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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몸이 어떤 나라에 있다고 그 나라 국민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 나라의 의를 자기의 의로 여길 때 비로소 국민이 된다는 의미와 같은 것이다. 실재로 한 나라의 국민이 된다는 것은 그 나라가 의로 여기고, 그 나라가 추구하는 의와 이익과 선에 동의하는 것이 입증될 때 국민이 되는 것이다. 그것에는 피부색이나 나이나 성별과 같은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즉 할례라는 육체적인 증거가 유대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으로 시작된 세계가 있는데 그 세계의 시작이 자신에게 있는 사람이라야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에 속한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교회에 다니면 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겠지만, 교회는 형식이다. 실제는 교회에 속한 사람들 안에 동일하게 인정되는 어떤 의가 있는데 그것이 자신의 의로움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의로움이라는 것은, 그것으로 말미암아 살고, 그것을 위하여 살며, 그것에 맞으면 선이 되고, 그것에 반하면 악이 되는 모든 것의 기준이 바로 <의(義)>인 것이다.


그러면 아브라함의 세계는 어떤 것인가? 아브라함으로 시작된 것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 바로 이 세계의 시작인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는 아브라함으로 시작된 어떤 시작으로 비롯된 세계라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라는 지방에 살았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찾아 오셨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찾아 오실 때 아브라함의 이름은 아브라함이 아니라 아브람이었다. 아브람이라는 이름의 의미는 “위대함의 아버지”라는 의미이다. 그런 아브람에게 하나님께서 오셔서 “너는 네 본토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창 12:1) 하시는 그 말씀에 순종하여 자기의 자리를 떠난 사람이고, 아브라함의 세계는 그렇게 시작이 되었다.


아브라함의 그 시작이 바로 아브라함의 세계가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의 시작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에 속하려 한다면 아브라함의 이 시작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본토 아비 집을 떠나는 일> 그것이 있어야 아브라함으로 시작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가 있게 된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으로 시작된 이 세계는 어느 곳을 떠나서 어떤 곳으로 가는 세계이다. 하나님은 위대함의 아버지인 아브람에게 찾아 오셔서 “네 본토 아비 집을 떠나라” 하셨다. 이름이 위대함의 아버지인 아브람에게 본토 아비집이라는 곳은 아브람에게 “위대함의 아비”라는 이름을 지어주는 가치관을 가진 조상들이다. 즉, 위대함을 좇는 세계가 아브람에게 하나님이 찾아 오셨을 때 아브람이 거하던 세계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곳을 떠나라 하심은 <위대함>을 추구하는 세계에서 떠나라는 것이다. 그것이 시작 중의 시작인 것이다.


위대함이라는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본래 자신의 역량 이상으로 강해지고 위대해지는 것을 의로움으로 여기는 것을 말한다. 이 아브람이 나오는 창세기 12장의 앞장인 11장에는 유명한 바벨탑 사건이 나온다. 바벨탑 사건은 한마디로 사람들이 스스로 하늘에 오르려고 한 사건이다. 어떻게 하늘에 오르려 했는가 하면, 흙을 구워 벽돌을 만들고 그것을 쌓아서 하늘에 오르려 했다. 


흙을 구워서 벽돌을 만든다는 것은 사람을 단련시킨다는 것이다. 사람이 흙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이 흙을 연단시켜서 단단하게 만든 벽돌은 바로 사람을 위대하게 만들자는 것이다. 그리고 벽돌을 쌓아서 하늘에 이르려고 했다는 것은 그 위대함을 모으고 쌓으면 하나님께 이를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즉 위대함으로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세계가 바로 위대함의 세계고 아브람의 본토와 아비 집은 그것을 의롭게 여기는 세계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네 본토 아비 집을 떠나라고 하신 것은 위대함을 추구하는 세계를 떠나라고 하신 것이다. 아브라함은 자신이 아브람일때 찾아오셔서 위대함의 세계를 떠나라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그 세계를 떠났던 덧이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인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에 속하는 일원이 되려 한다면 아브라함과 같이 <위대함>의 본토 아비 집을 떠나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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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마태복음은 이렇게 시작한다. 최근 성경인 개역 개정판에는 세계가 아니라 계보라고 나오는데 이는 좀 못 마땅한 번역인듯 하다. 물론 영어로 genealogy라는 단어가 계보는 맞다. 근데 어떤 이유로 그렇게 번역을 했는지 모르지만 개역 한글에서 <세계>라고 번역한 것은 대단히 주목 받는 번역이라 여겨진다.


마태복음이 되었던 다른 성경이 되었던 그 첫절의 경우 대체로 저자가 기록하고자 하는 주제가 내포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마가복음의 경우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이렇게 시작하고, 요한복음의 경우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라”  등 그 시작은 어떤 면에서 보면 주제라고 볼 수 있는 경우가 많다.


이 마태복음은 마태라는 제자가 기록하였다. 마태는 세리였고, 세리는 그 당시 매국노와 같은 존재였다. 그런 마태가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초대교회 시대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기록해야겠다고 생각하여 기록한 성경이 바로 마태복음이다. 그 마태가 기록하고 싶은 예수 그리스도의 행적은 행적 그 자체나 족보가 아니다. 특히 이 마태복음의 경우 주 독자층, 그러니까 마태가 염두에 둔 독자층은 유대인들이다. 그리고 마태복음 전반에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이 복선처럼 깔려 있다. 나라, 즉 세계를 말씀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복음서에는 없는 <교회>라는 단어도 2회나 나온다. 즉 마태는 교회시대에 예수님의 행적을 기록한 목적이 하나님의 세계요 나라인 <교회>에 대하여 기록하고자 한 것이었다. 그리고 단순한 하나의 명제로서 “하나님의 나라는 이런 것이다”하려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되기까지 어떤 시작이 있었는가? 하는 것을 그 시작으로 기록했고, 그래서 시작을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이렇게 시작하는 것이다.


시작이라는 것을 객관적으로 본다면, 1월 1일이 시작이다. 하지만 어떤 기준에서 보면 다른 경우가 많다. 회계년도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도 나라마다 다르다. 우리나라는 1월1일부터지만 미국의 경우는 10월 1일에 회계년도가 시작되고, 일본, 영국, 인도 등은 4월 1일에 회계년도가 시작된다. 이처럼 시작이라는 것이 꼭 객관적으로 통일된 것이 아니라, 형편에 따라 그 시작이 다르다는 것이다.


같은 해에 고등학교를 졸업해도 재수를 한 사람과 아닌 사람은 대학생활의 시작이 다르다. 누가 되었던, 대학에 입학해서 다니기 시작할 그때 비로서 그 세계에 대하여 시작이 있다는 것이다. 즉 시작은 어떤 세계가 시작이 되는 것을 시작이라고 한다. 대학에 입학하면 대학생활의 시작이 된다. 즉 대학이라는 세계가 시작된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마태는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는 아브라함에서 시작된다고 기록했다. 이는 모든 유대인들이 인정할 수 있는 부분이다. 하지만 그것은 외형 즉 형식에 관하여 그러하다. 즉 육신으로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에 대하여 바울 사도는 로마서에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롬 2:28) 

라고 말했다.


유대인이라는 증거는 기본적으로 할례를 받은 증거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마태나 바울이 말하는 유대인은 이 유대인이 아니다. 이것은 표면적인 유대인이 아니라 내면적인 유대인, 즉 형식이 아닌 내용과 본질이 유대인인 사람들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는 것이며, 그런 관점에서 마태가 말하는 “아브라함”은 육신의 조상 아브라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으로 시작된 어떤 세계가 있는데 그 시작이 있는 사람들의 세계가 있는데 그 세계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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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 부활 (2)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치유 Date : 2013. 5. 10. 11:28 Writer : 김홍덕

예수님을 못박은 사람들이 추구하는 모든 가치관은 바벨탑을 쌓는 것과 같이 사람의 형식에 속한 행동에 관한 것, 사회적인 교양과 지위에 관한 것, 예의와 고상함에 관한 것을 쌓으면 쌓을수록 하나님과 가까워진다고 여기는 그 가치관이다. 이러한 가치관 앞에 서면 죄인이 되는 것이 자신의 모습이라는 것을 고백하는 사람, 그리고 그러한 가치관에 대하여 하나님 앞에 죽은 자와 같이 그런 것은 자신에게서는 죽은 것과 같은 것임을 아는 사람, 또한 그런 것을 추구하던 자신의 모습이 하나님 앞에서 죽은 자와 같았다는 것을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고서 알게 되고 고백함으로 지난 날 자신이 그런 가치관 안에서 하나님 앞에서 죽어 있었던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살리심과 같이 그 사람의 인생을 죽은 자 가운데서 건져내셔서 온전히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어내어 하나님의 성품으로 살아가는 하나님의 아들로 세우시는 것이 바로 부활인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무관하게 살면서 단지 ‘주여!’, ‘주여!’ 이름을 부르다가 죽은 사람의 육신을 어느 때에 다시 살리실 것이라 믿는 것이 부활신앙이 아닌 것이다. 부활이 있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시는 죽음을 맛본 사람이라야 그 부활을 맛 볼 수 있는 것이다.

 

부활은 독립된 사건이 아니다. 부활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의 연장선 상에 있는 사건이다. 그리고 부활 역시 육신의 부활에 한정된 말씀이 아니다. 어떤 세계에 대하여 다시 사는 것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죽음에 따르는 부활이 있는 것이고, 영적인 의미에서 어떤 부활이 있어야 하는지에 대하여 알아갈 때 나에게도 부활이 임하게 되는 것이지, 부활절에 계란 먹는다고 되는 일은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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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보면 부활은 구원과 같은 것이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과정에서 처음에는 홍해를 건너고 다음에는 요단강이라는 큰 물을 건너게 되는데, 둘 다 큰 물을 건넘과 같이 구원과 부활도 어떤 측면에서는 같은 섭리인 것이다. (히브리인이라는 말이 “큰 물을 건넌 자”라는 의미)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구원을 받아 거듭남이 있고, 또 하나님 안에서 부활하는 것이 있는 것이다. 이는 하나의 섭리 안에 있는 두 가지의 과정인 것이다. 마치 씨가 땅에 심겨지면 싹이 나는 것이 있고, 열매가 맺히는 것이 있듯, 구원과 부활도 하나님의 동일한 경륜 안에 있는 것이로되, 다만 그 과정이 다른 것이다.

 

우리 신앙의 여정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여정과 같이 세상에서 종살이 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이는 각 개인의 삶이 어떤 환경에서 시작한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이 종살이와 같다는 것을 인식하면서부터 신앙의 여정이 시작이 된다는 것이다. 자신의 삶이 종살이라고 깨닫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피라미드를 쌓은 애굽에서 종살이 했듯, 자신의 삶이 피라미드와 같은 구조 안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자신은 오르지도 못할 정상을 구성하기 위하여 사회의 일원이 되어 있다는 것을 알 때, 그때 자신의 삶이 종살이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신앙은 여기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즉 구원이 신앙의 시작이라는 것이다.

 

이는 구원의 경륜이다. 세상의 가치관이 자신의 삶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 구원이라는 것이다. 세상에 팽배한 의의 기준, 그 기준 안에서 보면 부유할수록 성공한 삶이고, 세상에서 신분이 높아질수록 성공한 삶이며, 종교 안에서 그 계율을 잘 지켜 행하면 그것이 의로운 것인 세계에서는 나의 삶이 거저 피라미드의 한 조각에 불과하며, 그 정상에는 오를 수 없고, 설사 천신만고 끝에 오른다 해도, 영원히 내 자리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 구원이라는 것이다. 그것을 알게 하는 자리가 바로 십자가의 자리이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것은 분명한 죽음이다. 세상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관 앞에서 실패자로 드러난다는 것은 세상에서 죽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시계가 시간을 가르치지 못하는 것과 같고, 자동차가 움직이지 못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적어도 세상의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분명히 죽은 것이다. 그 죽음이 있어야 구원이 있는 것이다. 아니, 그 죽음이 바로 구원인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죄로 여기시는 가치관이요, 세상에서 중요하다고 여기는 가치관에서 돌아선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회개고 그것이 구원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부활을 얻는 죽음인 것이다. 이렇게 죽지 않고 부활을 얻을 수는 없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그것과는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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