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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도문)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고 Ⅱ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주기도문 Date : 2013. 1. 30. 12:59 Writer : 김홍덕

2nd Temptation



예수님께서 받으신 두 번째 시험은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라’는 것이었다. 그 높은 곳은 거룩한 성의 거룩한 성전의 꼭대기를 말한다. 그리고는 시편의 말씀을 인용하여 ‘하나님께서 너를 받들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실 것’이라고 시험을 한다. 사람이 높은 곳에서 떨어지면 당연히 돌에 부딪혀서 죽는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은 그렇지 않을 것이니 한번 뛰어봐라 그러면 하나님께서 설마 아들이 죽는 것을 그냥 내 버려 두겠냐? 하는 그것이 바로 두 번째 시험이다.

 

여기서도 단서가 있다. 바로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어든?”이라는 것이다. 마귀와 예수님의 가장 큰 차이가 드러나는 장면이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정체성에 관한 것이다. 마귀가 생각하는 하나님의 아들은, 율법을 지키는 것이 사람이 먹을 양식이라 먼저 시험했다. 이는 하나님의 아들은 행위로 하나님의 율법을 다 지킬 것이라는 이야기지만, 예수님께서는 태어나신 분, 즉 생명의 법으로 아들 되셨지 율법을 잘 지킨 공로로 되신 분이 아니시며, 우리 또한 그렇게 아들 되어야 하기에 돌을 떡으로 만들지 않으셨다.

 

그리고 또 예수님과 달리 마귀는 하나님의 아들은 신비한 존재일 것이라는 유혹을 하고 있다. 높은 곳에서 뛰어 내려도 죽지 않고, 돌에 부딪히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육신의 한계가 없는 존재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죄인으로 못박히실 그 때도 힘없이 죽으신 연약한 육신을 가지신 분이시지, 하늘 같이 높은 곳에서 뛰어 내려도 죽지 않는 육신을 가지셔서 아들이신 것이 아니기에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하셨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구원하려 하시는 인간들은 그런 조건으로는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사람이 만약 높은 곳에서 뛰어 내려서 죽지 않는 신비한 육신을 가져야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면, 우리는 다 희망이 없다. 교회 다닐 필요 없다. 오늘부터 미친 듯이 술 마시고 간음하며 인생을 흥청망청 보내는 것이 더 현명하다. 어차피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없는 몸으로 났는데 뭐 한다고 하고 싶은 것 참고 살란 말인가? 그게 지옥이다.





그런데 큰교회에서는 신비한 일이 일어날수록 신앙이 있다 여긴다. 40일 금식한 사람을 보면 신앙이 있다고 보는 것처럼 말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오죽 신앙이 없으면 밥 굶어 가면서 신앙생활 하냐?’ 이렇게 여긴다. 하나님의 아들이 왜 하나님께 공로로 인정 받으려 하겠는가? 그건 종이니까 그런 것이다. 그러니 40일 금식이라도 해서 하나님께 잘 보여야 하는 사람은 종이지 아들은 아니다. 아들은 아버지와 밥상에서 밥 잘 먹고 함께 하는 것이 아들인 것이다. 방언도 모든 신비한 능력과 기적도 다 마찬가지다. 사람의 육신으로 소화하기 힘든 일을 할 수 있는 것이 더 신앙이 좋다고 생각하는 것과 그렇게 가르치는 모든 것은 다 예수님을 시험하는 마귀의 자식이요, 영지주의를 신앙하는 자들이요, 적그리도이다.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찌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않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요일 4:2-3상)

 

예수님께서도 이 땅에 계실 때 많은 기적을 행하셨으나, 그것을 다 버리시고 연약하고 추한 죄인을 모습으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우리 인생이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법을 보이셨지, 기적을 행하시면서 이 정도는 해야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신 적이 없고,

 

바울 사도 역시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겠느냐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것으로 너희에게 보이리라(고전 12:30-31)

로 고린도전서 12장을 마무리하고서 보여준 것이 바로 사랑이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아직도 큰 이적을 좇고 신비한 능력을 행하는 것이 더 훌륭한 신앙이라 여기는 것이 바로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한 두 번째 시험인 것이다. 그런데도 큰교회는 이것을 가르치고 있으니 이 어찌 통탄할 일이 아닌가?

 

나도 심히 어린 중학생일 때 방언으로 기도하기 시작했었다. 지금도 가끔 해보면 아직 입에서 떠나지 않았다. 하지만 난 그것으로 기도하지 않는다. 그것은 위성을 궤도에 올리기 위한 로켓에 불과한 것이다. 바울 사도가 말씀하신 것처럼 더 좋은 것을 봤으면 별로 필요 없는 것이다. 그런데 심지어 방언이 있어야 구원 받은 것이라 가르치는 곳도 있으니, 세상은 온전히 두 번째 시험에서 헤어나오고 있지 못하다. 아니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 신앙인데, 내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을 수 밖에 없는데, 왜 그런 공로와 신비한 이적이 신앙에 필요한지 잘 모르겠다. 하나님의 아들에게 필요한 것은 서로 사랑하는 그것 뿐이다.

 

사랑은 하나님이시니, 곧 서로 하나님의 성품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사람이 가져서는 안되게 하나님께서 자리 메겨 놓으신 대로 선악의 기준을 자기 안에 가지고 세상을 사는 것이 아니라, 오직 생명의 법을 좇아 살고 형제를 대하며 세상을 운영하시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 그것이 신앙이고 하나님의 아들이지, 높은 곳에서 뛰어 내려도 죽지 않을 것이라 유혹한 마귀의 꾀임에 빠져서 더 신비한 것을 사모하고 그럴수록 신앙 있고 더 위대한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고 믿는 것,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오심을 부인하는 적그리스도요 마귀의 자손인데, 오늘 큰교회가 그것을 가르치고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마귀의 유혹에 대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하셨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 큰교회에서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은 늘 하나님을 시험한다. 그래서 이미 2,000년 전에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계실 그 때에 우리에게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치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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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도문)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고 Ⅰ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주기도문 Date : 2013. 1. 30. 11:36 Writer : 김홍덕

1st Temptation



사람이 받는 시험은 어떤 것이 있을까? 이 시험은 Test가 아니라 Temptation이라는 것은 아마 다 아는 것 일듯하다. 시험이라 하면 예수님께서 금식하시고 마귀에게 받으신 시험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있는 시험의 모든 것이다. 그리스도의 삶을 살기 원하지 않는 사람은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성품을 좇아가며 살기를 원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시험은 예수님께서 받으신 시험 세가지가 살면서 받는 시험의 전부이다. 예수님처럼 살려고 하는 사람에게 예수님의 시험 외에 또 뭐가 있겠는가?

 

먼저는 마귀가 예수님께 이르기를 “돌로 떡이 되게 하라”했다. 조건이 있었다. “네가 만약 하나님의 아들이라면?”이라는 조건이 붙어 있었다. 하나님의 아들에게 있어서 돌로 떡을 만드는 것이 뭐 어렵겠는가? 별로 어렵지도 않은 일을 단지 마귀가 시킨다고 해서 자존심이 상해서 그것을 하지 않으신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은 그런 것을 하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인 것이다. 그건 역설적으로 마귀가 바라보는 하나님의 아들은 돌로 떡을 만드는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돌은 율법이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받을 때 돌판에 새겨주신 십계명을 받았다. 그래서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돌은 율법을 말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4’자를 ‘죽을 사’로 여기듯 그들에게는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래서 율법을 어긴 사람은 돌로 쳐서 죽인다. 그것은 율법으로 심판한다는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를 가진 ‘돌을 떡으로 만들어라’고 하는 것은 돌에 새긴 율법이 자기의 양식이 되는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여김을 받을 것이라는 것이 시험의 내용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돌에 새긴 율법이 자기의 양식이 되어, 어떤 율법이라도 다 지킬 수 있어야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고 생각하는 모든 생각이 바로 마귀가 사람에게 하는 시험이라는 것이다.

 

율법이란 것이 별게 아니다. 성경의 구약은 율법이고 신약은 복음이라는 생각도 틀린다. 신약에 나오는 말씀도 행위로 지켜보려고 하면 율법이 되는 것이다. 율법이란 것은 하나님 앞에서 뭔가를 행함으로 인정받으려 하는 것과, 하나님의 말씀을 행위 규범으로 스스로 인정하고 행동으로 지키려고 하면 그런 모든 것은 다 율법이 된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롬 3:20)

 

그러므로 성경에 나오는 말씀을 행동으로 지키고 유지할 수 있어야 하나님을 믿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것은 다 돌로 떡을 만드는 것이다. 즉 성경을 행위 규범으로 보고 기독교인은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행함의 법을 내는 모든 것이 돌로 떡을 만드는 것이고, 그렇게 유혹하는 것은 다 마귀의 생각이다. 그러니 지금의 큰교회들의 가르침이 누구의 생각을 좇고 있는지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이다. 기독교인이니 기도해라, 기독교인이 전도해라, 기독교인이니 사랑해라 등등, 그리고 그것에서 그치지 않고 그래야만 하나님의 믿는다 할 수 있다고 하니 이 모든 것이야 말로 마귀가 예수님께 시험한 내용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물론 기도도 해야 하고 전도도 해야 한다. 사랑이야 두말 할 것 없다. 하지만 그것을 행함으로 신앙이 생기고 기독교인이 되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인의 의무는 더더욱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본성이다. 그냥 그리스도의 생명이 그 안에 있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개는 어쩔 수 없이 짖듯이, 그리스도의 생명이 그 사람 안에서 싹이 트고 자라나면, 말리고 그 육신을 죽음 가운데 내 몰아도 기도하고 전도하고 사랑할 것이다. 개가 죽을 때 되었다고 ‘야옹’하지는 않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도 큰교회들이 그렇게 가르치지 않고 행해야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고 가르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생명이 될 수 있는 씨 있는 말씀이 없기 때문이고, 다음으로는 생명의 때를 기다리는 생명의 안목이 없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모르기 때문이다.

 

마귀가 예수님께 한 시험이 단순히 금식한 예수님을 유혹해서 마귀가 시키는 것이나 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오명을 얻을까 싶어 돌로 떡을 안 만드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돌에 새긴 율법을 행함으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행함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종의 신앙이지 아들의 신앙이 아니다. 이것은 오늘날 늘 우리 가운데 있는 시험이기도 하다. ‘내가 이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이다’라던가, ‘뭘 해야 하나님께서 기뻐하실까?’ 고민하는 모든 것이 다 돌로 떡을 만드는 시험 가운데 있는 것이고 또한 그 시험에 유혹당한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과 정체성이 같아야 한다. 한마디로 유전자가 같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존재의 하나님이신데, 소유와 행함이 양식이 되는 사람의 유전자가 어떻게 존재의 하나님과 같은 유전자로서 아들이 될 수 있겠는가? 그럴 수 없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다’라고 답변하신 것이다. 즉 이는 사람이 육신을 보전하고 영위하는 것 만이 사는 것이라 하지 않는다는 말씀이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시험을 이기셨고, 또한 우리에게 기도할 때에 우리가 하나님을 돌에 새긴 율법을 행함으로 아들이 되려고 하는 유혹을 이기게 해 달라고 기도하라고 하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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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죄를 사한다는 것


사람이 하나님께 진 가장 큰 죄는 무엇일까? 그건 한마디로 하나님이 자기를 조성하신 목적을 배반하는 것일 것이다. 자동차가 그 주인에게 지은 가장 큰 죄는 운행할 수 없는 상태가 된 것이듯 말이다. 그런 상태는 하말티아라는 어원의 죄, 즉 ‘자기의 자리를 벗어나다’이기도 하고, 또한 목적의 빚진 debt(채무)이기도 하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과 아닌 사람의 가장 큰 차이이자 출발점이 바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죄인이라고 고백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그 차이이기도 하다.

 

그래서 사람이 하나님께 죄를 용서 받는다는 것은, 회개고 구원이며 안식이고 부활이고 영원인 것이다. 물론 다 계절 따라 생명의 성장이 다르듯 그 단계를 표현하는 단어이기는 하지만 태어남이라는 대 시작이 있고 난 다음의 일이기 때문에 한 세계에 있는 것이다. 사람이 배우고 다치고 놀고 어른이 되고 결혼을 하고 하는 다양한 삶의 모습은 다 사람으로 태어나서 사람으로 사는 세계의 것들이듯 말이다. 그만큼 우리에게 있어서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죄를 사함 받는 것은 중요한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 죄를 사함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 목적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것을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 안에서>라고 표현했다.

 

성경에서 사람이 하나님이 주신 존재의 자리를 떠나는 시작은 누구나 알듯이 <선악과>를 먹는 것에서부터 비롯되었다. 이 선악과는 도무지 어떤 과일이길래 이렇게 인류를 힘들게 만들고 논쟁 가운데로 끌고 왔을까? 이것은 모든 기독 신앙의 근간이요 기초며 신앙의 이유인데도 불구하고 이것을 명쾌하게 설교해가는 큰교회는 잘 본 적이 없다. 대세는 거저 하나님의 명을 어긴 죄로 굳어진 상태다. 하지만 성경에 사람이 하나님의 명을 어긴 것이 어디 한두 번인가? 그래서 대체로 합의된 것이 아마 처음에 그랬던 본성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고들 한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인류는 희망이 없다. 아직도 그러고 있으니 말이다. 선악과는 하나님의 명을 어겼다는 것이 본질이 아니다. 물론 형태는 그러했지만 뱀이 하와를 꼬실 때에 ‘너희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처럼 될 것’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선악과를 먹으면 어떻게 하나님처럼 되는가? 또 하나님은 그것을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하셨지만 아담과 하와는 살아있지 않았는가? 도무지 이런 복잡한 일들은 어떤 이야기일까?

 



 

선과 악은 대칭점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하나이다. 한 과일 안에 있었으니 말이다. 사람이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처럼 된다는 말도 사실이고 죽는다는 말도 사실이다. 하지만 사람은 선악과를 먹어서 되는 하나님의 자리에 존재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지으신 존재가 아니다. 또한 바울이 말씀하신 대로 모든 사람이 사망 가운데 있다 했기에 죽었다는 것도 맞는 말이다. 시계가 목적을 상실하면 죽었다고 하듯, 사람도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자리에 가려 했으니 그것은 죽은 것 분명한 것이다. 그 선악과의 정체는 바로 선하고 악하다고 판단하는 기준을 가진다는 것, 그것이다. 즉 사람이 어떤 일을 보고 그것이 선하다 혹은 악하다 하는 기준을 가지고 있는 상태가 바로 선악과를 먹은 상태인 것이다. 먹은 것은 그 몸과 하나가 되기 때문이다.

 



 

아담도 선악과를 먹기 이전에는 자신의 행동에 대하여 잘했다고 여기거나 잘못했다고 여기지 않았다. 벗었으나 부끄러워 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선악과를 먹고 나서는 자신이 선악과를 먹었다는 그 사실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했기에 무화과 나무 아래 숨었던 것이다. 여기서 보여준 아담의 모습의 핵심은 잘못했다는 생각을 했다는 것이다. 즉 자기 안에 어떤 것은 잘 한 것이고, 어떤 것은 잘못한 것이라는 기준이 생겼다는 것이다. 그리고 벗은 것도 잘못된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래서 무화과 잎으로 몸을 가렸던 것이다. 선악과를 먹기 이전에는 없던 행동들이었다. 아담 안에 어떤 것은 선한 것이고 어떤 것은 악한 것이라는 생각이 생겨난 것이다. 그것은 선악과를 먹었기 때문인 것이다.

 

미국이 이라크와 전쟁을 하는 이유나, 시장에서 싸우는 두 사람이나 싸우는 이유는 오직 한가지이다. <너는 악하고, 나는 선하다> 이것이다. 이것에서 더하거나 모자라는 갈등은 세상에 전혀 없다. 만약 사람 안에 어떤 것을 선하고 악하다 판단하는 판단이 없다면 세상은 바로 천국이 될 것이다. 사실 그게 천국의 모습이기도 하다. 무엇이 선한지 악한지는 오직 하나님께만 있는 것인데, 사람이 마음에 어떤 것은 선하고 어떤 것은 악하다고 여기기 시작함으로 모든 갈등과 죄와 범죄가 생겨난 것이다. 세상의 혼란은 단 하나 그것 때문일 뿐이다. 그게 선악과고 그게 사람이 하나님 앞에 범죄한 것이다.

 

전쟁 영화를 보면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산을 올라가는 병사들은 날아오는 수많은 총탄을 피해가며 전투한다. 하지만 그렇게 날아오는 총알을 일일이 피할 수는 없는 법이다. 방법이 있다면 총을 쏘는 벙커를 무력화 시켜야 하는 것이다. 이처럼 사람이 저지르는  살인과 간음과 폭력과 같은 모든 범죄들은 다 날아오는 총탄일 뿐이다. 그 모든 원인은 바로 사람 안에 선하고 악함을 판단하는 기준이 있어서 그런 것이다. 그게 원인이고 바로 벙커인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큰교회들은 날아오는 총탄을 피하기 위한 설교를 해대고 있다. 그러다 정작 목사와 교회들도 그 총알에 맞아 사회적인 물의를 일으키는 것이다. 원인을 몰라서 그런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의 죄를 사하는 것은 우리가 사람을 보고 그 행위로 판단함을 그치는 것이다. 또한 그것은 내가 하나님 앞에서 내 자리를 회복한 것이다. 선악간에 판단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역이요 권한이니 내가 나의 자리를 떠나 교만히 그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내 안에 건방지게 하나님처럼 선과 악에 대한 기준이 있었음을 고백함으로 내 자리로 돌아가서 하나님께서 나를 창조하신 목적 아래 거하며, 선악간에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연약한 중에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하는 그런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 그것이 바로 주기도문에 있는 죄를 사하고 사함을 받는 것이다. 생각해보라, 우리가 사람을 볼 때 선악간의 기준 없이 생명 그대로 본다면, 모든 빚을 탕감하기에 부족함이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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