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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죽음 가운에서 먼저 나신 자라고 바울 사도는 전하고 있다. 먼저 나셨다는 것은 당연히 먼저 죽으셨기에 가능한 것이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이 죽은 이유는 죄인이었기 때문이다. 특히나 그 죄인 된 죄목은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고 유대인의 왕이라 하셨기 때문이다. 


그렇게 죄를 줄 수 있는 근거는 바로 당시의 율법과 세상을 상징하는 로마의 법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예수님께서 먼저 죽으셨다는 것은 또 어떤 이들이 그렇게 죽을 것이기 때문에 먼저 죽으셨다 하신 것이다.


예수님과 같이 죽을 사람이 또 있었기에 먼저 죽으셨는데, 그렇다면 그렇게 죽은 사람은 누구인가? 십자가를 거꾸로 진 베드로 외에 우리가 예수 믿는다는 이유로 십자가에 죽은 사람을 기억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므로 형식적인 면에서 볼 때 십자가에서 죽을 사람이 더 있다는 말씀은 아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과 같은 이유에서 죽을 사람이 있다는 의미이고, 그 중에서 예수님께서 처음이라는 말씀이신 것이다.


죽었다는 것은 비단 목숨이 끊어진 것만 죽었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시계가 시간을 알려주지 못하면 죽었다고 하듯이 어떤 목적 안에서 볼 때 그 기능을 다하지 못하면 죽었다고 하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그 창조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을 때도 죽었다고 하셨다. 


그와 같이 유대인들과 로마인들의 법으로 볼 때 예수님은 자신들이 추구하는 목적으로 볼 때 죽어야 하는 죄인, 즉 그 목적에 맞지 않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죽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먼저 죽으심은 또 그렇게 죽어야 할 사람들이 있다는 말씀인 것이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이나 로마인들이 볼 때, 즉 종교적인 형식을 준수하는 면이나, 세상적인인 성공에 대한 가치관이 가진 목적으로 볼 때는 시계가 멈춘 것과 같이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이기에 죽인 것이다. 마치 고장 난 시계를 버리듯이 말이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예수님과 같이 죽고 또 그분과 함께 살려고 한다면 먼저 죽어야 할 것이고, 그 죽는 이유가 예수님이 먼저 되셨다고 보증할 수 있게 같은 이유로 죽은 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과 같이 살아간다는 것은 종교적인 형식의 준수와 세상적인인 성공이라는 가치로 볼 때 우리 자신이 죽은 자라는 것을 깨달으면 예수님과 같이 죽는 것이 되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보고 나의 모습을 발견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의 모든 종교는 세상적인인 목적으로 볼 때 자신이 죽은 자로 발견되려 하는 것에 있지 않고, 오히려 종교의 힘을 빌려 세상적인으로 성공하고 평안을 얻으려 하고 있고, 이것에 대하여 기독교도 아니라 할 수 없는 입장이다. 우리가 정말 예수를 믿으려 한다면, 그런 세상적인인 가치관은 그냥 살아가는 한 방법과 수단에 그쳐야지 예수님을 믿어 세상에서 성공하는 사람이 되고, 그 성공을 하나님께 영광으로 돌리려 하는 것이 예수님을 잘 믿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나신 분이 되셨다는 것은, 예수님과 같이 죽은 자는 또한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께서 살리실 것인데, 그것이 구원이고 부활인 것이다. 비록 죽는 이유가 세상적인인 실패자로 발견되었기 때문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자신을 발견한 사람을 오히려 의로 여기셔서 살리시는 분이신 것이다. 그래서 건축자의 버린 돌을 모퉁이 돌이 되게 하셨다(행 4:11, 벧전 2:7)고 하신 것이다.


우리가 세상에서 성공을 외면할 이유는 없다. 또 그래서는 안 된다. 하지만 그것이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이 목적인 사람은 신앙도 수단이 되고, 무엇보다 그것에 실패하면 인생을 실패했다 여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성공하라고 우리를 보내신 것이 아니다. 그럴 거면 죽지 않게 하셨어야 할 것이다. 세상에 있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수단으로 알고 살아가면 된다. 하지만 그것이 목적이 되면 로마인과 유대인들처럼 성공하지 못하면 심판을 하게 되고, 그렇게 십자가에 매달게 되는 것이다. 적어도 그렇게는 되지 않아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예수님의 죽으심과 같은 이유가 내 안에 있다는 것을 고백할 수 있게 발견된다는 것은 곧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신 목적이 성공에 있지 않고, 하나님을 표현하는 것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첫걸음인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들을 예수님을 먼저 살리셨듯 살리실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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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것이 된다고 하는 것은, 이 세상의 모든 구성이 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있다는 것임을 먼저 인정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앞에서 포스팅한 것과 같이 세상에 어떤 부분은 하나님이 주관하지 못하는 영역이 있고, 이것을 마귀나 세상이 다스리므로 예수 믿는 사람들이 이곳에 빠져들지 않도록 깨어 있어야 한다고 하고, 또한 하나님께서 그러한 세계를 적으로 삼고 싸우시며 그 싸움의 대장이 예수 그리스도라 하는 것은 어쩌면 난센스다.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만드시고, 그 만드신 목적이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시기 위한 표현 양식으로 창조하셨기 때문에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다 하나님께서 표현하시고자 하는 것을 위하여 사용되는 도구이고, 표현 양식이며, 내용이신 하나님의 형식인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표현하고자 하시는 최고의 성품은 <사랑>이시니, 이를 요한 사도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일 4:8)”고 하시기도 했다. 그리고 그 최고의 성품인 사랑을 표현하기 위하여 만드신 존재가 사람이고, 이 사람 안에 하나님의 의가 있어 그 성품을 육신으로 표현하게 되는 존재를 그리스도라 하시고,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사 먼저 하나님의 로고스가 육신이 되게 하셨으니 그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의 모든 것은 비록 그것이 마귀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의가 사람 안에서 나타나는 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진 사람이 나오게 하기 위하여 사용하시는 도구들이기에, 이 세상의 모든 만물들은 탄식하며 고통당하면서 까지 고대한 것이 바로 하나님의 성품으로 사는 하나님의 아들 곧 그리스도인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그 그리스도의 처음이 되셨으니, 이것은 앞으로 오고 가는 모든 인생들에게 인생이 무엇을 위하여 살아야 하는 것인지를 몸소 보이시기 위하여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이다. 그리고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the Christ)를 보고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고 하나님 앞에 자신의 정체성을 고백하는 존재가 바로 그리스도인(a Christ)인 것이다. 


그러하기에 우리가 예수님을 볼 때에 그가 무엇을 보이고자 하셨는지를 알고 그것을 본 받아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본 받아야 하는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끌려갈 때 하늘의 천군천사가 와서 구원한 분이 아니다. 또한 빌라도와 유창한 말로 변론하여 무죄를 입증하신 분도 아니시고, 유대인들 보다 더 말씀을 행함으로 지켜내신 분은 더더욱 아니시다. 오히려 그런 것 앞에 죄인이 되시는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이다.


그런데 지금 흔히들 세상을 이기는 것에 관하여 이야기할 때, 세상 사람들보다 더 높은 자리, 더 유리한 자리에 가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상 사람들을 보란 듯이 이기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아니다 할지 모르겠지만 이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진정으로 그렇지 않다면 세상 사람들보다 더 윤리적이어야 한다고 가르치고, 더 능력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고, 또 부자가 되어서, 또 경쟁에서 이긴 자로 무대에 서서 ‘하나님께 영광을’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가르치고 있다는 것이 바로 그 증거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은 오히려 그렇게 하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기 에는 너무 초라했고, 유대인의 왕이라고 하기 에는 아무 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는 세상의 성공도, 과학이나 철학이나 재물이나 명예와 같은 그 어떤 것도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발가벗겨지신 것이다.


이 땅에 오셔서 그렇게 세상의 경쟁과 법 앞에서 죄인 되신 예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나신 분이 되셨다고 바울 사도는 말씀하고 있다. 죽은 자라고 하는 것은 육신으로 죽은 자 가운에서라는 것이 아니다. 


이는 세상의 법과 선악의 법으로 볼 때 죽은 자를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세상은 과학이나 철학이나 재물이나 명예가 있으면 더 선한 사람이 되고 사람들 중에 더 영광을 받고 인정을 받는 법을 가지고 있는데, 그렇다는 것은 그렇지 않은 사람은 죄인이 되고 결국은 죽은 자와 같이 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살리시는 죽은 자는 그런 사람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또한 그 처음이셨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볼 때, 세상의 법으로 볼 때는 십자가에 달릴 수밖에 없는 사람, 즉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 안에서 살려고 하는 사람은 다 세상의 법으로 볼 때 죽을 수밖에 없는데 그 죽음을 당한 죽은 자들은 하나님이 보실 때는 오히려 살아 있다 할 수 있는, 즉 하나님의 창조 목적이 온전한 사람이기 때문에 살리신다는 말씀인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살아 있다.'는 것은 육신으로 살아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 부합되는지 아닌지가 살았는지 죽었는지의 기준이 되는 법이 바로 하나님의 법이고 하나님께서 살아 있다고 여기시는 생명을 말하는 것이다.


시간을 알기 위하여 산 시계가 가지 않으면 ‘죽었다’하듯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수행하지 않고 있는 모든 인생은 다 하나님 앞에서 죽은 자인 것이다. 자기가 아무리 하나님을 위하여 사노라 하며 금식하고 울부짖어도 아닌 것은 아닌 것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세상의 법으로 하나님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세상의 법은 피라미드와 같고, 객관적이며 조직적이다. 더 가진 자가 더 높이 있는 것이다. 목사도 신학이라는 옵션과 종교적 행위인 기도 등을 더 많이 가졌기 때문에 더 높은 곳에 서서 설교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바로  세상의 법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그 법으로 심판 받아 죽으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살리시는 죽은 자가 바로 그 법에 의하여 죽은 자를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법 아래에서 그 법을 따라 아무리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외쳐도 안 되는 것은 안 된다. 운다고 될 일이 아닌 것이다. 하나님의 법은 십자가의 법이다. 십자가는 피라미드와 같이 올라가야만 의로워지는 그 법 앞에서 죄인이 되는 세계이고, 죽어 나가야 하는 세계이다. 


그 세계의 문이 바로 십자가이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것이 그것이다. 그러므로 십자가로 보여주신 모습이 바로 <나>의 모습이라는 것을 발견할 때, 하나님의 법으로 사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죽음을 벗어나는 길인 것이다.


즉 십자가의 의미를 바로 알지 못하는 모든 인생은 다 죽은 것이며, 부활이 없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다시 사신 것은 그 십자가의 의미와 법에 따라 행하신 하나님의 역사이니, 그 법을 좇지 않는 사람에게 다시 사는 세계라는 것은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하나님께서 살리시는 죽은 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먼저 죽으심은 하나님의 목적을 나타내시니 세상의 법이 그를 죽인 그 죽음을 먼저 당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사람의 운명이고 존재의 목적이며,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기에 세상의 법에 의하여 죄인이 되고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 즉 이 육신의 삶을 온전한 것으로 여기고 


이 육신으로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려 하는 사람이 그 이유로 죽은 죽음을 당할 때 그 죽음에서 하나님이 살리시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보실 때는 오히려 산 것이기 때문이다. 그 죽음을 예수님께서 먼저 죽으신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삶을 삶으로 당하는 죽음, 그 죽음을 당하는 사람이라야 하나님이 살리시는 것임을 예수님께서 먼저 죽으심으로 보여주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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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 사도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전하면서 

그는 교회의 머리라 그가 근본이요 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고자 하심이요(골 1:18)

이라 하셨다.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가 되신다는 것은 교회의 모든 의와 뜻이 그리스도와 같아야 한다고 먼저 포스팅 했다. 그것은 교회가 하는 모든 일이 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보이고자 하셨던 모든 것을 위하여 있어야 한다는 의미라고 했다. 


이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율법으로나 또한 신념을 가지고 성경말씀을 지켜 행하는 세계나, 많이 드림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는 가치관이 아니라 오히려 그런 것을 주장하는 법 앞에서는 예수님과 같이 죄인이 되는 것이 바로 교회의 머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각이시기에 교회도 역시 그러해야 한다. 그러므로 반대로 신념이 있고, 많이 드리고 기적을 체험할수록 하나님께 인정받는다고 생각한다는 것은 그리스도가 머리가 되시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는 근본이라고 했다. 근본이라 함은 뿌리와 같은 것이다. 그 존재하는 모든 이유와 살아가는 모든 요소가 그것에서 비롯될 때 그것을 근본이라고 한다. 머리에서 모든 몸의 삶이 드러나듯, 어떤 것이든 그 모든 표현과 드러난 것의 뿌리와 같은 근원이 있기 마련이고 교회와 우리 신앙에 있어 머리와 근원되시는 분은 그리스도이신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근본이 그리스도라고 하는 것은 교회는 그 모인 사람들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심과 같이 모든 성도들이 그렇게 고백되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발견할 수 있도록 하고, 그 안에 모인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로 살아갈 때 그때 그리스도가 근본이 되시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로마서에서 우리가 사나 죽으나 다 주의 것(롬 14:8)이라고 했고, 고린도 전서에서는 먹든지 마시던지 주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이라고 하셨다.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고 하시는 말씀이 계시록 22장에 나온다. 그것처럼 바울 사도가 골로새교회에 있는 성도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그리스도가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고(1:16) 또한 근원이 된다고 하시며, 또한 모든 만물보다 먼저 되었다 하시고, 로마서 8장에서는 모든 만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는 것이라고 하셨으니, 이 또한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의 시작이고, 모든 것의 목적이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다.


바울 사도에게 있어 이러한 것을 강조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먼저는 지금의 큰 교회들처럼 당시 골로새교회를 비롯하여 많은 초대교회들이 영지주의나 세상적인 가치관이 가미되면 될수록 더 신앙이 좋은 것이라고 믿는 풍조에 대하여 심히 중하게 경계하여야 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교회는 그리스도를 신앙하는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인데, 그리스도 외에 세상적인 지식이나 재산이나 권력이 있으면 더 존중 받거나 장로가 되기 쉬운 현재의 풍토나 골로새 교회처럼 철학이나 과학적 지식이 있으면 더 나은 신앙이 되는 것과 같은 것은 분명히 경계되어야 할 심각한 신앙적 부패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것에 대하여 바울도 다른 사도와 마찬가지로  이를 기록하여 당시와 후대에까지 이것을 경계하려 한 것이다.


많은 신앙인들이 자신의 삶에서 그리스도를 최고로 여기면서 산다. 그것도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서 아주 훌륭하지만 최고인 것과 모든 것인 것은 아주 다른 것이다. 그리고 그렇다고 모든 것이라는 것이 입만 떼면 '예수'라고 말하는 것이 모든 것인 삶은 아니다.


모든 것이라는 것은 삶의 근원과 뿌리가 그리스도 이신 것을 말한다. 그래서 예수님은 생명이 되시는 것이다. 사람에게 사람의 유전자는 모든 것이다. 어떤 순간 어떤 위치에서 사람이 사람의 유전자를 벗어난 삶을 살지 않는다. 그것이 근원이고 그것이 머리이고 그것이 뿌리와 같은 것이다.


이것은 회사도 가지 않고, 공부도 하지 않고 교회에서 사는 것이나, 신앙과 관련된 일만 하는 것과는 완연히 다른 것이다. 그리스도가 머리가 되시고 근원이 되신다는 것은 세상의 어떤 떤 곳에서 어떤 삶을 살아도 그리스도의 성품을, 또한 그 생명으로 사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한 가지 또 다른 예를 들면 보통의 기독교인들은 마귀가 하나님과 다투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이야 말로 신성모독인 것이다. 왜냐하면 다투는 대상으로 둔다는 것, 그것도 아직도 몇 천 년 동안 다투는 상대라면 급이 비슷하다는 이야기 밖에 더 되겠는가? 하나님에게 있어서 마귀는 욥기에서 볼 수 있듯, 수하에 있는 하나의 도구와 같은 것이다. 


물론 사람들이야 마귀와 싸우는 대상이 될 수 있지만, 그것도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경영하기 위하여 그렇게 하시는 것이지, 마귀가 좀비들처럼 신선한 고기가 먹고 싶어서 우리를 노리는 것이 아니다. 이것도 역시 하나님께서 세상의 모든 것이 되신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즉, 세상에 있는 모든 것, 그리고 사람이 인지하는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경영하심 아래에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모든 것이 왜 하나님의 경륜 아래에 다 있는 것인가? 그것은 세상의 모든 만물이 다 하나님의 품성을 나타내는 하나님의 표현이고, 영이신 하나님의 형식인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에 있는 것은 그 시작이 무엇이던, 그리고 그 끝이 무엇이던, 그리고 과정이 무엇이던 모든 것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나타나는 것을 고대하고, 또한 그것을 위하여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 모든 것의 뿌리와 목적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다는 말씀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무엇을 위하여 살아가야 하는지가 분명해 지는 것이다. 그것은 오직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리고 그리스도로 인하여, 그리고 그리스도로서 살아가는 것을 위하여 자신의 삶이 촛불과 같이 태워지는 것이 인생의 유일한 목적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그리스도는 먼저 살아나신 분이라는 말씀으로 이어가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교회와 관련된 일만 하면서 사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지고 자신에게 주어진 육신의 삶을 세상에서 살아냄으로 다른 사람들이 그 삶으로 인하여 그리스도를 발견하게 하는 삶을 살아내는 것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가 머리되시고 근원이 되시는 삶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 되신다는 것은 교회의 모든 것이 다 그러해야 한다는 것이고, 그런 사람들이 모여서 교회가 된다는 말씀인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과 같이 교회가 세상을 배척하고 죄악이 관영하므로 상관하면 할수록 신앙이 떨어지니 멀리하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옳은 생각이 아니다.


물론 세상이 죄악으로 관영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 죄악이라는 것이 단순히 형법적으로 문제가 되는 살인이나 간음과 같은 타락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모르고 하나님을 표현하라고 주신 인생을 그렇게 살지 않고 세상에서 영광을 얻으려고 살아가는 그 삶이 주인이 되어서 죄악된 세상인 것이다. 


그런데 그 세상의 법, 세상에서 알만 알수록 가지면 가질수록 영광이 되는 철학과 과학과 재물과 명예와 같은 것이 교회 안에 들어와서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는 이유로 신앙의 고백 보다, 그 사람의 삶이 주어진 삶 안에서 얼마나 그리스도를 나타내는지 보다 철학과 과학과 재물과 명예를 가진 사람이 더 인정을 받고 그들의 말을 듣고 그들을 장로로 세우는 그런 모습은 그리스도가 머리되고 근원이 되시는 교회의 모습이 아니기에 바울 사도는 그것을 지금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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