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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이다. 지금 시대의 사람들에게 기름은 별로 권위가 없고 그냥 소비재이지만, 고대부터 기름을 머리에 부음 받는 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었다. 성경에서도 왕, 제사장, 그리고 선지자 이 세 종류의 신분만이 머리에 기름부음을 받았다. 그리스도를 히브리어로 하면 <메시아>가 된다. 아마 이것을 지금의 말로 바꾸면 영웅이 되지 않을까 싶다. 즉, 세상을 구원하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는 자기만의 영웅이 다 있다. 더 정확히는 자기가 되고 싶은 영웅이 있다. 슈퍼맨 같은 능력을 소망하는 사람에게는 영웅이 슈퍼맨일 것이고, 여자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카사노바가 영웅일 수도 있겠다. 





또 어떤 사상 아래서는 히틀러가 영웅이라 자신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을지도 모른다.(아직 독일에는 일부 있는 듯) 그렇듯이 각 사람의 마음속에 바라는 자기가 되고 싶어 하는 존재, 혹은 자기를 구원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존재를 다 소망하는데, 그 종류는 모든 사람이 다르지만 그런 존재가 있다는 것은 동일하다. 그렇게 사람 마음에 소망되는 모든 영웅들을 총칭하면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 것이다.


옛날 유대인들에게도 전 민족적인 소망으로 바라던 메시야가 있었는데, 난데없이 목수의 아들이 돌아다니면서 <내가 그리스도다!>라고 하니 정말 어이없고, 예수님보다 세상 열심히 살아서 민족과 나라를 위해서 밤낮 수고하던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한마디로 생뚱맞은 그런 존재였을 뿐이었다. 그런 예수님을 사람들이 십자가에 못 박는데 3년이 걸렸다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것이다.


알고 보면 그 당시나 지금이나 사람이 그리스도가 된다는 것은 정말 인정하기 어려운 것이다. 사람들은 사람인 자기의 정체성에 뭔가가 더해질 때 그리스도나 영웅이 된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더해지는 그 무엇이 바로 선한 것이며, 의로운 것이라 여긴다. 그게 바로 선악과이기도 하다.(선악과에 대하여는 다음에 포스팅하기로 하자) 바로 그렇기 때문에 사람을 그리스도로 인정하지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단순하게 생각해서 <나도 너처럼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면 그 <너>가 바로 그리스도인 것이다. 다만 하나님 나라에서는 나도 너처럼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이유가 너를 보니 하나님의 뜻을 알겠고, 너를 보니 예수 믿고 싶고, 나도 너의 성품과 같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할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일에 가장 먼저 첫 열매가 되신 분이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신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굳이 이를 영어로 표현하면 the Christ가 되는 것이다. 그 분이 그렇게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되시는 것은 사실 별거 아닐 수 있다. 


그 사건을 보며 나도 그분과 같은 그리스도가 될 수 있다고 여길 수 없다면 그게 뭔 상관이겠는가? 예수께서 그리스도 되심은  나도 그리스도로 살게 하시기 위함이지 그리스도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보이는 것이야 당연한 일인데 그게 뭐 놀라운 일이겠는가 말이다. 그게 놀라운 일이 되려면 나도 그렇게 되어야 그게 놀라운 것이 아니겠는가? 전교 1등이 서울대 가는 것이야 당연하지만 그것을 보고 나도 열심히 할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놀라운 일이 아니겠는가?


에바브라라는 한 사람을 골로새의 교인들이 그리스도로 또 사도로 받느냐 받지 않느냐 하는 문제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받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문제와 동일한 것이다. 예수님께서 하늘의 보좌를 버리고(빌 2:6~8) 이 땅에 오시되, 위대한 영웅이 아니라 목수의 아들로 오셔서, 그런 평범한 사람이 그리스도로 살 수 있다는 것을 보이심으로 그것을 믿는 모든 이들은 다 예수님과 같이 그리스도(a Christ)로 살 수 있다는 그것을 전하기 위하심 이었는데, 유대인들은 예수가 초라해서 죽여 버렸듯, 에바브라 역시 바울에게 받은 하나님의 복음을 전함에 있어 세상적인 지식과 철학이 부족하다고 외면 받는다면 그것은 바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과 같은 것이 되는 것이기에 바울 사도는 에바브라를 골로새 교회 앞에 온전히 세우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오늘날에도 매우 중요한 교훈이 아닐 수 없다. 큰 교회들이 목사를 청빙할 때 약(이)력을 보지, 신앙고백을 보지 않는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왜냐하면 큰 교회가 바라보는 그리스도와 목자가 교인들이 닮고 싶고, 그 사람이면 정말로 하나님을 알 수 있을 것 같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보다는 얼마나 공부를 했고 얼마나 경력이 있는지 그것이 중요하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예수님을 못 박은 유대인들의 메시야 관과 같은 것이다. 사람에게 어떤 것이 더 더해졌는가 하는 것을 기준으로 목사를 평가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발가벗겨져서 돌아가셨는데 말이다. 발가벗겨지셨다는 것이 뭔지 아는가? 그것은 인간 본연의 정체성 외에 겉옷처럼 치장된 사람의 모든 요소 학력이나 경력 재력 같은 모든 옷을 벗은 모습이 그리스도시라는 뜻이다. 


그런 신앙고백이 있는 사람, 모든 것을 다 버리고도 그 사람을 볼 때,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 보이듯 하나님의 아들로 보이는 그런 사람을 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그리스도는 소유와 능력의 위대함을 좇기에 바알과 아세라와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사람을 그리스도로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만드시고 심히 기뻐하신 그 모습 그대로 살아도 얼마든지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이며, 에바브라가 비록 세상적인 지식이 전문가들에 비하여 부족하다 해도, 하나님 앞에서 세상 것을 전혀 더하지 않아도 하나님이 기뻐하심을 믿는 믿음으로 성도를 사랑하는 그것으로 그를 그리스도와 같이 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듯 오늘을 사는 우리도 사람에게 뭔가 더해져서, 신학을 해야 목사고, 방언을 해야 성령 받았고, 금식을 해야 신앙이 좋고, 성경을 수십 번 읽어야 그리스도를 잘 안다고 여기는 그 소유와 행위의 신앙을 버리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과 같이, 때로 부인하고 싶은 인생을 사는 초라해 보일지 모르는 인간 그 본연의 모습만으로도, 그리스도의 성품을 좇아 살 수 있다는 것을 믿음으로 신앙 안에서의 형제들을 서로 주로 받아 가는 삶을 살아야 함을 골로새서를 통해서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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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로새서) 1:6-8 중재자 에바브라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골로새서 Date : 2013. 1. 22. 11:59 Writer : 김홍덕

바울 사도가 골로새 교회에 편지를 하는 목적은 골로새 교회에 들어온 철학과 과학과 같은 세상적인 가치관이 복음과 혼합되고 심지어 복음보다 귀하게 여기는 현상에 대하여 경계하기 위함이다. 이는 에바브라가 바울을 찾아와서 전한 교회에 대한 소식을 들은 바울 사도가 그러한 것이 교회에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기에 이를 교훈하기 위하여 쓴 옥중 서신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 있어 두 가지 큰 오류가 있는데 그 하나는 영지주의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율법주의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내용이라 할 수 있는 사람의 존재 목적인 하나님의 의와 그것을 표현하는 사람의 삶이라는 형식이 하나가 되어야 하는데, 그 중에 하나를 버리거나 경시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영지주의에 관해서는 요한일서나 유다서와 같은 말씀을 통해서 교훈을 하고 있고, 율법주의에 관해서는 로마서나 야고보서와 같은 성경 등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고 계신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이단적인 사상들은 대게의 경우 다른 것과 결합이 된다.


영지주의는 사람의 육신을 부인하거나 폄하함으로 예수께서 육신으로 오신 것을 부인하는 생각들(요일 4:3)이 천사숭배 사상과 같이 다른 영을 숭배하는 것과 타협을 하는 반면, 당시 유럽과 아시아의 인접한 지역을 중심으로 문명이 발달하면서 철학과 과학의 발전으로 인한 세상적인 지식(골 2:8)은 본질이 아닌 형식의 일종이기에 신앙의 형식만 강조하는 율법주의적인 신앙과 타협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유대인이 숭배하는 형식이 율법이라면 이방인은 철학과 과학이라는 형식을 숭배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자신이 전한 복음 외에 다른 가치관이 교회에 혼합되거나 복음이 아닌 지식이 많음에 따라 교회에서의 권위가 바뀌는 것을 경계했고, 요한 사도는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오심을 부인하는 것을 심히 경계했다.


이러한 신앙의 타협에 관하여 잘 알 수 있는 성경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변화하신 산 위의 사건(마 17장)이다. 예수님께서 산에서 변화하셨을 때, 엘리야와 모세가 나타나자 베드로는 “주여 여기가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고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마 17:4)”라 했다. 


이 사건 속 베드로의 마음에는 <예수님 + 모세 + 엘리야>가 되면 더 좋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때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되 

이는 내 사랑하는 자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어라(마 17:5)

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이 사건은 바로 엘리야도 모세도 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므로 그리스도의 말씀만 들으면 된다는 말씀인 것이다.


엘리야 - 불의 선지자, 기적과 능력의 선지자

모세   - 물에서 건진 자며 물을 건너고 물에 관한 실수한 물의 선지자며 율법을 받은 지도자


또 예수님께서 변화산에 계실 때에 산 아래에서는 귀신들린 아이를 나머지 제자들에게 데려와서 고쳐달라고 할 때 그 부모가 말하기를 아이가 간질로 불에도 넘어지고 물에도 넘어지나이다 하나 제자들이 고치지 못하였는데, 예수님께서 내려오셔서 아이를 고치지 못함으로 

이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마 17:17)

라고 꾸짖으시고 그 아이를 고쳐주시고 이르시기를 겨자씨만한 믿음만 있으면 산을 옮길 것이라 하셨다.


아이가 불에도 넘어지고 물에도 넘어지는 것은 엘리야(불, 기적)로도 안 되고, 모세(물, 율법)로도 안 된다는 것이다. 또한 예수님 외에 추가로 내 마음 안에 장막을 지어 모세와 엘리야를 둘 이유도 없다는 것을 말씀하심이다.


이 변화산 사건이 주는 교훈은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가장 핵심적인 것이 있다면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는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뜻으로 더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인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가장 완전한 하나님의 뜻이고 기뻐하시는 것이지 그것에는 심지어 모세나 엘리야라 해도 예수님과 더해야 할 것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골로새 교회의 상황은 바울 사도가 전하여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열매 맺는 중에 교회 안에 어떤 세상의 지식과 철학이 들어와서 그것에 능한 이를 더 칭송하고 바울 사도가 전한 복음에 이러한 지식을 더하여 더 조직적이고 체계적이길 원하는 사상들이 복음을 오염시키려 하는 사람들이 있기에 바울 사도가 이를 경계하기 위한 편지를 보내어 이를 경계하려 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전한 복음, 세상의 철학과 과학과 결합되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만 구원을 얻는 그 복음으로 골로새 교회를 개척한 에바브라가 너희를 위한 신실한 일꾼이며, 그가 전하는 말씀이 온전한 것이지 세상적인 지식과 철학을 가지거나 그것을 복음에 더하려고 하는 자가 너희를 위하는 자가 아님을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초대교회 시절, 그리고 바울 사도가 염려한 그 염려가 지금 시대에도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일례로 교회에 좋은 파이프 오르간이 있으면 하나님께 더 영광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나, 교회가 더 화려하고 좋게 지어지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여기는 생각들과 같은 것이다. 그리고 개인으로 보면 세상에서 성공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하는 생각 역시 세상의 것과 신앙이 결합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바울 사도는 골로새 교회의 형제들에게 에바브라가 자신과 함께 종이 되었고, 너희 안에 맺은 열매가 에바브라에게 배워서 그런 것이지, 세상에 속한 학문에 배워서 그런 것이 아님을 이야기하며 에바브라가 바울 사도가 가진 복음을 너희에게 전한 일꾼이며, 바울 사도가 가진 복음을 전한 중재자임을 보증하며 편지를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마치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예수 그리스도가 중재자이시듯, 바울과 골로새 교회의 신실한 형제들 사이에 에바브라가 중재임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에바브라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바울을 인정하지 않는 것과 같음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며, 그것은 또한 하나님의 뜻으로 사도된 바울에게 주신 그리스도의 복음을 부인하는 것임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인데, 육신으로 오신 그리스도는 참 보잘 것 없는 그런 사람이었다. 이름 ‘예수’는 그 당시 흔하고 흔한 이름이었고, 신분은 목수의 아들이었고, 흠모할 만한 것이 없는 그런 모습(사 53:2-3)이었을 뿐 아니라 심지어 당시 최고의 형벌인 십자가형을 받은 최고의 죄인이셨다.


그렇게 육신을 가지신 분이 그리스도로 오심은 우리의 모습이 비록 연약하여도 우리도 하나님의 아들로 그리고 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기 위한 것이었고, 그것을 보는 사람이 육신을 가진 자신도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과 운명을 같이 하는 존재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을 믿는 것이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보고 자신도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은혜를 입은 또 다른 사람, 그러나 예수님과 또 모든 사람과 같이 육신을 가진 동일한 인생이나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은혜를 입은 사람, 그 사람을 보고 누군가가 또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은혜를 입게 된다면 그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의 삶을 사는 것이다.


즉, 예수님을 만나서 사도가 된 바울, 그리고 그 바울로 인하여 복음을 듣고 믿는 에바브라는 골로새 교회에 있어 예수님을 대신하고 바울을 대신하는 신실한 하나님의 종이요 사도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복음이지 세상적인 철학과 과학이 결합된 사상으로 돋보이는 사람이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중요한 신앙의 사건이다. 철학이나 과학을 복음과 결합시키는 것이 신앙의 변질이라는 것도 매우 중요한 것이고, 또한 그리스도의 복음은 그런 변질이 없이 십자가의 도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뜻, 사람의 존재 목적을 깨닫고 그것만을 전하는 사람이 또한 그리스도(a christ)라는 것을 바울이 에바브라를 보증함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것이 바로 사람을 그리스도로 받는 신앙의 모습이다. '사람을 어떻게 그리스도로 받을 수 있느냐?' 한다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받을 수 없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 법의 표준이요 첫 열매가 되시는 장자이신 것이고, 그분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삶을 사는 사람 역시 그리스도(a christ)의 삶을 살기에 사람을 그리스도로 받을 수 없다면 그것은 예수님이 육신으로 오심을 인정하지 않음과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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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로새서) 1:3-5 하늘에 쌓아둔 소망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골로새서 Date : 2013. 1. 22. 09:19 Writer : 김홍덕



<하늘 소망>, 우리의 소망이 땅에 있지 않고 하늘에 있다는 것을 노래하는 찬양이 있다. 가사도 좋고 리듬도 좋아 참 좋아하는 찬양의 하나이다. 이 찬양의 가사처럼 우리의 소망은 땅에 있지 않고 하늘에 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사는 사람들에게 있어 땅과 하늘은 공간에 국한된 개념만은 아니다.


땅이야 당연히 밟고 다니는 땅도 있겠고, 하늘도 머리 위에 하늘이 있지만, 하늘과 땅의 관계는, 하늘이 변하면 땅에 속한 모든 것이 다 변한 하늘에 맞추어 진다는 것이다. 하늘에서 비가 오면 땅은 거저 젖고 또한 땅에 거하는 모든 것도 비가 오는 하늘에 맞추어 숨던지 아니면 우산을 들고서 다니든지 해야 하듯 성경이 말씀하는 하늘과 땅은 하늘은 뜻을 가지고 있고, 땅은 그것에 순종하는 관계를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뜻을 정하시면 사람이 그 안에서 모든 것을 순종하며 살아야 하는 관계를 말씀하는 것이다. 아니 어쩌면 그것을 표현하시기 위하여 하늘과 땅을 그렇게 만드신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하늘은 내 머리 위에 있는 우주 공간이 아니라, 나의 모든 삶의 형태와 모양과 방법 그리고 무엇보다 목적과 의를 가지 곳이 바로 <하늘>이다. 반면에 땅은 흙으로 만들어진 사람, 하늘의 뜻 곧 하나님의 의와 뜻이 수용되어야 하는 사람을 말씀하는 것이다.


바울 사도는 골로새에 있는 신실한 형제들이 소망을 하늘에 쌓아 두었음을 감사하고 있다. 하늘이던 그 어디든 그 정체성과 맞지 않는 것을 수용하거나 쌓아두는 법은 없다. 즉 하늘에는 하늘에 합당한 것만 쌓아 둘 수 있다. 모든 뜻과 의를 가진 하늘은 하나님이시니 하나님의 성품에 합당하지 않는 것은 어느 것도 쌓아둘 수 없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가 골로새의 형제들을 위하여 하늘에 소망을 쌓아 두었다고 하는 것은 하늘에 합당한 소망, 즉 바울 사도가 이 편지를 시작하면서 내내 일관되게 증거하고 감사하고 있는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며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우리에게도 아버지가 되시는 그 하나님의 뜻에 합하는 그 소망을 마음에 두었음을 감사하는 것이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하늘에 소망을 쌓으려 한다. 불교에서는 공력이라고 하는 것이나 교회에서 천국의 상급이라고 하는 소망들이라는 것이 알고 보면 죽고 난 다음의 자신의 내세와 혹은 다음 생에서의 풍요를 위함일 뿐, 하늘이신 하나님의 성품에 맞는 것을 소망하여 쌓아두는 것이 아닌 경우가 많다.


사람들의 소망이 그런 것인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천국을 생각할 때 마치 이 땅의 구조와 방식과 같다고 생각하는 경향 탓이다. 그런 생각은 물질적 풍요가 삶의 질이 다를 것을 기대하면서 이 땅에서는 좀 어렵게 살더라도 천국에서의 삶을 위하여 먹을 것 아껴가며 헌금하면 하나님께서 그것을 기억하시고 천국에서 많은 상급으로 갚아 주실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그런 모든 가르침과 소망은 하늘 소망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은 땅에 속한 생각일 뿐이다. 왜냐하면 육신의 모든 소유와 공력은 다 하늘이 변함에 따라 땅이 표현하는 하늘의 성품인 것처럼, 그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기 위한 땅에 속한 표현 양식일 뿐이기 때문이다.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 하늘로서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나니(요 3:31)


땅에서 난 것은 하늘에서 온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사람은 흙에서 왔으므로 땅에서 나왔으며, 또 그 사람이 육신의 소유와 성공에 소망을 두고 사랑하는 것들은 다 땅에서 온 것이다. 이러한 소망이 존재의 신이시며 우리와 아버지와 아들로 만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처소인 하늘과는 다른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것은 하늘에 쌓아둘 방법이 없다.


누구든지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요일 2:15,16)


골로새의 신실한 형제들을 위하여 바울 사도가 하늘에 쌓아둔 소망은 이런 것이 아님을 바울 사도가 감사하고 있다. 바울 사도는 이 소망이 복음 진리의 말씀을 들음으로 비롯되었다고 했다. 이 복음 안에 있는 소망이라는 것은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생각하는 소망과는 조금은 다른 면이 있다.


그것은 이 소망은 생명에 관한 것인데 그것이 생명에 관한 것인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두신 뜻이 있는 사람의 삶을 생명이 있는 사람으로 보시는 하나님의 법 때문이다. 즉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 생명이 있는 소망이라는 것이다.


이 생명이 있는 소망이라는 것은 지금은 없지만 나중에는 생기리라 생각하는 것과 다르다. 왜냐하면 생명의 소망이라는 것은 사과나무를 심고 사과를 소망하는 것처럼 원인과 결과가 생명의 법 안에서 분명한 관계가 있는 소망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이 하늘에 적합하고 하늘의 뜻과 같아서 그 하늘의 뜻이 사람에게 신실한 성도들에게 이루어지는 소망, 확률적으로 본다 해도 사과나무에서 복숭아가 아닌 사과가 열리는 것과 같은 100%의 확률처럼 골로새 교회의 신실한 성도들이 하나님의 생명 안에서 좋은 열매가 될 것이라는 소망이 있고, 그것은 하늘의 뜻과 같기에 하늘에 쌓아 두는 것이라고 사도 바울이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즉, 복음은 땅에 속한 육신의 부유함과 성공에 관한 것이 아니라 하늘에 쌓아 두기에 합당하며 하나님의 의와 하나가 되는 소망 곧 하나님의 뜻으로부터 오는 은혜와 평강에 관한 것이며, 존재의 신이시며 우리에게 아버지로 만나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 것, 곧 진리의 말씀을 들음으로 소망하게 되는 것임을 바울 사도는 감사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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