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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 사도는 골로새에 있는 신실한 형제들에게 편지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신가? 하는 것에 대하여 이어가고 있다. 우리는 2,000년 전에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셨기 때문에 직접 볼 수 없지만, 그 당시만 해도 예수님을 본 사람들이 제법 있었던 시절임에도 바울 사도는 그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를 이야기하고 있다. 


즉 그것은 예수님이 육신으로 누구의 아들이었는지, 어떤 생김새였는지, 어떤 성격이었는지 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오히려 사도바울 사도는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이름은 크게 3가지이다.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임마누엘이다. 예수라는 이름은 우리의 주민등록증에 있는 이름과 같은 이름인데 그 의미가 “죄에서 구원할 자”라는 의미이다. 이는 예수님의 역할에 대한 이름이다. 그리고 그리스도라는 것은 신분에 관한 이름이다. 즉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의미의 그리스도는, 당시 기름 부음을 받는 3가지 신분이 모두 예수님의 신분이라는 의미이다. 그 3가지 신분은 왕, 선지자, 제사장이다. 그리고 ‘임마누엘’은 상태적인 이름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분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예수님(the Christ)의 정체성을 살펴보면 예수님이라는 사람이 기름부음을 받아야 될 수 있는 신분을 가지신 분으로 왕이요 제사장이요 선지자시라는 의미가 되고, 그것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에 그러하다는 의미이다. 즉, 하나님으로 인하여 사람들을 죄에서 구원하는 분이요, 하나님 앞에서 왕이요, 제사장이요, 선지자라는 이야기이다. 그게 임마누엘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이 세상의 가치기준에 관하여, 또한 정치적으로 왕이 되시는 분이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물론 실패해야만 그리스도라는 이야기는 더욱 아니다. 


세상에서의 성공과 실패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다 보면 있을 수 있는 일일 뿐이고, 또한 그런 인생의 생사고락은 모두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살게 하는  경륜의 일환일 뿐이지 그것이 우리가 사는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있어 구주가 되시는 것은 우리도 그와 같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이셨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은 육신으로 오신 것은 예수님처럼 우리도 동일한 육신을 가지고서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임마누엘) 그리스도(a Christ)로  살아가게 될 수 있다는 말씀인 것이다.


그러므로 육신을 가진 인생이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왕이요 제사장으로 살아 또한 인생으로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을 얻게 하는 삶을 살게 하도록 하나님의 아들이 직접 육신으로 이 땅에 오신 것이기에 우리도 그렇게 되어야 하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인생의 목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사람에게 있어서 모든 것이라는 말씀을 바울 사도가 골로새의 신실한 형제들에게 편지하고 있는 것이다.


흔히들 큰 교회에서 예수님에 대하여 노래하고 이야기할 때, 모든 것 되시는 주님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어떤 의미에서의 모든 것인가는 좀 시각이 어긋나 있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큰 교회에서 이야기하는 모든 것이라는 것은 다분히 사람이 살아가면서 필요한 모든 것이라는 의미가 짙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큰 교회들의 가르침이 지금과 같이, 육신의 삶에 속한 재물과 건강과 신분에 관한 것이 잘 될수록 하나님 기뻐하신다고 가르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것이 잘못되어야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의미는 더더욱 아니다. 그런 것은 다 우리의 삶이 가진 목적을 구현하는 표현양식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므로 목적을 먼저 분명히 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모든 것이 된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예수님은 단 하나가 되신다는 이야기일 수 있다. 그것은 우리가 존재하는 목적, 우리가 살아야 할 목적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신 것이다. 자동차에 아무리 부품이 많아도 ‘안전한 운행’이라는 그 목적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동차에 있어서 안전한 운행은 모든 것이 되는 것이다. 


그것과 같이 예수님은 우리 인생의 목적,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신 목적의 표상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우리 삶의 모든 것이 되시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먹든지 마시던지 주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고 하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인생들에게 있어 유일한 목적이요 또한 모든 것이 되신다는 것은 세상의 모든 만물의 근원이 되신다는 말씀이다. 


김춘수 시인의 ‘꽃’이라는 시에는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했다. 그것은 어떤 것이 내가 그 의미를 부여해 주었을 때, 또한 내가 인식할 그 때에 꽃이 되던 세상이 되던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창세기도 그렇다. 세상이 아무리 먼저 창조되었다 해도, 내가 태어나서 인식하지 못한다면 그건 적어도 나에게 세상이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의 모든 만물이 나에게 의미가 있어야 비로소 그 존재의 의미가 생기는 것이다. 


그렇다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가지는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이야 두말 할 것도 없이,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아들로 살게 하는 것을 위하여 있는 것이다. 세상에 실존하는 모든 것은 다 사람이 다스리라 하셨다. 그것은 다른 의미로 보면 사람이 자기에게 유익하게 사용하라는 의미이다. 그 사람에게 있어 최고의 유익이요 목적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사는 것이라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살게 하는 것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로마서에서 이르기를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롬 8:19-21)

이라 하셨다. 


다시 말해서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피조물은 다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즉 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진 사람이 되는 것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며, 또한 한 사람에게 모든 피조물들이, 자신이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살기를 하나님께서 바라신다는 인식이 있을 그 때 비로소 그리스도가 모든 것 되신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이 모든 것의 설계도와 같은 분이시기에, 그 분은 세상의 모든 것이 된다는 것이며, 모든 만물보다 먼저 되신 것이라 하시는 것이다. 더 깊이 말하면 <그리스도>라는 개념, 즉 그 정체성이 먼저 있고 나서, 그것을 달성하기 위하여 세상의 모든 만물이 존재하게 된 것이기에 그리스도는 세상의 어떤 것 보다 먼저 된 분이라는 말씀인 것이다. 


이는 마치 세상의 모든 통신 기기는 그것이 언제 발명되었든 간에 사람이 서로 연락하고자 하는 마음이 가장 먼저 있었기 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 즉 사람이 연락하고 싶은 마음이라는 것이 모든 통신기기의 존재 목적이요, 사람에게 있어 그리스도와 같이 모든 통신 보다 먼저 있었던 것 같이,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의 모든 만물과 그것을 인식하는 모든 사람에게 두신 하나님의 존재 목적이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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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창조물보다 예수님이 먼저 계셨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 “우리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만들고” 하신 창세기 1장 26절을 기준으로, 하나님은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이미 세상을 만드실 그 때에 예수님이 계셨다고 한다면 그것은 이해보다는 '무조건 믿어라'는 강요에 가까울 수 있다.


왜냐하면 그런 시간의 개념은 크로노스(Cronous)의 시간개념 밖에 없기 때문이다. 즉 객관적인 시간 밖에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점심시간은 12시다 라고 하는 것은 크로노스 적인 개념이다. 반면에 ‘카이로스(Kairos)’라는 것이 있다. 카이로스의 점심시간은 내가 배고플 때인 것이다. 


크로노스는 객관적인 시간이 때를 정하고, 카이로스는 목적이 때를 정한다. 크로노스는 시간이 기준이고, 카이로스는 목적이 기준이다. 배가 고프지 않아도 12시가 되면 밥 먹어야 한다는 것은 시간이 기준이고, 내가 배고플 때, 그 때가 식사시간이라는 것은 배가 고파서 밥을 먹어야 한다는 그 목적이 시간의 기준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태초가 열릴 때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표현하시기 위하여 사람을 만드실 의도와 사람에 대한 목적을 분명히 가지고 계셨고, 그 목적이 육신이 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시기에 예수님은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계신 분이신 것이다.


이것을 생각해보자. 집을 지을 때 집이 먼저인가 아니면 집을 짓겠다는 생각과 설계도가 먼저인가? 그건 당연히 집을 지으려는 의도와 그것이 구체화된 설계도가 먼저인 것 아니겠는가? 그렇듯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실 때 하나님 안에는 하나님을 표현하고자 하는 의가 먼저 계셨고, 그렇게 표현하고자 하신 하나님의 모습이 바로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이며, 예수님께서 바로 그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되신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만물이 그를 위하여 또한 그로 말미암아 창조되었다고 하셨고, 그리스도가 만물의 근원이 되신다고 하신 것이며, 예수님께서는 내가 

아브라함보다 먼저 있느니라(있었느니라가 아니라 있느니라.)(요 8:58)

하셨으며, 바울 사도는 로마서에서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롬 8:19)

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온 세상이 지향하는 하나님의 표현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다, 그리스도 즉 하나님의 성품을 가진 인생이 나타나는 것을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며, 그 모든 것의 시작 이전에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이 있었기에 그리스도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되신 것이다.


그 그리스도가 누구신가? 그는 지금 교회에서 흔히들 이야기하는, 세상적인인 성공이 있으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그것을 세상 사람들이 보고 교회로 오게 된다고 하는 현재의 기독교인의 모습이 아니다. 


설사 세상적인으로 성공한 기독교인을 보고 자기도 그렇게 되어야겠다고 교회로 온다고 쳐도 그 사람이 교회에 오는 목적은 이미 세상적인인 성공을 위하여 교회에 오는 사람이지,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아야 할 필요도 없는 사람이다. 그 하나님이 누구든지 간에 시키는 대로만 하면 잘 먹고 잘 살게 해 준다니 교회에 온 것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 목적을 위하여 기도하고 전도하는 것은 다 간첩이 기부하고 봉사활동 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이미 그 안에 있는 그리스도는 행위의 공로와 소유를 드림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는 바알의 신앙을 가진 사람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그런 분이 아니다.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은 그런 것이 아니다. 그리고 사람이란 그런 것을 그리스도로 받고 먹기 위하여 창조된 존재가 아니다. 그리스도는 인생이 연약하고, 세상이 요구하는 법과 의 앞에서는 언제나 죄인이 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 바로 그것 때문이다. 당시의 유대인들의 법과 로마의 법에 의하면 죄인 될 수밖에 없는 정체성을 가지셨기 때문에 그 법의 집행에 따라 십자가에 달리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 아닌가? 그리고 그렇게 십자가에 달려도 초인적인 기적으로 내려오지 못하고 그저 죽어갈 수밖에 없는 연약한 인생의 모습을 보이시기까지 하신 것이다.


그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을 볼 때, “아 내가 바로 저런 존재구나!!”라는 고백이 나올 때, 내가 그리스도와 같은 정체성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이 자기의 모습과 같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듯, 나도 하나님의 아들이고, 그렇게 초라한 모습이 바로 내 모습이라고 고백한다는 것은 또한 나도 예수님과 같이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을 가진 존재라는 고백이기에 그게 바로 구원이고, 그것이 바로 신앙인 것이다. 


그리고 그 그리스도의 정체성이 바로 세상이 창조되기 전부터 하나님께서 세우신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이기에, 그것을 자기의 정체성이고 사는 목적이며, 또한 그런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나를 창조하신 목적이라고 받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고 사는 자, 곧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야기인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산다는 것은 또한 우리가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있는 의를 가진 자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피조물의 존재 목적이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다 사람이 그런 하나님의 뜻을 자기의 운명과 정체성으로 받고 그렇게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나타나는 것을 목적으로 창조된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한 사람의 생명이 온 천하보다 귀하다고 하신 것이다. 이 세상, 온 천하 만물이 다 그런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한 사람이 나오게 하기 위하여 창조되었기 때문에 그러하다는 말씀이다. 그냥 자기 맘대로 사는 인생들이 천하보다 귀하다는 말씀이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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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서 2장 6절에서 바울 사도는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라는 표현을 했다. 이러한 표현들은 기본적으로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이해해야 하는 부분이다.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는 아들이라는 것이 어떤 존재인가 하는 문제에 대하여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몇 년 전에  최요삼이라는 권투선수가 경기 중 당한 부상으로 뇌사 판정을 받아서 장기기증을 한 후 삶을 떠난 사건이 있었다. 최요삼 선수에게는 평소 아버지처럼 여기던 박태훈(전 숭민프로모션 사장)이라는 분이 계셨다. 성이 다르니 생부는 아니지만 그는 그분을 아버지라 여겼다 한다. 그렇듯 아들이란 존재는 생물학적인 아들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아들이라는 것은 아버지가 가지고 있는 뜻이 육신으로 나타났을 때, 그 존재를 아들이라고 하는 것이다. 가장 일반적인 생물학적인 부자관계 역시, 아버지가 가지고 있는 자손을 두기 원하는 그 마음이 육신으로 나타난 존재를 두고 아들이라고 한다. 그리고 더 본질적으로는 어떤 사람이 가진 뜻을 이루어내는 후세의 사람을 많은 경우 아들과 같이 여긴다. 그렇듯 아버지가 가지고 있는 의와 뜻이 육신으로 나타난 존재, 그리고 그 아버지를 대신하여 그것을 이어가는 존재가 바로 아들이며, 그 아들이 아버지의 뜻이 육신이 되었기 때문에 그것을 성육신(成肉身)이라고 하는 것이다.


성경에 나오는 아들과 성육신이란 말씀이 바로 이러한 세계를 두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두신 뜻이 있었다. 그것은 연약한 육신을 가진 존재로 살면서 서로 사랑함으로 사랑이라는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게 하시기 위하여 창조하신 존재였다. 


그래서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드셨다’고도 하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셨다’고도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외모가 사람의 모습처럼 생겼다는 뜻이 아니라 인생의 목적이 하나님을 표현하는 것이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의 그 뜻을 가지고 살게 된다면 그것이 바로 아들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래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되심이고, 성육신되신 분이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신 것이다.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입었다는 것도 우리가 그러한 법 아래에서 아들이 된다는 이야기인 것이다. <그 아들 안에서>라고 하는 것은 공간적으로 예수님 안에서라던가, 아니면 교회 안에서라는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그 법의 세계 안에서라는 의미이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의고 뜻이기에, 그 분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셨듯이, 우리도 예수님처럼 그렇게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고 살면 그 아들 안에서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그 아들 안에서 구속을 받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나타내셨는가? 지금의 큰 교회처럼 위대해지고 화려해지고 교인들이 사회에서 성공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가르치고, 교회 안에서도 돈 있고 학식 있는 사람이 신앙 있는 사람이고 장로가 되는 그런 법을 보이셨던가? 아니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는데 하나님의 능력으로 스스로 내려오시는 기적을 보여주셔서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보증을 받았는가? 


전혀 그런 것이 아니다. 물론 그 시대에도 지금의 큰 교회의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다. 바로 바리새인들, 그리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 말이다. 그러니 지금의 큰 교회들의 위치가 어디인지 알 수 있지 않은가?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뜻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예수님은 지금의 큰 교회들이 가르치듯, 세상에서 성공하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다고 하는 것과 헌금을 많이 할수록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은행처럼 받아 두셨다가 죽고 나면 이자 쳐서 부유하게 해 주신다고 가르치는 것과, 교회에 봉사를 많이 할수록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라고 가르치는 그 가치관 앞에서 죄인이 되어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것을 보여주심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신 것이다.


즉 세상이 옳다 하는 가치관, 소유와 공로가 있어야 인정받을 수 있고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여긴다는 그 가치관으로 볼 때 정말 보잘것없는 초라한 모습, 또 그 가치관 앞에서 하염없이 죄인 되셨고, 그 모습을 내 모습이라고 인정하는 그것이 바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볼 때 내 모습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난 목적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두신 목적이기에 내가 그렇게 고백될 때 내가 <그 아들 안에서> 아들이 되는 법이다. 그리고 그것은 죄 사함인 것이요, 죄인이 아들이 되는 것이며, 빚이 기업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그것을 본 백부장이 “그는 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고백했다. 하늘이 어두워져서 그런 것도 아니다. 성전의 막이 찢어져서 그런 것도 아니다. 백부장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의 모습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았다는 것이다. 또한 그 모습이 자기의 모습이라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그렇게 육신을 가진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과 의가 성육신이 되었다는 것이니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이 나타난 것이 아니겠는가? 예수님께서도 자신을 본 자는 하나님을 보았다 하셨다. 그것이 무엇인가? 예수님께서 바로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씀이 아니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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