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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창조 셋째 날 이후에는 사람의 먹거리로 주신 식물들에 관한 것과 또한 각종 동물들에 관한 말씀이 나온다. 이런 모든 것은 다 생명이다. 다시 이야기해서 가공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가공되지 않았다는 것은 억지로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신앙생활이나 삶이라는 것이 금욕적이고 성경을 규범과 법칙처럼 지켜내서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지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천지창조에 나오는 각종 식물과 동물의 창조 과정과 그들에 대한 말씀을 하신 의도를 우리는 알 수 있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식물이라는 것은 사람의 먹거리다. 무엇을 먹는다는 것은 그것과 몸이 하나가 된다는 의미이다. 먹었다는 것은 그 섭취한 것이 다시는 분리할 수 없는 우리 몸의 일부가 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엇을 먹느냐?' 하는 것은 '그것을 먹는 존재가 무엇이냐'와 같은 의미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에 내내 하나님의 말씀을 씨로 표현하고 계심을 본다면, 씨 있는 것을 먹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먹는 존재가 바로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을 가진 존재라는 것이다. 먹는 것과 먹는 존재는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먹은 것이 몸과 하나가 된다는 것은 바로 말씀이 육신이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말씀인 씨앗 있는 것을 먹는다는 것은 그 씨가 몸과 분리할 수 없는 상태가 된다는 것이고, 또한 씨와 몸이 같은 정체성을 가졌다는 의미이다. 


이것에 대하여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을 가리켜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라고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씨앗 있는 것을 먹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먹는다는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가 되는 정체성을 가진 존재가 되는 것이고, 그것은 말씀이 육신이 되는 것을 말씀하심이며, 그렇게 말씀이 육신이 된 존재를 <그리스도>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그러므로 창세기에 나오는 식물의 이야기는 우주와 지구를 창조하시면서 먼저 식물류를 만들었다는 것을 말씀하시기 위하여 기록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먹는 이가 하나님의 말씀을 먹는 사람이고, 그 하나님의 말씀을 먹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자신이 하나가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며, 그것이 바로 말씀이 육신이 되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며,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정체성이기 때문에 창조의 과정이 그리스도가 나타나는 것인 것이다.


그리고 이 씨 있는 식물과 없는 것, 그리고 씨 가진 열매 맺는 과목은 씨앗을 가진 생명의 장성함에 관한 것임을 이미 포스트한 바가 있다.


<관련포스트>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 (창세기) 천지창조 셋째 날 (2) - 풀과 씨 맺는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 (창세기) 천지창조 셋째 날 (3) - 사람이 먹는 것의 종류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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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그리스도의 정체성에는 그리스도는 씨 있는 채소을 먹고, 씨 가진 열매를 먹는다는 것을 포함하고 있다. 땅에서는 풀과 씨 있는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과목이 나와서 그 열매를 낸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가진 사람은 세상의 가치관으로는 살 수 없다는 고백을 내어 놓은 사람의 삶과 말씀을 먹는다는 것이고, 또한 그런 사람은 그것을 다시 내어 놓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상호 유기적인 것에 관한 것이다.(이런 유기적인 관계를 가진 공동체를 <교회>라고 하며, 이 교회에 대한 것이 이 블로그의 최종적인 목표 중의 하나이므로 그것을 차차 다루도록 하겠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오셔서 세상적인 가치관으로는 죽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십자가를 통해서 보여주셨다. 그리고 십자가에 달리신 그 모습을 보고 백부장은 <"그는 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는 고백을 했다. 이것은 그리스도는 세상적 심판의 기준에 의하여 죽고, 그것을 본 사람은 다시 그리스도의 생명이 되어가는 과정을 그린 것이다.


천지창조의 과정에서 본다면, 세상적 가치를 상징하는 바다에서는 살 수 없어 드러난 땅, 바다의 입장에서 보면 뱉어 버린 땅에서 씨 있는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과목이 나왔다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세상적인 가치기준을 가진 로마의 법과 형식에 찌든 유대인들의 법으로 인하여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모습과 그 모습을 보고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무엇이며, 그리스도가 무엇인지를 알아 다시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살게 되는 것과 같은 말씀인 것이다.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고 그것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이고, 그것이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전하시는 말씀이며, 그 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깨닫는다는 것은 사람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오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것을 자세히 생각해 보면 사람은 흙으로 지어졌으니, 흙 안에 들어와서 새로운 생명을 낳게 된다는 것은 바로 씨가 땅에 심기운 것과 같은 것이다. 


흙인 사람에게 농부가 흙에 씨를 뿌리듯 사람의 심령 안에 심기는 하나님의 말씀이 바로 <씨>


그래서 하나님은 농부이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흙인 사람에게 농부가 흙에 씨를 뿌리시듯 사람의 심령 안에 하나님의 말씀을 심으시는 것이다. 그리고 그 말씀이 그리스도의 생명이 되게 하시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 사람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싹트고 장성한 나무가 되어서 굳이 성경을 행위 규범으로 지키려 노력하지 않아도 심겨진 생명의 본성대로 행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내용이 형식으로 표현되는 것이고, 그것이 성경에 <'하라(Do)'>고 하신 것이다. 그러니까 그것은 정확히는 노력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본능적으로 할 수 밖에 없는 것을 기록해 놓으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씨다. 그 씨가 바로 창세기에서 말씀하고 있는 씨 있는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과목에 나오는 씨다. 그 씨는 다른 씨가 아니다. 흙으로 지으신 사람 안에 들어가면 그리스도의 생명이 나오게 되는 씨를 말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그 모습이 백부장이라는 사람 안에 씨와 같이 들어가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을 하게 하는 열매를 내어 놓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 성경을 읽으면서 그 백부장에 관한 말씀을 보고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천지창조에 나오는 <씨>의 정체성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씨는 그리스도라는 씨앗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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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창조가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지게 되는 것, 정확히는 또 한 사람의 그리스도가 되는 과정이라는 것은 이 성경 전체가 그리스도에 대하여 기록한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라(요 5:39) 라고 하셨다.


즉 성경의 모든 이야기는 그리스도에 관한 이야기이다. 성경이 예배를 어떻게 드려야 하는지, 십일조를 어떻게 드리는지, 아니면 물리적인 세상이 어떻게 창조되었는지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는 책이 아니라는 것을 예수님께서 말씀하심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것을 외면하고 성경을 문자적으로 지키고 해석하려고만 한다.


성경의 모든 말씀은 <그리스도>에 관한 말씀이다.


정히 그렇게 성경을 형식적인 관점에서 보고 싶다면 모든 면에서 그리 봐야 하겠지만 그 또한 그렇지 않다. 20대 후반에 전도사였던 친구와 대화 속에서 십일조를 내라는 것은 문자적으로 해석하면서, 부모를 버리고 나를 따르라는 것은 의미적으로 해석하는 모습에 대하여, 그것을 나누는 기준이 뭐냐?고 반문한 적이 있었다. 대답? 없었다.


이런 문제는 성경이 <그리스도>에 대하여 말씀하고 계신다는 것을 외면한 결과이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의 정체성이라는 존재 규범에 대한 말씀을 어덯게 행동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까 하는 존재 규범으로 보기 때문인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간첩이 봉사활 동 하는 것과 같다. 존재가 바르지 않으면 좋은 일을 하면 할수록 죄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경의 모든 말씀은 다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이다. 그리스도란 무엇이며, 이 그리스도가 무엇임을 사람에게 보여 주고자 하나님께서 보내신 첫 그리스도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보여 주려한 그리스도의 정체성은 무엇인지를 말씀하고 있는 것이 성경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그렇게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말씀하시고자 간절하신가? 그것은 사람이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가지고 살게 하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셨기 때문인 것이다. 그리고 그 그리스도의 정체성이라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인 것이다.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이 곧 하나님의 형상이고 사람의 존재 목적


결론적으로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하면서 살도록 지으셨고, 그 목적하신 하나님의 형상이 바로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무엇인지 사람에게 알게 하시기 위하여 독생자를 사람의 모양으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이다. 그게 성경이다. 


그렇다면 이 천지창조는 또 뭐겠는가? 이것이 과연 물리적 세상의 창조과정이겠는가? 그건 아니지 않는가? 그러므로 이 천지창조의 과정은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설명하는 과정이다. 그리스도란 어떤 것을 귀하게 여기는지, 무엇을 의롭게 여기는지, 무엇을 선하게 여기는지에 대한 이야기인 것이다.


그래서 사람이 육신으로 숨 쉬고, 물을 마시고, 음식물을 먹듯이,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은 무엇을 먹고, 어떤 호흡을 하며 어떤 것을 양식으로 삼게 되는지에 대한 과정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 바로 창세기의 천지창조인 것이다. 천지창조는 그리스도 정체성에 대한 대 원리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창조의 후반부인 넷째 날, 다섯째 날 그리고 여섯째 날에는 사람이 무엇을 먹을 것이며, 사람이 영적으로 어떤 부류의 사람, 어떤 특성을 가진 사람들이 있는지에 대하여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천지창조 과정 속에 있는 그리스도의 정체성인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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