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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이유가 있었는데 그것은 스스로 유대인의 왕이라고 답하셨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심문하던 빌라도가 봐도 도무지 왕이 될 만한 것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그저 초라한 사람이었는데도 스스로를 왕이라 하신 것이다. 그것으로 당시 세상의 모든 힘이었던 로마의 왕을 대신한 빌라도 앞에서 완벽한 죄인이 되심에도 그렇게 하신 것은,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 역시 유대인의 왕이 되어야하기 때문이었지, 로마로 가서 이스라엘을 해방하시려고 하신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세상의 경쟁력이 없어서 죄인이 되셔서 십자가에 달리셨고, 그렇게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바로 교회의 머리라는 것이다. 그것은 교회가 세상에서 경쟁력을 가짐으로 기름 부음 받은 그리스도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의 큰 교회들은 그 반대의 길을 가고 있다. ‘교회에서 사용하는 것은 무조건 세상적인인 것 보다 좋아야 한다.’, ‘거룩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교인들이 예배에 참석하고 기도하면서 공부하여 좋은 대학에 가면 사람들이 부러워하여 그것을 보고 교회에 올 것이라 생각하고, 더 좋은 시설을 갖추어야 사람들이 올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로마의 생각이다. 예수님은 그렇게 교회의 머리가 되신 분이 아니시다.


그렇듯 종교적인 기준과 세상적인인 기준으로 볼 때, 잘 할수록 예수를 잘 믿는 것이라 여기는 것은 십자가를 피하는 길이 될지는 몰라도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의도와는 사뭇 다른 모습임에도 오늘날의 큰 교회들은 그렇게 길을 정해서 가고 있다. 


물론 교회가 좋은 건물을 가지는 것이야 좋다. 또 세상적인으로 성공하는 것이야 얼마나 좋은가? 하지만 그건 그래도 되고, 그렇지 않아도 그리스도인이어야 하는 것이지, 그것이 더(better) 예수를 잘 믿는 것이라고 하는 것은 기본 신앙관에 문제가 있는 것이고, 그런 교회는 예수님이 머리가 되시는 교회라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예수님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신다는 것은 교회의 모든 일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이나 짐승이나 다, 몸의 모든 기관이 전부 머리가 가진 생각과 뜻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몸의 모든 근원은 다 머리다. 머리의 생각대로 움직이고, 머리의 뜻대로 삶을 사는 것이다. 그게 머리고, 또한 예수님께서 머리가 되신다는 것은 교회의 모든 행사가 다 그리스도로 말미암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리스도로 인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당연히 십자가에서 인간의 실존을 보여주신 그 그리스도를 말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적인인 가치관으로 조직된 교회의 조직이나, 교회 안에서 존경 받는 장로라는 직분이 사회적인 역량이 뛰어 날수록 좋다고 암묵적으로 인정하는 세상에 오염된 가치관으로 다스려진다는 것은 그리스도가 머리가 아니라 세상적인인 가치관이 머리가 된 교회인 것이다.


머리가 되신다는 것은 또한 그 안의 모든 일도 그리스도의 생각과 같아야 한다. 그렇다는 것은 교회의 모든 예배와 모임과 나눔과 행사와 일이 무엇과 같아야 할 것인가를 일러주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직임이 무엇인가? 예수님의 이름의 뜻이 무엇인가? 


그러므로 교회의 모든 것은 그 공동체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자신의 모습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믿음의 구원을 받은 자요, 또한 공동체 안에 서로를 볼 때에 서로의 모습을 통하여 예수님의 뜻을 알아갈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교회의 머리가 그리스도이시니 그런 것이다. 그게 교회의 가장 기본인 것이다. 그런 차원에서 선교도 하고 봉사도 하는 것이지, 선교하고 봉사하는 것이 예수 믿는 사람의 의무인 것처럼 강요하는 것은 잘못되었다. 


그저 그 사람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본성이 생명으로 자라기만 하면, 자기가 아무리 부인하고 거부한다 해도, 예수님이 하신 것과 같이 살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개가 고양이처럼 ‘야옹’ 하겠는가? 아무리 용을 써도 ‘멍멍’할 뿐이듯, 자기 안에 예수님의 본성이 자리하게 되면 자기 목이 달아나도 예수님처럼 살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 일이 일어나는 곳이어야 그리스도가 머리 되시는 교회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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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는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했다. ‘먼저 계셨다’라는 과거형이 아니라 ‘먼저 계시고’라 했다. 현재형, 즉 지금도 그런 분이라는 말씀이다. 또한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함은 세상의 모든 만물이 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즉 그 세계 안에서,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로서 의미를 가질 때, 비로소 서게 된다는 말씀이신 것이다.


그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가 되신다는 말씀을 하고 있다. 또한 그가 교회의 근본이라 말씀하신다. 이것은 오늘 날 이 시대의 큰 교회들이 생각하고 또 생각해봐야 할 말씀이다. 머리라는 것은 뜻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외형적으로도 그 정체성을 나타낸다. 


모든 동물에게 있어 머리는 그 정체성의 백미인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머리가 그리스도라는 것은 교회의 정체성이 그리스도에게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그 뜻이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의미이다. 예로부터 기름 부음을 받는 신분은 3가지였다. 선지자, 왕, 그리고 제사장이었다. 


그러므로 예수님도 하나님 나라의 왕이요, 제사장이요, 선지자이신 분이라는 말씀이다. 하나님 나라에 관하여 말이다. 눈에 보이는 세상은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이 모든 만물은 그리스도가 나오는 것을 고대하고 또한 그것을 위하여 창조된 것이라고 이미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무엇으로, 무엇에 관하여 왕이요 제사장이신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향하여 두신 하나님의 목적에 관하여 그러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두신 뜻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사람, 그리고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며 사는 존재로 살게 하시기 위하여 만드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산다는 것이 곧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라는 말씀이다. 아들은 아버지의 본성이 육신으로 나타난 존재이기 때문이다. 예수님 또한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과 의가 성육신되신 분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 되신 것이고, 예수님의 그러하심을 보고, “나도 그런 존재이구나!” 이렇게 발견되는 사람마다 다 그렇게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이고 예수님은 그 나라의 왕이요, 그렇게 구원하는 제사장이신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떤 모습으로 그리스도이심을 나타내셨는가? 그것은 한마디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보이신 것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니, ‘그가 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을 백부장이 하게 되었던 것 같이, 우리도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이 내 모습이구나!' 인정되어지면 나도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이다. 


그게 믿음인 것이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의 모습이 자기 모습으로 비쳐지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받아들이는 것이고, 수용하는 것이지, 신념을 가지고 “믿습니다!!” 외치면서 믿으려 애쓰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은 무엇인가? 우선 십자가는 누가 달리는 곳인가? 그곳은 죄인이 달리는 죄인의 형틀이다. 그러므로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 자신을 발견하는 사람은 우선 자신이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일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죄가 없는데 어떤 법에 의하여 죄인이 되었는가? 그것은 그 당시 유대인들의 법과 로마의 법에 의하여 죄인 되신 것이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죄인이라 한 이유가 무엇인가? 초라한 꼴로 하나님의 아들이라 했기 때문 아닌가?


예수님께서는 심문을 받으실 때에 다른 모든 것에는 답변하지 않으시다가, 단 두 가지 질문에만  답하셨다. 그것은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라는 유대인들의 질문과,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하는 빌라도의 질문 그 두 질문에만 답하셨다. 


사실 다른 질문들, 성전을 사흘 만에 짓겠다는 것과 같은 것은 당시 최고형인 십자가형을 받을 만한 일은 아닌데도 그런 것에는 답변하지 않으시고 하필 꼭 답변하면 십자가에 달릴 수밖에 없는 두 가지 질문에만 답을 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네가 찬송 받을 자의 아들이냐?” 물으실 때, “Yes!”라고 답하면 죽는다는 것을 아시면서 그렇게 하셨는가? 그 외에 다른 어떤 고발에도 답을 하시지 않던 예수님께서 말이다. 





그것은 육신을 가진 모든 인생은 스스로도 부끄러워하고 감추고 싶어 하는 육신의 연약함, 발가벗겨지면 부끄럽고, 자기의 곤고함을 자신의 손과 발로 구원하지 못하며, 자신의 정체성을 머리로 해결할 수 없는 모든 사람은 다 예수님께 적용한 죄목으로 다 십자가에 발가벗겨져서 손과 발에 못 박히고 머리에 가시관이 씌워질 죄인이 될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 예수님이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분이라는 말씀이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아들 삼으신 법이라면, 오늘날 예수님을 믿고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살아가길 원하는 사람들의 정체성도 그러해야 한다. 


그렇다는 것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심판한 것이 ‘초라한 꼴에, 창녀와 세리와 어울리던 사람이 어디 감히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느냐? 우리처럼 율법도 잘 지키고 해도 될까 말까 한데 말이야’ 라는 기준이었고, 그런 기준 아래에서는 죄인이 되신 것이었다. 


그렇다면 오늘날도 교회가 지키라고 하는 모든 행위 규범들을 정말 솔직한 마음으로 진실 되게 예수를 믿는다면 그렇게 살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고, 그것을 안다는 것은 그 법아래 내가 죄인임을 깨닫게 되는 것이며, 자신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처럼 죄인으로 인정이 될 것이다.


“왜 교회의 가르침을 못 지키느냐?”, “지금이 어디 율법의 시대냐?’할지 모르지만, 구약이던 신약이던 간에 행위 규범으로 받아 지켜야 할 것으로 받으면 성경의 어디가 되던 율법이요, 반대로 성경을 통해보니 내가 하나님의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자로구나 깨달아져서 자신의 정체성을 고백하게 되면 복음이 되는 것이요, 그렇게 죽은 자를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다시 살리시듯 살리셔서 행위 규범이 아니라, 생명의 법으로 살게 하시므로, 성경에 기록된 모든 행동양식이 규범이나 규칙이 아니라, 생명의 본성이 되어 금할 수 없는 것이 되는 것이 바로 복음이다.


그런데 오늘날 큰 교회들의 가르침은 모든 것을 Have to로 가르치고 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이렇게 해야 한다’, ‘천국에서 잘 살려면 이래야 한다.'라고 가르친다. 그 가르침은 한마디로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깨끗한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 + 종교적 규범인 기도와 말씀 그리고 예배와 봉사와 같은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무엇을 하느냐?’를 먼저 보시는 분이 아니라, “너는 누구냐?” 하는 것을 보시는 분이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존재의 신이시기에 하나님 앞에 서는 사람의 존재가 무엇인지에 먼저 관심을 두시는 것이다. 그 하나님 앞에서 인간은, “율법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지킬 수 없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고백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에 달리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유대인의 율법으로 죄인 되였듯, 나도 그렇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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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 사도는 골로새에 있는 신실한 형제들에게 편지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신가? 하는 것에 대하여 이어가고 있다. 우리는 2,000년 전에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셨기 때문에 직접 볼 수 없지만, 그 당시만 해도 예수님을 본 사람들이 제법 있었던 시절임에도 바울 사도는 그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를 이야기하고 있다. 


즉 그것은 예수님이 육신으로 누구의 아들이었는지, 어떤 생김새였는지, 어떤 성격이었는지 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오히려 사도바울 사도는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이름은 크게 3가지이다.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임마누엘이다. 예수라는 이름은 우리의 주민등록증에 있는 이름과 같은 이름인데 그 의미가 “죄에서 구원할 자”라는 의미이다. 이는 예수님의 역할에 대한 이름이다. 그리고 그리스도라는 것은 신분에 관한 이름이다. 즉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의미의 그리스도는, 당시 기름 부음을 받는 3가지 신분이 모두 예수님의 신분이라는 의미이다. 그 3가지 신분은 왕, 선지자, 제사장이다. 그리고 ‘임마누엘’은 상태적인 이름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분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예수님(the Christ)의 정체성을 살펴보면 예수님이라는 사람이 기름부음을 받아야 될 수 있는 신분을 가지신 분으로 왕이요 제사장이요 선지자시라는 의미가 되고, 그것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에 그러하다는 의미이다. 즉, 하나님으로 인하여 사람들을 죄에서 구원하는 분이요, 하나님 앞에서 왕이요, 제사장이요, 선지자라는 이야기이다. 그게 임마누엘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이 세상의 가치기준에 관하여, 또한 정치적으로 왕이 되시는 분이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물론 실패해야만 그리스도라는 이야기는 더욱 아니다. 


세상에서의 성공과 실패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다 보면 있을 수 있는 일일 뿐이고, 또한 그런 인생의 생사고락은 모두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살게 하는  경륜의 일환일 뿐이지 그것이 우리가 사는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있어 구주가 되시는 것은 우리도 그와 같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이셨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은 육신으로 오신 것은 예수님처럼 우리도 동일한 육신을 가지고서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임마누엘) 그리스도(a Christ)로  살아가게 될 수 있다는 말씀인 것이다.


그러므로 육신을 가진 인생이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왕이요 제사장으로 살아 또한 인생으로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을 얻게 하는 삶을 살게 하도록 하나님의 아들이 직접 육신으로 이 땅에 오신 것이기에 우리도 그렇게 되어야 하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인생의 목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사람에게 있어서 모든 것이라는 말씀을 바울 사도가 골로새의 신실한 형제들에게 편지하고 있는 것이다.


흔히들 큰 교회에서 예수님에 대하여 노래하고 이야기할 때, 모든 것 되시는 주님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어떤 의미에서의 모든 것인가는 좀 시각이 어긋나 있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큰 교회에서 이야기하는 모든 것이라는 것은 다분히 사람이 살아가면서 필요한 모든 것이라는 의미가 짙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큰 교회들의 가르침이 지금과 같이, 육신의 삶에 속한 재물과 건강과 신분에 관한 것이 잘 될수록 하나님 기뻐하신다고 가르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것이 잘못되어야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의미는 더더욱 아니다. 그런 것은 다 우리의 삶이 가진 목적을 구현하는 표현양식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므로 목적을 먼저 분명히 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모든 것이 된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예수님은 단 하나가 되신다는 이야기일 수 있다. 그것은 우리가 존재하는 목적, 우리가 살아야 할 목적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신 것이다. 자동차에 아무리 부품이 많아도 ‘안전한 운행’이라는 그 목적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동차에 있어서 안전한 운행은 모든 것이 되는 것이다. 


그것과 같이 예수님은 우리 인생의 목적,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신 목적의 표상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우리 삶의 모든 것이 되시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먹든지 마시던지 주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고 하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인생들에게 있어 유일한 목적이요 또한 모든 것이 되신다는 것은 세상의 모든 만물의 근원이 되신다는 말씀이다. 


김춘수 시인의 ‘꽃’이라는 시에는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했다. 그것은 어떤 것이 내가 그 의미를 부여해 주었을 때, 또한 내가 인식할 그 때에 꽃이 되던 세상이 되던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창세기도 그렇다. 세상이 아무리 먼저 창조되었다 해도, 내가 태어나서 인식하지 못한다면 그건 적어도 나에게 세상이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의 모든 만물이 나에게 의미가 있어야 비로소 그 존재의 의미가 생기는 것이다. 


그렇다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가지는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이야 두말 할 것도 없이,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아들로 살게 하는 것을 위하여 있는 것이다. 세상에 실존하는 모든 것은 다 사람이 다스리라 하셨다. 그것은 다른 의미로 보면 사람이 자기에게 유익하게 사용하라는 의미이다. 그 사람에게 있어 최고의 유익이요 목적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사는 것이라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살게 하는 것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로마서에서 이르기를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롬 8:19-21)

이라 하셨다. 


다시 말해서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피조물은 다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즉 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진 사람이 되는 것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며, 또한 한 사람에게 모든 피조물들이, 자신이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살기를 하나님께서 바라신다는 인식이 있을 그 때 비로소 그리스도가 모든 것 되신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이 모든 것의 설계도와 같은 분이시기에, 그 분은 세상의 모든 것이 된다는 것이며, 모든 만물보다 먼저 되신 것이라 하시는 것이다. 더 깊이 말하면 <그리스도>라는 개념, 즉 그 정체성이 먼저 있고 나서, 그것을 달성하기 위하여 세상의 모든 만물이 존재하게 된 것이기에 그리스도는 세상의 어떤 것 보다 먼저 된 분이라는 말씀인 것이다. 


이는 마치 세상의 모든 통신 기기는 그것이 언제 발명되었든 간에 사람이 서로 연락하고자 하는 마음이 가장 먼저 있었기 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 즉 사람이 연락하고 싶은 마음이라는 것이 모든 통신기기의 존재 목적이요, 사람에게 있어 그리스도와 같이 모든 통신 보다 먼저 있었던 것 같이,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의 모든 만물과 그것을 인식하는 모든 사람에게 두신 하나님의 존재 목적이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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