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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육신은 아주 연약하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아주 강하기도 한 것이다. 그러나 종교적으로 보면 대부분의 종교가 이 육신을 부인하는 것에 종교적인 초점을 상당히 두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불교나 천주교의 경우 진정한 구도자가 되기 위해 성욕을 억제하여야 한다 하여 결혼을 하지 않는 계층이 있고, 기독교의 경우도 인간의 육신이 가진 욕망을 절제하는 것이 신앙에 도움이 된다고 하여 금식이라든가 철야기도를 수 없이 하고 있다.


골로새교회에 바울 사도가 편지를 보내는 당시의 시대에도 천사 숭배 사상이나, 육신은 부정하고 영만 거룩하다고 생각하는 영지주의와 같은 사상들도 다 육신 안에서 나오는 욕망과 또 사람들이 육신을 가지고 보여주는 연약하고 부정한 모습을 신앙 안에서 버려야 할 것으로 간주하는 생각, 즉 육신은 부정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그 사상들의 근간인 것이다. 그리고 이 생각은 사람들이 쉽게 동의하고 마는 것이다. 그것은 모든 사람의 육신이 거의 동일한 욕망과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인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것은 단순히 육신의 부정적인 모습에 시각을 제한 할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 육신을 누가 조성하셨는가? 하는 문제를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자기가 거하는 그 육신을 스스로 부정하게 여기지만 그 육신을 자기가 선택한 것도 아니고, 자신이 조성한 것은 더더욱 아니다. 부모도 물론 아니다. 그렇다면 이 육신을 누가 조성하였는가? 그것은 하나님이 조성하고 창조하신 것이다.(진화론에 대하여 논하고 싶지만 다음 기회로 미룬다.)


누군가가 스마트폰을 구입해서 기능이 불량하면 그 스마트폰을 욕하는 것이 아니라 만든 제조사를 욕한다. 그와 같이 하나님께서 만드신 사람을 부정하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부정하게 여기는 것이다. 사람들이 육신을 부정하게 여기는 이유는 하나님과 사람이 육신을 보는 관점이 다르기 때문인 것이다. 


사실 알고 보면 그것이 가장 큰 죄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만드신 것에 대하여 사람이 잘됐다 아니다 규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그것을 선악과를 먹은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바울 사도의 안목 안에는 온 세상 만물이 다 그리스도를 향하고 위한 것이라는 것과 또 사람의 육신이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라는 것이 있다. 이는 우리 신앙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선언이다. 많은 종교인들이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 중의 하나가 육신을 제어하고, 육신을 부정하다 여기고 그것을 이기려고 하는 것에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 섭리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고 반항이고 죄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육신을 이렇게 만드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셨다. 아담과 우리가 다른 육신을 가진 것이 아니다. 그리고 진짜 중요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예수님도 우리와 같은 육신을 가지고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육신을 스스로가 부정하게 여길 만큼 약하게 만드신 것에는 이유가 있으시다는 말씀인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이유를 기준으로 우리 육신을 볼 때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시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액션 영화에 나오는 유리가 깨어지는 장면을 위해서는 설탕으로 유리를 만든다고도 한다. 왜 그런가 하면 잘 깨어지라고 그런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유리를 만든 사람은 유리가 잘 깨어질 때 보기에 좋았다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우리의 육신은 하나님께서 거하시기 위하여 만드신 것이다. 온 우주에 충만하신 하나님께서 좁아터진 사람의 마음 안에 공간적으로 거하시겠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겠다고 하신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성품으로 살게 하시기 위하여 만드셨다는 것이다. 


마치 유전자가 남자면 남자로 살고, 유전자가 여자면 여자로 사는 것처럼 우리 삶의 유전자와 같이 거하심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표현하면서 살아가게 할 목적으로 만드셨고, 그 목적으로 볼 때 보시기에 좋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육신이 하나님을 표현하는 것이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을 잘 보여주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오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육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에 예수님께서 개를 구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면 개의 모습으로 오셨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육신을 가진 우리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오셨기 때문에 우리와 같은 육신을 가지고 오셔서 우리의 육신이 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기에 합당한 것인지를 보여주신 것이다. 그 모습이 바로 십자가의 모습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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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교회는 모르는 주기도문

Category : 출간 서적 소개 Date : 2013. 4. 2. 09:47 Writer : 김홍덕

 

생각해보면 세상을 살아가는 것에 관하여 크게 열심인 적이 별로 없었던 것 같다. 공부해야 하는 학창시절에 공부를 열심히 한 것도 아니고, 직장에서 남 보다 정말 열심히 해서 뭔가 이루어 보겠다는 것도 없었던 것 같다. 그러나 다행히도 각 시절에는 적당한 그리고 때로는 성공적인 기간을 보내기도 했었다. 물론 실패한 것도 많았지만…… 그런데 단 한가지 예수 믿는 일에 대하여는 참 열심이었던 것 같다. 물론 많은 기간을 그저 열심이만 했었지만 말이다. 옛말로 국민학교에 들어간 이후 지금까지의 기간 중에 지금으로부터 지난 한 20년 정도는 방향은 제대로 잡았던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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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20년간 신앙에 대하여 묵상하고, 또 보고 배우고 실패하고 돌이키고 한 것을 책으로 내어 보기로 했다. 시대에 맞추어 전자책으로 발간하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그 첫 작품을 지난 달에 발간했다. 제목은 <큰 교회는 모르는 주기도문>이라고 했다. 언뜻 보면 도발적인 느낌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큰 교회가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하여 알면 좀 누그러뜨려질 것이라 생각된다.

 

내가 말하는 큰 교회는 이 블로그를 통해서 계속 말하고 있는 교회를 말한다. 한마디로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 세상적인 것이 있으면 더 좋다는 것을 가르치는 모든 교회를 크기에 관계 없이 나는 <큰 교회>라고 정의를 한 것이다. 이를테면 ‘세상에서 성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라고 가르치는 교회들 말이다. 학생에겐 공부 잘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라 가르치고, 사업하는 사람에게는 사업이 성공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라 가르치는 교회를 말하는 것이다. 교회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그분만 전하면 되는 곳인데 그런 세상의 성공을 가르친다는 것은 변질이다. 그리고 그런 교회는 하나 같이 외형의 발전을 교회의 발전이라 여긴다.

 

나의 신앙관도 그러했다. 복음이란 것이 ‘모태신앙이면 더 좋다’라던가, 아니면 남자라는 것을 강조하기도 하고, ‘군에 가보지 않으면 모른다’와 같은 것이 신앙과 접목되어 있었다. 그런 것을 떨쳐 내는데 10년이 넘는 세월을 보냈던 것 같다. 그리고 이제 그 잔재들을 정리해 가고 있는 시점이기도 하다. 그런 시점에, 거의 20년 전에 새롭게 들었던 <주기도문>에 대하여 지난 20년 가까운 세월 동안 듣고 보고 또 내가 실패하고 돌이키며 배운 것을 주기도문에 실어 책으로 발간해 보았다.

 

다시 읽어보니 맞춤법이 틀린 곳도 많고, 내용이 매끄럽지 못한 것도 많다. 더욱이 독자의 입장이 크게 고려되지 않고, 내가 보는 각도에 가깝다는 점도 보여 참 허술하다. 하지만 이제 이렇게라도 복음에 대하여 전하려고 한다. 또 계속 책을 쓸 것이다. 생각해보니, 이전에는 페이스북이나, 카페 같은 곳에 늘 웃긴 사진이나 올리며 살았던 것 같다. 그렇다고 이제 그것을 금할 이유는 없지만 이제는 많은 지면과 시간을 이렇게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활용하면서 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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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그 위대한 변신 유전자

Category : 김집사의 뜰/복음 담론 Date : 2013. 4. 2. 00:25 Writer : 김홍덕

나는 경상도 남자다. 그러니까 제대로 하는 것도 없으면서 '남자네'하는 고리타분한 경상도 남자라는 이야기다. 결혼 초기에만 해도 아내가 아들을 미장원에 데리고 갔다는 이유만으로 화를 내기도 했었는데, 이젠 가끔씩 미장원에 가서 파머도 해 보고 그런다. 그게 내 사고방식이 완전히 바뀐 것이라 할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이전과는 많이 다른 생각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런 내가 여자를 볼 때 아주 놀라운 점이 있다. 계속 생각이 나서 곰곰히 생각해 보게 된 것인데, 남자들에 비해 자기의 삶이 크게 바뀌는 것을 잘 수용한다는 것이다. 특히 결혼이라는 것은 남자보다 여자에게 더 많은 변화를 가져다 준다. 여자들은 결혼을 하면 자기가 살아온 문화가 바뀐다. 그런 엄청난 변화를 크게 고려하지 않고 사랑하는 남자와 결혼하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목적을 향해 직진하는 모습과 같은 것이다.



특히나 여자가 아이를 낳고 나면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된다. 사는 세계가 달라지는 것이다. 지금은 거의 볼 수 없는 상황이지만, 내가 고등학생이던 80년대 초만 해도 시내 버스 안에서 아이에게 수유하는 엄마들을 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처녀들로서는 상상도 하지 못하는 일이지만, 아이를 낳은 여자, 즉 엄마들은 아이의 일이라면 가슴을 보이는 것 정도는 일도 아닌 존재가 되는 것이다. 결혼해서 아이를 낳은 여자는 살아가는 세계가 바뀌는 것이다. 그것은 진정 위대한 변신이다.



<사진 출처 : http://www.khanews.com/ 효성병원의 제4회 모유 사진전 대상 수상작>



사람은 모두 다 하나님 앞에서는 여자와 같은 존재이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우리를 예수님 앞에서 신부라는 표현을 하는 것이다. 여자는 아이를 낳음으로 세계가 바뀌는 존재이다. 하나님 앞에서 아이를 낳는다는 것은 영적으로 새로운 존재가 태어나는 것이다. 그것이 우선은 자기 자신이 거듭남으로 완전히 새로운 생명을 얻는 것이 여자와 같은 것이고, 또 복음을 전파하여 얻은 생명이 또 아들과 같이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아이를 위하여 사는 존재는 모든 것이 다 아이에게 집중이 되고 아이를 위해서라면 목숨도 아깝지 않은 존재가 되는 것이 바로 여자다. 그와 같이 사람도 하나님 앞에서 여자와 같기에 하나님의 생명으로 낳은 아들, 바울에게서 디모데와 같은 아들, 즉 말씀을 전하여 그 안에서 새로운 생명이된 그 생명을 위하여 모든 것을 올인하는 삶을 사는 존재가 바로 하나님 앞에서 사람인 것이다.



생각해보니 사람으로서 하나님이 주신 목적만을 위하여 사는 것이 참 어렵게 여기면서만 살아왔던 것 같다. 하지만 여자들을 보며, 아니 엄마들을 보며 하나님 앞에서 나의 정체성도 그렇게 하나님이 주신 목적으로 살아가는 것이 어려운 일이 아니라 내 안에 유전자로 있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아 간다. 즉, 아이를 낳은 여자들이 아이를 위해서라면 어떤 수치도 위험도 개념치 않고 아이를 위해서 살아가는 분명한 세계관을 가지게 되듯, 나 또한 하나님 앞에서 여자와 같은 존재로서 그렇게 아들과 같은 하나님의 생명을 얻는 것에, 또 아들을 위하여 사는 것을 목적으로 살기에 충분한 유전자를 이미 가지고 있음을 확신해 가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어쩌면 이때까지 살아오면서 흩어져 있는 미완인 삶의 조각을 하나로 완성하고, 아이를 낳고 변신한 여자와 같이 완전히 세계가 바뀐 삶으로 가는 것이라 여긴다. 이 세계는 태초에 초대받은 삶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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