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군대를 대학을 졸업하고선 갔다. 군에서의 생활이란 남자들은 다 알겠지만, 사회에서 그 지위가 어떠하던 자기 계급에 맞는 행동양식과 정신을 요구한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런 곳에 있으면, 자기가 사회에서 교회에 다닐 때에 리더를 했던 목사를 했던 상관없다. 오직 자기 옆에 있는 사람과 동일한 모양으로 살아야 한다. 그건 어쩌면 하나님 앞에서 사람의 삶의 모습이 어떠하던 동일한 존재라는 것을 보여 주는 것과 같다.
그래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군에 있는 동안 그때까지 내가 입고 있던 모던 종교적인 옷을 벗고서(벗겨졌지만) 그 날까지의 신앙을 돌아보는 시간이었다. 그래서 난 지금도 신앙적 측면에서 군을 잘 다녀왔다고 생각한다. 그런 군 생활 속에서 심각한 의문이 생겼다. 기상시간 보다 조금 일찍 일어나서 기도를 하는 날은 저녁 시간에 집합이 덜 한 것 같고, 그렇지 않은 날이면 자주 저녁에 집합이 있곤 했는데, 난 그게 너무 이상했다.
그때 난 '이건 뭐 무당 굿하는 것과 비교하면 신만 다를뿐이지 같은 시스템이구만'하는 의문이 들었다. 실제 그렇다. 무당은 산신령께(?) 굿을 하고, 기독교인은 하나님께 기도할 뿐이다. 산신령<->하나님, 굿<->기도, 이렇게 딱 매칭이 되는 것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육신의 문제를 해결해 달라는 것 그것이 동일했다. 물론 기독교인들은 하나님과 산신령이 다르기 때문에 다른 문제라고 볼지 모르지만 그 두 신앙을 대하는 사람의 마음이 같다는 점이라는 것이다. 즉 신을 섬기는 목적이 같다는 것이다. 아마 내가 좀 더 경건한(?) 기독교인이었다면? 난 저녁에 집합이 없도록 해 달라고 아침 기도를 거르지 않으려 노력했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 땐 분명히 몰랐지만 그렇게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라고 하나님을 믿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에 해당하는 문제일 뿐인 것이다.
그것은 자유함의 문제로 다가왔다. 정말 자유하다면 기도를 하던 안하던 삶은 동일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자유가 육신을 얽매는 삶의 문제에 대한 자유라면 말이다. 참 하나님, 즉 존재의 하나님을 믿음으로 내 육신의 삶의 모양이 집합을 좀 당하던 좀 구속을 받게 되어도 난 하나님을 믿는 일에 의심이나 구속함이 없는 것이 정상이라 생각했다. 그러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하신 말씀이 생각났고, '난 진리이신 예수님을 아는데 내 모습은 자유하지 않구나 ?' 생각했다.
그 이후 내 신앙의 의문과 갈등은 절정에 달했다. 두 가지중 하나였다. 내가 이때까지 예수를 잘못 믿었거나, 예수가 희대의 사기꾼이거나, 그 둘중의 하나라 생각했다. 그 의문은 전역 후에도 가시지 않았고, 전역 이후에 내 친구가 '교회가 더 이상 가르쳐 주는 것이 없다'며 떠나갈때도 할말도 없고 붙잡지도 못하는 꼴이 되었고, 토요일이면 다음날 새벽까지 고스톱 치며 놀다가 부시시한 모습으로 교회에 가서는 고등부 교사를 하러 가는것이 일상이었다.
그러다 한 목사님을 만나게 되었고 난 그 날까지의 모든 의문을 질문 하나에 담아 질문을 했다.
"목사님!, 이 기독교 신앙이 Do에 관한 것입니까? Be에 관한 것입니까?" 라고
내심 나는 이 질문에 바로 답하지 못할 것이라 예상했다. (어쩌면 지금도 양심이 있고, 자기의 삶이 그 어느 것 중에 하나라고 확신하는 목사가 아니라면 쉽게 답하지 못할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그런데 그 목사님은 내 질문이 끝나기도 무섭게 기다렸다는 듯이 아주 간략하고 확신에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BE에 관한 것이다!!>
그 순간은 내 일생 일대의 사건이었고, 내 삶의 절대 전환점이었고, 가장 잘한 일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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