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 2595

바울 사도는 골로새 교회를 향한 간구에서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 그 영광을 좇아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라는 간구를 이어가고 있다. 세상 사람들은 누구나 다 하나님이라는 이름을 한번쯤은 들어 봤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TV에 나오는 연예인을 아는 것 같은 것이다.


하지만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또 바울 사도가 말씀하고 있는 <하나님을 아는 것>은 그렇게 아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은 아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안다는 것은 봤다거나 들어봤다거나 하는 것으로 안다고 이야기 하지 않는다. 체험적인 것, 자기의 것이 된 것을 안다고 표현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유대인들에게 있어 ‘저 여자를 안다’하는 것은 잠자리를 같이 해 봤다 할 수 있을 정도를 이야기 하는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의 본성이 내 안에 자리하게 된 것을 안다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 하신 분이며, 전지전능하시고, 나를 위해 아들을 보내서 십자가를 지게 하셨으며, 어디에나 계시는 분이시다’와 같은 것을 지식으로 또 객관적 사실로 믿는 것이 아는 것이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본성이 내 안에 있어서, 그것이 내 생명과 정체성이 되었을 때 비로소 하나님을 아는 것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라는 간구를 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을 아는 것은 생명을 아는 것이고, 그 생명이 내 안에 하나가 된 것이기에, 생명의 자람 같이 <자라게>라는 표현을 사용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또한 바울 사도는 ‘영광의 힘을 좇아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고’라고 하고 있다. 영광은 ‘표현하다’라는 의미를 가진 doxa라는 단어를 사용한다고 했다. 그리고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신다.’ 하셨다. 이것은 세상의 어떤 일이라도 다 할 수 있게 하신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기독교인들이 가장 착각하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이런 것이다. 하나님의 능하심은, 사람이 세상을 살다 겪게 되는 문제들을 해결하는 능력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문제는 궁극적으로 아무리 해결해도 결말은 다 육신의 죽음으로 끝나기 때문에 그것이 하나님께서 그 능력을 표현하고자 하시는 본질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크게 오해하고 있다. 하나님의 능력은 우선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인간이 살다가 겪게 되는 육신의 문제에 기적이 나타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기적은 하나님의 몫이며, 인생 육신의 삶의 문제는 이미 자연 속에 있기에 우리를 그 안에 두신 것이며, 또한 위대함도 자연의 위대함에 사람이 미치지 못하니 이는 세상을 통해 하나님의 위대함은 이미 맘껏 표현 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능력>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 자라나 표현(영광)되어진 것이 능력인 것이다. 또한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성경에 대하여 더 안다거나, 신학적 지식이 더 늘어난다거나, 신비한 능력이 더해진다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러한 것들을 더 아는 것이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상들이 골로새 교회에 들어왔기 때문에 바울 사도께서 이 편지를 쓰고 계신 것이다. 


그렇다면 진정으로 하나님을 아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생에게 두신 의와 목적을 잘 아는 것이다. 그것은 오히려 사람에게 덧씌워진 각양의 사회적 지위와 삶의 모양과 철학과 지식 등을 버리면 버릴수록 더 하나님을 아는 것이 된다. 하나님께서 인생에게 기대하시는 것이 바로 인간, 연약한 인간 그 자체를 통하여 하나님을 표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연약함을 사랑하시는 마음을 표현하는 것을 위하여 사람을 지으셔서, 우리 인생이 날 때와 같이 하나님이 그 성품을 표현하시려는 그 인간 본연의 모습 이외에 아무것도 부가되지 않은 인간의 모습으로 살게 되는 그것이 능력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선악과를 먹음으로 자기 나름의 선의 기준을 가지고, 자기가 선하다고 하는 것을 계속 덧입어 능력을 나타내려는 죄 가운데서 자기가 가진 선의 기준으로 서로를 판단함으로 분쟁과 갈등 가운데 살고 있다.


그것은 영광스러운 자리가 아니다. 언제나 심판이 있는 자리일 뿐이다. 그리고 다들 그 자리에서 벗어나고자 하나 선악과의 관점이 스스로를 죄인으로 만든 자리이다. 바로 그 자리에서 떠나게 되는 것이 능력이니, 그것이 인생에게 있어서 가장 힘든 일이기에 그것이 사람 안에서 나타나는 일이 가장 능력 있는 일이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것이다.





그 능력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것이다. 예수님께서 사람의 정체성을 십자가에서 보이심으로 그 모습을 보고 사람이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하게 될 때, 사람을 선악의 기준으로 보지 않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원래의 모습 그대로로 보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영광의 힘을 좇은 능력인 것이다.


하나님의 능력은 사람이 바벨탑처럼 위대해지고 높아지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죄인의 형틀인 십자가에서 예수님께서 벌거벗겨지고, 세상 사람들이 사람에게 덧씌워지는 것이 선이라는 기준으로 볼 때 죄인의 모습으로 돌아가신 그 십자가 사건으로 말미암아 인생들이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에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영광이며, 그 영광을 알게 되어 영광을 좇게 되어, 하나님 안에서 능력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우리 안에서도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것에 대하여 자라남으로 세상적인인 나의 모습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하나님의 성품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나를 볼 때, 하나님께서 인생에게 두신 뜻이 세상적인으로 위대해지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본 것처럼. 하나님의 아들이 무엇인지 않고 고백함으로 자신도 그렇게 되는 그것이 바로 진정한 능력인 것이다.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

사람들은 참 많은 선한 일을 한다. 정확히 표현하면 자기가 생각할 때 선하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는 것이지만 말이다. 큰 교회 안에는 여러 조직이 있다. 모든 사람이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많은 경우 자기가 봉사하는 부서를 제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즉 자기가 하는 일이 제일 선하는 이야기다. 뭐 어떤 것이라도 좋지만, 바울 사도가 골로새 교회를 위한 간구에는 선한 일로 열매가 맺어지기를 간구하고 있다.


오늘 날도 어떤 사람은 해외봉사라는 선한 일을 하고, 어떤 사람은 노숙자에게 밥을 퍼 주는 봉사를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장애우를 돌보는 선한 일을 하고, 어떤 사람은 병든 사람을 돌보는 선한 일을 한다. 그런 일들은 분명히 좋은 일이고, 할 수 있는 대로 권장되는 것이 좋다. 하지만 그런 모든 일들은 우리에게 어떤 열매를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선한 일에는 열매가 있어야만 선한 일이 된다는 한정적인 구속을 하려고 하는 이야기는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떤 제자가 부친을 장사 지내고 오겠다고 하니 죽은 자는 죽은 자로 하여금 장사 지내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신 적이 있다(마 8, 눅 9) 장례를 치르는 것과 선한 일을 하는 것은 다르게 보일지도 모르지만, 사람의 일이라는 것에서는 비슷한데, 예수님께서 부친의 장례보다 자신을 따르기를 원하셨던 것은, 세상에 있는 어떤 일이 되었든 간에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에 대하여 교훈이 되어야 그 일이 의미가 있어 지는 것이다.


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에 그 어머니 마리아를 보고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 이다(요 19:26)’라고 말씀 하신 적이 있다. 이는 여러 해석이 있겠으나, 마리아여 당신에게서는 하나님의 아들이 나왔으니 당신의 삶은 온전한 것입니다. 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즉 이것 역시 우리의 삶 속에 있는 여러 가지 일들이 결국은 그 일을 겪는 사람이 더 예수를 닮아가고 그리스도의 성품을 얻어가는 교훈을 주어야 비로소 의미가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골로새 교인들을 위한 간구에 ‘모든 선한 일이 열매 맺게 하시고’라고 간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골로새 교회의 형제들이 행하는 모든 일들이 그들 자신에 예수 그리스도를 더 알아가게 되므로 골로새 교회의 형제들이 하나님 앞에 온전히 열매 맺게 되기를 바라는 간구인 것이다.


만약 누군가가 선한 봉사활동을 하고 예수님을 더 알아 가는 열매는 없이, 선한 일을 했다는 그 사실에만 의미를 둔다면, 그 선한 일을 공개적으로 했던, 비밀스럽게 했던 또한 자랑하던 그렇지 않던 간에  그건 그냥 선한 일을 한 것뿐이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부친의 장례도 예수님을 따르는 것 보다 중요하지 않은 하나님의 마음인데, 노숙자에게 밥 지어 줬다고 하나님 앞에서 대단한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무엇이 선한 일인가? 한다면, 그것은 어떤 일이 되었던 그 일 가운에 있는 사람의 더 예수님을 알게 되었다면 그것이 진정한 선한 일이지, 그저 사회적 약자를 돌보았다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리라 생각하는 것은 공로주의 신앙이요, 하나님 앞에서 공로로 인정받으려 하는 종의 신앙이며, 천국에서의 상급을 염두에 두었다면 그건 악한 장사꾼의 마음과 같은 것일 뿐이다. 하지만 반대로 어떤 악한 일을 보고서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깨닫게 된다면 그것은 오히려 선한 일이 될 것이다.


우리가 흔히 하는 선한 일들로 사회적인 약자를 돌보는 일이 있다. 우리는 그런 일을 하는 것이 중요하고 또 해야 할 때가 있어 하게 되었을 때, 아픈 사람을 볼 때 내가 하나님 앞에 이렇게 병든 자구나 하는 것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하고, 노숙자를 볼 때 '내가 하나님 앞에 이렇게 추한 나그네와 같은 사람이구나!' 라고 깨달을 수 있어야 한다. 그렇듯 살면서 부딪히는 선하고 때로 불미스런 일 가운데서도 우리는 늘 하나님 앞에 자신을 더 깨달아 가는 열매 맺는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이기에 바울 사도가 그렇게 간구한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도 삶을 살아가며 때로는 선한 일이던 또 그렇지 못한 일이던 그 일로 인해서 하나님과 나와의 정체성과 관계를 더 알아가서 나 자신이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열매가 되는 일이 선한 일의 목적이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그저 선한 일을 했다는 것 그것만 있다면 그것은 공로주의 신앙일 뿐이다. 설사 아무런 보응을 기대하지 않고 했다 하더라도 말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 사도는 골로새의 형제들이 그렇게 하나님 앞에서 열매 맺는 성도들이 되기를 간구하고 있는 것이다.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

(주기도문) 다만 악에서 구원하소서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주기도문 Date : 2013. 1. 31. 23:59 Writer : 김홍덕

악(惡)은 무엇일까?

 

마태복음 9장에는 중풍병자를 고치시면서 예수님께서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라고 하시자, 바리새인들이 속으로 ‘이 사람이 참람하도다’라고 생각하는 것을 예수님께서 아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마음에 악한 생각을 하느냐(마 9:4)”라고 하셨다. 또한 마태복음 12장(22절 이후)에서는 예수님께서 눈 멀고 벙어리 된 자를 고치시니 사람들이 예수님을 ‘이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 하니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기적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의 힘을 빌어 한 것이라 폄하할 때에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을 향해 말씀하시기를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마 12:34)”이라고 말씀 하신다.

 



 

우리는 위의 두 예에서 예수님께서 분명하게 악이라고 규정하는 사람들의 생각이 있는데, 이것은 육신을 가진 사람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은 참람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또한 사람이 귀신의 힘을 빌려서 병을 고칠 수는 있어도 하나님을 대신해서는 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을 예수님께서는 악한 생각이라고 하셨다. 이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부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 예수님을 대신하여 이 땅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면서 사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예수님처럼 기적을 행하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가 본받아야 하는 예수님의 모습은 기적을 행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하나님의 아들로, 또한 사람을 구원하는 그리스도의 직임을 감당하며 사는 것이 예수님과 같이 행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에 실재로 많은 기적을 행하실 뿐 아니라,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기도 하고 물위로 걸으시기도 하셨지만 예수님은 한번도 제자들이나 사람들에게 그것이 그리스도의 조건이라고 하신 적은 없다. 그러시면서도 자신의 모든 것은 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일 뿐 아니라, 예수님보다 더 큰 일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요 14:12)

 

이것은 예수님을 대신해서 우리가 기적을 행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 아니다. 그게 예수님의 일이고, 우리가 그런 예수님을 대신하여야 예수님을 믿는 것이라면, 우린 오늘 다 예수 믿는 것 때리 쳐야 할 것이다. 누가 회사 일이나 가사 일처럼 기적을 일으키는 것을 일로 할 수 있겠는가? 그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의 성품을 좇아 살게 되므로, 십자가 밑에 섰던 백부장이 예수님을 보고 ‘그는 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하며 예수님을 믿었듯이, 우리 중에 한 사람, 평범하고 기적을 일으킬 수도 없고, 특별히 신학을 하지도 않았으며, 세상적으로 전혀 성공하지도 않은 사람, 즉 인간이라는 그 본연의 모습 그 외에는 예수님처럼 흠모할만한 것이 전혀 없는(사 53:2) 사람이 한 사람을 볼 때, ‘너가 과연 하나님의 아들이구나!’ 고백하게 할 수 있는 그 한 사람이 되는 그것이 바로 예수님을 대신하는 일인 것이다.

 

왜냐하면, 십자가에 벌거벗겨지신 모습으로 돌아가신 그 예수님을 볼 때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것이 그것이기 때문이다. 세상이 주는 모든 의복, 즉 신분과 학력과 재력과 권력을 다 내려 놓은 모습이 바로 벌거벗은 모습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날의 큰교회는 그 반대로 가고 있다. 목사를 청빙함에 있어 신앙고백을 보는 것이 아니라 약력을 보며, 사람이 변하는 곳이 교회가 아니라 교회의 겉모습이 자꾸 화려해져야 교회가 제 일을 한다고 여기고 있다는 것이다.

 

만약, 오늘날의 큰교회와 큰교회에 시무하는 목사들을 보고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싶은 지경이 되려면, 교회의 그 모든 화려함도 다 빼고, 건물도 조직도 재정도 다 빼고 난 모습으로 있어도 교회가 되고, 목사도 신학박사라는 약력에서부터 자기의 모든 업적을 다 버리고 런닝 차림으로 다녀도 그를 볼 때 말씀을 듣고 싶고, 그를 예수님의 제자요, 예수님의 직분을 대신하는 사람이요, 예수님의 성품을 가진 자로 인정 받을 수 있어야 그것이 바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오히려 그런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여기는 모든 생각이 바로 악이다.

 

예수님 당시에도 유대인들의 사고방식 안에는 초라한 모습의 예수가 어떻게 하나님 만이 하실 수 있는 사람의 죄를 사할 수 있으며, 귀신을 내어 쫓을 수 있느냐?라며 생각하는 그 생각을 예수님께서는 <악>이라고 하셨다. 만약 화려한 옷을 입은 대제사장이 그랬다면 그들은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하찮은 목수의 아들이 거름뱅이 같은 모습으로 다니다가 사람의 죄를 사한다고 하니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그 꼬라지를 하고 하나님을 아버지라 하니 더 화가 난 것이다. 그런데 그 생각이 바로 악한 생각인 것이다.

 

그리고 그 때나 지금이나 그런 생각은 동일하다. 사람 안에서 사람이, 그것도 세상적 가치관 안에서 전혀 경쟁력이 없는 사람이 하나님의 성품을 닮은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 하나님을 대신하는 구원자의 역할을 하여 사람들의 죄를 사하여 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정죄하는 생각은 역사와 함께하고 있다. 그것이 바로 <악>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치실 때에 <다만 악에서 구원하소서>라고 기도하라고 하신 것이다.

 

우리가 빠지지 말아야 할 그 악함, 즉 육신을 가진 인생이 하나님을 대신하여 사람에게 안식과 죄 사함을 줄 수 없다는 생각은 예수님의 모든 것을 부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니, 하나님은 육신을 가진 인생이 원래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하나님의 아들로 예비되었고, 그렇게 평범한 육신을 가진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을 보이시기 위하여, 자기 아들을 평범한 사람의 모습으로 이 땅에 보내셔서 십자가에 못 박아 가면서 까지 말씀하셨는데, 평범한 인간은 하나님을 대신할 수 없다고 하니, 그것이야 말로 선하신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요, 예수님을 부인하는 악한 생각이요 적그리스도가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주기도문에 나오는 <다만 악에서 구원하소서>라고 기도하라 하심은, ‘인생이 세상적으로 위대해져야 그리스도의 직분을 감당할 수 있다고 여기는 생각과, 연약하고 볼 품 없는 모습으로는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없다고 여기는 모든 생각에 우리를 구원하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이다. 세상에 <악>은 오직 그것 하나 밖에 없다. 오직 하나님 한 분만 선하신 것처럼 말이다.

 

(계속)…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