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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 사도에게 있어 골로새 교회는 직접적인 연관을 가진 교회는 아니라고 볼 수 있다. 바울에게 말씀을 들은 에바브라가 세운 교회이기 때문에 2장에 나오는 바와 같이, 골로새 교회의 성도들 중에서는 바울 사도의 얼굴을 보지 못한 성도들도 있었다. 그러한 교회의 성도들로 인하여 바울 사도가 괴로움을 받았다는 것은 선뜻 이해하기에 쉬운 부분은 아닐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괴로움은 직접 가해를 하는 것이라는 말이 아니다.


아이가 태어나서 자라는 과정에서, 아이는 아무런 의도를 하지 않고 자기의 생존 본능에 의거하여 울고 떼쓰고 하는 것뿐이지만 어른들은, 특히 그 부모는 그 아이로 인한 괴로움이 이루 말할 수 없는 지경인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바울 사도의 괴로움은 바로 그런 것이다. 


즉 어떤 어린 생명이 자라는 과정에서 받는 장성한 사람들의 괴로움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골로새 교회의 성도들의 신앙이 자라는 과정에서 당시의 상황처럼 신앙이 어리기 때문에 세상적인인 철학에도 휩싸이고, 또 영지주의와 같이 변질된 신앙에도 휩싸이는 그런 어린 모습을 바라보는 사도의 마음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실재하는 괴로움이다.


교회가 진정한 신앙 공동체로, 생명 공동체로 살아가게 된다면, 그 안에서는 분명히 말씀을 먼저 깨달아 살아가는 영적으로 장성한 사람이 있기 마련이고, 또 그러한 장성한 사람들의 삶은 마치 어린 생명을 기르는 부모와 같이 신앙이 어린 사람들을 위한 각양의 수고를 감당하게 될 수밖에 없다. 


만약 그렇지 않고, 교회에서 어른이라 여기는 목사나 장로들이 귀찮아지지 않도록 제도적으로 어떤 규약을 만든다면, 그곳은 생명공동체가 아니라 그냥 조직체로서의 교회이고, 그건 모든 세상의 조직과 다를 바가 없으며, 또 목사가 설교 준비를 위하여 토요일에 결혼식 주례를 거절하는 것과 같이, 나이나 직분과 같은 형식으로 어른 된 사람들의 수고를 회피하려는 모든 의도는 생명을 기를 수 있는 장성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한 마디로 '나는 장성한 사람도 아니고, 신앙이 아주 어린 사람입니다' 라고 자백하는 것이다. 어린 생명이 아닌데 그렇게 보호할 이유가 없지 않겠는가? 장성한 사람들인 군인들이 일요일이라고 나라 안 지키겠는가? 훈련해야 하니 보초서는 일을 감하겠는가? 그렇듯 장성한 사람들에게는 그런 일이 있는 것이 아니라, 어린 생명을 위하여 괴로운 수고를 감당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이 골로새서 1장의 마지막 부분에서 우리는 진정한 사도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다. 우선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을 전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지금 사도 바울 사도가 전한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것 되신다는 것이었다. 


그것에는 세상에서 그 사람이 어떠한 모습이나 지위이던 상관하지 않고, 그 사람 안에 '그리스도의 성품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그것으로만 교회 안에서 인정받을 수 있는 그 복음을 전한 것이다. 바울 사도가 그렇게 전한 것은 세상에서 살인자로 살아도 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교회에 오는 그의 모습이 어떤 모습인가 하는 것이다. 


바울 사도가 전한 것은 그리스도가 세상 만물의 모든 것이라는 것과, 세상의 모든 것이 다 그리스도를 지향한다는 것과, 모든 것 보다 그리스도가 먼저 있었다는 것과, 또 세상의 모든 것이 그리스도로 비롯되었다는 것을 전하였다. 


물론 오늘 우리가 믿어야 하는 것도 그것이다. 그것은 한마디로 그리스도 하나면 족한 것이며, 또 우리 삶의 모든 것은 그리스도에 수렴해야 한다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그것은 바로 예수를 믿는 것에, 세상에서 온 지식이나 예의범절이나, 나이나, 부유함이나, 권력이나, 혈통과 같은 그 어떤 것도 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며, 그리스도를 위하여 있는 것이며, 그리스도로 인하여 있는 것이지, 예수를 믿고 살아가는데, 아니 어쩌면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그리스도에 부가되어야 할 요소는 아니다.


또한 이것은 생명의 세계이므로 그 안에 그리스도가 있으면 그 사람이 변하여 세상에서도 사랑하는 사람이 되는 생명의 세계이고, 또한 바울 사도가 전한 바와 같이 그리스도는 모든 것이 되시므로, 그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풍성하게 된다면 세상의 모든 것에 관하여도 참 충실한 사람이 될 수  밖에 없는 그런 생명의 세계인 것이다. 


마치 개로 태어나면 '멍멍'하며 짖을 수밖에 없는 것처럼 말이다. 즉 생명의 세계는 안에서 밖으로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기에 생명이 주신 하나님의 영이 그 안에 있으면 그렇게 변해가는 것이지, 예수 믿으니 이러해야한다는 것은 밖에서 안으로 변화를 이끄는 가공의 법이요 생명의 법이 아니다.


바울 사도가 전한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사도란 그것을 전할 때 사도가 되는 것이다. 신앙고백이 아니라 학력으로 목사가 되어 강단에 서서, 세상적인인 성공으로 유혹하고, 기왕이면 다홍치마라는 식으로 예수 믿는 사람이 세상에서 성공하면 할수록 좋은 것이라 가르치는 것은 사도가 아닌 것이다. 


왜냐하면 바울 사도가 전했듯 전할 수 없다는 것은 그 안에 생명이 없기 때문에 조직적인 방법으로 복음을 전해가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수고와 손해를 감당하지 않으려, 토요일에는 주례도 거부하고, 목사로 대접 받고, 장로로 인사 받기를 은근히 바라는 마음으로 살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바울 사도가 골로새서 1장 마지막에서 보여준 자신의 마음은 자신의 속에 있는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위하여 수고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나오는 수고한다는 의미는 어린 생명으로 인하여 받는 괴로움을 감내하면서 가는 그런 수고를 말한다. 단순히 복음만 전하고 다른 수고는 하지 않는 그런 수고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즉 복음을 전하기 위하는 삶은 말씀만 전하고 사라지는 그런 모습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 것을 위하여 사람이 모이면 발생하는 모든 번거로움, 청소와 음식을 준비하는 것과 같이 모든 육신의 수고를 감당하면서 최선을 다하는 수고를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내내 말해 온 공로와는 다른 것이다. 공로는 그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고 신앙의 지표로 삼는 것이고, 이것은 복음이 그 마음 안에 있으므로 그것이 표현되는 것이다. 방향이 다르다는 이야기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는 세상적인인 것이 더해져서 더 좋은 신앙이 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충만 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 하나만 있으면 된다는 것을 전하는 사도요, 또 모든 것 되시는 주님을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들여 수고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런 말씀을 전하고 있는 이유는 단 한가지이다. 이 글을 읽는 골로새교회의 성도들과 또 지금의 성도들도 그런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것,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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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 바울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가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이 되시며, 만물의 고대하는 바요, 만물의 근원이요 충만 이라고 하시고 또한 이 모든 것이 그로 말미암아 화목하게 되었으니, 곧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그리되었다고 전하였다. 바울에게 있어 이것은 정말로 중요한 계시였고, 또한 오늘 우리에게도 너무나 중요한 말씀인 것이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만물의 근원이요 충만이 되신다고 하는 것은, 예수 이외에 세상의 어떤 것을 더함으로 그 신앙이 좋아지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영원히 예수 그리스도 그 하나면 충분하다는 것을 말씀하심이다. 이는 그 당시의 골로새교회의 상황이나, 오늘날 교회의 상황이나 예수 + Something(세상의 철학이나 학문, 혹은 세상의 지위나 재력 또 권세, 그리고 신학과 같은 학위 등등)이 많으면 많을수록 신앙이 좋은 것으로 간주되는 변질된 신앙을 경계하기 위함이 그 첫 번째 이유이고,


또 한편으로는 예수 믿는 것이 인생의 모든 것이 되어야 하는 인간 실존의 목적에 관하여서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 실존의 목적이라고 하는 것은 당연히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에 관함이요, 그것은 세상의 모든 만물이 다 하나님의 아들이 나오는 것을 고대하고 있듯, 모든 인생 또한 그 삶이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살아가는 인생이 되는 것이 전부인 삶이 되어야 하는 것이기에 그러하다는 것이다.


이렇게 블로그를 써 내려가면서 바울 사도에 비할 바는 아니겠지만 오늘날 교회가 대통령이 돌아온다고 현수막 붙이는 이런 행태들, 즉 세상적인인 신분이 교회에서의 대우에 영향을 미치는 이러한 모습이 바로 바울 사도와 많은 사도들이 초대교회에 경고했던 그 모습이기에 그것을 보는 마음이 편하지는 않다. 교회는 오직 그 사람의 신앙, 그 사람의 신앙고백 그 하나만으로 인정받아야 하는 것 아닌가? 그게 바울사도의 모든 권면일지도 모른다.


당시의 에바브라는 교회 안에 들어오기 시작한 철학이나 과학에 능통한 자들에 비하여 세상적인인 면모가 분명히 보잘 것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오네시모와 같이 도망간 종과 같이 다녔으니 오죽했겠는가? 그렇지만 바울 사도는 골로새 교회의 성도들에게 에바브라를 따르는 것이 옳다고 전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에바브라가 바울에게 복음을 듣고 전했으며, 그 전하는 내용이 바울 사도가 보기에 온전한 것이기에 그러했던 것이다. 반면에 골로새 교회와 인근한 라오디게아 교회 등에서는 에바브라보다 철학이나 과학이 더 뛰어난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 더 인정받는 즉, 그것이 더 좋은 믿음이라는 생각들이 들어와 있었던 상황이었기에 바울 사도가 그것을 경계하기 위하여 이 골로새서를 기록한 것이다.


그러면 바울 사도는 1:23절에서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너희 들은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면 그리하리라(골 1:23)

했는데, 이것은 바로 에바브라에게 들은 말씀 그것이 온전한 믿음으로 알고 그 위에 서 있으면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 받을 것이 없는 자로 그(예수님) 앞에 서게 되리라(골 1:22)"고 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에바브라라는 한 사람의 말을 들으라고 하는 것이나, 그것만 들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이미 골로새 교회 안에 철학이나 과학이 뛰어나고 복음도 아는 사람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외모로 볼 때 복음을 가졌다는 그 하나 밖에 없는 에바브라의 말을 듣고 청종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세상적인인 요소가 부가될수록 신앙이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과 달리, 복음 하나면 된다는 믿음을 가져야만 가능한 것이기에 그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바울 사도 자신은 그렇듯, 천하 만민에게 전파된 복음을 위하여 일군이 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즉 천하 만민에게 전파된 복음이라는 것은, 그 사람의 형편과 생각과 모양과 지위와 재력과 같은 세상에서 온 것이 어떠하더라도 상관없이 믿을 수 있는 예수를 전하고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바로 복음이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누구라도 믿을 수 있고, 오직 인생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좇아 사는 그 하나만 보고, 그것에 올인한 사람이기만 하면 교회 안에서 영광을 얻게 되는 그것이 바로 복음이라는 것이고, 바울 사도는 그런 복음을 위한 일군이 되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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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그 육신을 십자가에 드리심이 오늘날 우리에게, 또 당시 골로새교인들에게 구원이 되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인가?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하여 예수님이 사람들의 죄를 위하여 대속했으니, 그것을 사실로 믿어라 그러면 된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왜 그런 구조가 성립이 되는지에 대하여 설명을 하지 못한다면, 이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예수 그리스도가 있었다는 역사적인 사실과 또한 십자가에 죽었다는 사실과, 그 이유가 우리 때문이기에 당신이 믿어야 한다.”라고 전할 수밖에 없고, 또 그렇게 해 왔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2,000년 전에 우리나라에서 거의 지구 반대편에 있는 나라에서 죽은 한 사람의 명분이 나를 구원한다는 것에 대하여 이 시대의 사람들이 이해하는 것은 어렵다. 그래서 다음 카드가 늘, “안 보고 믿는 것이 믿음”이라고 하게 된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이 실존 사실과 행적과 기적의 실존을 객관적으로 믿는 것이 아니다. 그건 정말로 남의 나라 신화를 믿는 것과 같은 것일 뿐이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을 기록해 놓은 것은, 그것을 볼 때 나와 상관이 있는 이야기가 되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안 되기 때문에 도올 김영옥 교수 같은 사람이 기독교는 남의 나라 이야기라고 하는 것이다. 뉴턴이 만유인력의 법칙을 알아냈다. 그것이 서양의 발견이라고 우리가 사용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왜 그런가? 그건 그 만유인력이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데 나와 상관있는 물리적 법칙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이와 같이 예수님의 십자가도 오늘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 때, 나에게 구원이 있는 것이 되는 것이다.


그러한 명백한 관점에서 바울 사도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가 골로새의 교인들과 오늘 우리에게 있어서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던 것에서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한 것이라고 하고 있다. 


이것은 오늘 우리가 이 말씀을 들을 때에 나 자신과 상관있는 이야기, 그리고 아무리 부인하려 해도 예수님의 십자가가 나의 이야기로 발견되어져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어떻게? 그 십자가의 피가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였다는 것인가? 그것이 중요한 점이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는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을 자기와 화목하게 한다고 했다. 먼저는 우리가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있었다고 했는데, 우리가 멀리 떠난 기원은 당연히 아담의 선악과로 말미암은 것이다. 


이 선악과는 악과가 아니다. 즉 선하고 악한 것을 한꺼번에 먹었다는 이야기인데, 그것은 사람이 그 마음 안에 어떤 것은 선하고, 어떤 것은 악한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된 것을 ‘선악과’를 먹은 것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선악과를 먹기 전의 아담은 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는데, 선악과를 먹고 난 다음에는 자신의 모습이 잘 못되었다고 생각해서 숨은 것이다. 선악과를 먹기 전에도 벗고 있었던 것은 마찬가지인데 말이다.


이렇듯 사람이 그 마음 안에서 어떤 것은 선하고 어떤 것은 악하다고 여기면서부터 가장 심판을 받은 것이 어쩌면 인간의 육신이다. 즉 육신이 가지고 있는 연약함도 떨쳐 버리려 했고, 육신 안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욕망도 정죄를 받아 늘 억제를 당해야만 했다. 그것이 옳은 것이라 생각했다면 그럴 이유가 없는 것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어떠한가? 하나님께서 인간을 육신으로 만들어 놓으시고 말씀하시기를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 하셨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 난 이후에 육신의 어떤 변화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그 육신을 보는 안목이 달라진 것이다. 어떤 것은 선하고 어떤 것은 악한 것이라고 보는 안목이 생긴 것이다.


아담이 그렇게 타락했다면 두 번째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는 아담으로 인한 것을 바로잡기 위하여 오신 것이다. 즉 그것은 세상의 어떤 것을 깨끗하게 하시기 위하여 오신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세상에 있는 것을 선과 악의 기준으로 보지 않고, 하나님의 창조물로 보게 하도록 육신으로 오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거룩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악하게 정죄하는 세상의 부정적인 모든 요소와 선한 것, 그 모두가 다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시기 위하여 주신 것이라는 것을 믿게 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것이다. 그리고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피조물이 바로 <인간>인 것이다.


유대인이나 또한 모든 종교나 철학들이 사람의 육신으로 오는 욕망과 연약함을 부인하고 이기려 하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 방법이 어떠하던 간에 그 모든 출발은 육신을 부정하게 보는 것에서 출발한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인간들이 부정하게 여기는 그 육신이 바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고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심히 좋았던 것이라는 것을 보이시기 위하여 친히 육신으로 오신 것이고, 또한 그 육신의 가장 연약한 모습이자 죄인의 모습으로 돌아가심은 인간의 모습이 아무리 추해도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이시고자 하심인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책망할 것이 없다는 것은 당연히 하나님께서 책망할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바울도 책망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책망할 것이 없다고 여기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죄악으로 여기시는 것과는 확연하게 다른 것이기 책망할 것이 없는 것이라는 의미인데, 그런 온전한 모습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거룩함이 바로 그것이다. 거룩함은 구별된다는 의미이다. 즉 예수님이 구별이 된다는 것이다. 즉 세상과 다른 존재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다른 것은 세상 사람들이 사람의 육신을 늘 부정하게 여기지만 예수님은 사람의 육신을 부정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전하심으로 십자가에 달리는 죄인이 되었던 것이다.


예수님께서 그러실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이 육신을 가진 인생은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존재로, 하나님을 나타내는 형식으로 또 하나님의 의와 생명이 육신으로 표현된 아들로 살아가기 위한 존재이기에 더 없이 온전한 존재인데 사람들이 스스로 하나님이 되려고 정한 선과 악의 기준으로 볼 때 이 육신을 악하게 여기는 것과는 다른 분이셨기 때문이다.


철학이나 과학이 가미되면 더 좋은 신앙이라 여기는 것도 그것이 없으면 부족하다 여기기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사람의 모습 그대로는 부족하니 과학이나 철학으로 무장하면 더 나은 신앙, 더 나은 사람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인 것이다. 바로 그런 생각들은 예수님께서 거룩하게 구분되시는 배경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것과는 다른 분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당시의 골로새 교회에 있었던 영지주의는 말할 것도 없고, 철학을 중시하거나, 그런 것이 있으면 더 신앙이 좋은 것으로 보는 그 모든 시각은 십자가에서 사람이 부정하게 보는 모든 것을 화목제와 같이 드리신 예수님을 전하는 바울 사도의 신앙 안에서 볼 때 어림도 없는 것이었고, 그것에 관하여 자세히 설명하고 또 단호하게 대처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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