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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의 갈비뼈로 여자를 만드시다 (2)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4. 1. 10. 07:08 Writer : 김홍덕

그렇다면 '남자는 의를 가지고 있고, 여자는 그냥 형식이란 말인가?'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것이 아니라, 의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육신으로 남자든 여자든 간에 그 사람이 바로 영적으로는 남자이고, 그 남자의 의에서 의에 관한 형식이 나오는 것이다. 그것이 성경의 기본적인 관점인 것이다.


그러니까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시는 과정에서, 하나님께서 육신으로 남자를 중요하게 여기시므로 사람을 만드실 때 먼저 남자를 만드시고, 그 육신의 일부를 떼서 여자를 만드셨다는 것이 아니다. 분명히 창세기에는 아담을 만드실 때, 그리고 하와가 등장할 떄까지는 '남자'를 만드신 것이 아니라, <사람>을 만드셨다고 되어 있다.


그게 그것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하나님께서 하와를 만드신 이유를 말씀 하실 때에도 "남자가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가 아니라, <사람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라고 되어 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하와를 만드시기 전까지는 여자라는 개념이 없다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께서 만드신 처음 아담의 모습은 생물학적으로 볼 때 분명히 남자였을 것이다. 하지만 남자 여자라는 개념은 한 쪽이 없으면 상대 개념도 없어지는 개념이다. 다시 말해서 여자가 없다면 남자라는 것이 필요 없다. 그냥 사람이라는 개념만 있으면 되는 존재요 명칭이란 것이다.


그러므로 아담의 갈비뼈에서 하와를 만드셨다는 것은 생물학적으로 남여의 갈비뼈의 수를 확인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말씀에 대한 정확한 해석은 하나님의 의가 형상화 되었다는 의미인 것이다. 그리고 보면 이것은 이미 우리가 말씀 안에서 본 기억이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들고...."라고 하신 부분이다. 그 <우리의 형상>은 하나님의 image라고 했다. 


즉 보이지 않는 하나님 의, 형상화 되지 않은 하나님의 모습, 그것을 형상이 있는 육신으로 표현한 것이 바로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이유인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들을 잘 묵상해 보면 다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만드셨다는 것과

하나님의 형상(image)대로 사람을 만드셨다는 것과

아담의 뼈에서 여자를 만드셨다는 것과

예수님을 말씀이 육신되신 분이라고 하는 것은 다 동일한 표현이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것과, 하나님께서 그 형상(Image)대로 사람을 만드셨다는 것과 남자의 뼈를 가지고 여자를 만드셨다는 것 그 모두가 눈으로 볼 수 없는 실체를 인식할 수 있는 상태로 표현하셨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이유는 <사람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다>하신 이유에서 알 수 있는 것이다. 


즉,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의>가 표현되지 않고 있는 것은 좋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이 표현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을 두고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고 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의가 사람에게 표현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정확히는 인식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이 사람이 가장 잘 인식할 수 있는 사람의 모습으로 표현된 존재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천지창조 역시 동일하다. 천지창조는 사람이 하나님의 세계를 인식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것이 태초라고 했다. 그것 역시 사람들이 하나님을 바로 알지 못하므로 사람에게 빛이 있으라 하심으로 하나님의 세계에 대한 인식이 있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스스로를 가리켜 <빛이 세상에 왔다>라고 하신 것이다. 그것이 천지 창조이다.


또한 하나님께서 그 형상대로 사람을 만드셨다는 것 역시, 사람이 생물학적으로는 살아 있지만, 하나님께서 보실 때 살아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없는 죽은 자와 같은 모습일 때, 하나님의 생령, 즉 성령을 그 안에 주심으로 비로서 하나님께서 보실 때 살아 있다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사건인 것이다. 그러니까 정확히 표현하면 하나님이 보실 때 살아 있는 사람이라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 성령을 주심으로 말이다.


또한 아담에게서 갈비뼈를 취하여 하와를 만드셨다는 것도, 하나님의 의를 가진 존재는 독처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표현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것 역시 의가 형상화 되는 성육신의 과정에 대한 것이다. 생물학적으로 남자의 몸에서 여자가 나왔다는 그런 무식한 이야기를 하고자 하시는 것이 아니다. 그 내용이 무엇이든 전달하고자 하는 말씀의 목적이 그것이라는 것이다. 그것을 모르면 아무 것도 모르는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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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의 갈비뼈로 여자를 만드시다 (1)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4. 1. 9. 21:33 Writer : 김홍덕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시고, "사람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다"고 하시면서 아담을 잠들게 하신 다음에 그 갈비뼈를 취하여 여자를 만드셨다고 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만드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자는 남자인 아담과는 다르게 아담의 뼈를 가지고 만들었다고 하셨다.


사람들은 흔히들 이 성경 구절을 보고서 해부학적으로 남자의 갈비뼈가 여자보다 하나 적은지를 궁금해 한다. 하지만 해부학적으로 남여 공히 갈비뼈의 수는 24개로 동일하다. 그것을 두고 하나님께서 뺀 갈비뼈를 채워주신 것으로 해석하기도 하는데, 성경의 말씀을 문자 그대로 보게 된다면 이러한 해부학적 접근을 하게 된다. 그러니까 성경은 그렇게 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갈비뼈는 남녀 둘 다 24개이다(출처 : 위키백과)>



성경에서 뼈를 말씀하신다는 것은 <의>를 이야기 하자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도, 통상적으로는 죄인이 죽었는지 확인하기 위하여 뼈를 꺽지만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고 하셨는데, 그것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의>는 꺽이지 않게 하셨다는 하나님의 생각이 있었기 때문인 것이다.


에스겔서에 나오는 마른 뼈의 말씀 역시 의가 있다면 하나님의 군사가 될 수 있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이렇듯 성경에서는 <의>를 나타낼 때 뼈로 말씀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담의 갈비뼈를 취하여서 여자를 만들었다고 하시는 것은 남자의 의가 형상화, 육신을 가진 성육신이 되었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남자의 <의>가 여자가 되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있을 것이다. 즉 성경은 남존여비의 사상을 가진 것이냐? 하는 문제가 대두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성경을 읽어보면 여자는 사람 수를 계수할 때도 세지 않는 등, 현재로서는 상상도 하기 힘든 남녀 차별이 많이 있다.


하지만 이것은 육신의 남녀를 구분하고자 하시는 것이 아니다. 성경을 문자 그대로 읽고, 승천하신 예수님께서 우주로 날아갔다고 생각하고, 하나님의 천지창조가 물리적인 세상을 창조하신 것을 믿게 하시기 위한 것으로 여기는 관점에서 본다면 성경은 남존여비의 사상으로 가득한 구시대적인 경전일 것이다. 실재로 성경을 그렇게 보는 사람들이 있다 보니, <어버이 하나님>, 또는 안상홍파에서 말하듯 <어머니>와 같은 표현들이 나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비록 기존 교단에 있다해도 성경을 문자 그대로 보는 시각을 가졌다면 뭐 안상홍파와 다를 바가 없다고 볼 수 있기도 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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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과 그리스도의 직임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3. 12. 16. 18:56 Writer : 김홍덕

아담이 동물에게 이름을 붙이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책무라 할까? 본분을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 논리적 근거가 없는 비약을 볼 수도 있겠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인생들에게 의미를 부여하시는 일을 하셨다. 이것을 다르게 표현하면 이름을 불러 주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이름+정체성>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인간의 정체성을 일깨워 주셨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깨우신 인간의 정체성은, 사람이 노력하고 치장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연약함을 가진 그대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직접 보여주셨다는 것이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그 당시의 관점에서 보면 지금의 사람들의 생각과 같이 선하고 도덕적인 분이 아니었다. 물론 지금의 관점에서 봐도 동일하다. 이것이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예수님께서는 그 당시 유대인들의 지도층인 바리새인, 제사장, 서기관 등 그 시대의 지금의 목사나 교수나 선생과 같은 사람들이 볼 때, 형편없는 사람이었다.


세금을 제대로 내기를 하나, 사회 지도층 인사들에게 "독사의 자식들아"라고 욕하질 않나, 성전에 가서는 상을 뒤엎지를 않나, 쉬라는 안식일에는 남의 밀 밭에서 밀을 까 드시질 않나, 뭐 하나 당시 사람들이 도덕적으로 여기는 모든 것에 시비를 걸듯하신 분이다. 


그렇다고 그 당시 지도층인 바리새인들이 나쁜 사람들이었는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 이 시대의 지도층과 비교할수도 없을 정도로 그 나라의 가치관 안에서 훌륭한 삶을 살았던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에게 도전하셨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인간의 정체성을 회복하고,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뜻을 바로 하는 것이고, 그것이 인간을 구원하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사람의 이름을 부르신 것이었다.


이렇게 말하면 "일탈"같은 생각과 행동이 다 구원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예수님께서는 일탈을 하신 것이 아니다. 인간의 정체성을 보이셨는데, 그것이 사람들이 가진 인간의 정체성,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과 다르게 스스로 정의 내린 인간의 정체성에 반한 것으로 보였기 때문에 일탈로 보였고, 그들에겐 일탈 이상으로 죽일 수 밖에 없는 모습이었던 것이다.


그런 예수님의 모습은 다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사람은 그렇게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정체성이 행위로 도덕적이고, 율법을 잘 지키고, 하나님께 어떻게, 또 무엇을 하고 드리느냐? 하는 것에 있지 않다는 것을 말씀하시려는 것이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정체성을 일깨우는 것이었고, 그것이 바로 사람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었다.


첫번째 아담은 창세기에 나오는 아담이고, 두번째 아담은 예수 그리스도라고 했다. 아담은 '붉다'는 의미고, <사람>이라는 말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사람으로 오셨다는 것, 그것은 하나님께서 아담을 만드신 것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것이다. 그 둘 다 없었던 존재가 존재하게 된 것이기 때문이다. 


Rome Chapelle Sixtine vintage
Rome Chapelle Sixtine vintage by Grégory Cassiau 저작자 표시비영리변경 금지



그 예수님의 존재, 이 땅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람의 모습이 존재하게 되었다는 그 사실, 그것은 사람으로 사는 존재들에게 그 정체성을 알게 하는 것이다. 그렇게 사람의 이름을 부르는 것, 사람의 정체성을 알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업무인 것이다. 그리고 그 이름을 듣고 자기를 알게 될 때, 사람은 하나님의 세계가 열리는 천지창조를 맛보게 되는 것이고, 그 내용이 바로 사람을 흙으로 만드셨다는 것이고, 그 직임이 또한 그렇게 사람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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