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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사람을 만드시다 (2)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3. 11. 5. 10:30 Writer : 김홍덕

누군가의 어머니도 또 누군가의 아버지도 다 이 세상을 떠난다. 그렇지만 그 자녀들에게 부모의 이미지는 늘 있다. 다만 부모가 세상을 떠난 다음에는 이미지만 있고 실체가 없는 것이다. 창세기에서 말씀하고 있는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의 이미지라고 했다. 즉 하나님의 이미지가 형상화된 존재가 바로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사람의 정체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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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에 대하여 바울 사도는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빌 2장)" 이라고 했고, 요한 사도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요 1장)"이라고 했다. 이것은 하나님이 인간이 되심에 대하여 말씀하심이다. 이것은 흔히 말하는 <빙의>와 같이 하나님이 사람 속에 들어 오신 것과는 좀 다른 이야기다.


사람이란 하나님의 이미지가 형상이 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사람과 하나님은 형식과 내용의 관계라는 것이다. 즉 하나님은 내용이고 사람은 그 형식이라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다. 사람이 있는데 그것에 하나님이 마치 귀신 들린 것 처럼 그 사람 안에 기거하는 형태는 아니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사람 따로 하나님 따로가 아니라, 사람은 곧 하나님의 한 표현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왜 중요한가 하면 사람들은 하나님께 기도를 하는데 그 내용이 보면 사람에게 필요한 것을 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구하는 것이 대부분 하나님께서 사람의 필요를 들어 주시기를 기도한다. 그것은 하나님과 사람의 필요가 다르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그렇게 생각한다.


하지만 하나님의 생각은 다르다. 하나님은 그 뜻이 우리에게 이루어지기를 원하신다. 우리가 또 우리 육신의 일이 잘 되므로 하나님께서 좋아하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과 사람은 그 구하는 것이 다르다. 사람은 육신이라는 형식을 가지고 있어서 그 형식에 맞는 것을 구하나,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그 영이 표현되는 형식을 원하신다.


어떻게 보면 다를 것 없는 이 차이는 <무엇을 좋은 것으로 여기는가?> 하는 것에서 구분이 된다. 사람들은 세상에서 성공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한다. 년말 각종 시상식에서 교회 다니는 유명인들의 수상 소감과 같은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런 것이 아쉬운 분이 아니시다. 


사람들이 흠모하는 세상에 있는 모든 좋은 것을 다 그 분이 만드셨다. 그게 필요한 분이 아니시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이유가 사람이 이 세상의 어떤 것으로 성공하는 것을 보시기 위하여 사람을 만드신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사람에게 두신 목적은 그런 위대함이나 고상함이나 화려함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알려 주신 분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이시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무엇을 보여 주셨는가? 하는 것을 본다면 사람을 만드신 목적을 알 수 있고, 그 목적을 자세히 보면 천지창조의 과정 속에 이미 하나님께서 그 뜻을 보이셨음을 알 수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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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사람을 만드시다 (1)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3. 11. 4. 09:32 Writer : 김홍덕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만드실 때 흙으로 만드셨다. 세상에 좋고 강하거나 아름다운 것이 얼마든지 있는데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 하필이면 흙으로 만드셨을까? 다른 것도 아니고 하나님 자신을 표현할 존재를 만드시면서 말이다. 이렇게 말하면 괜히 문제를 도입하기 위하여 이렇게 말하는 것인 아닌가 싶겠지만 그것은 아니다.


사람들이 늘 강해지고 위대해지고 아름다워지려고 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자신을 표현할 존재를 만드심에 있어 강한 재질이나 아름다운 것으로 만드시지 않았다는 것을 강조해 보고 싶은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흙>으로 만드셨다는 것을 망각하면서 살 때가 많기 때문이다. 그것은 망각하면 안 되는 것이다. 궁극적으로는 그것을 망각한다는 것은 바로 <죄>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사람을 만드신 원재료인 흙이다. 이것은 아무것도 아닐 수 있다. 하지만 이 세상의 모든 식물은 다 여기서 난다. 단 하나의 씨로 인하여 이 흙이 생명이 되는 것이다. 나무와 채소의 모든 것은 다 흙으로 부터 온 것이다. 그리고 식물이든 동물이든 다 죽으면 흙으로 돌아간다. 이 흙이 바로 사람의 정체성이다. 하지만 육신의 정체성이 흙이라는 것을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천지창조의 과정에서 사람을 흙으로 창조하셨다는 것은 사람의 정체성에 대한 말씀인 것이다. 사람이 무엇이냐? 그리고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그리고 또 왜 창조되었는가? 하는 모든 것이 이 안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설명하는 것이 바로 천지창조의 과정인 것이다.


천지창조의 과정은 지구나 우주가 어떻게 생성되었는지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이것은 결국 천지창조라는 것을 인식하는 사람에게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며, 그것은 하나님의 세계가 열리는 것이라고 했고, 하나님의 세계를 인식하고 이 세상을 하나님의 세계로 인식하며 사는 사람을 성경은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사람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천지창조는 결국 사람을 만드심으로 종결된다. 그것은 이 천지창조의 목적이 사람을 만드시는 것에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태초라는 것이 한 사람에게 어떤 세계가 열리는 것이라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한 사람에게 어떤 세계가 열리는 것이나, 한 사람이 하나님이 안식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나, 둘 다 사람이 목적이고 주체라는 점에서 같다는 것이다.


그렇다 사람은 하나님의 창조 목적의 본질이다. 그리고 누군가가 무엇을 만들었다는 것은 결국 자신을 나타내기 위함인 것이다. 휴대폰은 누가 만들어도 자기 상표를 꼭 붙인다. 자기가 만들었다는 것이다. 삼성이 자기가 만든 스마트폰에 사과 모양을 그리지는 않는다. 심지어 아이폰에서 돌아가는 프로그램 조차 잘 만들지 않는다. 자기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인 것이다.


성경에도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 <우리의 형상대로>라고 하셨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내고자 하신 것이다. 이것에 대하여는 앞에서 아주 길게 포스팅을 했다. 이것은 물리적인 형체가 아니라 <이미지>고 내용이라는 것을 말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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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천지창조의 과정 속에서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볼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보여주신 삶의 모습들이 고스란히 창조의 과정 속에 있기 때문인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자신을 아브라함 보다 먼저 있었다고 하셨고, 아버지께서 세상을 만드실 때에 함께 계셨다고 하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자신을 빛이라고 하셨다. 예수님께서 온 몸에서 빛이 났다는 말씀이 아니다. 이것은 천지를 창조하실 때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하심으로 한 사람 안에서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있기 시작했다는 의미라고 했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라는 정체성 곧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두신 목적과 의를 알게 되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빛이라고 하신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친히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심으로 창조의 과정 속에서 사람이 바다 같은 세상의 것으로 자기 정체성을 해갈할 수 없다는 것을 보이심과 같이 사람이 세례를 받아 하나님 앞에 자기를 고백하심을 보여 주신 것이다. 그리고 해와 같이 빛을 내시는 분, 다시 말해서 빛 그 자체는 아니지만 빛이 어떤 형상이 되었듯이, 하나님의 말씀이 예수님이라는 형상이 되시는 성육신을 보이셨고, 


또한 씨 있는 식물을 먹거리로 주심으로사람의 마음 밭에 하나님의 말씀을 뿌린다고 하심과 같은 것이다. 또한 동물에 관해서도 땅에 기는 것과 들짐승과 육축(가축)으로 구분하신 것은 결국 가축이 주안점인데, 이는 주인 있는 그러니까 순종하고, 그 생존의 목적이 주인에게 있는 생명이라는 것을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십자가에 달리심과 같은 것이다.


이렇듯 창조의 전 과정은 그리스도의 정체성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이 모든 창조의 과정은 다 사람에게 수렴한다. 다시 말해서 이 모든 창조는 결국 사람을 만드시기 위한 과정이었다는 것이다. 창세기로 본다면 아담과 하와를 만드시기 위한 과정이 천지창조의 과정이었다는 것이다.


특히나 사람을 만드시는 장면은 정말로 인상 깊고 성경적으로나 또한 우리 사람에게 아주 중요하고 의미가 있는 말씀이다. 먼저 가장 주목할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 <흙>으로 만드셨다는 것이다. 궤변처럼 반문해 본다면 세상에 좋은 재료가 얼마나 많은데 하필이면 흙인가? 하지만 이것이 매우매우 중요한 하나님의 <의>라는 것을 간과할 수 없는 것이다.


이제 다음 포스트 부터 사람에 대하여 깊이 있게 다루어 볼 예정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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