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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사람을 만드시다 (6)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3. 12. 6. 16:44 Writer : 김홍덕

이처럼 하나님께서 사람을 흙으로 만드셨다는 것은, 사람의 정체성이 어떤 것인가에 대하여 말씀하심이다. 다시말해서 스스로는 생명이 될 수 없지만, 어떤 씨를 받아서 생명이 되는 흙과 같이, 사람도 스스로는 하나님 앞에서 살았다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씨와 같이 받아 들이면 흙이 생명이 되듯, 사람의 삶이 하나님의 이미지가 형상화되듯 하나님의 성품으로 살게 되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께서 사람을 흙으로 만드셨다는 것은 사람의 위대함은, 흙이 강철보다 약하고, 금보다 천하고 보석 같은 아름다움은 없지만 생명을 낳는 능력이 그 최고의 경쟁력이듯이, 사람 역시 육체를 단련하여 강해지거나, 성형 수술을 해서 아름답게 되거나, 또한 인격적으로 도덕적으로 훌륭한 사람이 된다고 그 정체성이 회복되는 것이 아니라, 흙이 씨를 받아 나무가 되듯,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성품으로 나타내는 것에 그 존재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지금의 시대 아니, 인류의 역사를 통해서 보면 사람에게 큰 시험이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은 늘 강해지려해서 올림픽이 생기고, 아름다워지려 해서 미녀 선발대회가 생기고, 학식에 관해서 노벨상이 생겼는데, 이는 마치 흙이 철 처럼 되려하고, 흙이 다이아나 금이 되려 하고, 또 보석이 되려함과 같은 것이다. 그것이 문제가 되는 것은 그것 자체 때문이 아니라, 사람이 그렇게 하는 것이 사람의 존재 목적이나 정체성이라고 여기는 것에 있다.


특히나 이러한 것에 대하여 심각한 오해를 가지고 있는 곳이 바로 종교단체, 그 중에서도 성경을 경전으로 삼는 기독교 계통의 종교들이라 할 수 있다. 왜 그런가 하면 일반적인 종교는 그 근간이 사람의 수행으로 종교적 경지에 이르는 구조지만 성경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이 소유와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닌데도 그리스도가 오신 목적을 어느새, 세상에서 성공하는 바탕으로 삼아 버렸기 때문이다. 


즉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가르치는 그 가르침이 사람이 흙으로 지어졌다는 것을 전면적으로 부인하고, 바벨탑을 쌓을 때와 애굽이 피라미드를 쌓기 위해서 흙에 짚을 넣고 굽고 하듯, 흙으로 만드어진 사람을 훈련하고 가공해 가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땅과 같이 사람을 흙으로 만드셨는데, 사람은 흙을 구워 벽돌을 만들듯, 자신을 가공하고 훈련하면 강해지고 위대해져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것이 신앙의 정체성이라고 또 본질이라고 생각하고 가르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한마디로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다.


사람은 흙으로 만들어졌다. 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다는 것을 말씀하셨을까? 왜 유독 사람만 무엇으로 만들었는지 사람으로 알게 하셨을까? 그것이 사람인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는 모습에서 알 수 있다.


만약에 사람이 위대해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예수님은 그야말로 십자가에서 자신의 힘으로 내려왔어야 했다. 그것이 아니지 않는가? 정말로 사람이 위대해지고 도덕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릴 것에 대비하거나 회피하거나 이기기 위하여 운동하고, 기적을 연마하고, 바리새인들에게 공손하셔야 하지 않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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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사람을 만드시다 (5)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3. 12. 6. 13:44 Writer : 김홍덕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만드시는 재료(?)로 <흙>을 사용하셨다. 정말 특이한 것은 세상의 모든 다른 것의 창조는 단지 말씀으로만 하셨는데, 유일하게 사람만 흙으로 만들었다고 말씀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람의 정체성을 아주 분명히 하신 말씀이 아닌가 생각된다. 아울러, 이는 이 모든 천지창조의 과정이 사람에게 포커스가 맞춰져 있다는 것에 대한 부연 설명도 될 수 있을 것 같다.


무엇보다 흙이라는 것은 사실 자연계에서도 강도나 가치로 볼 때, 우수한 것은 아닌 물질이다. 강하기로 따지만 철이나 다이아몬드가 있고, 가치로 본다고 해도 금과 은은 물론 역시 다이아몬드와 같은 것이 있는데, 그 자체로는 뭐 하나 만들수도 없고, 어디가나 있는 것이라 크게 가치가 있는 것도 아닌 흙이 바로 사람의 근본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기대하시는 것이 강함이나 능력이나 보석같은 아름다운 가치나 고상함의 가치가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다시 말해서 흔히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 처럼 <남보다 더 잘하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귀하게 여기실 의사가 사람을 창조할 때 부터 없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이 되었던 다른 신이 되었던 간에 그 신앙하는 대상이 사람을 기뻐하는 것으로 강함이나 위대함 그리고 고상함과 도덕적인 것을 생각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흙으로 만드셨다는 것을 모르거나 부인하기 때문인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좀 심도 있게 이야기 한다면 사람의 정체성을 떠난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이 되었던 그 자리를 이탈한 것을 죄(하말티아, '과녁을 벗어나다'는 의미의 헬라어로 "죄"를 의미)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의 앞에서 사람이 죄가 되는 것이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을 때, 그 이유는 단 하나였다. <하나님처럼 되는 것> 그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위대해지려고 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흙이라는 인간의 정체성에 반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이 하나님 앞에 죄가 되는 것이다.(선악과는 정말 상세히 다룰 예정) 


흙은, 강함이나 위대함이나 고상함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아주 아주 절대적인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모든 생명의 모태라는 것이다. 모든 식물들이 흙에 뿌리를 두고 있고, 그 열매를 먹는 것에서 먹이 사슬이 시작된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모든 생명에게 있어 흙은 물 만큼이나 중요한 요소인 것이다.



사과나무의 모든 성분은 땅에서 왔다. 하지만 사과씨로 인한 것이기에 사과나무가 된 것이다.(사진 출처 : www.moontaknet.com)



하지만, 흙은 그 자체가 생명이지는 않다. 하지만 모든 식물의 성분은 다 흙에서 비롯된다. 다시 말해서 모든 생명은 다 흙이다. 그래서 죽으면 흙으로 돌아 간다. 사과씨가 땅에 떨어져서 사과 나무가 되는 것은 사과 씨가 나무가 된 것이 아니다. 사과 씨로 인하여 그 부근의 흙 안에 있는 성분들이 물과 햇빛과 함께 사과나무가 된 것이다. 그러므로 사과나무의 모든 것은 다 흙에서 온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람의 정체성이다. 다시 말해서 사람과 흙과 마찬가지로 생명 그 본질은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생명은 하나님이 보실 때 살아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을 말한다. 육신이 살았다고 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실 때 살아 있어야 하는 것이다. 시계가 멀쩡하지만 시간이 가지 않으면 주인 입장에서는 죽은 것과 마찬가지로, 사람이 아무리 육신이 멀쩡하게 살아 있어도 창조자의 목적이 없으면 죽은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씨와 같이 흙과 같은 사람 안에 들어 오게 되면, 그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 즉 하나님의 이미지가 형상화 되는 것이다. 그런 존재를 성경은 <그리스도>라고 한다. 하지만 그 사람은 사과나무의 모든 성분이 다 흙에서 비롯되었듯,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리스도와 같이 살아간다 해도 그 사람은 그냥 그 사람일 뿐이다. 


즉 원래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하여 그리스도와 같은 성품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사과씨로 인하여 흙이 사과 나무가 되듯이 말이다. 그러다 사과나무가 사과 열매를 맺지 못하는 상태가 되면 다시 흙으로 돌아가듯이, 사람도 그 안에 하나님의 씨와 같은 말씀과 이미지와 호흡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죽은 존재가 되는 것 역시 같은 이치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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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이 얼마나 절대적 사안인가?

Category : 김집사의 뜰/복음 담론 Date : 2013. 11. 25. 12:57 Writer : 김홍덕

11월은 본의 아니게 조금은 바쁜 세월을 보내고 있는듯 하다. 자연스레 포스팅도 자주 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 저녁에 티비로 배구중계나 보고 있을 때는, '이러니 뭐라도 하자' 마음 먹고 몸을 일으켜보려 해도 그게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다고 여기서 포기할 것도 아니지만 말이다.


나는 가끔씩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이 삶에서 얼마나 절대적인가 하는 문제를 생각해 보곤 한다. 어떤 날들은 교회 생활이 너무 재미있기도 하고, 반대로 어떤 날들은 교회에 가는 것이 참 부담스럽게 여겨질때가 있기도 하다. 또 한 때는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던 사람이 어느날 소원해지는 것을 보면서, '두렵지 않은가?', '어느 것이 진실된 모습인가?' 생각해보기도 한다.


고등학교 시절 친구들과 같이 다니던 교회에 교회 이전 문제를 논의한 적이 있었는데, 거의 이전 쪽으로 교회의 의견이 모일 때 쯤, 한 원로장로께서 검은 양복에 검은 넥타이를 메고 나와서 "교회를 이전하려면 나를 밟고 가라"는 말 한마디에 이전이 없던 일로 된 적이 있었는데, 한 친구가 이 일을 보고 교회를 떠났었다.


어떻게 전 교회의 의견을 한 사람이 뒤집는가 하는 것이 그의 말이었다. 그리고 그는 다른 교회에 열심히 출석했다. 이젠 가끔씩 부모님들 돌아가시면 만날 수 있는 세월을 보내다 만났을 때 자기 교회에 대한 자랑이 보통이 아니었다. 그런 그가 얼마 전에 만났을 때 이제는 어떤 교회도 다니지 않는다고 했다. 그가 자랑하던 교회에서 장립집사 피택이 되었는데, 헌금액이 너무 많아 포기했다는 것이다.


그 친구를 요즘 생각해 본다. 고등학교때 같이 다니던 교회의 문제나, 장립집사 헌금이 너무 많은 문제와 같은 것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가 무엇이든 그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그런 문제보다 절대적인 것이었는가? 하는 것을 생각해보는 것이다. 우리에게 있어 신앙이 얼마나 절대적인 사안인가를 생각해 보는 것이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소위 말하는 <먹고 사는 문제>가 삶의 절대적인 문제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과연 그것이 인간으로 가진 문제의 전부일까를 생각해 보는 것이다. 그리고 때로 한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면, 그에게 하나님을 믿었다는 그 과거와 지금을 통틀어서 과연 하나님을 믿는 것이 절대적인 문제일까 싶은 것이다.


사람이 그렇듯 신앙이 삶의 절대적인 사안이 되지 못하는 것은 신앙이라는 것이 먹고 사는 문제와 같은 삶의 한 행위와 방법에 관한 것으로 전락했기 때문이라 생각이 된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 행여 하나님이 아니라 할찌라도, 오늘 <나는 누구인가?>하는 문제가 모든 먹고 사는 문제보다 절대적인 사안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나는 그 친구를 또 만날 것이다. 그 때 행여 신앙에 대하여 이야기할 기회가 있다면, 나는 그에게 '너에게 신앙은 한번도 절대적 사안이 아니었나 보다'라고 말해 줘야겠다 생각한다. 친구니까? 그리고 이 블로그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에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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