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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로새서) 1:9-12 성도의 기업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골로새서 Date : 2013. 2. 6. 15:14 Writer : 김홍덕

인터넷에서 ‘성도의 기업’을 한번 검색해보니, 한마디로 별거 없다. 특이한 것은 교회 주보나 홈페이지에 <성도의 기업>이라는 항이 제법 있다는 것이다. 주된 내용들은 큰 교회의 성도들이 하는 사업장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는 내용들이 주류이다. 그건 뭐 큰 교회들이 친목회나 계모임이 다 되어간다는 이야기와 같기 때문에 씁쓸하다.





<성도의 기업>이라는 것은 그야말로 성도로서의 기업이지, 육신이 운영하는 기업(회사나 사업체)에 관한 이야기가 아닌데, 큰 교회들이 그러한 것을 구분하지 않고 사용하고 있다는 것은 그들이 얼마나 육신의 삶에 속한 소유와 부유함에 갈급하며 하나님은 버리고 물질을 신앙하는지를 대변하는 현상이 아닌가 생각된다. 


바울 사도는 골로새 교회를 위한 간구의 마지막에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라고 했다. 이는 실로 대단한 간구의 내용이 아닐 수 없다.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는다는 것은 믿는 분의 기업을 얻는다는 것이다. 우리가 믿는 분은 하나님이시니, 하나님의 기업의 부분을 받는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 나오는 <기업>은 하나님의 기업이다. 이는 하나님의 의에 관한 것이고, 하나님의 분량에 관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성도의 기업은, 교회의 교인이 운영하는 사업체나 가게 혹은 회사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기업, 하나님 아버지가 운영하시는 가업에 관한 것이다. 그것은 이 세상에서 돈을 벌기 위해 세운 회사가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것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도 아버지께서 일을 하시므로 일하신다고 하신 그 일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하여 나타내신 하나님의 의와 뜻을 나타내는 그 일이 바로 성도의 기업이라는 말씀인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요 5:19)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인간을 만드신 것은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기업의 부분을 받는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업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아들이기도 하다. 원래 업은 아버지에게서 아들로 물려지는 것이 아닌가? 


그렇듯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것을 물려받는 것, 그것이 바로 성도의 기업이다. 그리고 그 기업의 처음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the Christ)>이시고 우리는 예수님처럼 그리스도의 성품, 즉 하나님을 표현하는 일을 받은 것이다.


이 업은 한편으로는 빚이다. 성경이 말씀하는 빚은 돈을 빌려간 빚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다 빚진 자'라고 할 때 그 빚이 하나님께 돈을 빌려서 빚진 자가 되었다는 말씀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빚이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 목적하신 것을 우리가 나타내어야 하는 빚이 있다는 것이다.


이 빚은 존재 목적의 빚이다. 휴대폰은 주인에게 통화와 정보를 제공해야 하는 존재의 목적에 의한 빚이 있는 것이다. 그것이 되지 않으면 죽은 것이고 사망이다. 반면에 그것은 또한 휴대폰이 주인에게 물려받은 업이다. 휴대폰이 아무리 바뀌어도 주인이 원하고 기대하는 것은 늘 동일한 것이다. 그것이 빚이기도 하고 또한 업이기도 한 것이다. 또한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고, 그것이 사도 바울을 사도로 세우신 하나님의 뜻이며, 그것을 아는 것이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그것이 아니라 세상의 철학과 과학과 같은 것으로 사람의 정체성을 왜곡하여 사람이 가진 본 모습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하거나 과학이나 철학이 있으면 있을수록 더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도 아니고 그런 일을 도모하는 것은 성도의 기업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우리가 존재하는 목적이기도 하다. 우리에게 누군가가 목적을 주었다는 것은 우리에게 목적을 주신 이에게 우리는 <빚>이 있는 상황이 되는 것이다. 그것이 또한 업이기도 한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실 때에 두신 우리를 향한 목적이 우리의 업이고, 또한 빚이라는 이야기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빚진 자이기도 하고, 또한 그 기업을 물려받는 자이기도 한 것이다.


그리고 그 목적은 바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고 사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성품 중에서도 위대함을 좇아서 세상적인인 성공으로 그 목적을 달성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연약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인정함으로 서로의 연약함을 인정하며 사는 사랑함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의 성품을 표현하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 받을 기업과 또한 하나님께 진 빚이라는 것이 인생이라는 연약함을 가지고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고 서로 사랑하는 것이라는 것을 간과해 버리면, 앞 다투어 크고 위대해지려고 한다. 교회가 크고 위대해지는 것도 그런 것과 같은 원단이라고 봐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바울 사도가 간구하고 있는 내용은 골로새 교회의 성도들이 운영하는 사업이 잘되어 대대손손 이어지기를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 하나님께서 의롭다 여기시는, 또한 하나님의 업이요 하나님 앞에 사람이 진 목적의 빚을 감당함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그런 모든 일로 인하여 바울 사도가 하나님께 감사드릴 수 있는 것을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그러니까 바울이 전한 복음, 에바브라를 통하여 전한 복음, 사람이 하나님의 창조 목적 안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하는 것, 사람이 보기에는 연약하게 지어졌고, 그 안에 늘 부정한 것만 있는 것 같아서 정죄하고 싶은 그 모습이 오히려 하나님이 보실 때는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기에 너무나 온전한 존재였기에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셨고, 


그 모습을 보임으로 죄인이 되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볼 때 살릴 수밖에 없는 하나님의 아들의 모습이었다는 것, 그것을 표현하고 나타내고 사람들이 또한 자신들을 보고 그것을 알아갈 수 있도록 인생을 살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성도의 기업이요, 하나님을 바로 아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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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 하신 것은 밝음이 있으라 하신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밝음이 있으라는 말씀인 것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가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라고 하신 것이다. 지금의 본문은 이어지는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이라는 말씀까지 하나로 연결된 말씀이지만, 이 <빛>이 어떤 의미인지 모른다면 골로새서의 말씀 뿐 아니라 성경 전체를 알 수 없는 것이기에 분명하게 포스팅하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빛>은 밝음이고 시작이다.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창 1:2)’ 창세기의 말씀은 천체물리학적 시작이나 과학에서 말하는 빛만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것을 연구하고 있는 바보 같은 ‘창조과학회’도 있다. 어떤 세계의 시작이라도 내가 인지할 때 태초가 되는 것이다. 내가 나지 않았다면 이놈의 세상이 창조된들 무슨 의미란 말인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 1:1)”하신 것은 <나에게 하나님의 세계가 열리게 되었다>라는 의미가 없다면, 지구가 어떻게 생겨 먹었던, 과학과 성경이 어떤 관계가 있던 아무 상관없는 것일 뿐이다.


대학 2학년 때, 당시에 있었던 대학생 병영 체험의 일환으로 전방 25사단에서 일주일간 보초를 서로 갔었는데, 그 밤이 얼마나 어두운지 바로 앞에 사람이 있어도 보이지 않았다. 철모 뒤에 있는 야광 스티커가 아니면 앞에 가는 사람은 보이지도 않았다. 그때 사람 눈에 빛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정도로 어두웠다. 즉 빛이 없었다. 빛이 없는 곳에서는 어떤 것도 할 수 없다. 할 때 마다 부딪히고 들이받고 할 뿐이다. 설사 그것이 내가 늘 생활하는 방이라 해도 빛이 없다면, 내가 늘 사용하던 물건들에게 조차 나는 해를 입을 것이다. 빛이 없으면 그렇게 된다.





그래서 빛은 밝음이다. 단순한 조명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는 이치에 대한 밝음이고 세계에 대한 밝음이다. 컴퓨터 세계에 어두우면 컴맹이라 하는 것이 그래서 그렇다. 그러므로 빛 안에 있다는 것은 세상의 이치를 알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앞서 어두움 중에서는 모든 것과 부딪힌다 했다. 그것이 내가 늘 사용하는 것이라 해도 말이다. 세상 사람들의 모든 다툼도 어두워서 그렇다. 그들의 세계 안에는 그 세계에 대하여 인지할 수 있는 밝음이 없기 때문에 늘 다툰다. 빛이 없어서 그렇다.


빛이 있다는 것은 모든 것을 인지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것을 인지한다는 것은 모든 것을 다스릴 수 있는 것이다. 어두운 방에서는 선풍기에도 부딪히고 책상에도 부딪힌다. 그게 설사 자기 방이고 늘 사용하던 자기 물건이라도 빛이 없으면 그렇게 된다. 반면에 빛이 있으면 모든 것을 인지하고 모든 것을 그 용도에 맞게 다스리고 운용한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시고 세상을 다스리라 하신 것이다. 즉, 빛 가운데 있으면 모든 것의 정체성이 분명해지므로 그 정체성에 맞게 운용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생명이 있는 세계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빛 안에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밝음 안에 있어서 세상의 모든 이치를 알게 하시고, 세상에 있는 모든 정체성을 알아 다스리게 하실 뿐 아니라, 우리가 세상의 어떤 요소에 부딪히거나 상하거나 해를 당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마치 불 켜진 방에서는 어떤 것에 부딪힘 없이 다니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내가 큰 교회에 있을 때, 빛이 이런 것이라 가르쳐 주는 이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가르쳐 줄 수가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다들 어두우니까? 만약 밝다면, 교회 안에 다툼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늘 싸우고 있다는 것은 어딘가에 부딪힌다는 것이고, 서로 부딪힌다는 것은 둘 다 어두움 가운데 있다는 것이다. 둘 중 하나만 밝아도 부딪히지 않을 터인데 말이다. 그래서 목사와 장로들이 싸우는 것이다. 서로 어두워서, 그것도 모르고 있으니 더 할 말이 없다.


바울 사도는 골로새 교회의 성도들을 간구하면서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행하게 하시고>라 간구했다. 이는 바울 사도와 함께하는 사도들과 골로새의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의 밝은 빛, 하나님의 세계 안에 두신 그 빛의 밝음을 좇아서 그 가운데 행함으로 모든 이치를 알아 다툼과 분쟁과 갈등과 의문이 없는 삶 가운데 살기를 간구하신 것이다. 그것은 먼저 간구한 기쁨으로 견디는 것이나, 선한 일에 열매 맺게 하시는 것이나, 하나님을 아는 것, 그 모든 것이 밝음 가운데 깨우쳐진 삶 가운에 있기를 간구하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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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종교가 되었던 그 안에는 일방적인 즐거움이나 무조건적인 긍정만이 존재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은 다 어떤 일에든지 열매를 얻기 위해서는 상당한 수고를 해야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세상의 모든 일이 그렇다는 것은 이를 지으신 하나님의 성품이 그러하다는 것이기도 하다.


오래 참고 견딘다는 것은 참 대단한 일이다. 당연히 쉬운 일도 아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왜?” 또한 “무엇을 위해서?” 그러는가 하는 문제가 있는 것이다. 앞에서 <선한 일>에 대하여 포스팅 할 때도 언급했지만, 선한 일 자체가 전부이면 그건 자기의 의로움일 뿐이라 했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오래 참고 견디는 것도, 그러한 것 자체가 신앙이 있어 보이는 행동이라 여겨 참고 견딘다면 그것 그냥 공로주의 이고 하나님 앞에서는 크게 의미 있는 일은 아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해 달라고 간구했다. 골로새의 모든 형제들이 신앙생활과 교회생활을 함에 있어 견딤과 오래 참음이 요구되는데 그러한 것을 기쁨으로 감당하게 되기를 간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말이 쉽지, 참고 견딘다는 것이 즐거운 일에 쓰는 표현은 아니라, 어렵고 힘든 일에 참고 견디는 것이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참 어려운 일인데 그것을 기쁨으로 한다는 것은 더더욱 사람에게 힘든 일임에 분명한 것임에도 바울 사도는 골로새 교회의 성도들이 그런 자리에 이르기를 바라고 있다.


지금 바울 사도가 골로새 교회에 편지를 하는 이유는 교회 안에 세상적인 철학과 과학이 결합되는 것을 경계하기 위함이다. 그러니까 신앙에 철학과 과학이 가미된 사람이 더 좋은 신앙인으로 인정하려는 골로새 교회의 사람들에게 과학과 철학에 대한 지식은 비록 없지만 오히려 그것과 복음이 결합되지 않아야 함을 아는 에바브라가 전하는 것이 복음이라는 것을 전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어떤 기쁨이 있기 때문에 이 기쁨으로 인해서 참음과 견딤이 가능하기에 바울 사도가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기를 원한다고 말씀하고 있다. 이 기쁨은 앞서 10절에서 하나님께 합당히 행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과 연결된 것이다.


즉 지혜와 총명으로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이 하나님께 기쁨이 되고 바로 그 기쁨이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는 힘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즉, 지혜와 총명으로 하나님을 아는 것에 이르고 영광의 능력으로 열매 맺는 자리에 이르기를 바라는 바울의 소망이 기쁨으로 참고 견디는 것과 상관이 있다는 것이다.


사람이 어려움을 참고 견디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일 때도 많지만,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선택함으로 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사람의 정체성을 알고 그것이 자신의 운명이라고 아는 사람은 예수님과 같은 운명이 된다. 그 운명은 예수님께서 아무 죄가 없으시나 세상의 법에 의해서 죄인이 되신 그 운명을 말한다.


사람이 하나님께서 자신을 지은 그대로의 모습으로 인정하고 산다는 것은 사람 자체로는 성공도 구원도 없기에 끊임없이 사람을 업그레이드해서 피라미드의 꼭대기로 가야한다는 세상의 법이 지배하는 사회 속에서 산다는 것은 보통의 일이 아니다.


그것은 정말로 오래 참고 모든 것을 견뎌야 하는 일이다. 그런 일은 어떤 분명한 목적 없이 또 기댈 곳 없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기댈 곳, 그 목적이 무엇인가 할 때 그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 바로 그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사람이 가진 연약함과 부족함을 인정하면서 살아감으로 인하여 겪는 모든 어려움을 이기게 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세상을 이긴 이김인 것이다.


이렇듯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안다는 것이고, 하나님이 가지시고 계신 사람을 향하신 근원되는 뜻은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을 나타내시는 것이며, 그것이 나타난다는 것은 하나님의 생명이 육신을 가진 인생의 삶으로 표현된다는 것이며. 그런 삶을 살아 있다고, 생명이 있는 것이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생명이 있는 삶이 바로 하나님을 아는 삶이다.


그리고 생명은 또한 같은 생명을 얻기 위하여 또 그 생명을 자라고 장성하게 하고 널리 퍼지도록 정말로 최선을 다한다. 그것은 비단 혈육에 관한 것만이 아니다. 자기가 의롭다거나 좋다고 생각하는 것이 있는 것이 있으면 누구라도 그것을 널리 알리려 하는데, 하물며 아들까지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의와 뜻과 생명이야 더 말할 것도 없는 것이다.


기쁨으로 참고 견딜 수 있는 일은 세상에 어쩌면 하나 밖에 없다. 그것은 생명을 기르는 것이다. 자기의 자녀를 기르는 일에는 많은 수고와 어려움이 있지만 그것을 참고 견딤으로 해 나가는 이유는 바로 <기쁨>이다. 또한 농부가 곡식을 기르는 것 역시 그와 같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가 ‘<기쁨으로>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라고 한 것은 <생명을 기르는 수고를 온전히 감당하게 하시고>라는 표현과 같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선한 일에 열매 맺게 하시고 와도 일맥상통하는 바가 있다. 열매는 생명 세계의 결과니까?





하나님은 생명의 주인이시다. (욥기 38장 이하에는 하나님께서 욥과 변론하시면서 당신이 생명의 주인이심을 나타내셨다.) 또한 하나님은 모든 생명을 창조하신 근원이시며, 사람에게 생기를 불어 넣으신 창조주이시다. 즉 기쁨으로 견디고 오래 참는다는 것은 생명을 기르는 사람이 되라는 의미의 간구이며, 이는 또한 생명이신 하나님과 그 정체성이 동일한 세계로 이르게 되기를 간구하는 것이기도 하다.


바울 사도가 골로새 교회의 형제들을 위하여 하는 간구들은 하나님을 아는 것으로 지혜와 총명이 가득하게 되고,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 맺게 하고,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고, 이렇게 연결된 모든 내용들을 하나로 연결해 볼 때, 이 모든 것은 생명 세계에 대한 표현이다. 이것은 마치 하나님을 도깨비 방망이로 여기며, 밥 달라, 돈 달라, 좋은 여자 달라 기도하는 큰 교회들의 기도와는 확연히 다른 세계의 간구인 것이다.


바울 사도가 골로새 교회의 성도들이 이르기를 원하는 자리에 대한 것에는 골로새 교회의 교인들이 세상적인으로 성공함으로 세상 사람들이 그들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를 믿게 되도록 그들의 세상적인 안위와 풍성을 간구하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의 큰 교회들은 그렇지 않다. 그들의 가르침에도 일관성은 있다. 성경 어디를 읽어도 그들은 이 세상에서 결국은 하나님께서 축복하실 것이라는 것에 수렴하는 것을 가르친다. 그리고 그것을 보고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을 것이라 하면서……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다.


그래서 큰 교회에서는 천국의 상급을 위하여 참으라고는 한다. 또한 ‘하나님께서 다 아신다’며 좀 억울하고 예수 믿는 것이 힘들어도 참으라고 한다. 그저 참는다는 것 그것이 선한 줄로 알고 있다. 하지만 간첩이 정말 어려운 일을 견딘다고 해도, 나라에 투항하지 않고 참는다면, 참으면 참을수록 죄가 되듯이, 하나님 앞에서도 왜 오래 참고 견뎌야 하는지, 무엇을 위해서 그래야 하는지, 어떤 세계에 대하여 그래야 하는지 모르고 참고 견디는 것은 하면 할수록 죄가 되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은 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 안에서 모든 참음과 견딤은 하나님의 품성으로 거듭난 생명 안에서 그 생명이 또 분배되고 잉태되며, 그 생명이 또한 그렇게 되도록 하는 생명의 기쁨을 인하여 참고 견디는 것이 아니면 다 죄요, 참을수록 죄가 되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은 생명의 하나님이니 그 생명으로 인하여 아들 되는 신앙은 어쩌면 굳이 참으려 애쓰지 않아도 그 본성이 하나님을 닮아 그렇게 살 수 밖에 없는 생명으로 살게 되기 때문인 것이다. 바울 사도의 간구도 또한 그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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