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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도문에 나오는 뜻은 당연히 <하나님의 뜻>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 이루어지는 것은 당연한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해 달라고 기도하라고 하시는 것이다. 하늘의 뜻은 땅에 당연히 이루어진다. 하늘이 습하면 땅에 비가오고 습하며, 하늘이 추워지면 땅도 당연히 추워진다. 그렇듯 하늘의 뜻이 땅에 이루어지기는 지는데 하늘의 뜻이 기준이 되어 이루어진다. 그렇듯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기도 역시 하늘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진다고 하셨다. 명백히 한다면 이 문장은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선언일 수 있다. 


그런데 큰 교회에서는 이 문구를 이렇게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 ‘하나님 당신이 마음먹으면 얼마든지 나의 삶을 바꾸실 수 있습니다’라고……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나의 삶’은 당연히 육신의 삶이다. 즉 큰 교회에서는 주기도문 뿐 아니라 기도를 가르칠 때,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니 당신의 모든 것을 들어 주십니다’라고 가르친다. 그 당신의 모든 것이라는 것이 또한 육신의 형편을 개선하는 것이라는 것과 또한 하나님께서 당신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마음이 들도록 열심히 노력하라는 조건과 함께……


하지만 하늘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뜻은 육신의 어떠함에 관한 것이 아니다. 하늘은 육신의 세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늘은 영이신 하나님의 의의 세계이다. 그러므로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하신 것은, ‘하나님의 목적과 의가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라고 기도하는 것이다. 그것은 하늘의 따뜻한 기운이 땅에서는 꽃이 피는 것으로 표현이 되듯, ‘하나님께서 사람을 향하여 가지신 뜻이 인생인 나의 삶을 통하여 표현되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이다. 성경에 나오는 <땅>은 대부분의 경우 사람을 의미한다. 하늘과 대칭이 되는 표현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자연의 이치처럼 하늘은 하나님이고 땅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하늘이 흐리면 땅에 비가 오는 것이다. 땅의 기후가 스스로  변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하심은 <하나님의 뜻이 나에게 이루어지게 해 주시옵소서!> 라는 기도인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뜻, 즉 <하나님의 의>는 무엇인가? 하는 것이 중요할 수밖에 없다. 보통 우리가 가장 많이 접하는 하나님의 뜻은 <이것을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가? 아니면 저것을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가?> 하는 것이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하나님은 그런 것에는 관심이 별로 없으시다. 그것을 묻는 것은 하나님을 무당 취급하는 꼴이니 이제 그만 하는 것이 좋겠다 싶다. ‘대학원에 갈까요? 취업을 할까요?’ 하며 하나님의 뜻을 묻는다면, ‘아무거나 하면 된다.’라고 답하는 것이 좋다. 좀 더 친절하다면, 하고 싶은 것이나, 감당할 수 있는 것을 하라고 하면 그 뿐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이 대학원인가요? 취업인가요?’라는 질문이 하나님의 뜻을 묻는 질문이라고 여긴다면, 그런 것은 이미 세상을 만드실 때 다 할 수 있게 두시고, 지금은 너의 존재를 바라시는 하나님을 모욕하는 질문이다.





하나님의 뜻은 한마디로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나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두신 하나님의 뜻은, 바로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신 목적이다. 그러하기에 그것을 사람이 알 수는 없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하는 본질이지, 사람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대학이나 취업이나 결혼은 다 자기의 힘으로 대학도 갈 수 있고, 취업도 할 수 있고, 이 여인과 결혼할 수도 있고, 저 여인과 결혼할 수도 있다. 다만 어떤 선택의 결과에 따른 수고를 감당하기 싫어서 명분을 얻으려고 하나님의 뜻을 남용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뜻은 말 그대로 하나님만이 할 수 있고 품을 수 있는 뜻을 말하는 것이다. 땅에게 하늘은 그런 것이듯, 사람에게 하나님의 뜻도 그런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만이 가지실 수 있는 것이기에, 사람에게 있어서 하늘의 뜻이란 자기로선 알 수 없고, 창조주이신 하나님만이 아는 사람의 요소가 바로 하늘의 뜻이다. 그것은 바로 인생이 창조되고 내가 존재하는 목적과 이유이다. 그것은 어떤 인생도 자기의 의지로 자신이 존재하는 목적을 정할 수 없다. 자기 의사로 이 땅에 태어난 인간이 없기 때문이다. 그것이 육신의 부모에게 있다고 우기는 것은 더 무식한 것이다. 그 부모도 똑같은 인생이기에 그렇다. 그러므로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생을 창조하신 목적이 나에게 이루어지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늘 자신이 살아가는 정황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을 찾는다. ‘왜 이런 일어났을까?’ 하면서…….  그래서 사람들은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까? 저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까?’하는 생각을 많이 하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은 단 하나라는 것과 그것이 무엇인가만 안다면, 사람들에게 있어서 세상을 사는 동안에 하나님의 뜻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위하여 사는 인생에게 그것의 의미는 중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미 자기의 삶으로 체휼이 되었으니 그것을 굳이 알려고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은 오직 하나, 사람이 하나님의 성품을 닮은 그리스도의 삶을 사는 그것 하나뿐이다. 그 하나를 위하여 하나님은 사람을 부하게도 하셨다가, 가난하게도 하기고, 때로 아프게도 하시기도 하고, 때로 흥하게도 하시는 분이시다. 그것을 모르면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일으키시는 일들에 대하여 “왜 내게?”라는 의문을 가지고 살게 되는 것이다. 컵을 사는 사람은 늘 그 컵으로 음료수를 마시기 위한 뜻을 가지고 컵을 산다. 그리고 그 뜻을 이루기 위하여 때로는 뜨거운 커피를 타서 마시기도 하고, 때로는 라면 그릇으로 사용하기도 하고, 때론 콜라를 먹기도 한다. 게다가 좀 더러워지면 그 컵을 찬물에나 뜨거운 물로 씻기도 하고, 때로는 식기 세척기에 넣어서 괴롭히기도 한다. 컵의 입장에서 보면 이만저만 난감하고 헷갈리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이랬다가 대로는 저랬다가 하니 그 주인의 뜻을 알지 못할 수도 있지만, 자신의 존재 목적이 자신의 주인이 깨끗한 음료를 마시기 위함이라는 것만 알면, 차가운 물에 있어도 왜 그런지 알고, 뜨거운 물에 있어도 왜 그런지 알며, 커피가 담겨도 왜 그런지 알고, 콜라가 담겨도 왜 그런지 아는 것이다.


그렇듯 사람도 하나님께서 지으신 존재이기 때문에 그 지으신 목적이 있다. 그 목적은 다음이 아니라 그 사람에게서 그리스도의 인격이 나오게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인격이 나온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의미이고,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은 그 아버지의 성품을 표현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드신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에게서 그리스도의 인격이 나오게 되는 것을 위하여 라면 그 사람이 때로는 부하게도 될 것이고, 때로는 빈고한 가운데 처하기도 할 것이며 또 때로는 아플 수도 있고 또 때로는 사업이 흥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 모든 것이 어우러져서 사람으로 하여금 그 지으신 이의 목적에 이르게 하시기 위하여 어떤 사람을 만나게도 하시고 자신의 형편이 변할 때 내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생각해보게 하시는 것이다. 그 때, 이 모든 것이 다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살게 하시기 위하여 행하시는 하나님의 경륜임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의 뜻이다. 하나님이 하늘에 계시니 하늘의 뜻은 당연히 하나님의 뜻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은 사람이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 따라 그 삶에서 그리스도의 성품이 나오게 되는 것이지,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하늘의 뜻이라 그것이 하늘에서 이루어지듯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해 주시옵소서 기도하라는 말씀이 아닌 것이다. 그런데도 큰 교회들이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이야기 할 때 육신의 형편과 문제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은 신앙의 목적이 육신의 안녕에 있기 때문이며, 이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이야기고 현상이며, 또한 지금 큰 교회들의 모습인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주기도문을 가르치시긴 전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이 기도를 가르치셨다.(마 6:5-8) 외식이란 형식에 집중하는 것이다. 인생에게 형식은 무엇을 먹느냐? 무엇을 입느냐? 하는 것이다. 그것은 육신의 문제이다. 반면에 내용은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의 뜻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가 외식하는 자와 같지 않으려면 육신의 삶에 대하여 중언부언하며 기도할 것이 아니라, 하늘의 뜻, 곧 하나님께서 인생을 주신 목적과 의를 알기를 간구하는 그것이 바로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이니,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에 관한 기도를 그치고 하나님 앞에 내가 어떤 존재이며, 존재의 하나님께서 나를 두신 그 뜻에 대하여 간구하는 것이 바로 하늘의 뜻이 땅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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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로새서 1장 9절 이하에는 골로새 교회를 향한 바울 사도의 본격적인 권면이 기록되어 있다. 이 권면들의 핵심은 어쩌면 <사람을 그리스도로 받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건 차차 포스트 하기로 하고, 지금 바울 사도의 권면에는 골로새 교회의 소식을 듣던 날로부터 바울 사도가 골로새 교회의 형제들을 위하여 간구한 것이 있다고 시작하고 있다. 그 권면의 내용은 9절에 있는 대로 “너희로 하여금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라고 간구하고 있다고 했다.


지혜와 총명은 같이 붙어 다니는 것이 입에 익숙한 조합이다. 단어의 뜻이 하나님께서 전하고자 하시는 본질은 아니다. 다만 그것은 표현의 형식이지만 그 표현을 한번 살펴본다면, 지혜라는 것은 보통 ‘소피아(Sophia)’를 그 어원이라고 본다. 또한 총명은 ‘쉬네시스(Sunesis)’가 그 어원이라고 본다.


지혜는 정적인 것이며 논리적이고 이성적이며 인과 관계를 밝히 아는 지식이라면, 총명은 동적인 것이며 변화하는 것을 지속적으로 이해하고 또한 변환하여 표현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하나님의 뜻으로 사람의 지혜와 총명 채워지기를 바란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그 인과관계를 명확하게 알게 되는 것과, 2,000년 전에 있었던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오늘날 내 안에서 시대의 변화가 있다 해도 그것을 이해하고 변환해 가고 시대에 맞게 설명해 갈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간구한다는 의미이다.


바울 사도는 골로새의 형제들에게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워지기를’이라고 간구한다고 했다. 신령하다는 것은 어쩌면 사람들이 신령하게 여기는 모든 세상의 지혜와 총명에 관한 것일 것이다. 그러한 모든 것에 하나님의 뜻이 채워지기를 간구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내 안에서 그 원인과 결과가 분명하게 연결되고, 어떤 상황과 삶의 정황에서도 말씀과 함께 적용해 갈 수 있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그것은 한마디고 신앙 안에 의문, 즉 (Why?)가 없어진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이 과연 그렇게 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있을 수 있다. 그것은 분명히 가능한 세계다. 아니 오히려 그것은 적어도 하나님을 믿는다면 그렇게 되어야 하는 것이라 확신한다.


저가 또 우리로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케 하셨으니 의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고후 3:6)


하지만 '하나님을 믿노라' 하면서 사람들이 많은 의문에 있다는 것은, 바울 사도가 골로새 형제들을 위했던 간구, 즉 ‘신비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워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잠깐 오늘날 큰 교회 목사들의 행보를 본다면, 그들이 진정으로 교인들을 위하여 바울과 같이 간구한다면, 적어도 자기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이 의문에 쌓여있지는 않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그렇지 못한 것은, 알지만 그런 간구가 없거나 아니면 자기도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 대부분은 후자일 것이다. 그래서 교회에서 자주 이런 말을 들을 것이다. “안보고 믿는 것이 믿음”이라고…… 그리고 만약 전자라면 그는 이단일 것이다. 이단의 가장 큰 특징은 뭐든지 교주만 알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만민을 위하셨던 것에 대립해서 말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삶 속에서 신앙적 의문이 끊이질 않는다는 것은 단 한 가지 이유뿐이다. 그것은 <사람을 그리스도로 받는 믿음> 그것 하나가 없기 때문이다. 사람을 그리스도로 받는다는 것은 내 앞에 있는 사람을 2,000년 전에 십자가 지셨던 그 예수님과 동격으로 격상시킨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리스도라는 것이 뭔가? 기름 부은 자요, 왕이요 제사장이며 선지자 아닌가? 하나님께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이유가 뭔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왕이요 제사장이요 선지자가 되게 하시기 위함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이제 와서 ‘사람이 어떻게 감히’, 더 사실적으로 말해서 “네가 뭔데 감히 ……”라며 그것을 부인한단 말인가? 그리고서 그곳을 교회라 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서 같이 신앙생활 하는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 있는 형제>라고 할 수 있을까?


사람을 그리스도로 받는다는 것은 성경의 대 주제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가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처럼 살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창조의 모양도 하나님의 형상대로였다. 그런데 이제 와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우리가 그리스도(a Christ)로 살아야 한다.’ 라고 하면 말할 수 없는 거센 저항에 부딪히는 이유는 뭔가? 그게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렇듯 사람을 그리스도를 받는 것에 대하여 성경의 의도와 다르게 터부시 하고 또 염려하는 이유는 사람에 대한 기준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잘못된 원인은 <선악과> 때문이다.(선악과에 대하여는 다음에 포스팅하기로 하자) 사람들이 사람에 대한 기준이 높아지고 그리스도의 기준은 그보다 더 높아졌기 때문인 것이다.


사람은 흙으로 만들어졌고, 그 생명이 다른 창조물과는 달리 하나님의 생기로 말미암았고, 하나님의 모습을 나타내기 위하여 지으심을 받았다. 그리고 아담이 아무것도 입지 않고 창조되었을 최초의 모습을 보고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셨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사람에게 기대가 너무 높다. 학력이 높아질수록 사람답고, 부와 지위와 고상함이 높을수록 지도자가 된다고 여기고 있다. 그렇다 보니 모든 인생의 희망인 그리스도의 모습이라면 더더욱 가치 있게 보여야 한다고 여긴다. 그것이 세상적인 가치인지도 모르고서 말이다. 그리고 이건 놀랍게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이유이기도 한 것이다. 


그런 안목으로 성경을 볼 때는 모든 것이 의문일 뿐이다. 그렇게 되기가 너무 힘들고 몇몇 사람만이 1등이 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 1등도 내일이면 바뀌는 세상에서 기대치 높은 사람이어야 그리스도가 된다는 것은 너무 어렵기에 사람들에게 성경은 어려운 것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성경은 인간의 나약한 모습 그대로가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하기에 좋은 모습임을 설명하고 있다. 그것을 모르는 사람들은 세상적인인 가치인 돈과 명예와 고상함에 관하여 위대한 사람이라야 그리스도라 여기는 안목으로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런 안목 안에서는 성경이 무슨 말을 해도 의문에 쌓일 뿐이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받고 믿는 것은 십자가에 달리셨기 때문이지 위대해서가 아니지 않는가? 이것 하나만 제대로 볼 수 있다면 성경은 죽은 의문에 있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 사도가 골로새 교회의 형제들에게 지혜와 총명이 하나님의 뜻으로 채워지기를 바란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사람이 가질 수 있는 모든 지혜와 총명이라는 옷 입기를 바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인생이 하나님의 형상을 닮는 것 아닌가? 또한 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진 자로 또한 하나님의 아들로 살게 하심이 아닌가? 지금 바울 사도가 골로새 교회에 간구하는 것 역시 그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면, 당시의 세상적인 철학과 과학을 장착한 사람이 사도나 그리스도로 사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전한 복음, 즉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한 그 믿음을 전한 에바브라를 골로새 교회의 성도들 앞에 선 그리스도(a Christ)라고 전하며 그것을 믿음으로 받는 것이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으로 채워지는 것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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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도문) 나라가 임하옵시며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주기도문 Date : 2013. 1. 23. 10:07 Writer : 김홍덕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는 하나님은 거룩한 분이라는 것을 믿는 사람들이 되게 해 달라고 하시고는 나라가 임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그 나라는 당연히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기는 나라가 될 것이다. 즉, 나라에는 다 <의(義)>가 있는데 그 의가 바로 하나님을 거룩히 여기는 의라는 것이다. 그것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어떤 행위의 공로나 소유를 드림이나 어떤 장소에 거한다거나 하는 것에 따라 그 사람을 판단하는 세계와는 분명히 거룩하게 구분되는 의를 가지신 분이시기에 그 하나님의 나라의 의 또한 그것과 같은 것이며, 바로 그런 나라가 임하게 하여 달라고 기도하라고 하신 것이다.


그리고 나라가 임하게 해 달라고 하는 것은 하늘에서 어떤 나라가 땅에 내려온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내가 하나님께 어떤 나라가 임하게 하여 달라고 기도한다는 것은 내게 어떤 나라가 임하도록 해 달라는 것이며, 그것은 내가 어떤 나라의 일원이 되도록 해 달라고 기도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나라는 당연히 하나님의 의가 다스리는 하나님의 나라인 것이다. 소유와 공로의 모든 신들과 분명하고 거룩하게 구분되시는 하나님의 나라라는 뜻이며, 내가 그 이름을 거룩히 여긴다는 것은 또한 내가 그 나라의 일원이 된다는 뜻이기도 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 땅에 임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어디에 있는가? 그래야 내가 속할 수 있게 될 것이 아닌가? 여기서 잠깐 큰 교회의 이야기를 또 한다면, 그들에게 있어 이 하나님의 나라를 찾을 나침판이 있기나 한 것인지 생각해보게 된다. 계속 반복되는 이야기고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반복될 이야기이기도 한 큰 교회의 신앙관은 목사를 청빙함에 있어, 그 목사는 그리스도를 어떤 분으로 여긴다는 신앙고백을 보고 청빙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하지 않은 공부를 얼마나 했느냐? 하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 하지만 예수님은 너는 할 수 없는 구원의 법을 가르치신 적이 없다. 또한 장로가 되려면 교회의 대소사를 많이 감당한 공로와 교회에 큰 일이 있을 때 재정적인 부담을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또한 기준이 되고 임직식 때는 봉 잡은 듯 교회를 개조하는 헌금을 내야 될 수 있는 자리이다. 이것이 무엇인가? 교회가 인정하는 자리인 장로가 되려면 공로와 소유가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과연 그런 가치관이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하신 하나님의 이름의 정체성에 부합되는 신앙관인가 하는 것을 또 재기해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임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나라, 내가 속하게 해 달라고 하는 나라는 바로 이 땅에서의 하나님의 나라 곧, 교회가 그곳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크게 구약과 신약으로 나누어져 있다. 구약이 오실 그리스도에 대하여 기록되었다면, 신약은 무엇을 약속하고 있는가? 신약성경은 구름타고 오시는 예수님의 재림과 새 하늘과 새 땅이 올 것이라는 이야기를 약속하고 있다. 그래서 지금도 많은 종말론적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달력으로 그 날이 오기만을 기다리면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그래서 예전에 다미선교회가 1992년 10월 28일에 세상의 종말이 온다고 말하면서 사회적인 이슈가 된 적이 있었다. 그 당시 방송국에서 기준시간인 10시였던가에 다미선교회에 가서 뉴스를 방송하고 그랬던 기억이 있다. 그 당시 다미선교회의 사람들은 흰 옷을 입고서 기도하는 모습이 TV에 비쳐졌었다. 


그런데 더 재미난 것은 그 당시 그것을 주도했던 이초석 목사가 아직도 활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세계적인 망신을 당했는데도 아직도 그 사람이 활동할 수 있다는 것은 아직도 시한부적 종말론을 신봉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다미선교회가 아닌 보통의 교회들이 그것에서 자유로운가? 그것 또한 아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심은 이미 교회가 재림하신 주님과 같은 것이라는 말씀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중에서 예수님이 왕권을 가지고 다시 오는 것을 볼 자가 있다고 복음서에 말씀하셨다.(마 16:28, 막 9:1, 눅 9:27) 그렇다면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서 재림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 누가 종말론적 신앙 안에서 볼 때 아직 우리에게도 오지 않은 예수님을 만날 수 있다는 말인가? 


그것은 바로 교회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생각해보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교회가 바로 다시 오신 주님이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도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리고 바울 사도는 에베소서에서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취었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서 정사와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심이니......(엡 3:9-10)”이라고 하셨는데, 이는 이제 교회로 하여감 하나님의 모든 뜻을 나타내시겠다는 말씀이신 것이다. 또한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심 또한 이 땅에 실존하는 그리스도가 이제 교회로 있다는 말씀이신 것이다. 


물론 예수님은 직접 육신이 볼 수 있는 형태로 다시 오실 것이다. 그 때는 실제로 하나님만 아실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이 예수님의 재림이라고 믿는 가치관 안에 있다는 것은 2,000년 전에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지금은 만날 수 없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과 같이, 언제가 오실 예수님의 재림이라는 실체도 있겠지만 그런 재림이 있는 것은 이미 교회로 오신 예수님의 재림을 확정하기 위함인 것이지 그것만이 재림이라고 한다면, 예수님의 재림이 언제일지 모르지만 그 시대를 사는 사람이 아니면 재림의 주님을 볼 것이라 약속하신 말씀이 이루어질 수 없고, 제자들 중에 다시 오실 주님을 만날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 또한 틀린 것이라 주장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것이라 하심에서 우리는 왕권으로 오신다는 것은 어떤 나라를 이루시고 오신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그 나라는 당연히 하나님의 나라이다. 예수님이 누구신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닌가? 그러므로 그 나라는 당연히 하나님의 나라이고, 그것이 이미 왔다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인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바로 하나님의 나라가 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기도를 통해서 그 하나님의 나라, 곧 교회가 임함으로 내가 교회 안에 거하는 자가 되는 것이 바로 내게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이기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기도하라고 하신 것이다.


또한 나라의 의는 무엇을 옳다고 하는 것이며, 그 나라에서는 무엇이 선한지 악한지를 판단하는 기준이 되는 것이 바로 그 나라의 의이기에, 하나님의 나라인 교회는 어떤 법으로 다스려져야하는가 했을 때에, 하나님이 옳다 여기시는 것을 그 통치기준으로 삼아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는 공로와 소유의 어떠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 즉 스스로는 구원할 수 없는 그런 죄인의 모습이 바로 자기의 모습이요 정체성이라는 것을 고백하는 그것을 옳다 여기시는 하나님이시기에 그것이 옳다 여김을 받는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이지, 학식 있고 돈 있고 교회에 많은 봉사를 한 사람을 인정하여 장로로 세우는 그런 법을 가진 곳이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지금의 큰 교회의 의는 하나님을 소유의 하나님으로 또 행위에 보답하는 하나님으로 믿고 가르치기 때문에 그렇게 장로를 선출하는 것이다. 장로의 선출 방법이 잘못되었다는 한정적인 이야기가 아니다. 그런 사람을 장로로 뽑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가치관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소유와 공로를 가치의 기준으로 인정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그 교회가 그것을 의로 삼고 있다는 이야기이며, 하나님의 나라이며, 그리스도의 몸이요 주님이 왕권으로 오신 나라의 모습을 그런 모습으로 오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 “나라가 임하옵시며”라고 기도하라 하심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동일한 정체성으로 아버지와 아들이 되는 것을, 곧 하나님의 의가 나의 의가 되어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살 수 있는 의가 동일한 존재가 되기를 기도하라고 하시는 것이며, 그것은 그런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인 교회를 내게 허락하셔서 그 나라의 일원으로 살 수 있는 사람, 그런 자격이 있고, 그 나라의 의를, 그 교회의 의를 나의 의로 삼는 사람이 되게 하시고, 또한 그런 사람이 모인 교회와 함께 살아가는 삶, 즉 나라에 속한 삶을 주시기를 기도하라고 하시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당연히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또한 되는 것이다. 아버지의 정체성이 아들의 정체성이 되는 것은 하나도 어려운 일이 아니듯이 말이다. 그렇게 하나님의 의가 다스리는 곳, 그 의가 모든 통치의 기본이요 법이 되는 곳이 하나님의 나라이기에 교회는 늘 그러한 법으로 다스려질 수밖에 없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나라가 임하옵시며’하심은 하나님의 나라, 곧 하나님의 법과 뜻이 다스리는 나라인 교회에 대한 기도이다.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기는 사람들이 모여서 하나님의 법을 누리며 사는 공동체인 교회가 임하게 해달라고 하셨으니 그것은 기도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러한 공동체의 삶을 허락하여 주시기를 기도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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