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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악과 (9) - 선악과의 현상, 부끄러움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4. 2. 16. 13:23 Writer : 김홍덕

벗었다는 것에 대하여, 하나님이나 선악과 먹기 전의 아담과 선악과를 먹은 다음의 아담은 입장 차이가 있다. 즉, 하나님과 선악과를 먹기 전의 아담은 벗었으나 부끄러워 하지 않았다. 이것은 사람의 외목에 대하여 어떤 의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선악과를 먹은 아담의 태도는 달랐다.


선악과를 먹은 아담은 우선은 벗었다는 것을 부끄러워했다.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뭐가 잘못되었다는 것은 다음에 이야기하더라도, 우선은 뭔가에 대하여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했다는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가장 핵심 중의 핵심이다. 그리고 다음으로는 부끄러움을 가리려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뭇잎으로 옷을 해 입었다. 그리고 선악과를 먹은 아담의 행동은 그것에서 그치지 않았다.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숨었다. 그리고 두려워했다.


이것이 선악과의 효과(?)이고 실체이다. 그러므로 선악과는 단순히 하나님의 명령에 불복종한 사건이 아니다. 이로 인해서 불복종한 마음이 사람에게 생겼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뱀이 유혹할 때 "하나님처럼"이라는 단서가 있었다. 즉 선과 악을 안다는 것을 하나님처럼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반역과 같은 것이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음으로 인하여 아담은 이전과 다른 존재가 되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사람의 모습에 대하여 판단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핵심이다.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시고 그 모습을 보셨을 때, 심히 좋았다고 했다. 그때 아담이 어떤 명품 옷을 입고 있었던가? 그것이 아니었다. 그냥 벗은 몸 그대로였다.


이것은 단순히 육신의 의복의 이야기가 아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의복은 그 신분을 말하는 것이다. 이는 성경의 전반에 있는 관점이고, 유대인들의 가치관이기도 하다.(성경은 유대인이 기록했다) 다시 말해서 벗은 것이 부끄러웠다는 것은, 사람이 사람 그대로의 상태로 있는 것이 부끄럽고 잘못된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지으시고 심히 좋다고 하셨는데, 사람이 사람 그대로 있는 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 그대로의 모습은 어떤 것인가?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 먼저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만드셨다고 하셨다. 여기서 형상이라는 것은 이미지라고 앞에서 포스트 한 바가 있다. 이미지는 내용이고 본질인 것다. 어머니라는 이미지가 있고, 각자의 어머니가 집에 있는 것이라는 것이다. 각 가정에 있는 모든 어머니는 어머니라는 이미지의 실체인 것이다.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 (창세기) 천지창조 여섯째 날 (7) - 하나님의 형상 = 이미지(image)



그러므로 사람은 하나님의 이미지가 형상화된 존재라는 것이다. 우리가 자신의 어머니를 통하여 어머니라는 이미지를 알게 되듯, 사람이라는 이 존재를 통하여 하나님이라는 이미지이자 인간 존재의 본질적 목적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바로 그런 존재가 인간이라는 것이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람의 정체성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인가, 곧 하나님이라는 본질을 표현하는 인간은 굳이 옷이 필요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육신의 의복이 필요없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인간이라는 그 본질 이외에 다른 것을 입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인간이라는 본질 이외에 '사람이 사람 구실을 하려면 예의가 있어야 한다.', '사람이 사람처럼 살려면 돈이 있어야 한다.'와 같이 <인간 + Something>이라는 구조를 선으로 보고 이것을 추구하고, 이것에 반하면 악이라고 정의하면서 역사를 이끌어 온 것이다. 선악과를 먹은 아담이 벗은 것을 부끄러워했듯이 말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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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ere You At?
Where You At? by godserv 저작자 표시비영리



선악과를 먹은 아담에게 하나님께서 하신 질문은 아주 중요한 문제일 수 있다. 우리가 일상에서 어떤 사람의 잘못을 꾸중할 때, 기본적인 관심사는 "Do"이다. 다시 말해서 "무슨 짓을 했느냐?"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아담 역시 먹지말라고 한 것을 먹은 나쁜 행동을 했다. 그런데 하나님의 질문은, <"네가 어디에 있느냐?">이다.


아담이 숨었기에 그렇게 물으셨다고 하기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너무 무한하다. 당신이 창조한 아담이 얼마나 넓은지는 모르지만 에덴 동산 어디에 숨었다고 못 찾는다고 할 수 있겠는가?  적어도 하나님께서 아담이 어디 있는지 모를 분은 아니라는 것에는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데, 왜 질문이 "어디에 있느냐?"였을까?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물으시는 질문 속의 "어디"라는 것이 장소의 시각인가? 그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아담이 지금 나무 뒤에 있느냐? 아니면 나무 위에 있느냐? 하는 것과 같은 장소(place)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아담에게 아담이 있어야 할 자리에 있느냐? 하는 것을 물으시는 것이다.


이 하나님의 질문을 이해한다는 것은 어쩌면 성경의 기본적인 관점을 이애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성경의 말씀이 행위에 관한 것이거나, 현상계에 관한 말씀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천지창조가 이 현상계의 창조과정을 설명하기 위하여 기록한 말씀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유대인의 왕이라는 것이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의 왕이라는 것이 아니듯이 말이다.


성경은 행위 규범에 관한 말씀이 아니라 존재 규범에 관한 말씀이고, 이 세상의 이치를 설명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이 세상으로 표현된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세계를 설명하기 위한 것이고, 이 땅 위의 나라들을 설명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설명하기 위하여 이 땅에 나라들이 있는 것이며, 예수 믿는 사람이 어떻게 행동하라고 가르치신 것이 아니라, 그 안에 하나님의 성품이 있으면 어떤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라는 알지 못하면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하신 질문은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비밀 중의 비밀에 속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선악과를 먹는 것은 어떤 행동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정체성의 문제라는 것을 말씀하시고 계신다는 것이다. 즉 선악을 알게되는 나무의 열매를 먹어 그것과 같은 상태가 된 존재, 즉 선악을 알게 된 상태가 문제가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물으신 질문의 핵심인 것이다.


즉, 선악과를 먹음으로 벌거벗은 것이 부끄럽지 않았던 상태가 아니라, 그것이 부끄러운 상태 곧 잘못된 것이고 악한 것이라고 판단하게 된 아담의 상태를 물으시는 것이라는 것이다. 먹지말라고 한 것을 어긴 행동에 관한 질물이 아니라, 지금 너의 정체성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창세기 3장(7~11절)에 나오는 하나님과 아담의 대화는 이를 아주 분명하게 말해주고 있다. 아담은 '하나님께서 어디에 있느냐?'라고 묻자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라고 했다. 부끄러워서 옷을 해 입었으면 된 것일텐데, 그것이 왜 두려운 상태라는 것인가? 이는 마치 길 잃어버린 아이와 같은 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의 정체성이 상실된 두려움을 아담이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누가 너의 벗을 것을 고하였느냐?"라고 다시 물으시면서, "네가 먹지말라고 한 실과를 먹었느냐?"하신다. 다시말해서, 아담이 벗은 것을 부끄러워하고, 두려워하는 이유가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를 먹음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분명하게 말씀하시고 계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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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악과에 대한 성경의 정확한 표현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이다. 우리는 그냥 선악과라고 줄여서 쓰면서 그 의미의 핵심을 간과하고 있을지 모른다. 그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불복종한 상징이나, 인류의 역사를 바꾼 과일 중의 하나와 같은 표현으로 희석된체로 말이다.


선악과는 하나님의 계율에 대한 범죄적 <행위>의 대명사가 아니다. 본질은 사람이 <선과 악을 알게 되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그것을 하나님께서 가장 중요한 죄로 보신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이것이 완전히 희석되어 버렸다. 이는 사람들이 삶과 세상의 요소를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적 논리로 분리하고 그 중에서 악한 것을 배제하고 자신의 삶에서 추출하는 것이 훌륭한 인생이라는 유전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논제에 대하여 "그럼 악한 행동을 하고 살아도 된다는 말인가?"라는 반문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것은 그런 문제가 아니다. 즉, 어떤 행동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어떤 행동이 선한 것이며, 어떤 행동이 악한 것이냐? 하는 것이 선과 악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선과 악을 구분하는 기준을 행동과 그 결과에 두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행동이나 표현은 어떤 것인가를 생각해 보자. 행동과 표현은 그 존재의 정체성에서 비롯된다. 군복을 입어서 군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군인이라서 군복을 입는 것이다. 만약에 간첩이 우리나라에 살면서 도덕적으로 너무 훌륭하게 살고 주변 모든 사람에게 칭송을 받는 삶을 산다고 해 보자. 대학에 기부도 하고 그렇게 살았다고 해도, 그가 간첩이라는 것이 밝혀지면 좋은 뜻으로 기부를 받은 대학마저 곤란해 질 것이다. 이건 행동의 문제가 아니라, 누구냐의 문제인 것이다.


무엇인 선한 것이고 무엇이 악한 것이냐의 기준은 사람의 행동과 세상의 결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누구이냐? 하는 문제가 더 중요한 문제인 것이다. 


실재로 성경에서도 선악과를 먹고 몰랐던 부끄러움도 알게 되었고, 자신의 행동이 악하다는 생각도 가지게 된 아담은 하나님을 피해 숨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숨어 있는 아담을 찾아와서 질문을 하신다. 그때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던진 질문이 <"아담아 네가 어디에 있느냐?">이다. 숨바꼭질로 찾으면 술래에게 들킨 사람인데, 질문이 어색하다. 통상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아담, 네가 무슨 짓을 했느냐?">가 더 적합할 것인데 말이다.


아담은 선악과를 먹는 불순종의 행동을 했는데, 하나님은 왜 "네가 어디에 있느냐?"고 물으셨을까?


이는 아담의 행동이 무슨 행동을 했느냐?에 대한 죄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네 자리, 곧 너의 정체성과 네가 일치 하느냐? 네가 네 정체성의 자리에 있느냐? 하는 질문인 것이다. 다시말해서 사람이 선과 악을 알게 되어 부끄러워 하고 자신의 행동을 악한 것으로 인식하여 숨는 아담의 모습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 사람에게 부여한 정체성의 자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어디에 있느냐?">라고 물으신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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