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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이어서 바울 사도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시기를 기뻐하심이라(골 1:20)

라고 하고 있다. 기뻐하시는 주체는 하나님이시다.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나 다 예수님과 화목케 한다고 하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구약성경에 기록된 제사에 대하여 생각해 봄으로 가늠해 볼 수 있는데,


성경에 나오는 제사들이 있는데, 모든 제사의 기본인 번제와 속죄제 등의 제사들은 항상 흠 없는 수컷을 제사로 드리게 되어 있다. 이는 그 시대에는 여자와 암컷은 다 부정한 것을 의미했다. 그래서 제사에는 올리지 않았는데, 유독 마지막 제사에 속하는 화목제의 경우 암컷이라도 무관하게 제사를 드릴 수 있었다.


암컷을 제사에 드리지 않음이나 여자를 인구의 계수에도 치지 않은 것은 육신으로 여자인 것을 부정하게 여김이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슬로브핫의 세 딸들은 땅을 분깃으로 받지 않아야 했지만 모세는 이를 나누어주었다.(민 36장) 


그러므로 이는 육신이 여자인 것이 아니라, 그 신앙의 상태가 씨와 같은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존재를 말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모든 인생을 다 여자와 같이 보시고, 그것을 부정하게 여기시는 것이다. 그래서 성도들을 예수님의 신부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관점에서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나, 세상적인인 요소를 하나님께 제사로 드리지 않는다는 말씀을 하시고자 하심이 암컷을 제사로 드리지 못하게 하신 것이다.


그런데 유독 화목제만은 암컷도 제사를 드릴 수 있게 하신 것이다. 이것은 화목하게 하는 것에 있어서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없다 하여도 그 사람과 같이 어울리게 하심이다. 화목제란 그런 것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들이나 같이 화목케 하신다고 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고 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왜 그렇다는 것인가? 하나님께서 화목제를 그리게 하셨는가? 즉 하나님을 모르는 것, 어떻게 보면 본질이신 하나님이 아닌 형식과 겉치레인 세상의 것과 화목하게 하셨는가 하는 것이다.


그것에 대하여 바울 사도는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것이라고 했다. 세상의 모든 만물들이 존재하는 이유와 지향하는 모든 것이 다 그리스도를 위함이라고 했다. 그리고 또 모든 충만함이 그 안에 있는 예수께서 땅과 하늘이나 모든 것과 화평케 하도록 십자가에서 피를 흘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예수님의 피가 어떻게 오늘 우리의 죄를 사함으로 하나님 앞에서 여자와 같은 인생들이 화목제와 같이 드려지게 되는지에 대하여 말씀하고자 하심이며, 또 한편으로 땅이 하늘과 화목하게 된다고 하는 것은  골로새 교회가 당면했고, 또 오늘의 큰 교회가 가지고 있는 문제인, 땅에서 난 학문과 소유와 공로가 하나님인 하늘과 화목하게 되었다는 것인데, 


그것은 땅에서 난 지식과 소유와 공로가 하나님과 연합이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하늘의 뜻에 맞게 화목 되었다는 것, 즉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을 표현하기 위하여 사용되었다는 것이고, 그것을 위하여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렸다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늘이 변하면 땅이 변하는 것이지, 땅이 변한다고 하늘이 변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즉, 하늘이 봄이 되어야 꽃이 피는 것이지, 꽃이 펴서 계절이 봄이 되는 것이 아니듯, 세상의 모든 지식과 소유와 공로도 다 이와 같이 하늘에 속한 것이지, 그것을 어떻게 한다고 하늘과 같은 하나님의 뜻과 믿음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인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제사가 암컷도 제물로 드려지는 화목제도 함께 드린 제사가 되는 것이다. 이를 다시 살펴본다면,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하여 하나님의 뜻이 사람과 화목하게 되어, 하늘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것, 즉 하나님의 마음이 사람 안에 이루어지는 것이 가능하게 된 사건이 바로 십자가의 사건이며, 


그와 같이 육신이라는 형식을 가진 사람의 모든 것이 주를 위하여, 또 주로 인하여 있게 되는 것과 같이, 사람이 구현한 모든 지식과 소유와 공로 역시 또 하나의 형식으로서 하나님의 뜻과 의 앞에 수용되고 하나님의 뜻에 종속되어야 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당시의 골로새교회에는 그런 형식이 부가 되어 세상적인인 역량이 있을수록 교회에서 인정받게 되는 신앙적 변질이 있었기에 바울 사도는 이렇게 강변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때와 같이 지금의 큰 교회들도, 그 날의 골로새 교회와 같이, 세상적인인 경쟁력이 있을수록 교회 안에서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는 미명 아래 더 인정받는 모습을 자랑하고, 그렇게 될수록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가르치고 있으니, 오늘날의 큰 교회들도 골로새 교회를 향한 바울 사도의 말씀을 깊이 상고해봐야 할 것이라 생각이 된다.


그러므로 세상의 것이 하나님 안에서 화목이 되려고 하는 것은 그 목적에 맞게 사용되고 존재할 때이다. 그 목적은 다른 것이 아니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나오는 것에 사용되어지는 것이다.


세상의 것이 하나님의 아들이 나오는 것을 위하여 사용된다는 것은, 철학이나 과학이나 재물이나 명예나 그 어떤 것이라도 하나님의 복음과 뜻과 결합되어서 그것에 가미되어 시너지를 나타ㅐ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곧 하나님의 아들이자 하나님의 성품이 표현되는 것을 위하여 사용되는 도구로서 유용하게 사용될 때 화목한 것이 되는 것이라는 말씀을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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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 사도의 안목 안에서 그리스도란 과학자들이 보는 우주의 대 원리와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그 안목에는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의 것에 관하여 그리스도와의 연관성을 부단히도 단절하려고 했다. 그것은 육과 영의 관계를 단절시키려 한 것이 아니라, 보이는 세계가 본질로 오인되고, 그것이 가진 어떤 형태가 하나님을 신앙하는 것에 있어서 의로운 것이 되는 것을 철저히 경계를 했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와 요한 사도는 육신과 영의 관계를 단절시키고, 영은 거룩하고 육은 부정하다 여기는 것을 크게 경계하였다.


눈에 보이는 것이 현실 같아 보이지만 그것이 실상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히브리서 기자도 보이는 것이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고 히브리서 11장에서 밝혔다. 이것은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말씀이다. 


바울 사도에게 있어 “하나님께서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했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충만 이라는 것이 육신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다. 실제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의가 표현된 2차적인 표현인 것이고, 본질은 보이지 않는 것이다. 즉,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세상의 모든 만물로 표현된 것이다. 그러므로 본질은 하나님이고, 이 세상은 표현양식인 것이다.


한마디로 이 세상은 하나님의 표현 양식이지 본질이 아니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것을 숭배하거나, 의롭게 여기거나, 노력이나 소유로서 그것을 변경시키는 것이 하나님의 나타나심이나 기적이 아니라는 이야기인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무언가를 나타내시려고 이 세상에 보이는 모든 것을 만드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나타내려고 하신 것이 무엇이냐 할 때, 그것은 바로 하나님 자신이요, 하나님의 성품이요, 하나님의 의(義)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의가 사람의 육신으로 나타난바 된 분이 있는데, 그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이며, 그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육신을 가진 사람이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고 살 때,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 같이 우리도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인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께서 말씀하시는 <모든 충만>이라는 것은, 예수님께서 세상의 재화와 용역을 풍족히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그것을 구하는 사람에게 주실 수 있는 존재라는 뜻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모든 충만이 되신다고 하는 것은, 사람들이 좋다고 여기는 학문이나 재물이나 지위 같은 것 역시 모든 것 중의 일부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게 구하는 사람에게 주실 수 있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하겠지만 그것이 아니라, 바울 사도가 앞에서도 밝힌 바와 같이 으뜸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것이 된다는 것은 한마디로 <그것 하나만 있으면 된다.> 뜻인 것이다.





이는 또 우리가 무엇을 위하여 살 것인가 하는 문제에 있어서도 <오직 예수>를 위하여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오직 예수라고 하면 모든 재산을 다 교회에 가져다 바치는 것과 같은 몰입이 아니라, 삶의 모든 목적과 수단이 다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사는 것, 즉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며 사는 것이라는 말씀인 것이다.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한다는 것은 이 블로그에서 지속적으로 말하는 바와 같이, 세상적인으로 위대해짐으로 예수의 이름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이 연약한 육신을 인정함으로 서로 사랑하는 자리에 이르는 것이 바로 예수를 위하여 사는 것이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모든 것이니까? 당연히 인생의 모든 이유가 그것이어야 하는 것이라는 말씀인 것이다.


바울 사도 당시에 골로새 교회의 안과 밖에서 예수를 믿는 신앙에 학문과 철학과 같이 세상적인인 요소가 더하여 질수록 좋다고 여기는 사상이 팽대해졌고, 이는 바울 사도가 전한 복음이 아니었기에 바울 사도는 이렇게 말씀을 해 가시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말씀은 오늘날의 큰 교회에도 마찬가지로 상고되어야 하는 것이다. 즉, 사회적인 지위와 재산의 어떠함이 교회에서 영향력을 준다거나, 그런 사람이 장로와 같이 교회에서 높임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그런 암묵적인 동의는 바울 사도가 심히 경계하는 것이요, 예수님이 모든 것이 아니라, <예수 + 세상적인 불순물>인 세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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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먼저 죽으시고 또한 먼저 나신 이유는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라 바울 사도는 전하고 있다. ‘으뜸’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것 중에 승리자이자 목표이고 그 세계 안에서 수렴되어야 할 위치에 있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셨다는 것은, 이 세상 모든 만물들의 목적이 예수님을 나타내려 하셨다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관점은 바울 사도의 편지에 있는 내용 중에서 상당히 비중이 있는 계시라고 볼 수 있다.


바울 사도는 로마서 8장에서도 모든 만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는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는데, 사실 로마서 8장은 성경 안에서도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말씀이다. 로마서 7장에서 8장으로 넘어가는 부분은 (물론 바울 사도가 편지를 기록할 때 장, 절 구분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로마서 7장에서 바울 사도 스스로가 자신 안에 두 가지 법이 있는데, 하나는 하나님의 법이 있고, 또 하나는 육신의 법이 있다고 했다.(롬 7:25) 그리고 그 두 법의 갈등이 있는 자신의 몸을 사망의 몸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것에서 건져낼 사람이 누구인가? 하고 부르짖듯이 반문하고 있었는데,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육신의 법을 좇는 자신의 모습이 있는데, 그러므로 이제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면서 해방으로 넘어가버린다.(롬 8:1)


생각해보면 이건 좀 의문스러운  부분이 아닐 수 없다. 자신 안에서 마음은 하나님을 좇고 육신은 육신을 좇는데 정죄함이 없다니? 그것이 도무지 무슨 의미인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신앙은 우리 안에서 육신을 좇는 것을 부정하게 여기면서 그것을 이기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자신을 수련하듯 하는 것이 신앙이라 알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더욱 그러하다. 


바울 사도가 정죄함이 없다고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것은 자신과 예수님이 같은 운명을 가졌기에 자신이 예수님 안에 있다는 것이다. 그 운명이라는 것이 다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예수님도 바울도 또한 우리도 다 세상의 법으로는 언제나 죄인이 될 수 밖에 없는 그런 육신 가진 삶을 사는 존재라는 그 운명을 말하는 것이다.


그 운명이 바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고, 바울 사도를 정죄함이 없는 사람이 되게 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한 것이다. 우리도 예수님과 같은 운명 안에 있기 때문에 정죄함이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육신 안에 있기 때문에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좇는 그런 삶을 산다는 것이다. 즉 그것은 우리가 예수님과 동일한 육신 가진 운명 안에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육신은 누구나 다 그러하기 때문이다.


그 육신을 스스로 정죄하는 것은 선악의 법이다. 선과 악으로 세상을 구분하고 하나님처럼 되려 하면 육신이 가진 모습은 언제나 정죄의 대상이 된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선악의 법으로 십자가에 달리셔서 인간의 운명을 보이셨기에 그런 육신을 가지고서 씨름하는 인생들의 구주가 되시는 것이다.


그 구주, 그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신 것이다. 그래서 우리도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법아래서 구원을 얻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다. 그 아들,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을 표현하고 나타내는 존재이다. 즉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존재인 것이다.(요 17장)


그러므로 이 모든 세상을 통하여 그 성품을 나타내신 하나님의 목적 안에서 보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아들이 나오는 것을 위하여 있는 것이다. 사람이 범접할 수 없는 자연의 능력도 또한 신앙을 가졌다면서 무시하고 맘대로 정죄하는 이 세상도 또 사람이 인자하고 사고하는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는 것을 위하여 있다고 바울 사도가 로마서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듯 세상의 모든 것은 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존재한다고 전하고 있는 바울 사도는 골로새 교회에도 동일하게 그것을 전하고 있다. 왜냐하면 골로새 교회를 비롯하여 당시의 초대교회에는 영지주의와 또 발달하기 시작한 과학과 철학이 결합된 복음을 가치 있게 여기는 풍조가 많았기 때문에 


그런 모든 것은 다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인하여, 그리고 위하여 있다는 것을 전해야 하는 사도로서의 간절함이었다고 볼 수 있다. 쉽게 말하면 과학이든 철학이든 재물이든 명예든 그 어떤 것도 으뜸 되신 예수 그리스도보다 다 아래에 있는 것이고,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는 것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이 있어야 더 온전한 복음이고, 그런 것을 알고 있으면 더 좋은 신앙이고, 세상에서 영광을 얻으면 더 교회에서 존경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주 하등한 사고이며 으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것이라는 것을 바울 사도는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 사도가 예수께서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셨다고 하신 것에는 바울 안에 있는 큰 계시가 있는 것이다. 그것은 세상의 모든 것이 다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것, 그리고 육신을 가진 인생들에게 있어서는 그리스도의 성품을 나타내며 사는 것이 으뜸이 되는 목적이기에 골로새 교회가 겪고 있는 철학과 학문에 대한 가치 변화를 볼 때, 


그런 모든 것 역시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하나님을 표현할 자로 살아가는 하나님의 법 앞에서 볼 때, 목표가 아니라 그냥 수단이고, 그것에 가치를 두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 두어야 한다는 것을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세상이 비롯되었고, 만물과 세상의 학문과 같은 모든 것 역시 그냥 한낱 수단에 불과하고 그리스도로 수렴해야 할 것이기에 그것을 골로새 교회에 전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친히 그렇게 하셨다고 하는 것은 빌립보서에서 말씀하시듯,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신데 그렇게 죽고 살아나야 할 모든 사람, 즉 하나님께서 인생으로 창조하셔서 그 성품을 나타낼 것으로 목적으로 두신 모든 사람들 보다 먼저 그 본을 보이셨기에 그렇게 말씀하시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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