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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추김치

Category : 김집사의 뜰/복음 담론 Date : 2013. 4. 10. 17:38 Writer : 김홍덕

예전에는 신앙 안에서 세상의 요소들은 버려져야 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은 틀린 생각은 아니다. 신앙 안에서는 싸가지가 없어도 되고, 돈이 없어도 되고, 명예가 없어도 되며, 나이도 상관이 없다. 그런 것은 다 육신에 속한 것이고, 내가 그것으로 인정 받으려 하면 늘 옥상 옥처럼 늘 나보다 강한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물론 비단 그런 이유에서가 아니어도 신앙 안에서 그런 것은 중요한 것은 아니다. 즉, 돈 없다고 예수님처럼 살지 못하는 것 아니고, 싸가지 없다고 예수님처럼 살지 못하는 것 아니다.

 

하지만, 우리가 신앙 안에서 그러한 것을 떨쳐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불필요해서가 아니다. 그것에 의를 두기 때문이다. 즉, 그것이 있어야 더 옳다고 생각하는 것 때문이다. 이를테면 예의가 바를수록 신앙이 좋은 것이라고 하는 것과 같은 생각 말이다. 사실 신앙생활 하는데 예의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땅에 계실 때 과히 예의 바른 분은 아니셨다. 그것은 예의가 악한 것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그것이 있어야 하나님이 옳다 여기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나, 많은 신앙의 경륜을 거치다 보니, 사람들이 살아가는데 있어 그런 것에 대한 생각이 달라진다. 여기에 어쩌면 성경의 비밀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성경에서 이렇게 하라, 저것을 하라 하는 모든 말씀들이 율법과 같이 그것을 지켜 행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이라고 생각해서 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율법적인 신앙이지만 마음 안에서 그것이 본성과 같이 발현된다면 다른 이야기가 될 것이다. 생명은 안에서 밖으로 표현되는 것이고, 가공품은 밖에서 안으로 가는 것이니까 말이다. 즉, 말씀대로 행동하면 예수님처럼 된다고 여기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처럼 되면 그 말씀대로 살게 된다는 것이다.

 

세상에서의 삶에 열심인 것도 그와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교회에 다닌다면 높은 도덕성을 요구한다. 분명히 알 것은 도덕적이어야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마음에서 도덕적인 삶으로 나타나게 될 수 밖에 없는 생명이 되어 그렇게 산다면 다른 이야기가 된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성경이 말씀하시는 행함이다. 그래서 야고보서에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하신 것이다. 즉 안에서부터 아무 것도 표현될 것이 없는 것은 죽은 것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행동해야 믿음이라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생각해보니, 예전에 율법적인 관념 속에서 신앙생활을 할 때, ~~ 해야겠다고 여기던 모든 것들을 하는 자리로 돌아가는 여정이 바로 신앙의 여정이라는 것을 알아가게 된다.어떻게 보면 원래 자리로 돌아가는 것 같지만, 사실은 전혀 다른 자리이기도 하면서 원래의 자리이기도 하다. 즉 세상은 열심히 그리고 도덕적이고 양심적으로 살아야 한다. 다만 그래야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은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어서 그렇다는 것이다.

 

 

배추가 처음에는 뻣뻣하다. 그래야 배추인 줄 안다. 신앙 안에서 보면 그 뻣뻣함은 세상에서 훌륭하고 선한 사람이어야 예수님의 제자인 것이라 여기는 것 같다. 하지만 배추가 원래 목적인 김치가 되기 위해서 소금으로 그 풀을 다 죽이듯, 사람들도 하나님의 경륜이라는 소금에 저리는 과정을 겪고 나면, 세상의 것을 잘해서 예수 잘 믿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선한 본성으로 인해 그렇게 사는 것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나면 배추가 그 뻣뻣함을 다 버리고 나서 김치가 되어서도 그 이름이 배추김치이듯, 사람도 세상의 것에 의를 두고 사는 마음을 다 버리고 나도 세상의 것으로 사는 사람이 되는 것이 그에 비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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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김치는, 배추 하나가 아니라 갖은 양념이 어우러져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것은 아마 공동체와 하나가 되는 것에 비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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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의, 그리고 공의 (2)

Category : 김집사의 뜰/복음 담론 Date : 2013. 4. 8. 23:32 Writer : 김홍덕

공의, 공동체와 하나되게 하다.

 

하여튼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오셨다는 것,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온갖 욕망으로 가득하고, 세상에서 실패를 거듭하는 삶을 살지라도 나의 인생이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삶이라는 것을 깨닫고 믿는 것이 의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나 개인의 가치관을 바꾸어 내는 것이다. 그리고 신앙의 세계는 그것에서 그치지 않고 공동체의 세계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의를 깨달은 사람들이 개인으로 있지 않고, 또 하나의 사회를 이루어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을 성경은 교회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리고 그 교회는 조직으로 구성된 조직 교회가 아니라, 진정한 공동체인 것이다.

 

사람이 개인의 구원을 이룬다는 것도 참 대단한 것이다. 그리고 구원은 신앙의 종착점이나 목적지가 아니다. 마치 그것이 교회와 신앙의 모든 것인 것 인양 가르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일부만 아는 것이다. 구원은 신앙의 시작이다. 즉 출발점이라는 것이다. 구원이 신앙의 종착점이냐, 아니면 시작이냐 하는 것은 아주 큰 차이고 그 영광의 차이가 너무 큰 개념이다. 그리고 구원이 시작이라면 개인의 구원이라는 것이 개인 구원 그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나의 신앙 여정에서도 매우 중요한 전환점이라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의자를 위한 의자가 없고, 교훈을 위한 교훈도 없다. 의자는 사람을 위하여 있고, 교훈은 그렇게 살아가라는 목적이 있는 것이다. 구원도 구원에 머물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구원이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굳이 찾으려 하지 않아도 알게 될 것이다. 사람이 성인이 되면 이성을 찾아 나서는 본능이 발휘되듯, 구원을 인지한다면 교회에서 상품 걸어가며 전도하라고 하지 않아도 전하게 될 것이고, 또 무엇보다 자기와 같은 사람을 찾게 될 것이다.  나 역시 십자가를 새롭게 보게 된 이후에 가장 먼저 마음에 일었던 생각이, ‘나와 같은 사람이 또 없는가?’ 하는 것이었다.

 

사람이 어떤 공동체에 소속된다는 것은 단순한 것이 아니다. 그 공동체 안에서 자기의 이익만 챙길 목적이라면 몰라도 하나가 되는 과정이 있어야 한다. 물론 조직체는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공동체는 다르다. 가정과 회사가 다르듯이…. 그렇게 공동체 안에서 일원이 된다는 것은 그 안에 속한 모든 구성원의 다름을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이건 단순한 과제인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이건 절대 절명의 명제이다. 이것이 없으면 공멸하거나, 아니면 배척을 당할 것이다. 이건 긴 설명이 필요할 수 있다.

 

사람의 몸의 모든 장기는 다 다르고 신체의 부분도 다르다. 그리고 몸은 하나로 움직이는 유기적인 공동체이다. 몸은 모든 기관이 다 다름을 인정하는 것에서 한 사람의 삶의 기초가 확립되는 것이다. 바울도 고린도전서에서 이것에 대하여 말씀했다. 그리고 이것은 바로 공의의 시작이다. 평등은 객관적인 것이 아니다. ‘나라가 어려우니 공평하게 모든 사람이 다 100만원씩 내자!’한다면 그것은 평등이 아니다. 형편에 맞게 내어야 공평이요 평등인 것이다. 남여 평등을 이야기할 때, 남자는 여자 보고 ‘군에 가라’하고, 여자는 남자에게 ‘애 낳아봐라’ 하는 것은 평등이 아닌 것이다.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것은 이러한 평등을 인정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같이 예배 드리고, 교적부에 이름이 같이 올라 있다고 공동체가 아니듯,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이 그 부르신 분량에 따라, 또 하나님이 주신 육신의 어떠함과 사회적인 역량에 따라 대접하고 인정하는 것이 바로 공의의 시작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것이다. 공동체, 즉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이고, 나라는 하나님의 의가 다스리는 곳이다. 즉 개인의 구원인 십자가의 도가 다스리는 곳이다. 그리고 그 나라의 일원이 된다는 것은 그 나라안에 있는 모든 것에 내가 순종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영원한 나의 기업이다.

 

잠깐 삶을 돌아보니, 거의 모든 세상의 것에는 열심이지 않은 나의 삶이지만, 욕을 먹던 어떠하던 신앙생활은 열심히 해 왔었다. 그런데 그 어느 순간에도 내가 계획을 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한걸음 한걸음 지나고 나서 보니 그 뜻하심을 아는 것이었다. 이제 돌아보니, 공동체의 일원이 되기 위하여, 세상에 있는 모든 것에 대하여 늘 반항하던 내가 이 세상의 모든 것에 순종하고 또 하려는 사람이 되어 왔다. 그러니까, 이제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문을 여는 열쇠를 손에 쥐게 된 것이다. 이는 또 새로운 시작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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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의, 그리고 공의 (1)

Category : 김집사의 뜰/복음 담론 Date : 2013. 4. 8. 17:44 Writer : 김홍덕

하나님의 의, 개인의 구원을 이루다.

 

신앙 안에서 흔히 하는 표현 중에 ‘세상’이라는 것이 있다. 이 말은 자칫 사회와 물리적인 세계를 부인하는 것과 같이 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은 아니다. 이것은 어떤 가치관에 관한 이야기이다. 어떤 것을 의롭다 여기고, 그것을 추구하는 것이 박수를 받는 범주를 하나의 세계로 보는 것이다. 그렇게 볼 때,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여기는 세계가 있고, 아닌 것이 있다. 그리고 그렇지 않은 그 가치관의 세계를 <세상>이라고 한다. 즉 같은 물건, 같은 현상이라도 어떤 가치관으로 보느냐에 따라 세상이 되기도 하고 신앙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나 역시 사회적으로 산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에 속해 있고, 물리적으로 볼 때 인지되는 형이하학의 만물 속에 있다. 그 안에서 이 모든 것을 어떤 가치관으로 옳게 보는가? 하는 문제가 신앙의 문제라는 것이다. 그러고 이러한 것을 그렇게 인지한 세월이 그리 긴 것 같지는 않다. 달력의 세월로는 말이다. 하지만 카이로스의 시간 안에서는 적지 않은 시간을 보내왔던 것 같다. 그리고 그 신앙의 세계 안에는 여정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한 것 역시 얼마 되지 않는 것 같다.

 

신앙이라는 것은 여러 함축적인 표현으로 축약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중에서 요즈음에 묵상해 보는 것은 <의와 공평>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가 있고, 그 하나님의 의 안에서 공의, 즉 공평 혹은 평등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고의 전개는 범위로 본다면, 개인의 신앙에서 공동체의 신앙으로 확장되는 것에 관함이고, 신앙의 여정으로 본다면 장성한 신앙에 관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하나님의 공의에 대하여 안다는 것이 말이다.

 

하나님의 의는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믿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의 의다. 이것은 육신을 가진 사람이 그리스도로 칭함을 받았다는 사실을 믿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와 같이 육신을 가진 <나>라는 개인도 그 분과 같은 성품으로 살고, 그 분의 신분을 따라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그리고 그 믿음은 신념이 아니라 부인할 수 없는 수용이라는 것도 중요하다. “믿습니다!!” 소리치는 것이 믿음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부인할 수 없는 것으로 인정되는 것이 비로서 믿음이란 것이다.

 

육신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볼 때, 그 분이 육신을 가지고, 육신이 가진 연약함을 보이셨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이 된다는 것은 내 안에 <의>가 바뀌지 않고서는 인정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의 아들, 즉 사람들의 표상이요 영웅은 사람의 연약함을 극복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즉 육신이 가진 갖은 욕망을 극복하는 것과, 평범한 사람이 이루지 못한 업적을 이룰수록 영웅이 되고 박수를 받는 것이 당연하다 여기고 하나님의 아들은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생각은 하나님을 믿는 것에서 변질되는 모든 변질의 근본 원인이다. <의>가 변질되었기 때문이다.

 

나의 신앙 여정 역시 이러한 변질, 곧 죄에서 벗어나기 위한 세월을 하염없이 보냈다 할 만큼 보냈다. ‘예수를 믿으려면 성경을 잘 알아야 한다’, ‘예수 믿는 사람이 예의가 있어야지!’, ‘성공할수록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 등등 이루 말로 할 수 없는 것들이 예수를 잘 믿는 조건으로 형성된 내 가치관을 벗어내는 것에 거의 사활을 걸고 살았던 신앙의 여정이었다. 그리고 내가 중요하게 여겼던 그 모든 것은, 어떤 이는 할 수 있고, 반면에 어떤 이는 선천적으로 할 수 없는 것들도 있었다. 예를 들면 ‘모태신앙이 유익하다’ 같은 것 말이다.

 

하지만 십자가를 자세히 보니 그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오셔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아들의 모습인 십자가 그 어디에도 그런 것은 없었다. 오히려 발가벗겨지고, 손과 발에 못 박히고, 머리에 가시관을 쓴 패배자요 죄인의 모습을 보여주신 곳이 십자가였다. 그것은 내 거울이고 나를 조성하신 틀(Mold)이었다. 나의 모습도 그러했다. 내가 아무리 생각해도 가시관 쓰신 예수님과 같이 내 생각이 나를 구원할 수 없고, 아무리 행동으로 노력해도 손과 발에 못 박히신 주님과 같이 행동으로 나를 구원할 수 없었다. 신분이야 더 말할 것도 없이 발가벗겨진 예수님과 같은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 모습이 세상 속에 있는 모든 인간의 모습이라는 것도 더불어 알게 되었다. 내가 이 세상의 일부라는 사실은 말할 것도 없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의다. 하나님의 의가 뭔가? 모든 것 중에서 사람을 향하신 하나님의 의만 나에게 의미가 있다. 나는 사람이니까? 그리고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의는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 즉 아버지의 성품으로 사는 아들, 즉 하나님의 성품으로 사는 아들로서 사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예수님의 모습에서 하나님의 아들의 모습을 알고, 또 나의 이 초라한 인생도 그렇게 하나님의 아들로 살도록 하시기 위하여 만드셨다는 것을 아는 것 그것이 의에 대하여 아는 첫 걸음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의는 나로 하여금 세상에서 실패할 수 밖에 없음을 인정하는 것에 있음을 알게 했고, 그 깨달음은 나로 하여금 모든 신앙적 변질을 알 수 있게 했다. 이건 본성이라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리고 그렇게 시작된 신앙의 여정은 공동체를 찾아 나서는 순례자의 여정으로 인도했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의 공평하심, 하나님의 공의라는 문에 손잡이를 붙잡을 수 있는 자리에 섰다. 세상의 모든 것이 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이기에 그것에 순종하는 것이 나의 본분이라는 열쇠를 가지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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