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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의 의미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주기도문 Date : 2013. 2. 18. 11:04 Writer : 김홍덕

주기도문에는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이 없다. 하지만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요 14:14)’ 라고 예수님께서 기도에 대하여 가르치신 부분이 있고, 이를 모든 한국 교회에서 기도의 형식으로 채택해서 기도의 마지막에는 꼭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이라는 말을 넣고 있다. 그렇게 기도를 구성하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에 대하여 글을 쓰면서 그것에 대하여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여겨서 이 내용까지 이번 책에 포함해서 이야기하려 한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이름으로 기도하라고 하시는 것은 기도의 내용이 무엇이든 마지막에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하면 그것을 들어주신다는 것이 아니다. 요한복음 14장 13절에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무엇이든 시행하신다는 데는 어떤 세계가 있다는 것을 말씀하신다. 이르시기를 “너희가 또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14:13)” 하셨다. 즉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했을 때 들어주시는 이유는, 아버지가 아들로 인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하심이라고 분명히 하셨다.

 

영광의 원어는 Doxa라는 말이라고 한다. 이는 ‘표현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즉 아버지께서 아들로 인하여 영광을 받으신다는 것은, 아들이 아버지의 본성을 표현하게 되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들어주신다는 것은 밥 달라, 돈 달라, 이성을 달라 하는 것을 들어주신다는 말씀이 아니다. 이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아들로 살게 되는 것에 관한 모든 것을 시행하시겠다는 말씀이시다. 그런데 큰교회에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가난도 해결되고, 병도 낫고, 아들도 좋은 대학 갈 것이라고 가르친다. 정말 그래도 되는지 모르겠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셨다. 그러므로 사람의 육신에게 어떤 것이 필요한지는 다 아신다.(마 6:33~34) 하나님을 전지전능한 하나님으로 믿는다면서 하나님께서 당신이 만드신 사람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도 준비안하셨다고 믿는 것은 참 믿음이 없는 것이다. 세상 살면서 육신의 삶에 필요한 이것저것을 기도해서 얻으려 한다는 것은, “하나님! 당신께서 저를 세상에 보내시면서 준비를 덜 하셨군요. 그래서 지금 이런 저런 것이 필요하니 좀 보내주셔야겠습니다. 당신은 모든 것을 다 가지고 계시니 그렇게 해 주실 줄 믿습니다.”라고 AS를 요청하는 꼴이다. 그러면서 마치 그래야하는 것을 명시한 계약서를 내밀 듯이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육신의 필요에 관하여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기도라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을 불신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때에 따라 육신에 관한 일을 주관하셔서, 때로는 부유하게도 하시고, 때로는 궁핍하게도 하신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는 것은 다 이유가 있으시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두신 목적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표현하라는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한다는 것은 모든 사람의 목적이고, 사람들이 그렇게 하기 전까지는 하나님께 진 빚이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사람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인 것이다. 예수님께서 육신을 가지고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고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심으로 아들이 되신 것이 우리가 살아가야 하는 목적이다. 그래서 그것을 위하여, 사람이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아들이 되기를 구하는 것과, 그렇게 살기 위하여 필요한 은혜를 구하는 것에 관하여 기도하면 다 들어 주시겠다고 하신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것을 구하는 것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이다. 이름이라는 것이 바로 정체성이기 때문이다. 즉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정체성을 구하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 안에서 그 세계에 필요하고, 그 세계가 목적으로 하는 것을 구하는 것이 바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이다. 사람의 육신의 어떠함에 관하여 우리가 때로 기도해야 한다면, 그것은 그 목적에 관하여, 그것을 이루기 위하여 필요한 것에 관하여 구함이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 안에 있으므로 우리는 결과에 대하여 늘 순종하여야 한다. 부흥강사들이 말하듯 떼쓰면 안 된다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것은 소유와 공로를 표현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 앞에 내가 어떤 일을 감당 했습니다 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여기는 것은 잘못알고 있는 것이다. 큰 상을 받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여기는 것은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다. 그건 받으면 감사한 일이다. 하지만 그래야만 하나님께서 더 영광을 받으신다고 한다면, 상을 받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복음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어차피 상은 1등에게만 주는 것이 아닌가? 그럼 그 한명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하는, 그러니까 하나님을 표현하지 못하는 것이 되니 그것은 만민을 위한 복음이 아닌 것이다. 만약 복음이 그런 것이라면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로 가신 것이 아니라 로마 황제가 되었어야 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표현한다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표현하신 하나님, 즉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되신 자리는 십자가의 자리이다. 이 십자가가 어떤 자리인가? 죄인의 자리이고 발가벗겨지고 손과 발에 못 박히고 머리에 가시관을 쓰신 자리가 아닌가? 그것이 무슨 의미인가? 우리가 다 하나님 앞에 빚진 죄인이라는 말씀이고, 벗겨졌다는 것은 우리가 살면서 가지는 그 어떤 겉옷, 즉 신분도 나를 구원할 수 없으니 다 벗겨진 자리요, 손과 발이 못 박혀서 묶임은 우리의 손과 발의 모든 공로와 육신의 모든 행위로 구원 받을 수 없는 자리요, 머리에 쓴 가시관은 우리의 생각이 우리를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줄 수밖에 없는 모습과 자리, 그 자리가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자리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표현하는 자리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표현한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존재로 사는 빚을 진 자입니다 고백하는 것이요, 우리의 육신의 어떤 것으로도 우리가 우리를 구원하여 하나님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라고 고백하는 자리, 그리고 그것인 인생의 운명이요 목적이요 정체성이라는 고백하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표현한다는 것이요,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자리라는 것이다. 바로 그 자리, 그 안에서 구하는 것이 바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는 것이요, 그것을 구할 때에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들어주신다는 말씀이 바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들어주신다는 말씀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의 본성상 들어주시지 않을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것을 육신의 필요를 구할 때 그렇게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하신 보증서처럼 여겨서 아무 때나 사용하고 있는 것은 <기도>가 무엇인지를 모르는 것이며, 주님이 기도를 가르치신 목적도 모르는 것이며, 주기도문이 무엇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생각의 세계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세계에 있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정한 자리를 떠난 것, 곧 죄(하말티아 : 과녁을 벗어난 자리)의의 자리이며, 그 안에서 어떤 것을 해도 하면 할수록 다 죄가 되는 것이다. 그것이 설사 하나님의 이름으로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준다 해도 말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정체성에 관하여 기도한다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 곧 소유와 공로의 세계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나는 어떤 존재인가를 고백하는 세계 안에서 구하는 모든 것을 주시겠다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피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드신 목적이기 때문이다. 형광등이 조명을 밝히기 위하여 주인에게 요구하는 모든 것은 다 들어주는 것과 같은 이치 아니겠는가? 그것이 기도고 그것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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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도문) 기도한다는 것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주기도문 Date : 2013. 2. 12. 17:14 Writer : 김홍덕

몇 번의 포스트를 통해 <주기도문>에 대하여 이야기 해 보았다. 주기도문은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라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렇지만 성경에 예수님께서 기도에 대하여 주기도문만 말씀하신 것은 아니다. 굳이 꼭 ‘기도’라는 표현이 아니더라도 ‘구하라 주실 것이요’와 같은 말씀들도 있고, 요한복음 17장에는 예수님의 기도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그렇게 성경에 많이 기록되어 있고, 신앙 생활에 있어 정말 중요한 기도라는 것은 도무지 어떤 것인가를 이야기 함으로 주기도문에 대한 포스팅을 마무리할까 한다.

 

먼저 마태복음 7장에 나오는 “구하라 주실 것이요, 찾으라 찾을 것이요, 두드리라 열릴 것이라’하시는 말씀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데, 무엇을 구하고 찾으면 어떤 문을 두드릴 것인지는 말씀하지 않으셨다. 그렇다 보니 사람들은 뭐든지 자기가 필요한 것을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으로 알지만 사실 그것은 아니다. 육신이 먹고 사는 것에 관해서는 이미 세상에 수많은 농산물에서 비롯된 경제활동에 참여하면 먹고 사는 것은 해결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이미 세상을 만들어 놓으셨다.

 

그러므로 그런 것은 기도할 대상이라고 보기 어렵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원하시는 바가 무엇인가? 하는 그것이다. 사람들이 세상에서 도덕 윤리적으로나 종교적으로 모범적으로 살기 위하여 육신이 살아가며 필요한 것들을 얻기 위해 기도하고 신앙생활 하는 것이 정말 우리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할 모든 것인가? 아니면 그것에 더해서 그런 식으로 예수 믿는 사람을 늘이기 위하여 전도하고, 기독교인으로서 세상적 성공을 보여줌으로 육신의 삶의 평안을 갈망하는 세상사람들에게 하나님이 그렇게 해 주셨다고 전도하여 영광을 돌리는 것인가? 정말 그게 신앙의 전부고 기도할 제목이라고 여기는가?

 

사람들이 기도하면서부터 세계 평화를 위해 기도했지만, 이 지구상에서 전쟁이 없었던 날은 하루도 없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 기도는 도무지 안 들으시는 하나님이신가? 이게 이쯤 되면 하나님께서 무엇을 기도하라고 하시는지 새롭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과연 재화와 용역, 혹은 물리적인 세상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존재하시는 분이신가? 그렇다면 그 모든 것을 일일이 다 들어 주셨다 치자. 근데 죽고 나면 아무 소용 없는 것 아닌가? 그런데 그것을 매번 기도하고 얻고 한들 지속적인 의미가 있겠는가 말이다.

 

우스개 소리로 선교사가 아프리카 선교 활동 중에 식인종을 만나게 되어 “우리를 악에서 구원하소서” 기도했더니, 식인종은 “일용할 양식을 주셔서 감사합니다”했다고 한다. 과연 주기도문이 그렇게 쓰이는 것인가 말이다. 안 그렇겠지 싶겠지만, ‘사업 잘되게 해 주십시오’, ‘좋은 배우자 만나게 해 주십시오’, ‘시험 합격하게 해 주십시오’ 하는 모든 것이 다 그것인 것이다. 그리고 큰교회들이 수능 당일에 시험 시간표에 맞추어 기도하기도 하는데, 그게 얼마나 넌센스인가? 대구 팔공산 갓바위에도 그날은 그렇게 기도한다. 그리고 그건 같은 짓이다. 교회에서 기도한다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라 생각하겠지만, 하나님을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신으로 규정하는 것이므로, 그런 기도를 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정체성을 농락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구하라고 하신 것은 육신의 삶을 영위하는 것에 필요한 보이는 것에 관한 것이 아니다. 구하라 하심은 예수님 자신을 구하라고 하신 것이다. 찾으라고 한 것은 예수님의 정체성을 찾으라는 것이며, 두드리라는 것은 양의 문(요 10장)되시는 예수님을 두드리라는 것이다. 그래서 가르치신 기도가 바로 주기도문인 것이다. 그러므로 주기도문의 모든 내용은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의 의와 목적에 합일된 사람이 되기를 간구하는 것이지, 육신의 어떠함에 대한 간구가 아니다. 육신의 어떠함은 주시는 대로 받고 순종하고 감사히 받고 살아가는 문제이지, 그것을 해결해가는 것이 인생의 숙제가 아니다. 다해도 결국 죽으니 못한 꼴이 되는 것이니까 말이다.

 

주기도문의 내용은 구구절절이 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어떤 존재로 발견되어야 하는지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그것을 기도하라고 하신 것이다. 하늘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하나님의 목적이 사람에게 이루어지는 것이며, 시험이라 함은 우리가 율법을 행할 수 있어야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 여기는 것과 육신의 연약함을 이기는 것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여기는 것과, 보이는 것이 실상이라고 여기게 되는 시험을 이기게 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이렇게 연약하고 맘대로 못하는 육신을 만드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하신 그 마음을 좇아 이 육신으로 사는 삶을 감사히 받고, 이 연약함으로 인해 서로 사랑하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심이며, 우리가 연약하고 세상의 도덕과 윤리 기준으로 볼 때 한없이 부족한 사람이 하나님을 대신할 수 없다고 여기는 악에서 구원하시기를 기도하라고 하신 것이다.

 

그러한 모든 간구는 우리 인생들이 하나님을 신앙하고 믿는 것이 무엇을 행함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거나, 하나님께 무엇을 드림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라, 주신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삶, 즉 사람은 연약하고, 육신으로 세상의 모든 법과 윤리를 지킬 수도 없고, 죽지 않을 수도 없으며, 돌로 떡을 만들듯 하나님의 율법을 행함으로 지킬 수 없는 존재라는 고백으로 비롯되어 서로가 서로를 사랑함으로 하나님의 성품이신 사랑이 나타내는 것을 간구해야 하는 것이다.

 

생각해보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드셨으니 우리의 행동도 다 그의 생각 안에 있는 것이니, 그것이 얼마나 기쁘게 할 수 있으며, 세상을 만드신 하나님께 세상에서 얻은 먼지만도 작은 재물을 드림이 얼마나 기쁘시겠는가?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만들어진 것에 자꾸 무엇을 더하고, 더 행하려 하고, 더 가지려 하는 것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아무 것도 아닌 그저 죄인이라는 고백만 있으면 되는 것이지, 그것에 더해서 뭘 행하고 드리고 할 이유가 전혀 없으니 그런 것을 구하는 기도는 다 중언부언에 속하는 것이며, 육신의 삶이라는 형식에 관한 기도요 외식하는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기도한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존재가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바라시는 것은 예수님과 같이 그리스도로서 살아가는 것이다. 그리스도로 살아간다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로 사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와 변화산에서 예수님을 칭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하셨다. 즉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은 무엇을 행함이나 드림이 아니라, 아들이 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다.

 

아들은 생명으로 낳아지는 세계의 것이다. 하나님께서 생물학적으로 아들을 낳으신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생명이라는 말씀이시다. 또한 아들은 아버지의 모든 본성과 의가 육신으로 나타난 것이다. 모든 인간들의 자녀가 그렇지 않은가? 그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이요 의가 육신이 되는 것이 바로 아들이요 그리스도이다. 그러므로 모든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사는 것, 즉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존재로서 하나님의 성품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소유와 행함에 관하여 그 성품을 나타내지 않으신다. 그런 모든 것이 다 벗겨진 상태가 바로 십자가 위에 달리신 예수님이시다. 가시관은 우리의 생각이, 벗기심은 우리의 신분이, 못 박히심은 우리의 행동이 우리를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신 곳이 바로 십자가다. 그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이지, 더 화려해지는 교회나, 기독교인으로서 세상에 성공하는 사람이 그리스도 곧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구하는 것, 그것이 바로 기도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행함과 소유에 대한 의를 버리기를 간구하고, 오직 연약한 모습 이대로를 하나님께 감사히 받아 그것을 기쁨으로 살아가는 삶이 되기를 간구하는 것이 되어야지, 밥 달라, 돈 달라, 여자 달라 기도하는 것이 기도가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간구는 우리의 삶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과 같은 모습, 실로 하나님의 아들인 그 모습으로 인생을 살아가기를 간구하는 것이 되어야 할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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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크기가 중요한가?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교회 Date : 2013. 2. 12. 14:56 Writer : 김홍덕

블로그를 운영하면서 포스팅을 하기 위해 인터넷을 검색하기도 하는데, 얼마 전에  교회의 크기에 대하여 논한 사이트를 보았다. 그곳의 주제는 큰교회를 비난하는 것에 대하여, ‘그럼 교회는 작아야 하는가?’하는 관점에서 글을 써 놓은 것을 보았다. 그 문장 자체는 훌륭한 반문이다 싶다. 하지만, 교회의 크기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크기를 보는 관점이 문제인 것이다.

 

나는 이 블로그를 통해 큰교회를 비판하고 있다. 내가 말하는 <큰교회>는 교인수가 많고 규모가 큰교회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그들이 포함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지금 말하고 있는 ‘큰교회’는 교회의 규모가 커지는 것에 ‘의’를 두고 있는 모든 교회들을 말하는 것이다. <의>를 두고 있다는 것은, 교회가 커지는 것이 어느 작은 측면 하나에서라도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하면 그것에 의를 두고 있는 것이다.

 

교회의 규모가 크거나 작거나 한 것은 아무런 문제가 아니다. 교회가 생각하는 발전이라는 방향이, 생명공동체로 가려는 것이 아니라, 같은 값이라면, 혹은 기왕이면 더 많은 사람이 모이고,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고, 더 좋은 악기로 찬양하고, 더 좋은 영상시스템 가운데 예배 드리면 좋지 않겠나 하는 그 어떤 생각 중 하나 라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이미 큰교회이다.

 

그리고 이 블로그는 그런 큰교회를 비판하는 것 그 자체에 목적을 두고 있는 것은 아니다. <교회>라는 공동체는 사람을 구원하고,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이 창조하신 목적대로 하나님의 품성을 표현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명공동체가 되어야 하는 것이기에 교회의 규모에 관계 없이 그런 교회가 하나라도 더 되어주기를 기대하면서 먼 우주에 생명체가 있을지도 몰라 전파를 보내듯 포스팅을 하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고향에서 중형 정도의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시작했고, 가정적으로는 필자가 4대째, 아들들이 5대째 교회에 다니고 있는 집안이며, 지금은 100년 넘은 기독교 학교 내에 있는 학교 교회에 출석하고 있으면서, 지금 몸담고 있는 교회가 지금 말하고 있는 큰교회와는 다르게 살아가고 있기에 이런 즐거움을 더 많은 사람이 누렸으면 하는 바람으로 큰교회라는 대립각을 두고서 소유와 공로를 좇아가며 진정한 교회의 모습을 잃어버리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맘으로 이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다.

 

교회는, 크기는 어떠해도 상관없다. 예배당 건물도 어떠해도 상관없다. 성가대가 노래를 못해도 상관없고, 교회에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이 한 명도 없어도 상관없다. 교회에는 목사나 당회가 없어도 상관없다. 성경 어디에 그런 것이 있어야 교회라고 되어 있는가? 심지어 목사라는 단어는 성경에 한번 밖에 나오지 않는다. 목사가 교회의 당회장이 된 것은 교단의 헌법에 입각한 것이지 성경적인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그런 모든 것은 사람을 구원하는 조건으로서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

 

교회는 사람을 구원하는 곳이어야 한다. 교회 안에 있으면, 자신이 하나님의 목적 아래 있다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과,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과, 자신이 구원 받았다는 것과, 세상의 판사 앞에서는 몰라도 하나님의 안목 아래에서 보면 전혀 죄가 없다는 것을 아무리 부인하려고 해도 부인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하는 곳, 그곳이 바로 교회인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사람들이 모임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되는 곳, 그곳이 바로 교회인 것이다.

 

하나님의 교회가, 다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신 교회 안에 있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죄가 있어서 되겠는가? 물론 교통법규와 같은 세상의 법 아래서야 얼마든지 죄인 될 수 있다. 예수님도 그러셨으니 말이다. 하지만 교회 안에서 그 법으로 사람이 죄인이 된다면 그것 교회가 아니라, 세속에 물던 타락한 종교단체일 뿐이다. 큰교회를 꿈꾸는 모든 교회가 그렇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큰교회를 꿈꾼다는 것은, 그 마음 안에 소유와 공로가 선함의 기준이 되기에 그 기준으로 큰교회가 죄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교회의 형식은 어떠해도 상관없다. 크던 작던, 화려하던 초라하던, 부자교회던 미자립 교회던 아무런 상관없다. 그 모든 것은 형식이기 때문이다. 본질이 충만하면 된다.이건 흑묘백묘론 같은 이야기가 아니다. 생명의 세계는 이면 이고 아니면 아닌 것 뿐이다. 개면 개지 생긴 것은 갠데 ‘야옹’한다는 것은 없는 것이듯, 생명 공동체인 교회도 그 안에 구원의 역사가 있으면 교회고, 안에 속한 사람이 자신을 볼 때 ‘죄 없다’할 수 없다면, 교회가 아닌 것이다. 왜냐하면 그 죄책감은 세상에서 온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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