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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악과 (17)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4. 2. 22. 11:16 Writer : 김홍덕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부끄러움을 양의 가죽으로 가렸다. 사람은 자신이 연약한 것을 부끄러워했는데, 그 연약한 부끄러움을 가리는 것에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연약한 양의 가죽으로 입혔던 것이다. 연약해서 부끄러워하는 것을 가리려면, 사자 가죽이나, 호랑이 가죽, 아니면 금과 같은 것으로 옷을 입어야 할 것 같은데, 오히려 그 반대인 양의 가죽을 입히신 것이다.


성경에서 양은 언제나 연약함의 상징이고, 순종의 상징이고 무엇보다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다시 말해서 연약한 그리스도가 사람이 스스로 부끄러워 하는 것을 가린다는 것이다. 연약한 그리스도라는 것은 그리스도가 육신에 관하여 제사장의 아들이나 황제의 아들로 온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부끄러워 하는 모습으로 오셔서 다시 한번 인간이라는 연약한 모습으로 아담이 부끄러워 한 인간의 모습을 가리셨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 부끄러움이 바로 사람의 정체성이요 그리스도의 정체성이고, 그런 연약함이 있어야 그리스도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을 표현하는 존재이므로, 결론적으로 사람이 가진 이 연약함이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바탕이라는 것이다.


사람들의 종교 생활을 보면 인간이 가진 갖은 욕구를 절제하면 할수록 더 경건한 사람이 되는 것으로 보인다. 식욕을 금하고 40일 금식 기도를 한다면 신앙이 아주 좋은 사람이 되고, 신부나 수녀처럼 성욕을 참고 수도한다면 이를 성직자, 곧 성스러움이 그 직업인 사람으로 인정한다. 이것이 바로 아담이 부끄러워한 모습인데도 지속적으로 그리 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선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그렇게 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경건하지 못하고 때로 악한 사람이라는 의미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 그 본성으로 두신 것에 대하여 사람이 선하고 악한 것으로 규정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선악과다. 그러므로 이것을 돌이키지 않는 신앙은 선악과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앞에서 나는 이 선악과의 문제를 종교인들이 간과한다고 했던 것이다. 진정한 신앙, 곧 자신이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심령이 된다는 것은, 나의 나 됨을 부끄러워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인간의 가장 부끄러운 모든 모습을 보여주셨는데, 그 모습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존재라고 하나님께서 영광스럽게 여기셨기 때문이다.


어떤 각도에서 보면 이것은 신앙의 근간에 관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무엇을 믿는 것인가?의 문제가 된다는 것이다. 즉,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하지 못하는 기적을 일으켰다는 점에서 우리와 달리 하나님의 아들이고, 그 분의 사랑이 우리가 지은 죄에 대한 벌을 대신 받으신 그런 구세주로 믿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의도는 사람들에게 사람과 다른 존재, 일반 사람은 할 수 없는 것을 행하는 존재를 보내서 하나님의 아들이 무엇인지 보여 주시려 한 것이 아니라, 우리와 똑같은 사람을 아들로 보내심으로 그와 동일한 육신을 가진 사람들이 자신도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하여 우리와 전혀 다를 바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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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악과 (16) - 무화과 나뭇잎과 유대인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4. 2. 22. 09:08 Writer : 김홍덕

그러므로, 선악과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 자신을 비추어 우리가 스스로 선악 간에 판단하는 존재라는 고백을 할 수 있어야 하고, 또한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면서 인간이 우리의 모습이 추하고 더럽고 부끄럽게 여겨 그것을 내 삶에서 분리하는 노력을 할 것이 아니라, 그런 모습이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음을 감사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다시 한번 이 선악과의 문제는 우리 신앙에 있어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어떤 죄인인가 하는 것을 말씀 하시는 것이라는 것을 분명히 해야한다. 즉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인 것은 행위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의 문제라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마음에 더러운 생각을 가진 것을 회개하고, 또 형제를 욕한 것과 도적질과 같은 행동을 회개하지만, 진정한 회개는 하나님께서 주신 자기 육신의 것을 더럽게 여긴 그 기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회개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선악과에 대하여 기록하여 놓으신 이유인 것이다. 


그리고 이 선악과로 인하여 사람이 자기의 모습을 부끄러워하는 것을 대속하기 위하여 어린 양을 잡고 그 가죽으로 부끄러움을 가리셨는데, 이것을 잘 살펴보면, 옷이라는 것은 그 사람의 신분을 표현하는 것인데, 양의 가죽으로 입혔다는 것은 양과 같은 존재라는 것이고, 이 양은 그리스도를 말씀하는 것이므로, 사람을 그리스도와 같은 신분으로 입히셨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이 또한 우리가 선악과에 대한 말씀을 보고 우리가 스스로 선과 악을 판단하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을 알고,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어떤 의미인지 알게 되듯,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면서 우리가 어떠한 구속을 얻은 것인지 알 수 있게 하신 하나님의 섭리가 바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이 되는 것은 죄는 사람이 짓고, 벌은 예수님이 대신 받는 그런 시스템이 아니다. 먼저는 예수님은 우리의 행위에 대한 구속을 하기 위하여 오신 분이 아니다. 행위에 관해서 라면 예수님도 그리 떳떳한 분은 아니다. 지금은 우리가 다 예수님을 신앙하는 입장이라 그렇게 말하는 것이 다소 불경스럽게 비칠지 모르지만 예수님 당시의 관습과 문화 안에서 보면 예수님은 아주 불량한 한 사람이었다. 행위에 관해서 라면 말이다.


당시, 종교와 정치가 분리되지 않은 시대이고, 유대교의 율법이 사회의 근간이던 시절이었기에, 율법을 지키지 않는 것은 지금으로 치면 법과 예의와 에티켓과 같은 모든 것을 지키지 않는 사람과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랬던 것이다. 그리고 그래서 십자가에 못 박혔다. 


다시 말해서 아담이 스스로를 부끄러워해서 무화과 나뭇잎으로 자신을 가리려 했던 것 같이, 유대인들도 율법을 행함으로 인간의 더러운 것을 감추려 했던 것이다. 물론 그 더럽고 추하다는 기준 역시 자기 안에서 나온 것이지만 말이다. 재미있는 것은 무화과 나무는 유대인의 나무이다. 이는 곧 율법을 지키는 사람들을 말한다. 아담도 무화과 나무로 인간의 부끄러움을 가렸는데, 유대인들도 율법으로 사람을 부끄러운 존재로 규정하고, 그래서 율법으로 경건하게 살아서 그 부끄러움을 감추고자 했다. 이건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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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와 과정이 어떠하든지 결국은 이 선악과의 문제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연결되어 있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다만 그것이 어떻게 연결되었는지에 대하여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지식으로 알아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결국은 우리가 예수님의 무엇을 믿을 것인가? 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 대한 일반적인 견해는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불순종에 있는 것처럼 여기고 있지만, 자세히 들여다 보면, 사람이 스스로 선하고 악한 것을 규정하는 기준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만드신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과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사람의 모습을 선한 것과 악한 것으로 나누고 악한 것을 배제하기 위하여 수도하고 법을 만들고 금욕적인 생활을 하는가 하면, 반대로 선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남을 죽이는 것 까지 서슴치 않는 그런 사람의 생각을 말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렇게 사람이 사람의 모습을 선하고 악한 것으로 나누는 기준은 역사 이래 한번도 통일된 적이 없기에, 사람이 사는 세상은 늘 분쟁과 다툼과 같은 혼돈이 있고, 또 자기만의 선을 추구하는 결과로 남의 피해를 무시하고 심지어 사람을 죽이기 까지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한마디로 사람마다 무엇을 선한 것이라 하고 무엇을 악한 것이라 하는지, 그 기준이 제 각각 다 다르다는 것이다.


그리고 가장 핵심이 되는 문제는 <사람의 무엇을 선한 것으로, 또 무엇을 악한 것으로 보느냐?>의 문제 이전에,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한 이 연약한 사람의 모습을 보고, 악하고 버릴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그것이다. 그것을 성경은 아담이 벗었음으로 부끄러워했다고 기록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람이 사람의 연약한 모습을 버리려 하는 문제는, 어쩌면 작은 문제일 것 같지만, 이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이유라는 것을 알면 놀랄지도 모른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유대인들 앞에서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고 또 로마 속국의 국민으로서 자신이 왕이라고 했기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다. 


그런데 핵심적인 문제는 예수님의 모습이 그럴 만 했다면 아마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대제사장이나, 또는 로마황제의 아들과 같은 모습이었다면 말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가난한 나사렛 출신, 목수의 아들에 불과했다. 게다가 인간의 부끄러운 모습을 경건한 종교적 공로로 감추려 한 것을 악한 것으로, 또 성전의 기물을 파손하고, 죄인들과 먹고 마시니 그 모습은 사람의 연약함을 부끄러워하는 눈을 가진 이들이 볼 때는 절대로 하나님의 아들이나 왕, 메시아는 아니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벌거벗은 인간의 모습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아담이 부끄러워했던......


그런 모습으로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고 왕이라고 하니, 인간의 부끄러움을 감추고 종교적인 율법을 지키며, 연약한 모습을 버리면 버릴수록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라 믿었던 유대교인들에게 이는 신성모독이었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이유인 것이다. 그 이유나, 아담이 벗은 것을 부끄러워했기 때문에 죽임을 당한 양이나 이유가 같은 것이기에 그 가죽 옷이 예수님을 의미하고, 우리의 죄를 구속하는 법이라는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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