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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악과 (28) - 거듭남 vs. 영지주의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4. 3. 1. 08:54 Writer : 김홍덕

그러므로 성경에서 하나님이 보시는 유일한 악함인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없다는 생각을 제외한 그 어떤 것도 하나님께서는 문제를 삼지 않으신다. 그렇다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다는 것만 인정하면 아무나 죽여도 되고, 성적인 완전 개방도 문제가 되지 않는 세상이 되는 것인가? 라고 반문하겠지만,


사람이 사람을 죽이거나, 다른 사람을 해롭게 하는 뿌리는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하게 하는 선악과에 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하나님의 아들, 또한 그리스도가 될 수 없다는 생각을 하는 것과 사회적인 문제는 그 뿌리가 같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생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또한 서로의 죄를 사할 수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절대로 사람을 해롭게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람을 향해서 '이것이 선하다', 혹은 '이렇게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인간이라는 정체성은 수정하거나 개조할 것이 없는 온전한 존재라는 것을 안다는 것(이것은 하나님의 생각과 동일한 생각이기도 하다.)을 안다는 것이고, 이것은 자신이나 또한 다른 사람이 인간이라는 것이 전혀 부끄럽지 않다는 것을 안다는 것이다. 그것을 아는 사람은 사람을 하나님의 목적 앞에 늘 유익하지 해롭게 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생명이기 때문이다. 생명체는 태어나면 그 종으로만 살지 다른 종으로 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을 만나서 사람에 대한 생각을 바꾸어낸 사람을 <거듭났다>고 하는 것이다. 즉 다른 생명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생명이 되었다는 것은 절대로 다르게 살 수 없다. 그 생명을 죽일 수는 있어도 개로 살았던 것을 고양이로 살았다고 할 수 없고, 개를 죽일 수는 있어도 "야옹"하게 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서, 그러니까 혼돈 중에 있다가 하나님의 세계가 열린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거듭나게 된다. 이것을 성경을 거듭남이라고 한다. 사람의 부끄러움을 율법의 무화과 나뭇잎으로 가리던 사람이 사람 앞에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처럼 인간이라는 것을 보여주며 살아 그 삶을 보는 사람이 또한 그렇게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며 살게 하는 그런 생명이 되는 것, 그것이 바로 거듭남이다.


그러므로 이 <거듭남>의 과정을 지나서 그리스도의 생명이 된 사람에게, '사람이 하나님의 성품으로 살 수 있다는 것만 믿으면 내 맘대로 하며 살아도 된다'와 같은 생각은 들 수 없는 것이다. 개가 '나도 야옹' 해 봐야지 하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영지주의는 잘못된 것이다. 적어도 하나님의 세계가 바로 열리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 자기 모습이 발견된 사람이라면, 세상도 정말 열심히 살고, 누가 봐도 경건한 삶을 살 수 밖에 없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에는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하여 살았다면, 이제는 사람에게 사람의 정체성을 알게 하기 위하여 사는 것으로 삶의 목적이 치환되었을 뿐이다. 하지만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전부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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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어떤 관점에서 보면 성경의 모든 말씀은 사람을 하나의 정체성으로 보느냐? 아니면 사람 안에 있는 각 양의 본성들을 나누어서 보느냐 하는 문제로도 볼 수 있다. 이는 다르게 말해서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할 온전한 존재로 볼 것인지, 아니면 부정함을 가지고 있는 존재로 볼 것인지에 대한 문제라는 것이다.


이것은 중요한 문제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느냐? 아니면 절대로 그럴 수 없느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유대인들이나 로마인들의 관점에는 예수님이 보여주신 인간의 모습은 절대로 하나님의 아들이나 왕이 될 수 없는 것이지만, 하나님과 십자가 밑에 있던 백부장, 그리고 이후의 많은 사도들과 초대교회 성도들은 이 평범한 사람들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시고 믿었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세상, 그러니까 하나님의 세계 안에서는 선과 악은 단 하나 뿐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관점에 합당한 것과 아닌 것 그것 뿐인 것이다. 즉 사람이 하나님의 성품대로 사는 그리스도의 삶을 살 수 있느냐? 아니면 본연의 사람으로는 되지 않고, 사람의 추하고 악한 것을 종교적인 계율과 훈련으로 배제 시켜야만 살 수 있다는 그 두 가지 관점이 있고, 전자는 하나님 앞에서 선한 것이며, 후자는 악한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사람이 판단하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다. 


마태복음 9장에서 예수님께서 침상에 메고 온 중풍 병자를 고치실 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면서 고치심을 보고 그것을 참람하다고 생각하는 유대인들의 생각을 "너희가 어찌하여 악한 생각을 하느냐?(마 9:4)"이라고 하셨는데, 사람이 사람의 죄를 사하는 것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을 <악한 생각> 즉 악한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사람의 죄는 하나님만 사할 수 있는데, 사람이 그것을 대신한다는 것은 신성 모독이라고 생각하는 유대인들의 생각은 초라한 인간의 모습을 가진 주제에 하나님을 대신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유대인들의 생각이 바로 악한 생각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생각의 뿌리는 사람의 본성을 분리해서 보고 그 중 사람의 어떠한 요소는 절대로 하나님의 역할을 대신할 수 없는 존재로 사람을 자리 매긴다는 선악과에 근간을 둔 생각이 유대인의 생각이고 악한 생각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선과 악을 판단한다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성품으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의 삶을 살 수 없다고 생각하게 하고, 그런 모든 생각은 악한 것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선악과의 문제는 신앙의 근간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셔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의 형식으로 지으셨는데, 선악과를 먹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성품을 표현하기 위하여 부여한 사람의 연약함을 추하고 악한 것으로 본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사람의 잘못된 생각, 그것을 하나님께서는 악한 것으로 보실 뿐 아니라, 그런 상태에 있는 사람들을 목적을 상실한 죽음의 상태로 보시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같은 육신으로 오셔서 선악과를 먹고서 죄 가운데 있는 사람들의 생각, 알지 못하고, 땅이 혼돈하며, 하나님의 세계가 열리지 않은 세계를 하나님의 세계로, 또 그리스도의 정체성으로 살게 하는 생명이 있는 존재로 살 수 있도록 하신 것이 그리스도의 사역이고 성경의 근간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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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악과 (26) - 사람은 나눌 수 없는 존재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4. 2. 28. 15:42 Writer : 김홍덕

사람이 가진 연약함이라는 것은 사람이 어떤 것은 취하고 어떤 것은 배제하려는 이분법적 사고의 결과물이다. 그런 이분법적 사고는 당연히 선악과에서 비롯되었다. 그렇다면 만약 그런 이분법적 사고가 없다면, 사람들이 통상적으로 감추고 싶어 하는 인간의 모습이 연약하다는 관념도 뿌리가 이분법적 사고와 선악과에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나와 같이 일하는 사람이 인도에 출장을 갔는데, 나름 괜찮은 레스토랑에 갔는데, 사람들이 손으로 음식을 먹는 것을 보고 구역질을 할 번 했었다고 했다. 우리의 관점에서는 터무니 없이 비위생적인데 인도 사람들 적어도 그 식당의 사람들에게 손으로 음식을 먹는 것은 아무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스스로 감추고 싶어하고, 또 사람이 스스로 연약하고, 그래서는 안될 것 같은 본성들이 정말로 연약하고 부정한 것이라 이름을 메기는 것이 적당한가 하는 기본적인 질문부터 해 봐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육신을 가진 사람의 모습이 보기에 심히 좋았는데, 사람 특히 선악과 이후의 사람들은 그것을 추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즉 사람의 모습은 하나 인데 관점은 두 가지라는 것이다.


즉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연약하다고 생각하고 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본성이 과연 추한 것인가? 하는 문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선악과 이전에는 그것을 부끄러워하지도 않았고, 하나님도 너무나 좋았다고 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부끄럽게 여기는 것 보다 먼저 있었기도 했다. 


하지만 사람에 대한 관점을 누가 가질 수 있느냐? 하는 문제에 집중해 본다면, 사람을 누가 만드셨는가? 하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사람은 하나님께서 만드셨기 때문에 누가 뭐라 해도 하나님의 관점에서 정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창조물이나 내가 다스릴 존재에 대한 정의는 그 주인이 내린다는 것이다. 그것은 이견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스티븐 잡스가 스마트폰을 만들고 이름을 <아이폰>이라고 명명했다. 이것에 대하여 세상의 누구도 이의를 달 수 없다. 그가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단지 이름을 붙이는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기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부여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사람의 본성에 대하여 어떤 관점을 가지셨는가? 하는 문제는 동떨어진 문제에 논평을 하듯이 정의를 내리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이 선악의 관점, 이분법적 관점에서 부정하게 여기는 사람의 모습을 하나님께서는 단순히 선한 것이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하나님께 선한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 그것은 하나님께는 선하고 귀한 것이라는 의미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선악과의 관점으로 바라보는 사람의 본성과 모습은 원래 악하거나 연약한 것이 아니라, 사람을 지으신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너무 귀하고, 좋고, 선한 것이고, 또 하나님께 있어서도 그런 의미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사람이 하나님이라는 이미지가 형상화 된 존재라는 측면에서 이 사람은 하나님의 일부이고 하나님의 한 모습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 사람의 본성을 악한 것으로 규정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악한 존재로 보는 것과 같은 것이다.


즉, 사람은 어떤 부분은 악하고 어떤 부분은 선한 그런 존재가 아니라, 존재하는 전부, 사람이라는 정체성 전부, 그 안에 어떤 것이 들어 있고, 선악과를 먹은 관점으로 볼 때, 그것이 어떻게 비쳐지더라도 사람의 모든 모습은 하나님의 이미지가 형상화된 존재로 그 정체성의 일부를 분리하거나 나누어서 선하고 악한 것으로 규정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이다. 만약 사람의 본성을 선한 것과 악한 것으로 나누는 관점이 있다면 그냥 그런 관점이 있을 뿐 사람은 절대로 그런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즉, 사람은 선하고 악한 것으로 나눌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을 나눈다면 그렇게 나누는 시각만 있을 뿐, 사람은 부정하지 않다는 것이다. 사람에게 악한 것이 있다면 오직 하나, 바로 그것, 사람을 선한 것과 악한 것으로 나누어 보는 그 관점만이 사람이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악인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을 찾아온 젊은 관원이 예수님을 보고 "선한 선생이여"라고 했을 때, 예수님께서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하느냐?"라고 반문하셨는데, 이것은 예수님이 선한 분이냐 아니냐에 대한 답변이 아니라, '네가 누군데 사람을 선하다 악하다 하느나?'하는 반문인 것이다. 그러시면서 이어진 예수님의 말씀이 "오직 하나님 한분만 선하다"고 하신 것이다. 그러니까, 선과 악에 대한 기준과 판단은 하나님께만 있는 것인데, '왜 네 안에 그것을 판단하는 기준을 가지고 있느냐?'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그 본성의 모든 것이 다 하나님께서 지으실 때 목적대로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하는 존재이기에, 그 어느 하나를 나누어서 부정하게 여겨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것을 부정하게 여기는 것은 단 한 가지 사람이 부정해서가 아니라, 사람을 보는 관점이 부정해서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색안경 때문이라는 것이다. 선악과라는 색안경 때문일 뿐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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