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 2650

선악과 (34) - 선악과의 존재 시점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4. 3. 4. 11:02 Writer : 김홍덕

그리고 중요한 한 가지는 바로 시점이다. 아니 시간의 개념이다. 근원적으로 지금 이 창세기의 말씀이 물리적인 세상의 창조과정에 관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상기해야 한다. 즉, 선악과의 문제, 선악과와 관련한 모든 관점이 세상이 창조되고, 그 창조의 과정 속에 에덴 동산이 있고, 그 에덴 동산에 있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은 사건이라는 순차적인 사건이라는 프레임에 갇히다 보면 모든 문제를 천지가 물리적으로 창조 되던 시절이라는 시간 프레임에 함께 갇히게 된다는 것이다.


분명히 이 창세기에 대하여 포스트를 해 오면서 강조했던 것이 있는데, 그것은 이 창세기의 말씀이 옛날 옛적에 하늘과 산과 바다가 만들어지던 이야기를 하자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떠 올려야 한다. 지금 이 모든 이야기는 바로 오늘 나의 이야기라는 것을 말이다. 그래서 고백적인 관점이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이 천지창조가 바로 나에게 있어 하나님의 세계가 열리는 것이라는 것을 생각해 본다면,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 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세계가 만들어진다는 것이고, 이 창조의 과정은 물리적인 세상의 창조과정을 통한 하나님의 표현이고, 이것은 결국 하나님에 대한 의미가 나에게 생김으로 열리는 또 다른 세계에 대한 말씀이라는 것이다.


그러한 관점과 그런 고백 속에서 영이신 하나님께서 그 의를 표현하시기 위하여 세상을 만드시고, 사람을 만드시기 전의 혼돈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이는 우리가 신앙에 대한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면서 부터 생긴 여러 가지 의문과 혼돈들이 그것이다. 즉 창세기 1장 2절에 나오는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라는 말씀이 바로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온갖 의문을 가지고 있었던 시절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는 중에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 하시니, 마치 우리가 컴퓨터에 대하여 어두운 자였다가 좋은 선생을 만나 깨닫게 되었을 때 빛을 만났다고 하는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 혼돈 가운데 있는 우리 사람들에게 빛이 되신 것을 "빛이 있으라"고 하셨다고 했다. 즉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창조의 과정이 사람을 만드시고 안식하심으로 마치는 것은, 사람이 이 창조의 최종 목적이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보실 때, 하나님의 형상 즉 영이신 하나님의 이미지를 표현할 수 있는 존재가 나오게 되었을 때  그 존재를 하나님께서 당신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이라고 여기신다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생물학적인 사람의 형태를 만들었다는 것이 아니라, 이미 육신을 가지고 살던 사람이 하나님의 이미지를 표현할 수 있는 상태가 된 사람이 되었다는 의미를 가지셨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이 이미 생물학적으로 태어나서 멀쩡한 육신으로 살고 있다가, 그 사람이 하나님의 빛을 만나고, 창세기에 나오는 천지창조의 과정으로 표현된 것과 같은 의미의 과정을 삶으로 살아내면서 그 안에서 자신이 하나님의 형상 곧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며 사는 존재로 살아야 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 때 비로써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살아있는 사람으로 여기신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하는 존재로 살고 있지 않는 상태는 곧 하나님의 세계가 열리지 않은 세상이고, 이것은 생명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죽은 자와 같은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천지창조인 하나님의 세계가 그 인식 세계 안에 열리지 않은 사람은 생물학적으로 살아 있다고 해도, 하나님 앞에서는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기 위하여 지어진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있으니, 멀쩡하지만 시간이 가지 않는 시계처럼 죽은 것이고, 또한 그 사람이 서기 30,000년에 살던 기원 전 10,000년 전에 살든 동일하게 그 사람에게는 천지창조가 없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바로 그 상태, 즉 하나님께서 보실 때 살았다고 할 수 없고, 죽었다고 하는 상태가 바로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하실 때 그 죽은 상태와 동일한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선악과를 먹었다고 하는 것을 다른 표현으로 하면 창세기 1장 2절이 되는 것이다. 땅(흙으로 만들어진 인간)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는 그 상태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어 하나님께서 보실 때 죽은 상태인 것은 같은 것이다.


이것은 선악과라는 것이 단순히 에덴동산에 있었던 것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있어 과거에 있었던 것으로 간주되어, 오늘날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선악과를 먹을 줄 알면서 왜 만들어 놓았는가?’ 반문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선악과를 과거의 한 사건으로 보는 것만 있는 관점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 선악과가 모든 사람이 선과 악을 판단하는 기준을 가지고 있는 것만 봐도, 이것은 단순한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현재 숨 쉬며 살아가는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사건이고, 그렇다면 선악과의 시점이라는 것이 과거가 아니라, <나>라는 한 개인의 어떤 시점에 있는, 혹은 있었던 일인 것이다.


(계속)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

선악과 (33) - 선악과는 필연적인 것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4. 3. 4. 09:26 Writer : 김홍덕

그러므로 성경을 자기의 이야기로 받아 들이는 사람이 선악과에 대한 말씀을 보면, 자신이 모든 것을 선과 악으로 구분하여 보고 그 가운데서 선한 것만 취하여 사람을 그 선의 관점에서 경건하게 만들어야 하나님의 기쁨이 된다고 생각하고 살았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 성경을 주관적으로 받아 들이기 시작하는 것은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런 관점은 당연히 자기의 삶을 선악과를 먹은 인생이라는 고백을 할 수 밖에 없다.


이런 이야기를 해 가는 것은, 고백적인 관점이 아니라면 <"하나님께서는 왜 선악과로 인하여 사람들이 범죄 할 것을 알면서 선악과를 만들었는가?'>하는 문제의 답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즉, 이 문제는 자기 고백적 관점에서 볼 때 이해가 되는 사건인 것이다. 이것은 해석에 어떤 방향이나 지식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1"이 있고, "2"가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즉, 자기 고백적 관점이 먼저 있어야만 알 수 있는 것이다.


베드로도 빌라도의 뜰에서 예수님과 자신과의 관계를 알지 못하는, 즉 자신은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이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모습이 자기의 모습이라는 고백이 없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빌라도의 뜰에서 심문 받는 광경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마치 그것처럼, 선악과 역시 자기 고백적인 관점에서 보지 않는다면, 이것이 도무지 무슨 이야기인지 알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선악과가 사람들에게 문제가 될 것이라는 것을 아셨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표현하자면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선악과의 문제를 하나님과 사람의 존재와는 별개의 문제로 본다면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어떤 의미인가 하면,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하나님께서 존재하시고, 이어 세상을 만드시고, 또 사람을 만드신 그 모든 경륜과 별개로 또 하나의 과정과 사건으로 본다면 '미리 아셨다'고 표현할 수 있겠지만, 선악과는 하나님의 천지창조의 과정, 그리고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그 창조와 절대로 별개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선악과는 하나님의 천자창조 과정의 한 요소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동시적이고 동일한 것에 대한 또 다른 표현이다. 선악과라는 것은, 영이신 하나님께서 세상과 사람으로 그 형상 곧 이미지를 표현했다는 그 자체에서 필연적으로 사람들이 악으로 여길 수 밖에 없는 육신이라는 형식이 동반되었다는 것이다. 이건 너무 분명한 것이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주관 아래 있는 것이니 선악과도 예외가 될 수 없으니 말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악한 것으로 여길 수 있는 육신이라는 형식은 영이신 하나님께서 그 이미지를 형상으로 표현 하면서 시작된 동시적 개념인 것이다. 내용이 형식으로 표현된 것이니 하나의 정체성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하시는 순간, 이미 선악과의 문제는 발생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영이신 하나님께서 그 내용인 의를 사람이라는 육신을 가진 형식으로 표현했기 때문에, 그것을 표현하는 순간 사람이 악하게 보는 육신이라는 것이 함께 생겼다는 것이다.


(계속)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

선악과 (32) - 고백적 관점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4. 3. 3. 16:16 Writer : 김홍덕

그러므로 사람이 사람을 보는 관점은 오직 하나, 하나님과 같은 관점에서 봐야 한다. 사람이라면, 삶과 생김이 어떠해도 모두가 다 하나님의 형상, 곧 하나님의 이미지를 표현하는 표현 양식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리고 그 배경에는 하나님께서는 실수하시거나 부족한 것을 만드시는 분이 아닌 절대자임도 함께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선악과의 문제는 신앙의 근간이기도 하고, 교회의 존립 이유이기도 한 것이다. 즉, 교회라는 곳은 사람이 가지고 있는 선과 악을 판단하는 관점으로 사람을 보는 곳이 아니라 그저 사람이기만 하면 그 사람이라는 그 하나로 평안함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 벌거벗은 아담을 보고 하나님도 안식하셨는데, 사람이 그것을 보고 쉬지 않고 나무라는 일을 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 보다 뛰어난 존재거나 아니면 하나님 앞의 반역자일 뿐이다.


그렇다면 이제, 왜 사람은 스스로 선과 악을 판단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는가? 하는 것에 대하여 이야기 해 보자.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을 것이라는 것을 몰랐거나, 아니면 알면서 만들어 두셨는데, 몰랐을리는 없으니 왜 알면서 만들어 두셨는가? 하는 문제 말이다. 이 문제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하는 문제가 하나 있다. 그것은 성경의 모든 말씀은 성경을 기록한 저자들의 입장에서 볼 때 고백적 관점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아브라함의 노종이 아들 이삭의 베필을 얻기 위하여 메소포타미아 나홀 성에 이르기 전에, '소녀에게 물을 청하였을 때, 약대에게도 물을 주면 그 소녀를 하나님께서 주인의 아들의 베필로 주신 것으로 알겠다.'고 하고 갔을 때, 리브가를 만나게 되고 리브가가 그 종의 마음과 같이 약대에게 물을 주었기에 이삭의 아내가 되는 말씀이 창세기 24장에 있다. 이 말씀에서 그 노종에게 예언의 능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그 종이 어떤 마음을 가지고 나홀 성으로 갔던 간에, 리브가를 얻는 모든 과정이 그에게는 하나님께서 역사하신 고백적인 사건이라는 것이다.


특히, 성경을 고백적인 관점으로 봐야 하는 이유가 하나 있는데, 그것은 예정론에 관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예정론이라고 하면, 하나님께서 컴퓨터 프로그램을 짜듯이 사람의 삶과 인생의 모든 것을 미리 다 짜 놓고서 그대로 경영하신다는 것을 예정론으로 알지만 그것은 아니다. 진정한 예정론은 사람이 자기의 삶을 살고 보니 그 모든 과정이 하나님께서 예정하시고 이끄셨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 예정론이라는 것이다.(예정론은 나중에 따로 포스팅 예정)





'왜 이런 고백론적 관점에서 성경을 봐야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나 더 한다면, 사람들이 자기 고백적인 관점에서 성경을 보지 않는다는 것은 성경을 객관적인 관점에서 본다는 것이고, 그것은 남의 이야기, 남의 나라 이야기 하듯이 본다는 것이고, 그것은 성경을 믿는 믿음을 성경의 사실을 믿는 것이라고 믿게 되는 절대적인 오류에 매몰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오류에 매몰된 사람들의 질문들을 들어 보면, "예수님 이전의 사람들은 구원을 받았나요?", "예정되었다면 굳이 사람이 애쓰면 살 필요 있나?" 같은 3자적 관점의 질문을 한다. 즉 성경이 자기 이야기가 되지 않아 3자적 관점에서 보면 도올 김영옥 교수처럼 성경은 이스라엘 역사일 뿐이라고 하게 된다. 야신이라 불리는 김성근 감독은 '객관적인 입장에는 아무 말이나 할 수 있다.'고 했다. 즉 자기와 무관하니 아무렇게나 이야기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성경은 ,<나>의 이야기이다. 주관적인 나의 이야기가 아니면 성경은 그냥 소설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이 선악과에 대한 모든 이야기도 자기의 고백적인 관점에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냥 신학적 지식으로 이해하려고 한다면 단언컨데 절대로 그 의미를 제대로 알 수 없을 것이다. 이는 비단 선악과의 문제만 아니라 성경의 어떤 말씀도 그렇다. 예수님 당시에도 예수님께서 유월절을 앞두고 예루살렘에 입성 했을 때,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환호하던 이들이 수 없이 많았지만, 오직 예수님을 못 박는 자리에 있던 백부장에게는 자기의 모습을 발견하게 하는 이, 곧 자기의 이야기로 받아졌고, 예루살렘 성의 사람들은 정치자로서의 예수님만 알았던 것이다. 


 (계속)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