은 것이라고 믿는 풍조에 대하여 심히 중하게 경계하여야 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교회는 그리스도를 신앙하는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인데, 그리스도 외에 세상적인 지식이나 재산이나 권력이 있으면 더 존중 받거나 장로가 되기 쉬운 현재의 풍토나 골로새 교회처럼 철학이나 과학적 지식이 있으면 더 나은 신앙이 되는 것과 같은 것은 분명히 경계되어야 할 심각한 신앙적 부패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것에 대하여 바울도 다른 사도와 마찬가지로  이를 기록하여 당시와 후대에까지 이것을 경계하려 한 것이다.


많은 신앙인들이 자신의 삶에서 그리스도를 최고로 여기면서 산다. 그것도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서 아주 훌륭하지만 최고인 것과 모든 것인 것은 아주 다른 것이다. 그리고 그렇다고 모든 것이라는 것이 입만 떼면 '예수'라고 말하는 것이 모든 것인 삶은 아니다.


모든 것이라는 것은 삶의 근원과 뿌리가 그리스도 이신 것을 말한다. 그래서 예수님은 생명이 되시는 것이다. 사람에게 사람의 유전자는 모든 것이다. 어떤 순간 어떤 위치에서 사람이 사람의 유전자를 벗어난 삶을 살지 않는다. 그것이 근원이고 그것이 머리이고 그것이 뿌리와 같은 것이다.


이것은 회사도 가지 않고, 공부도 하지 않고 교회에서 사는 것이나, 신앙과 관련된 일만 하는 것과는 완연히 다른 것이다. 그리스도가 머리가 되시고 근원이 되신다는 것은 세상의 어떤 떤 곳에서 어떤 삶을 살아도 그리스도의 성품을, 또한 그 생명으로 사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한 가지 또 다른 예를 들면 보통의 기독교인들은 마귀가 하나님과 다투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이야 말로 신성모독인 것이다. 왜냐하면 다투는 대상으로 둔다는 것, 그것도 아직도 몇 천 년 동안 다투는 상대라면 급이 비슷하다는 이야기 밖에 더 되겠는가? 하나님에게 있어서 마귀는 욥기에서 볼 수 있듯, 수하에 있는 하나의 도구와 같은 것이다. 


물론 사람들이야 마귀와 싸우는 대상이 될 수 있지만, 그것도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경영하기 위하여 그렇게 하시는 것이지, 마귀가 좀비들처럼 신선한 고기가 먹고 싶어서 우리를 노리는 것이 아니다. 이것도 역시 하나님께서 세상의 모든 것이 되신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즉, 세상에 있는 모든 것, 그리고 사람이 인지하는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경영하심 아래에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모든 것이 왜 하나님의 경륜 아래에 다 있는 것인가? 그것은 세상의 모든 만물이 다 하나님의 품성을 나타내는 하나님의 표현이고, 영이신 하나님의 형식인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에 있는 것은 그 시작이 무엇이던, 그리고 그 끝이 무엇이던, 그리고 과정이 무엇이던 모든 것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나타나는 것을 고대하고, 또한 그것을 위하여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 모든 것의 뿌리와 목적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다는 말씀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무엇을 위하여 살아가야 하는지가 분명해 지는 것이다. 그것은 오직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리고 그리스도로 인하여, 그리고 그리스도로서 살아가는 것을 위하여 자신의 삶이 촛불과 같이 태워지는 것이 인생의 유일한 목적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그리스도는 먼저 살아나신 분이라는 말씀으로 이어가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교회와 관련된 일만 하면서 사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지고 자신에게 주어진 육신의 삶을 세상에서 살아냄으로 다른 사람들이 그 삶으로 인하여 그리스도를 발견하게 하는 삶을 살아내는 것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가 머리되시고 근원이 되시는 삶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 되신다는 것은 교회의 모든 것이 다 그러해야 한다는 것이고, 그런 사람들이 모여서 교회가 된다는 말씀인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과 같이 교회가 세상을 배척하고 죄악이 관영하므로 상관하면 할수록 신앙이 떨어지니 멀리하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옳은 생각이 아니다.


물론 세상이 죄악으로 관영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 죄악이라는 것이 단순히 형법적으로 문제가 되는 살인이나 간음과 같은 타락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모르고 하나님을 표현하라고 주신 인생을 그렇게 살지 않고 세상에서 영광을 얻으려고 살아가는 그 삶이 주인이 되어서 죄악된 세상인 것이다. 


그런데 그 세상의 법, 세상에서 알만 알수록 가지면 가질수록 영광이 되는 철학과 과학과 재물과 명예와 같은 것이 교회 안에 들어와서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는 이유로 신앙의 고백 보다, 그 사람의 삶이 주어진 삶 안에서 얼마나 그리스도를 나타내는지 보다 철학과 과학과 재물과 명예를 가진 사람이 더 인정을 받고 그들의 말을 듣고 그들을 장로로 세우는 그런 모습은 그리스도가 머리되고 근원이 되시는 교회의 모습이 아니기에 바울 사도는 그것을 지금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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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이유가 있었는데 그것은 스스로 유대인의 왕이라고 답하셨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심문하던 빌라도가 봐도 도무지 왕이 될 만한 것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그저 초라한 사람이었는데도 스스로를 왕이라 하신 것이다. 그것으로 당시 세상의 모든 힘이었던 로마의 왕을 대신한 빌라도 앞에서 완벽한 죄인이 되심에도 그렇게 하신 것은,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 역시 유대인의 왕이 되어야하기 때문이었지, 로마로 가서 이스라엘을 해방하시려고 하신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세상의 경쟁력이 없어서 죄인이 되셔서 십자가에 달리셨고, 그렇게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바로 교회의 머리라는 것이다. 그것은 교회가 세상에서 경쟁력을 가짐으로 기름 부음 받은 그리스도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의 큰 교회들은 그 반대의 길을 가고 있다. ‘교회에서 사용하는 것은 무조건 세상적인인 것 보다 좋아야 한다.’, ‘거룩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교인들이 예배에 참석하고 기도하면서 공부하여 좋은 대학에 가면 사람들이 부러워하여 그것을 보고 교회에 올 것이라 생각하고, 더 좋은 시설을 갖추어야 사람들이 올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로마의 생각이다. 예수님은 그렇게 교회의 머리가 되신 분이 아니시다.


그렇듯 종교적인 기준과 세상적인인 기준으로 볼 때, 잘 할수록 예수를 잘 믿는 것이라 여기는 것은 십자가를 피하는 길이 될지는 몰라도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의도와는 사뭇 다른 모습임에도 오늘날의 큰 교회들은 그렇게 길을 정해서 가고 있다. 


물론 교회가 좋은 건물을 가지는 것이야 좋다. 또 세상적인으로 성공하는 것이야 얼마나 좋은가? 하지만 그건 그래도 되고, 그렇지 않아도 그리스도인이어야 하는 것이지, 그것이 더(better) 예수를 잘 믿는 것이라고 하는 것은 기본 신앙관에 문제가 있는 것이고, 그런 교회는 예수님이 머리가 되시는 교회라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예수님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신다는 것은 교회의 모든 일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이나 짐승이나 다, 몸의 모든 기관이 전부 머리가 가진 생각과 뜻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몸의 모든 근원은 다 머리다. 머리의 생각대로 움직이고, 머리의 뜻대로 삶을 사는 것이다. 그게 머리고, 또한 예수님께서 머리가 되신다는 것은 교회의 모든 행사가 다 그리스도로 말미암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리스도로 인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당연히 십자가에서 인간의 실존을 보여주신 그 그리스도를 말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적인인 가치관으로 조직된 교회의 조직이나, 교회 안에서 존경 받는 장로라는 직분이 사회적인 역량이 뛰어 날수록 좋다고 암묵적으로 인정하는 세상에 오염된 가치관으로 다스려진다는 것은 그리스도가 머리가 아니라 세상적인인 가치관이 머리가 된 교회인 것이다.


머리가 되신다는 것은 또한 그 안의 모든 일도 그리스도의 생각과 같아야 한다. 그렇다는 것은 교회의 모든 예배와 모임과 나눔과 행사와 일이 무엇과 같아야 할 것인가를 일러주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직임이 무엇인가? 예수님의 이름의 뜻이 무엇인가? 


그러므로 교회의 모든 것은 그 공동체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자신의 모습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믿음의 구원을 받은 자요, 또한 공동체 안에 서로를 볼 때에 서로의 모습을 통하여 예수님의 뜻을 알아갈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교회의 머리가 그리스도이시니 그런 것이다. 그게 교회의 가장 기본인 것이다. 그런 차원에서 선교도 하고 봉사도 하는 것이지, 선교하고 봉사하는 것이 예수 믿는 사람의 의무인 것처럼 강요하는 것은 잘못되었다. 


그저 그 사람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본성이 생명으로 자라기만 하면, 자기가 아무리 부인하고 거부한다 해도, 예수님이 하신 것과 같이 살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개가 고양이처럼 ‘야옹’ 하겠는가? 아무리 용을 써도 ‘멍멍’할 뿐이듯, 자기 안에 예수님의 본성이 자리하게 되면 자기 목이 달아나도 예수님처럼 살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 일이 일어나는 곳이어야 그리스도가 머리 되시는 교회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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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는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했다. ‘먼저 계셨다’라는 과거형이 아니라 ‘먼저 계시고’라 했다. 현재형, 즉 지금도 그런 분이라는 말씀이다. 또한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함은 세상의 모든 만물이 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즉 그 세계 안에서,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로서 의미를 가질 때, 비로소 서게 된다는 말씀이신 것이다.


그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가 되신다는 말씀을 하고 있다. 또한 그가 교회의 근본이라 말씀하신다. 이것은 오늘 날 이 시대의 큰 교회들이 생각하고 또 생각해봐야 할 말씀이다. 머리라는 것은 뜻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외형적으로도 그 정체성을 나타낸다. 


모든 동물에게 있어 머리는 그 정체성의 백미인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머리가 그리스도라는 것은 교회의 정체성이 그리스도에게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그 뜻이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의미이다. 예로부터 기름 부음을 받는 신분은 3가지였다. 선지자, 왕, 그리고 제사장이었다. 


그러므로 예수님도 하나님 나라의 왕이요, 제사장이요, 선지자이신 분이라는 말씀이다. 하나님 나라에 관하여 말이다. 눈에 보이는 세상은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이 모든 만물은 그리스도가 나오는 것을 고대하고 또한 그것을 위하여 창조된 것이라고 이미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무엇으로, 무엇에 관하여 왕이요 제사장이신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향하여 두신 하나님의 목적에 관하여 그러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두신 뜻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사람, 그리고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며 사는 존재로 살게 하시기 위하여 만드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산다는 것이 곧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라는 말씀이다. 아들은 아버지의 본성이 육신으로 나타난 존재이기 때문이다. 예수님 또한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과 의가 성육신되신 분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 되신 것이고, 예수님의 그러하심을 보고, “나도 그런 존재이구나!” 이렇게 발견되는 사람마다 다 그렇게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이고 예수님은 그 나라의 왕이요, 그렇게 구원하는 제사장이신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떤 모습으로 그리스도이심을 나타내셨는가? 그것은 한마디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보이신 것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니, ‘그가 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을 백부장이 하게 되었던 것 같이, 우리도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이 내 모습이구나!' 인정되어지면 나도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이다. 


그게 믿음인 것이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의 모습이 자기 모습으로 비쳐지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받아들이는 것이고, 수용하는 것이지, 신념을 가지고 “믿습니다!!” 외치면서 믿으려 애쓰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은 무엇인가? 우선 십자가는 누가 달리는 곳인가? 그곳은 죄인이 달리는 죄인의 형틀이다. 그러므로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 자신을 발견하는 사람은 우선 자신이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일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죄가 없는데 어떤 법에 의하여 죄인이 되었는가? 그것은 그 당시 유대인들의 법과 로마의 법에 의하여 죄인 되신 것이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죄인이라 한 이유가 무엇인가? 초라한 꼴로 하나님의 아들이라 했기 때문 아닌가?


예수님께서는 심문을 받으실 때에 다른 모든 것에는 답변하지 않으시다가, 단 두 가지 질문에만  답하셨다. 그것은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라는 유대인들의 질문과,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하는 빌라도의 질문 그 두 질문에만 답하셨다. 


사실 다른 질문들, 성전을 사흘 만에 짓겠다는 것과 같은 것은 당시 최고형인 십자가형을 받을 만한 일은 아닌데도 그런 것에는 답변하지 않으시고 하필 꼭 답변하면 십자가에 달릴 수밖에 없는 두 가지 질문에만 답을 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네가 찬송 받을 자의 아들이냐?” 물으실 때, “Yes!”라고 답하면 죽는다는 것을 아시면서 그렇게 하셨는가? 그 외에 다른 어떤 고발에도 답을 하시지 않던 예수님께서 말이다. 





그것은 육신을 가진 모든 인생은 스스로도 부끄러워하고 감추고 싶어 하는 육신의 연약함, 발가벗겨지면 부끄럽고, 자기의 곤고함을 자신의 손과 발로 구원하지 못하며, 자신의 정체성을 머리로 해결할 수 없는 모든 사람은 다 예수님께 적용한 죄목으로 다 십자가에 발가벗겨져서 손과 발에 못 박히고 머리에 가시관이 씌워질 죄인이 될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 예수님이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분이라는 말씀이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아들 삼으신 법이라면, 오늘날 예수님을 믿고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살아가길 원하는 사람들의 정체성도 그러해야 한다. 


그렇다는 것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심판한 것이 ‘초라한 꼴에, 창녀와 세리와 어울리던 사람이 어디 감히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느냐? 우리처럼 율법도 잘 지키고 해도 될까 말까 한데 말이야’ 라는 기준이었고, 그런 기준 아래에서는 죄인이 되신 것이었다. 


그렇다면 오늘날도 교회가 지키라고 하는 모든 행위 규범들을 정말 솔직한 마음으로 진실 되게 예수를 믿는다면 그렇게 살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고, 그것을 안다는 것은 그 법아래 내가 죄인임을 깨닫게 되는 것이며, 자신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처럼 죄인으로 인정이 될 것이다.


“왜 교회의 가르침을 못 지키느냐?”, “지금이 어디 율법의 시대냐?’할지 모르지만, 구약이던 신약이던 간에 행위 규범으로 받아 지켜야 할 것으로 받으면 성경의 어디가 되던 율법이요, 반대로 성경을 통해보니 내가 하나님의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자로구나 깨달아져서 자신의 정체성을 고백하게 되면 복음이 되는 것이요, 그렇게 죽은 자를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다시 살리시듯 살리셔서 행위 규범이 아니라, 생명의 법으로 살게 하시므로, 성경에 기록된 모든 행동양식이 규범이나 규칙이 아니라, 생명의 본성이 되어 금할 수 없는 것이 되는 것이 바로 복음이다.


그런데 오늘날 큰 교회들의 가르침은 모든 것을 Have to로 가르치고 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이렇게 해야 한다’, ‘천국에서 잘 살려면 이래야 한다.'라고 가르친다. 그 가르침은 한마디로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깨끗한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 + 종교적 규범인 기도와 말씀 그리고 예배와 봉사와 같은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무엇을 하느냐?’를 먼저 보시는 분이 아니라, “너는 누구냐?” 하는 것을 보시는 분이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존재의 신이시기에 하나님 앞에 서는 사람의 존재가 무엇인지에 먼저 관심을 두시는 것이다. 그 하나님 앞에서 인간은, “율법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지킬 수 없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고백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에 달리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유대인의 율법으로 죄인 되였듯, 나도 그렇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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