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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악과 (40) - 선악과와 율법주의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4. 3. 10. 11:19 Writer : 김홍덕

사람이 선악과를 먹고 나면 나타나는 반응은 아담이 보여준 것과 같이 자신이 벗었다는 것, 즉  인간이라는 실체가 드러난 것을 부끄러워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부끄러움에 대처하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로 함축될 수 있다. 그 하나는 율법주의고 또 하나는 영지주의라 할 수 있다.


우선은 아담이 부끄러움을 감추리 위하여 무화과 나무의 잎을 따서 치마를 만들어 부끄러움을 가렸다고 했다. 무화과 나무는 유대인의 나무이다. 요한복음에서 나다나엘을 보고 예수님께서 "네가 무화과 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노라(요 1:48)"고 하신 것은 나다나엘이 율법 아래서 하나님을 믿는 때를 알고 있다는 의미이다.



figs on tree
figs on tree by Martin LaBar 저작자 표시비영리 <유대인의 나무 무화과>


또한 예수님께서 길가의 무화과 나무의 열매가 없음을 보시고 저주하신 사건(마 21장)에서도 저주하신 그 때가 시기적으로 무화과가 열리는 시기가 아님에도 열매가 없다고 마르게 하셨는데, 이것은 유대인들의 신앙이 열매가 없는, 그러니까 생명이 없음을 말씀하심인 것이다. 예수님께서 먹을 것이 없다는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열매, 곧 하나님의 성품이 나타나는 신앙이 없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무화과는 이스라엘과 유대인을 상징하는 나무인데, 아담이 그 나뭇잎으로 옷을 만들어 벗은 것을 가리려 했다는 것은, 율법적인 계율을 지킴으로서 사람이 가진 육신으로서의 한계를 가리려 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사람이 가진 본능적인 욕구들인 성욕을 율법으로 절제하게 하고, 또한 식욕을 금하여 기도하게 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즉 아담이 무화과 나무로 벗은 것을 가리려 했다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잘 지켜 행하면 사람의 부끄러운 것이 가려진다고 믿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종교 안에서 오랫동안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는 전제 하에 사람들은 때로 금식도 하고, 새벽 기도도 하고, 절기도 지킨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오셔서 한 없이 그것을 책망하셨다. 그런데 더 안타까운 것은 지금도 이러한 생각은 모든 종교 안에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돌판에 새겨 주신 것은 그림으로 치면 밑그림을 그린 것이다. 즉 율법이 본 그림이 아니라 율법은 도화지와 같은 것이다. 즉 율법은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 드러나게 하는 것에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율법을 잘 지키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통하여 우리가 사람이라는 것이 드러나게 하신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율법은 한마디로 사람이 다 지킬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율법을 온전히 지키려 한 사람은 반드시, "이것은 사람으로서는 다 지킬 수 없는 것이구나!"하는 고백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즉 율법은 사람이 부끄럽게 여기는 사람의 정체를 탄로 나게 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아담의 무화과 나뭇잎 옷도 결국은 그 부끄러움을 가리지 못한 것도 바로 그런 것을 알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인간의 부끄러움을 한없이 감추려고 한다. 그런 위장을 위하여 늘 율법을 지키려 한다. 그래서 집 밖에 나오면 화장실도 가지 않는 사람처럼 보이려 한다. 그리고 교회는 그런 고상함의 정도가 클수록 신앙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장로와 같은 직분을 주어 찬양하게 한다. 즉, 이것은 고상하게 보일수록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율법주의다.


이 율법주의는 구약의 말씀을 지키려 한 유대인들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다. 성경의 말씀을 행동으로 지켜내려고 하는 모든 시도는 다 율법주의다. 이것은 식칼을 흉기로 쓰는 것과 같이 목적을 벗어난 것이다. 성경의 말씀은 앞에서 한번 포스팅 한 것과 같이, 그 안에 생명이 있으면 아무리 못하게 해도 할 수 밖에 없는 그런 행동을 말하는 것이지, 성경의 말씀을 행동으로 지켜 행한다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유대인들은 금식도 하지 않고, 고상하지 못하게 창기와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리는 예수님의 행동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기는 커녕 오히려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이다. 이것은 지금도 교회에서 신약이 되었든 구약이 되었든 행동으로 지켜내지 못하면 십자가에 못 박듯 죄인을 만들고 있다.


하지만 아담이 부끄러워한 벗음을 해결한 것은 무화과 나뭇잎이 아니다. 그 부끄러움을 덮은 것은 어린 양의 희생이었다. 즉,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아담이 부끄러워한 그 모습이 바로 사람의 모습이라는 것을 보여주시고, 그것을 보고 자신의 모습을 인정할 때, 그 부끄러움이 없어지고, 선악과를 먹은 죄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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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악과 (39)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4. 3. 9. 11:08 Writer : 김홍덕

이 말씀을 정리해 본다면,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육신을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시고 만족하셨고 그런 존재가 나오는 것을 보고 안식 하셨는데 반해 사람은 그 육신을 보고 연약하고 그것을 통제하지 않으면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없다고 본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의 시각은 바로 뱀의 유혹과 같이 하나님과 같이 되려 하는 마음에 기인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 사람의 관점이 생기는 것을 사람의 일생으로 본다면, 뭐랄까? 철이 들면서 이 세상이 추구하는 것이 선한 것이라고 인식하면서 순간부터 이다. 그것이 바로 뱀의 유혹인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이 땅에 육신을 가지고 나는 것은 죄가 아닌 것이나, 그 육신을 바라 보는 관점 자체는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죽은 것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이 자신의 삶을 보는 관점은 다 그렇게 시작한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일 수 있다.


성경의 모든 말씀은 사실 객관적 사실에 대한 호소나 믿음을 청하는 것이 아니다. 성경의 모든 시간은 한 개인이 그렇게 되는 시점이 언제 인지를 말씀하는 것이고, 성경의 모든 상황과 역할은 한 개인이 하나님 앞에서 그런 존재라는 것과 그런 행동과 삶에 빠져 있다는 것을 알게 하시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세상에 나서 자신의 정체성을 알아가는 삶을 살아가는 과정 전체를 놓고 이 성경을 봐야 한다. 즉 개인의 출생이라는 것도 중요하지만 한 개인이 세상을 습득하는 과정은 역설적으로 그 개인 안에, 또한 그 개인이 바라보는 개별적인 세계가 형성되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렇게 형성된 세상은 각양의 모양을 가지고 있지만 결국은 피라미드와 같은 구조를 가진 다양한 형태인 것이다. 그것은 혼돈이다.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을 만나는 사건이 시작되는 것을 천지창조라고 한다. 즉 이때 까지 세상을 보면 자기의 세계가 형성되던 사람에게 하나님의 빛이 비췸을 통해 하나님의 세계가 열리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을 만드시고 에덴 동산을 만드시고 그 중심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과 생명 나무를 두셨다는 것은 한 사람이 자신의 육신으로서의 삶을 선과 악으로 구분하지 않고, 그것이 하나님의 만족의 중심이 되도록 목적 안에서 살아 갈 때는 에덴 동산과 같은 인생을 사는 것이고, 그렇지 않고, 육신의 삶을 선한 것과 악한 것으로 구분하여 산다면 그것은 혼돈 속에서 아직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삶이라는 것이다. 당연히 천지창조도 없는 삶이고, 선악과를 먹어 부끄럽게 여긴 것을 덮어주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도 없는 삶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선악과를 에덴에 두셨다는 것을 다르게 표현하면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육신을 주셨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신 이유는 영이신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기 위함이었다. 이것은 창조의 목적이었기 때문에 그 선악과를 에덴의 중앙에 두셨다. 즉 하나님께서 사람을 육신으로 지었다는 것은 창조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은 그것을 선한 것과 악한 것으로 판단하는 기준으로 먹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선악과의 존재가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선과 악을 판단하는 기준과 대상으로 먹은 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육신이 문제가 아니라, 그 육신을 바라보는 관점이 문제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관점이 형성되는 것은 뱀의 꾀임과 같이 하나님처럼 되려 하는 것 때문이었다. 그것은 사람이 육신으로 나서 이 세상의 모든 철학과 가치 기준에 따라 이 육신을 부정하고 그것을 개량할수록 세상에서 성공할 수 있다고 믿기 시작한 것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것이 뱀의 꾀임이다. 즉 육신을 부인할 수록 하나님과 같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결과적으로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죽은 것과 같이 되는 것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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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악과가 하나님의 형상 곧 이미지, 의와 목적이 형상화 된 것이라면, 생명과는 그 정체성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육신을 가진 존재 안에 하나님의 생명이 함께 있어야 비로써 온전한 하나님의 형상인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생명이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즉, 사람 안에 하나님의 생명이 함께 있어야 비로서 만족의 동산이 된다는 의미이다.





그런 측면에서 본다면, 에덴 동산도 하나의 사람에 비유 될 수 있다. 만족하는 사람,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 만족하고 안식 할 수 있는 사람은 에덴 동산에 비유 될 수 있다. 사실 신앙이 자라서 보면 에덴 동산이라는 곳이 따로 있는 곳이 아니라, 사람 자신이 하나님께서 주신 삶에 만족할 때, 자신의 삶과 이 세상이 에덴과 같이 참 만족할 수 있는 삶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물론 이 앞에는 <순종>이 무엇인지 정확한 체휼과 깨달음이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선악과와 생명과가 함께 있다는 것을 만족의 상태라고 할 때, 그것은 사람에게는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것은 육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 안에, 하나님의 생명이 있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이 상태가 바로 에덴 동산과 같은 상태이다. 그리고 이러한 상태의 사람은 이 세상을 만족하는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고, 그 안에서 생수의 강이 넘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상태, 즉 육신 안에 하나님의 생명이 온전히 있는 상태를 성경은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고 하고 있다. 즉 이것을 성육신(成肉身)이라고 하는 것이고, 그 첫 열매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이다. 요한 사도가 요한복음 1장에서 말씀하신 것이 바로 이런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바로 생명이신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의 육신의 모양으로 나타난 바 된 존재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잠깐 아들이라는 정체성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는 성인이 결혼하여 낳은 남자 아이를 아들이라고 한정적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본성이 육신이 된 존재가 아들인 것이다. 우리는 흔히 육신으로 낳지 않아도 아들이라는 말을 쓰곤 한다. 예를 들어 '대한의 아들'과 같은 표현들이다. 대한의 아들이라는 것은 대한민국의 염원을 실현해 낸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즉 염원이라는 무형의 의가 한 사람이라는 형식으로 표현되었을 때 우리는 그 사람을 아들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 곧 하나님의 이미지가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된 존재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인 것이다. 그 하나님의 형상과 이미지는 바로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신 목적인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통하여 자신의 성품을 표현하기 위하여 육신으로 지으셨는데, 그 육신이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면서 살도록 하신 것이 목적인 것이다. 그 목적을 잘 이루고 살면 하나님께서 보실 때 "살았다"할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생명이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바로 생명과인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창조 목적과 같이 연약한 육신을 통하여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면서 사는 존재는 하나님께서 생명과를 에덴의 중앙에 두심과 같이 그 사람을 살았다 하는 만족의 상태로 보시고 안식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존재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육신으로 난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다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육신의 모든 정체를 보여주신 것도 바로 우리가 육신을 가져서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신 사건이었던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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