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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는 예수님께서 많은 병자들을 고치신 기록이 있다. 눈먼 소경, 문둥병자, 앉은뱅이, 귀머거리, 중풍병자 등등 그리고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기까지 많은 병을 치유하셨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병자를 고치신 것에 대하여 우리는 예수님께서 실재로 그렇게 하셨다는 것을 객관적인 사실로서 믿는 것이 믿음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능력을 가지셨다는 것을 믿는 것이 믿음이라는 생각도 한다. 


하지만, 그러한 것을 사실로 믿는 것은 어떤 이에게는 쉬운 일이지만 어떤 사람들에게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다 보니 그것을 얼마나 절실하게 믿는가 하는 정도가 믿음의 척도가 되기도 한다. 그렇지만 눈으로 보지 않은 것이라 믿는 것에는 그야말로 믿음이 필요한 일이긴 하다.


그리고 사람들은 병이 든다. 그러다 보니 아프게 되면 예수님께 기도해서 그 병을 치유 받기를 원한다. 내가 대학에 다닐 때 친구의 어머니가 유방암으로 추측되는 병에 걸렸다. 추측이라고 한 것은 병원에 한 번도 가지 않았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다. 그분은 늘 기도의 힘을 믿었는데, 기도하면 자기의 병이 나을 것이라 말씀하시다가 결국 돌아가셨다. 물론 그 분과는 다르게 기도해서 병이 나은 사람도 참 많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병 고치는 은사가 있으면 신앙이 좋은 것이라 생각하기도 한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것이 있다.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많은 기적을 일으키시다가 ‘왜 정작 자신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그 때는 아무런 기적이 일어나지 않았는가?’ 하는 것이다. 또 한 가지는 예수님께서 병을 고치신 사람들은 그렇게 치유를 받았으면 죽지 않고 살아야 하지 않을까 싶은데 그들도 다 예외 없이 죽었다. 


하지만 그러한 것보다 가장 중요한 점은, 예수님께서 하신 것을 우리도 다 할 수 있어야 하는데 우리는 쉽게 그렇게 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사람들의 병을 고치셨다면 지금 우리도 다 그렇게 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한다는 것이 어쩌면 예수님이 병자를 고치는 기적을 행하신 것에 대하여 생각해봐야 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보이신 것 모두가 우리를 위하여, 또 우리가 예수님처럼 살게 하시기 위한 것이었는데, 왜 우리는 그것을 따라 하지 못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왜 그렇게 병자들을 고치신 것인가? 그렇다고 예수님께서 고친 병자들이 죽지 않고 오늘까지 살아 있는 것도 아니지 않는가? 그렇다면 왜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병자를 고치신 것인가? 또 그러다가 정작 본인이 죽게 되었을 때는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하고 그냥 십자가에 죽으셨는가? 이런 것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이것은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나도 할 수 있는가? 아닌가? 하는 중요한 문제인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따라 오라">고 하셨지 않는가?


사실, 우리는 예수님처럼 아픈 사람을 고치기 쉽지 않다. 아니 거의 할 수 없는 일이다. 만약 교회 다니기만 하면 다 예수님처럼 병자들을 고쳐낸다면 의대는 전문대의 하위 학과가 되고 말 것이고, 병원은 계란 파는 트럭과 같이 되고 말 것이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우리가 병자를 고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고 거의 일어나지 않는 일이다. 그러다 보니 이것은 아주 희귀한 일이 되었고, 또 지금도 예수님 당시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기적이라 여겨지는 것이다. 


물론 지금 뿐 아니라 예수님 당시와 초대교회 시절에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아픈 병자들을 고치는 것은 특정한 사람들에게만 있는 일로 여겨졌고, 예수님에 대하여 다시 생각해 보게 된 하나의 이유가 된 것이다. 예수님에 대하여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는 것은, <예수님은 우리와 다르다>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예수님이 하신 것과 같이 사람들이 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인 것이다. 병을 고친다는 것은 특히나 그런 것이었다.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초대교회의 성도들 중에서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기적을 직접 보기는 했지만 자신들은 할 수 없다는 것에 대하여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예수님은 우리와 다르고, 예수님은 눈으로 보기에는 육신을 가진 것 같아도 실상은 그렇지 않다. 그 분은 신이요 영이다>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그것을 우리는 영지주의라 한다. 그래서 요한 사도는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이제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요일 4:2,3)


라고 말씀하시고 그러한 생각을 심히 경계했다.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예수님께서 병을 고치신 것과 영지주의가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싶겠지만, 병 고치는 것과 같은 기적들을 사람들이 쉽게 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우리가 예수님 보다 더 큰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까지 하시면서 자신을 따라 오라 하신 것을 지킬 수 없는 것을 알기 때문에 이러한 괴리를 해결하기 위하여 궁리한 끝에 나온 것이 바로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육신을 가진 존재가 아니라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영이라고 하는 영지주의나 천사였다고 하는 천사 숭배와 같은 사상들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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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 나오는 모든 말씀은 생명에 관한 말씀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생명의 주인이시기 때문에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그렇듯 성경의 모든 것이 다 생명의 말씀이라면 모든 표현 역시 우리가 알고 있는 생명에 비하여 볼 수 있어야 한다. 만약 성경을 생명의 말씀으로 보지 않으면 방향이 역행하게 된다. 


무슨 말이냐 하면, 모든 생명은 안에서 밖으로 자라고 성장하지만, 생명이 아닌 가공과 율법의 세계는 밖에서 안으로 만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성령의 9가지 열매(갈 5장)라는 말씀이 있는데, 이것에 대하여 보통은 이렇게 말한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이렇게 열매를 맺어가야 합니다"라던가 아니면 아예 "이러한 9가지 열매를 맺기 위하여 노력하고 힘써야 합니다."라고…… 이런 설교나 권면은 생명에 대하여 모르기 때문에 발생하는 오류이다. 





정말 생명에 대하여 안다면, "당신은 성령의 임재를 사모하십시오. 그러면 성령이 9가지 열매를 맺게 하실 것입니다." 이렇게 되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생명이기 때문이다. 9가지 열매는 사실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그것은 오히려 성령만 있으면 자동으로 맺히는 것이다. 사과나무에 사과가 열리는 것이 당연한 것이듯 말이다.


골로새서 2장 6절과 7절에서 바울 사도는 이러한 생명의 세계의 관점에서 말씀을 이어가고 있다. 바울 사도는 

너희가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2:6)

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그 안에서’라는 말씀은 어떤 공간이나 조직 안에 있으라는 말씀이 아니다. 


예를 들어 교회 안에 있으면 주 안에 있다고 여긴다거나, 아니면 교회에 등록되어 있으면 주 안에 있다는 말씀이 아니다. 또한 그 안에서 행한다는 것도, ‘예수를 믿는 사람이니 이렇게 해야 한다’는 식의 행동 규범에 관한 것이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안에서>라는 것은 어떤 세계 안에서라는 말씀이다. 즉, 똥개든 세퍼트던 삽살이던 진돗개든 어떤 것이 되었던 다 <개> 안에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삶의 모양이나 형태가 어떠하던지 간에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사람으로 살아가는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있는 것이고, 그 안에서 행하는 것이다.


이렇게 예수 안에 있다는 것은 예수님과 같은 생명으로 살아간다는 것에 관한 말씀인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 즉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면서 사는 존재가 아들이요, 아버지의 생명으로 살아가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렇다면 하나님 아버지의 생명, 예수님을 통해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생명의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십자가에서 보이신 모습이다. 그 모습은 정말로 살아있다고 할 수 있는 생명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었지만 하나님은 살리실 수밖에 없는 생명의 정체성인 것이다.


십자가의 대속은 그저 차비를 대신 내어주듯,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죄를 받으신 것 같은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라, 그 모습을 볼 때 나의 모습을 발견하게 하심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고, 그 뜻으로 인하여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이 바로 나의 모습이라는 것이 발견될 때에 예수님과 내가 하나가 되는 것이다.


바로 그 생명이 바로 예수님의 생명이 내 안에 있는 것이 되는 것이고, 그렇게 될 때에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시듯, 우리도 그 분과 같이 그리스도의 직임을 감당하게 사는 것이고, 또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이 하나님의 아들의 모습이었듯 우리도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니, 그것이 바로 예수 안에 있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의 모습이 내 모습이라면 그렇게 억울한 죽음도 없는 모습인데 그것을 보고 감사함이 나오기는 어렵다. 하지만 그것은 형식만 볼 때 그런 마음이 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모습은 형식에 관하여 죄인 되심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죄목은 신성모독과 반역죄이다. 그것은 유대인이 종교적인 형식의 눈으로 볼 때 예수님의 모습은 죄인의 모습이었고, 또 로마의 법이라는 형식으로 볼 때 예수님의 모습이 죄인이 되신 것이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그 세계 안에 있으면 감사함이 넘친다는 것이다. 우리는 운전할 때 눈앞에서 벌어지는 끼어들기 하나 앞에서도 감사할 수 없는데, 이 억울한 환경 안에서 내가 발견될 때 감사함이 넘쳐난다는 것은 참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모습은 세상의 것에 관하여 옳다 그러다 하는 마음이 없이 오직 그 앞에 닥친 일이 무엇이던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것이라면 감당해가는 모습을 보여주신 것이기에 그 안에 감사함이 있다는 말씀이다. 우리는 세상의 일에 대하여 많은 불만과 또 하나님께 그런 것을 고쳐 달라고 기도한다. 못 마땅하고 틀렸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요구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냥 받아가셨다. 예수님께서 그러실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 안에 이것이 옳다, 저것이 옳다 주장하심이 없고, 오직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라면 죽음이라도 순종하시는 마음이 있었기에 그렇게 하신 것이다. 우리가 다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살고자 한다면 하나님께서 만드시고 운영하시는 세상에 불만을 가지고 이것을 고쳐 달라 저것을 없애 달라 새로운 것을 달라고 기도할 것이 아니라 순종하는 마음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예수님의 마음이고, 그 안에서 행한다면 무엇이라도 감사하게 되는 마음인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의 피조물의 하나로 살아가면서 이 세상의 어떤 것을 이렇게 해 달라 저렇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월권일 뿐 아니라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이고, 더 나아가서 하나님께서 세상을 불온전하게 만드셨으니 책임지라고 우기고 따지는 처사이니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기뻐하지 않으신다. 그래서 무엇이 선한지, 즉 무엇이 옳은 것인지에 대해서는 오직 하나님만 아신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다. 그 마음이 없으며 세상을 감사함으로 살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렇게 살 수 없다는 것은 자기 안에서 선악을 판단하는 기준이 있는 것이고, 그것은 아직 선악과를 해결하지 못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은 우리의 정체성을 알게 하심에 있다. 우리가 스스로 선과 악의 기준을 가지고 자신을 포함한 사람을 정죄하고 또 율법을 지키는 것과 같은 행함으로 구원을 얻어야 하는 것으로 알아 수고하는 자기 자리가 아닌 삶을 떠나 우리가 존재하는 목적 안으로 들어가게 하시기에 감사한 것이다.


이룬 오리새끼가 하늘을 나는 백조를 보고 자신이 백조인 것을 알고 날게 되었을 때 얼마나 감사하겠는가? 아마 백조였던 미운 오리새끼에게 자신이 백조라는 것을 알게 하는 것 이상 감사한 일이 어디에 있겠는가? 미운 오리새끼가 자신이 백조인 것을 아는 순간 먹는 것 입는 것 심지어 하늘을 나는 것까지 모든 것이 자신에게 감사함으로 다가오지 않겠는가?


그것이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보고 우리가 예수님을 알기 전에 저주스럽던 인생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미운 오리새끼가 백조가 되는 것 같은 그런 축복을 받는 것이기에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한 것이다.


이는 단순히 돈 필요할 때 복권이 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감사이고 다른 세계이고 다른 안목이다. 우리의 감사는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감사함이 넘치게 되는 것은 정체성이 회복되고 나면 그 정체성으로 살면 살수록 감사함이 넘치게 되는 것을 바울 사도가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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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 사도는 어떤 면에서 보면 지금 간절한 상황에서 글을 쓰고 있다. 그리고 그 간절함을 자기의 얼굴을 보지 못한 사람들도 알기를 원한다고 하고 있다. 그리고 왜 그래야 하는가 하는 것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다. 지금 이 골로새서를 기록한 배경이 있다고 말해왔다. 


이 골로새서를 기록한 이유는 그를 통하여 말씀을 들은 에바브라가 골로새 교회를 세웠고, 그 안에서 복음을 전해가는 중에, 당시 골로새가 속한 아시아 지역에서 발전한 철학과 과학에 대하여 박식한 사람들이 교회에 들어왔고, 교회 안에서 그런 사람들의 박식함이 보기에 좋아서, 복음과 함께 세상적인인 지식이 더해진 사람이 더 중용되어야 한다는 생각들이 들어왔고, 또 한편으로는 초대교회 시절 골치 아팠던 영지주의와 같은 사상들이 또한 교회로 들어오려 했기 때문에 이것에 대하여 경계하기 위하여 에바브라가 로마 감옥에 있는 바울을 찾았고, 그 소식을 들은 바울 사도가 이렇게 편지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는 사실 지금 이 시대의 교회에도 심각한 문제이다. 지금의 큰 교회들도 교회 안에서 그 사람의 신앙 고백이 아니라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형식이자 사회적인 신분과 능력과 재력 등이 교회 안에서 아주 중요한 기준이 되고 있다. 


그 뿐 아니라 더 나아가서 세상에서 성공할수록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가르친다. 이것은 기독교가 세상에서의 부와 명예를 위한 종교로 전락해가고 있다는 신호이자 변질의 현상이다. 그리고 그런 현장으로 인하여 교회는 더 좋은 건축 자재와 방송시설로 지어지고 꾸며지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명분이 하나님께 사용되는 물건이니 더 좋은 것일수록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다는 논리에 기인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것이 왜 문제가 되는가 하는 점이다. 이건 어떻게 보면 아주 간단한 대답이다. 그런 교회의 생각과 흐름에 기여할 수 없고,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은 믿기 어려운 예수가 되기 때문이다. 오늘날 교회가 사회에 많은 기여를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개독교’라는 소리를 듣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은 교회에 오라는 권유를 받을 때 생각해보게 된다. ‘십일조를 잘 낼 수 있을까?’, ‘술, 담배를 끊을 수 있을까?’ 생각하기도 하고, 또 ‘교회가 말하는 그 도덕적 기준을 내가 지킬 수 있을까?’ 생각해 본다. 그리고 또 어떤 이들은 ‘잘 살지도 못하는데 내가 가서 그들과 어울릴 수 있을까?’ 등등의 생각을 한다. 그리고는 이내 포기하게 된다. 


그러다가 교회가 도덕적인 문제를 일으키거나 하면 그 사람들의 마음에는 심각한 배신감이 든다. 자신들은 교회가 요구하는 도덕성에 미치지 못할 것 같아서 다니는 것을 포기했는데, 그것을 배신했으니 오죽하겠는가? 그렇듯, 오늘날 교회가 사람들로 점점 외면 받는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자기들만의 교회>가 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세상 사람들의 시각과 마음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교회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 교회가 가고 있는 방향은 누가 봐도 아무나 믿을 수 있는 예수가 아니다. 왜냐하면, 교회에 가면 사회적인 신분이 높은 사람이 더 대우 받는다는 것은 이명박 전 대통령이 복귀하는 소망교회의 모습만 봐도 자명한 것이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사회에서는 대통령을 했다 해도 교회에서는 그저 한 교인일 뿐이고, 오히려 교회에서는 그 신앙이 어떠하냐에 따라서 인정받아야 하는데, 그렇지 않는 모습이 모든 사람들의 마음 안에 이미 자리 잡은 지 오래되었다. 


이러한 모든 현상이 왜 일어났는가 하면, 교회가 세상적인인 가치관을 교회 안에서 용납하고, 더 나아가서 그것이 중요한 가치관이 되었기 때문인 것이다. 바울 사도는 바로 지금 우리 시대의 교회가 가진 이 모습을 경계하였기 때문에 골로새 교회의 성도들이 말씀을 전한 에바브라의 초라한 사회적인 역량을 보고 무시하고, 오히려 세상적인인 지식과 철학이 있는 사람들을 등용하는 것을 심히 경계한 것이다. 바로 교회가 오늘날의 모습과 같이 되는 것을 막기 외해서 그렇게 간절히 바랐던 것이다.





사도 바울 사도는 그 당시로 보면 최고의 사회 계층에 속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나면서부터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고, 당시 최고의 석학인 가말리엘의 문하생이었고, 또 비단 그 뿐 아니라 이 복음 안에서도 죽은 사람도 살리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가진 그 어떤 조건도 예수 믿는 것에 아니 예수를 잘 믿는 조건이라고 말한 적이 한 번도 없다. 


오히려 그런 것을 자랑하는 자들 앞에서 ‘부득불’이라는 전제하에 그것이 아무것도 아님을 말하기 위하여 자신의 어떠함을 말했을 뿐, 그 어느 순간에도 바울 사도가 다른 사람이 하지 못하는 것을 예수 믿는 조건으로, 또는 예수 잘 믿는 조건으로 제시한 적이 없고 남들이 가지지 못한 자신의 어떠함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말한 적도 없다.


그것이 바로 2장 2절에 나오는 원만한 이해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인 것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골로새 교회와 또 오늘 우리에게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세상의 어떤 지식이나, 또 어떤 신분이나, 공로나 소유의 정도에 따라서 하나님께 영광이 더 된다고 하는 그런 모든 변질된 생각을 멀리하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의 모든 것이라는 것, 그것이 바로 지혜요 지식임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잘 지키는 것이 바로 굳은 믿음이고, 또 그러한 모습이 있을 때 1장 22절에서 말한 바와 같이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가 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다. 사람들은 흔히 사회적으로 또는 도덕적으로 결함이 있는 것을 흠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오히려 그런 것이 있는 육신을 부인하는 것을 사도들이 더 경계했다는 것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래서 사도 바울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 외에 어떤 것이 더해질수록 신앙이 좋다고 여기는 모든 말을 공교한 말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것에 속지 않기를 권면하고 있다. 하지만 오늘날의 큰 교회들은 이미 그것에 꾀였을 뿐 아니라, 그것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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