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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자력 발전소의 디아코니아

Category : 김집사의 뜰/복음 담론 Date : 2013. 4. 1. 13:32 Writer : 김홍덕

원자력 발전소에서 전기를 발전 시킬 때 전압이나 전류는 어느 정도 일까? 전기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정확한 값도 모르고 인터넷을 뒤져봐도 뭐시기 저시기 적혀 있는 내용을 내가 다시 해석해서 글로 쓰기에게는 지식이 턱없이 부족하다. 하지만 내가 한가지 아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적어도 220V는 아니라는 것이다. 아마 우리가 가정에서 사용하는 전압의 100배 이상은 되지 않을까 싶다. 원자력은 굉장한 에너지다. 그것으로 많은 폭탄을 만들어 놓아서, 그것을 다 쓰면 지구를 몇 십 번이나 초토화 시킬 수 있다고 하기도 한다. 그 정도로 폭발력이 있는 에너지가 바로 <원자력>이다. 그것을 가정에서 사용하게 만들려고 하면 그것이 참 대단한 일이 아니겠나 싶은 것이다.

 

(영광 원전 6호기 모습)

 

원자력 발전소에서 발전된 엄청난 에너지를 우리 가정에서 사용할 수 있게 만드는 과정에서 하나님을 아는 것, 그리고 그것을 전하는 것에 대한 교훈을 얻어본다. 만약에 바울이라는 사람이 복음을 전함에 있어서, 자신이 보는 정도를 보아야 예수를 믿는 것이라고 전했다면, 아마 지금 우리나라에 교회를 다니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될 수 있는 사람이 당시에도 몇 없었을 것이니, 그게 어떻게 이 동양에까지 전해질 수 있었겠나 싶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바울은 자신이 보는 신앙 안에서의 계시가 어떠하던 간에 사람들에게 전할 때에는 원자력으로 발전된 전기를 가정용으로 공급하듯 누구나 누릴 수 있는 말씀으로 전했다.

 

그것은 내용을 축소하거나 감추었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자신 안에 있는 하나님에 대한 열정과, 안목을 복음의 기준으로 삼지 않고, 오직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기준, 즉 누구라도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는 자리, 그것이 바로 복음이라는 것을 전했던 것이다. 그렇게 수고한 바울, 요즘 말로 <고객만족>이라는 관점에서 복음을 전했던 것이다. 자기가 볼 때 너무나 답답한 인생들의 모습에도 복음 전파라는 그 목적으로 인하여 모든 수고를 감당했던 것이다. 마치 수 만 볼트 전기를 가정용으로 바꾸는 수고와 같이 말이다.

 

그리고 이 복음의 신앙은 씨를 심고 가꾸는 것이지, 나무를 옮겨 심는 것이 아니다. 나무는 그 모든 역량을 씨에 담는다. 그리고 그것을 전한다. 그리고 그것이 자라서 나무가 되는 것이지, 처음부터 나무를 따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생명은 다 그렇다. 그 사람 안에 하나님의 말씀인 씨를 심듯 전하는 것이 바로 복음을 전하는 삶인 것이다. 모든 인생은 다 흙과 같으니, 흙에 씨를 심는 것과 같이 그 속을 갈고 파듯 함께 어울리는 삶으로서 씨를 심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것을 가꾸시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디아코니아다. 그리고 그것이 내가 배워야 할 신앙의 세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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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게 절을 해 보았는가?

Category : 김집사의 뜰/복음 담론 Date : 2013. 3. 28. 15:50 Writer : 김홍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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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에 개봉한 영화 <신기전>의 마지막 장면에는 왕이 나라를 구한 후 돌아서서 가는 주인공 남녀의 뒤에서 그들에게 절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자 옆에 있던 신하들이 만류하지만 왕은 “사신에게도 4배를 하는데 내 백성에 절을 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하며 한마디 더 한다. “짐은 왕이요, 그대들은 황제니라” 라고…

 

사람이 사람을 경배한다는 것은 쉬운 이야기가 아니다. 사람이 사람을 무엇으로 보느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사람을 볼 때, 자기 안에 어떤 작은 기준이라도 있다면 그 기준으로 상대를 심판하게 될 것이다. 즉 잘잘못을 따지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에서 용서받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어쩌면 그 사람들 사이가 어떠하던 그 일이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일지 모른다.

 

하지만 자기 안에 사람을 보는 기준이 없어진다면? 사람이 사람에게 절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더욱이 사람이라는 존재가 하나님께서 거하시기 위한 성전과 같은 존재라면 이야기는 더더욱 쉬워진다. 옛날 유대인들은 하루에 세 번씩 성전이 있는 방향을 향해서 절을 했는데, 그것은 그 안에 하나님이 계신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람 안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심을 믿는다면? 그렇게 사람을 수용해 보았다면 우리는 그 사람을 위하여 절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신기전에서 왕이 백성에게 절하는 장면은 신분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지만, 나라의 근본이 백성에게 있다는 본질을 안다면 그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수 있다. 그렇듯이 우리가 사람의 외모와 신분에 관해서 어떤 기준을 가지고 보는 것이 아니라, 나라의 근원이 백성이라는 본질처럼, 사람이라는 존재가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기 위한 존재라는 것을 알고 또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이 그 사람 안에 거하심을 안다면 절을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 숭배가 아닌 경배로서 말이다.

 

우리가 대통령처럼 권력이 있는 사람을 만나도 머리를 숙이는데, 한 사람이 진정 그리스도의 인격으로 살아가는 것을 본다면 마음에서 우러나서 경의를 표하지 않겠는가? 그렇게 사람에게 경의을 표해 보았는가? 그것은 삶에 있어 진정한 행복 중의 하나이다. 그럴 수 있는 사람을 만났다는 것이 말이다. 내게는 그런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그것이 신앙 생활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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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우리가 예수님처럼 병자들을 고칠 수 있을까? 답은 "그렇다"이다. 아니 그래야만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가 예수님과 같이 병자를 고치는 기적을 일으킬 수 있을까? 그것을 안다는 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왜 병자들을 고치셨는가? 하는 것을 아는 것이 될 것이다.


앞에서 우리는 영지주의라는 것을 생각해 보았다. 영지주의의 출발은 사람들이 예수님과 같이 해 보려고 하는데 안 되기 때문에 생겨난 타협점과 같은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예수님과 같아져야 하는 것이 무엇인가? 아니 우리가 예수님의 무엇을 따라가야 하는가? 하는 것에 대하여 알지 못하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하셨던 것과 같이, 물 위로 걸어 다니고, 5,000명을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배 불려 먹이는 것을 그 모양 그대로 따라 하기를 원하셨다면, 우리를 인간으로 만드실 것이 아니라 다 천사나 영으로 만들었어야 할 것이다. 어쩌면 영지주의의 생각도 그와 같은 맥락일지 모르겠다. 그래서 예수님을 영으로 또한 육신이 없는 신으로 간주했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기적을 보이심은 그것을 따라 하게 하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러한 기적을 통해서 우리의 모습이 발견되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어떤 죄악과 어떤 영적인 질병 가운데 있었는지를 육신의 질병을 통해서 알게 하시고, 예수님께서 그 육신의 질병을 고치심으로 예수님께서 육신의 질병을 고치시듯 우리의 영적인 질병을 고치시는 분이라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하여 이 땅에서 사람들의 병을 고치신 것이다. 


그리고 진정한 기적은 육신의 병을 고침 받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자기 자신의 정체성이 병든 것을 고침 받아서 자신이 누구인지, 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게 되는 그것이다. 진정한 기적은 사람이 변하는 것이고, 진정한 치유는 그 존재의 정체성이 회복되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모든 치유의 기적은 그것이 사실이었다는 것을 믿는 것도 중요하지만 진정한 치유는 영적 치유이고 존재의 회복이라는 것을 알고 예수님의 치유의 사건들 속에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여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병든 모습이었던 것을 치유 받는 것이 핵심이고 예수님께서 이 땅에 병자들을 고치시며 우리에게 보여주신 교훈이요, 말씀인 것이다. 


예수님의 기적이 교훈을 주는 것에만 목적을 두었는가? 그것은 예수님의 기적을 과소평가하는 것은 아닌가 싶을지 모르겠지만,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있으신 분이시다. 즉,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어떤 일을 하셨던 그것은 다 각론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예수님의 기사는 단 하나 하나님께서 주신 그 목적을 달성하시기 위하여 행하신 것뿐이다. 즉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주신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병자도 고치시고, 성전의 상도 엎으시고, 자신의 목숨도 버리신 분이 예수님이시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행하신 모든 기적도 그 목적을 위하여 행하신 것이지, 그 행사, 그 기적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기적을 얼마나 따라 할 수 있느냐가 신앙의 척도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 즉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신 뜻을 예수님의 기적과 말씀과 삶을 통하여 자신의 이야기로 받느냐 하는 것이 바로 신앙의 척도이고 믿음인 것이다.


분명히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서 많은 병자를 고치셨다. 맹인도 앉은뱅이도, 귀머거리, 중풍병자, 귀신 들린 자 등 많은 병자를 고치시고 나중에는 죽은 나사로도 살리셨다. 그러면 그 많은 병자들은 어떤 의미에서 우리에게 교훈이 되는 것인가? 그것을 하나하나 알아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성경에 나오는 모든 이야기는 오늘 나의 이야기로 받아야만 의미가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경을 객관적인 사실로 믿는 것에 그치지 않고, 오늘 나의 이야기로 듣는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신앙적인 관점이다. 만약에 성경에 나오는 사실을 객관적인 사실이었다고 믿는 것이 믿음이라고 생각한다면, 나사로와 같이 그 사건의 당사자에게는 의미가 있지만 그것을 보는 오늘 나에게는 그것을 사실로 믿는다는 의미 외에, 나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 


즉,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치셨다는 것을 믿는다는 것을 믿음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나의 믿음과는 상관이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내가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사실인 것은 사실이다. 예전에 사람들이 천동설을 신앙처럼 믿고 있었지만, 사람들이 천동설을 믿고 있을 때에도 지구가 돌고 있었던 것과 같이, 세상 사람들이 다 예수님의 기적을 믿지 않아도 그것이 사실이면 사실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믿는다는 것을 믿음의 본질이라 할 수는 없다. 오히려 진정한 믿음은 예수님의 모든 치유의 기적이 오늘 나에게 의미가 있게 다가 올 때 그것이 예수님을 믿는 진정한 믿음인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병자들의 병을 고치신 것이 그 병자만을 위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사로를 살리심이 어디 나사로와 마르다와 마리아를 위한 것인가? 그것이 아니지 않는가?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쳤다는 것을 사실로 믿는 것을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나사로를 위해 나사로를 고치셨다고 믿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다. 


즉, 예수님이 기적과 같이 병을 고치셨다는 것을 실재 있었다고 믿는다는 것만을 믿음이라 하는 것은 그 사실을 믿는 것은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예수님을 믿는 나의 믿음은 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육신이 되었든, 아니면 어떤 영적인 의미에서든지 오늘 나의 어떤 병이 예수님으로 인하여 치유가 될 때, 그 때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병자들을 치유하셨던 것이 나에게 의미가 있고, 그 때 예수님을 믿는 분명한 믿음이 생기는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생각해보면 예수님께서 우리의 육신이나 고치자고 오신 분이 아니시기에 진정한 예수님의 치유는 우리 육신의 질병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영이 하나님 앞에서 어떤 문제를 가지고 있는 것을 육신의 병을 치유하심으로 예수님의 직임, 즉 사람을 구원하고 회복하게 하시는 것을 보이시고 설명하시기 위한 사역이신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예수님의 모든 치유와 기적도 다 비유인 것이다.


사실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은 늘 본질이라는 것이 있다. 자동차의 본질이 외형에 있는 것이 아니다. 자동차의 본질은 운송이라는 본연의 목적이 본질인 것이다. 사람을 운송하는 것, 사람이 원하는 곳에 편리하고 빠르게 가는 것이 자동차의 존재 목적이고 그것이 자동차의 본질이다. 현대적인 디자인이나 평안함 그리고 첨단 기능과 같은 것은 다 운송이라는 자동차의 목적을 위하여, 그 목적으로 인하여 발생된 기능인 것이다. 그리고 그런 것이 아무리 좋아도 운송이라는 목적을 이행할 수 없다면 그것은 죽은 것이다.


이렇게 세상이 본질이라 할 수 있는 내용과 그것이 표현된 외형적인 형식을 가지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의 성품과 관련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영이시기 때문에 표현양식이 필요하셔서 세상을 만드신 것이다. 그렇게 세상의 모든 것과 하나님과의 관계성이 창조의 섭리로 작용했기 때문에 그 섭리 안에서 만들어진 세상의 모든 것은 다 내용과 형식이란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피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고치신 것 역시 그것은 어떤 것에 대한 표현 양식인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몸과 삶이 영이신 하나님을 표현하기 위하여 창조된 하나님의 표현 양식이기 때문이다. 그 표현 양식을 치유하셨다는 것은 분명히 본질에 대한 메시지를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그렇게 본질에 대하여 설명하기 위하여 형식을 다루는 모든 것을 비유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예수님의 모든 치유는 또 하나의 비유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비유의 목적, 즉 본질이자 내용이 무엇인가 할 때, 그것은 우리의 영적 치유에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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