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 2650

하면 된다.

Category : 김집사의 뜰/복음 담론 Date : 2014. 4. 3. 16:54 Writer : 김홍덕

<하면 된다.>는 말이 있다. 난 어쩌다 군을 특전사에 다녀왔는데, 특전사의 특전훈도 <안 되면 되게 하라!>다. 하지만 난 이전에는 하면 된다는 것을 믿지 않았다. 뼛속 깊이, '사람이 한다고 되나?', '되는 일은 다 따로 있다', 또 '되게 하는 이는 따로 있다' 등의 생각이 박혀 있었다. 당연히 내 삶도 그러했다.





어쩌면 앞에서 포스팅 한 것 처럼, 실패를 해 보지 않았고, 또 하지 않으려 노력하다 보니, 삶의 방식은 당연히 소심하고 소극적일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거시적으로 본다면 그것이 진정한 실패였다. 그러고 이런 나의 생각은 다분히 종교적인 가치관의 기반 위에 형성되었다.


즉, 하나님께서 하시지 않으면 아무 것도 안된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뭔가 하시고 계시다는 것을 알기 전 까지는 무조건 조심하고 기다리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다보니 신앙 생활의 많은 시간들을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하는 것에 관심이 쏠려 있었다. 그것을 아는 것이 핵심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한 달란트 받은 사람과 같은 삶이다. 내가 뭐라고 언급할 처지는 아니지만 많은 기독교인들이 아직도 이 생각에 매몰되어 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 세상을 만드실 때, 이미 이 세상의 모든 것으로 그 뜻을 밝히신 하나님이시다.


다만 사람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이, 육신의 삶에 관한 것에 집중되어 있을 뿐이다. 즉 <"내가 어떻게 행동하면 하나님께서 보답해 주실까?"> 궁리하는 프레임에 갇혀 있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존재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런 것에는 관심이 별로 없으시다. 이 육신의 삶에 관해서는 이 육신이 거하는 세상 안에 그 법이 이미 다 있다. 그러니까 이미 다 주신 것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이라는 현상계를 만드시고 또한 사람의 육신 또한 형상으로 태어나게 하셨다는 것은 세상과 육신은 그 코드가 같다는 의미이다. 즉 육신의 일은 이 세상의 법에 따라 하면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육신에 관해서는 자기 하기에 따라 다 될 수 있게 주셨다는 것이다. 세상이 존재하고 내가 세상 안에 존재한다는 것이 이미 다 주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하면 된다는 것은 의미 있는 말이다. 육신으로서 세상을 살아가면서 세상에 관한 일은 하면 되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그런 법으로 살면 되는데, 육신의 일에 대하여 하나님의 뜻과 생각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 시간을 보내는 것, 하나님의 뜻을 위반하는 실패를 하지 않으려는 노력과 같은 것들은 그것 자체가 가장 큰 실패이다.


이 모든 것을 함축시킨 예수님의 말씀이 바로,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라는 것이다.


육신이 살아가는 일은 하면 된다. 하면 결과가 자기가 원하는대로 된다는 것이 아니다. 하면 된다는 것이다. 한다는 것은 언제나 된다는 것이다. 즉 Do라는 것은 언제나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결과가 나의 뜻대로 된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신앙 안에서 하나님께 있다. 다만 결과가 아니라 "하는 것"은 언제나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 결과가 어떻게 되어야 하는 것이 하면 된다는 것이 아니라, '한다'는 행위 자체는 늘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다. 결과에 순종할 수 없는 사람은 하지 않은 사람이다. 결과에 순종할 마음 없이 두 달란트와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이 어떻게 장사를 시작할 수 있었겠는가? 오히려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결과를 염려했기 때문에 가만히 묻어 둔 것이다.


'순종이 제사 보다 낫다'는 것은 뭔가를 해 본 사람의 세계이다. 해 보지 않았다면, 순종할 명령도, 결과도 없다. 해 보았다는 것은 육신의 삶이 세상의 법에 있다는 것과, 하나님의 법은 존재의 법으로서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언제나 무릎만 꿇고 앉아서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하는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일 뿐이다.


하면 된다는 것을 믿지 않았던 나의 시절은 순종을 모르는 시절이었다. 결과에 순종할 자신이 없었으니 아무 것도 하지 않았고, 내가 한다고 될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순종이 어떤 의미인지 알고 나서야 비로서 육신의 삶에 대하여 할 것은 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 이전에는 모르는 세계였다. 그런 말은 알았지만.



'김집사의 뜰 > 복음 담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신앙의 보편성과 순수성  (0) 2014.04.14
영화 <머니 볼>  (0) 2014.04.10
실패 예찬  (0) 2014.04.02
창조 경제타운  (2) 2014.02.19
때론 실패자가 되어 보자..  (0) 2014.02.12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

실패 예찬

Category : 김집사의 뜰/복음 담론 Date : 2014. 4. 2. 22:03 Writer : 김홍덕

드라마를 잘 보지는 않지만 어쩌다 재방으로 <정도전>이라는 드라마의 한 회를 보게 되었다. 그 회에는 이성계와 정도전 그릭 이방원이 나온다. 새로운 세상을 열자는 정도전에게 이성계는 뒤짚을 것이 아니라 개혁을 하면 되지 않겠는가 답변을 하는 대화를 이방원이 듣게 된다.



이에 이방원은 왜 아버지인 이성계를 설득하지 않느냐?라고 하자 정도전은 개혁을 꿈꾸는 자는 설득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실패가 필요한 것이라고 답변을 한다. 이성계가 개혁에 실패해야만 새 나라를 건설하게 될 것이라는 답변인 것이다.


실패!!!


사람들이 모두다 회피하고 싶은 실패에 대한 예찬을 해 볼까 한다. 물론 나보다 더 훌륭한 사람들, 또 이루 말할 수 없는 실패를 딛고 일어선 사람들, 그리고 철학자들의 실패 예찬이 없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에 넘칠 정도로 많다. 다만 그 위에 나도 한 술 얻어보려 하는 것이다.


앞에서도 말한 것과 같이, <"실내는 성공의 어머니다!">라는 누구나 아는 명언에서 부터 수많은 실패의 격언과 말들과 교훈이 있다. 나도 분명히 그런 세상을 살고 그런 것을 간간히 가르치는 학교를 다녔다. 그런데..... 불과 얼마 전까지 그 많은 것은 지식일 뿐이었다. 하지만 이젠 아니다. 여튼 나는 그렇다.


사람들은 실패를 피하려 한다. 한마디로 죄악시 한다는 것이다. 뭐 죄로 여기느냐? 하겠지만, 기피하고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것에서 죄와 같은 대접을 받고 있다는 말이다. 물론 당연히 그 가치와 성격은 다르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실패를 두려워하는 것일까?


그것은 한마디로 실패는 바르는 바와는 별개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때문이다. 즉 내가 바라는 버켓리스트에는 늘 없는, 아니 없어야 하는 것이라고 바라고 간절히 희망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도 그랬기 때문에 아마 사람이라면 거의 다 그런 생각에서 출발했을 것이라 나는 생각된다.


하지만 실패는 인생의 일부이다. 그러므로 인생이라는 삶을 살아야 하는 인간에게 있어 실패는 그 삶에서 절대로 분리되지 않는 요소인데 그것을 사람들은 외면하려 하고, 그 실패를 회피하려 애를 쓰다 보니, 마치 주자에게 신경 쓰느라 타자에게 안타 맞은 투수와 같은 결과를 손에 쥐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에게 실패를 회피하려는 마음은 비단 실패에만 적용되는 자세는 아니다. 어떤 기준, 즉 자기가 사는 문화와 나라, 그리고 자신이 처한 환경 안에서 규정된 어떤 선과 악한 것, 바라는 것과 없기를 바라는 것, 좋은 것과 나쁜 것이라는 이분법적 논리의 기반에서 부정적인 요소를 버리고 회피하고 떠나려 하는 것이 몸에 베였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선악과, 즉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은 결과인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이 어떤 것에 대하여 있어서는 안될 일을 스스로 정한다는 것이다. 실패는 인생에게 있어 불가분의 관계임에도 늘 피하는 것이 그 때문인 것이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자전거 타는 법 하나 배우는 것에도 실패 없이는 된 것이 없다. 그렇게 실패는 내 인생의 일부이듯, 사람이들이 그렇게 피하고 싶어하는 일들도 이미 인생의 일부인 것이다. 그래서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있고, 그렇게 봤기 때문에 피하려 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가 먹은 것이 선한 과일이나 악한 과일이 아니라 선과 악을 어우르는 선악과인 것 처럼, 실패도 또한 삶에서 그렇게 피하고 싶어하는 일들도 다 인생의 일부이다. 그렇게 인생을 봐야 한다. 어쩌면 삶에서 피해야 할 유일한 것이 있다면, 실패나 나쁜 것이 나에게 없기를 바라는 그 마음 그것 하나 뿐일지 모른다. 아니 그렇다. 


실패는 친구로는 껄끄럽다. 하지만 친해야 한다. 그를 멀리하고는 인생을 알 수 없다. 사람들이 나쁘게 생각하는 모든 것도 그렇다. 그것을 장려하거나 일부러 그럴 필요는 없지만, 그들은 우리가 사는 삶의 일부인 것이다. 그게 사람이고 세상이다.


나 역시 늘 실패를 멀리하려 했었다. 하지만 크지 않을지는 모르지만 얼마간의 실패를 겪고서 얻은 것의 가치는 대단하다. <"실패해 보지 않는 사람은 도전하지 않는다.">라는 말을 좋아한다. 이전에는 도전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정도전이 이성계에게 해 준 말이 바로 그것이다. 아마 그 말이 그 뜻이라는 것 조차 실패의 경험이 없다면 알 수 없을지도 모른다.



'김집사의 뜰 > 복음 담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영화 <머니 볼>  (0) 2014.04.10
하면 된다.  (0) 2014.04.03
창조 경제타운  (2) 2014.02.19
때론 실패자가 되어 보자..  (0) 2014.02.12
신앙이 얼마나 절대적 사안인가?  (0) 2013.11.25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

선악과는 그렇듯 사람을 볼 때, 선한 것과 악한 것으로 구분하는 관점이다. 이는 사람 자체를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으로 구분하는 것과 또한 한 사람의 행동에 있어서 선한 것과 악한 것을 구분하는 것 모두 다를 포함한다. 사실 이는 어쩌면 어쩔 수 없는 것일지 모른다. 그러나 사람이 그런 관점을 가진 것은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사람이 세상에서 세상의 가치관을 가지고 보기 때문에 그렇다.


사람이 그런 관점을 가지지 않고 사람을 대하는 대표적인 공동체가 가정이다. 가정이라는 곳은 사회적인 역량을 기준으로 잘하는 것과 못하는 것을 구분함이 덜하다. 법적으로도 가족의 범죄를 은닉하는 것은 무죄다. 이것은 세상적인 기준으로 그 구성원의 선과 악을 판단하는 것 보다, 가족이라는 연결 고리가 더 우선한다.


그래서일까? 사람들은 가정을 가장 원초적인 안식처로 인식한다. 그리고 어려운 상황 중에서도 가정은 늘 지켜내려고 한다. 사람이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람을 선하고 악한 것으로 구분하고 판단하는 세상적 관점을 피하여 쉴 수 있는 공동체의 안식을 사모하고 기억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역설적으로 본다면, 사람은 서로를 선하고 악한 것을 판단하는 관점에서 벗어나는 것을 갈망하고 그런 상태에서 안식하는 존재라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아마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은 부끄러워하는 사람을 만드시고 만족하시고 안식하셨던 것과 연관이 있는 것이라 생각이 된다. 즉 사람은 사람 그대로의 모습을 인정 받을 때 평안을 느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사람을 볼 때, 그 사람의 선한 것은 무엇이며, 그 사람의 악하고 연약한 것은 무엇인지 파악하는 것을 불편해 한다. 비록 그것이 의도적인 것이 아니라고 해도 말이다. 그렇다면 사람은 그런 판단이 없는 자리를 편하게 여긴다는 것이고, 이것은 우리가 사람을 어떻게 대할 것인지에 대한 해답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셔서 보여주신 것이기도 하다. 즉,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보여주신 것이 사람이 사람을 선하고 악한 것으로 구분하는 것이나 판단하는 것에서 떠나는 것을 말씀하시고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것이 그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인간의 참 모습이 어떤 것인지, 사람의 정체성이 어떤 것인지 보여주셨다.


그러므로 선악과의 문제가 해결되는 사람, 즉 구원을 받은 사람의 모습은 사람을 사람 그 자체로 인정하는 사람이라는 의미이다. 사람이 사람 그 자체로 인정한다는 것은, 사람을 볼 때, 돈이 없다고 멸시하지 않는 것이고, 욕망이 있다는 것이 악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고, 신앙이 없다고 죄인 취급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게 쉬운 일이었다면 하나님의 아들이 땅에 까지 와서 죽임을 당할 이유가 없었을 테니까......


(계속)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