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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의 갈비뼈로 여자를 만드시다 (1)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4. 1. 9. 21:33 Writer : 김홍덕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시고, "사람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다"고 하시면서 아담을 잠들게 하신 다음에 그 갈비뼈를 취하여 여자를 만드셨다고 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만드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자는 남자인 아담과는 다르게 아담의 뼈를 가지고 만들었다고 하셨다.


사람들은 흔히들 이 성경 구절을 보고서 해부학적으로 남자의 갈비뼈가 여자보다 하나 적은지를 궁금해 한다. 하지만 해부학적으로 남여 공히 갈비뼈의 수는 24개로 동일하다. 그것을 두고 하나님께서 뺀 갈비뼈를 채워주신 것으로 해석하기도 하는데, 성경의 말씀을 문자 그대로 보게 된다면 이러한 해부학적 접근을 하게 된다. 그러니까 성경은 그렇게 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갈비뼈는 남녀 둘 다 24개이다(출처 : 위키백과)>



성경에서 뼈를 말씀하신다는 것은 <의>를 이야기 하자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도, 통상적으로는 죄인이 죽었는지 확인하기 위하여 뼈를 꺽지만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고 하셨는데, 그것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의>는 꺽이지 않게 하셨다는 하나님의 생각이 있었기 때문인 것이다.


에스겔서에 나오는 마른 뼈의 말씀 역시 의가 있다면 하나님의 군사가 될 수 있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이렇듯 성경에서는 <의>를 나타낼 때 뼈로 말씀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담의 갈비뼈를 취하여서 여자를 만들었다고 하시는 것은 남자의 의가 형상화, 육신을 가진 성육신이 되었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남자의 <의>가 여자가 되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있을 것이다. 즉 성경은 남존여비의 사상을 가진 것이냐? 하는 문제가 대두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성경을 읽어보면 여자는 사람 수를 계수할 때도 세지 않는 등, 현재로서는 상상도 하기 힘든 남녀 차별이 많이 있다.


하지만 이것은 육신의 남녀를 구분하고자 하시는 것이 아니다. 성경을 문자 그대로 읽고, 승천하신 예수님께서 우주로 날아갔다고 생각하고, 하나님의 천지창조가 물리적인 세상을 창조하신 것을 믿게 하시기 위한 것으로 여기는 관점에서 본다면 성경은 남존여비의 사상으로 가득한 구시대적인 경전일 것이다. 실재로 성경을 그렇게 보는 사람들이 있다 보니, <어버이 하나님>, 또는 안상홍파에서 말하듯 <어머니>와 같은 표현들이 나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비록 기존 교단에 있다해도 성경을 문자 그대로 보는 시각을 가졌다면 뭐 안상홍파와 다를 바가 없다고 볼 수 있기도 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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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과 그리스도의 직임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3. 12. 16. 18:56 Writer : 김홍덕

아담이 동물에게 이름을 붙이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책무라 할까? 본분을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 논리적 근거가 없는 비약을 볼 수도 있겠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인생들에게 의미를 부여하시는 일을 하셨다. 이것을 다르게 표현하면 이름을 불러 주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이름+정체성>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인간의 정체성을 일깨워 주셨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깨우신 인간의 정체성은, 사람이 노력하고 치장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연약함을 가진 그대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직접 보여주셨다는 것이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그 당시의 관점에서 보면 지금의 사람들의 생각과 같이 선하고 도덕적인 분이 아니었다. 물론 지금의 관점에서 봐도 동일하다. 이것이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예수님께서는 그 당시 유대인들의 지도층인 바리새인, 제사장, 서기관 등 그 시대의 지금의 목사나 교수나 선생과 같은 사람들이 볼 때, 형편없는 사람이었다.


세금을 제대로 내기를 하나, 사회 지도층 인사들에게 "독사의 자식들아"라고 욕하질 않나, 성전에 가서는 상을 뒤엎지를 않나, 쉬라는 안식일에는 남의 밀 밭에서 밀을 까 드시질 않나, 뭐 하나 당시 사람들이 도덕적으로 여기는 모든 것에 시비를 걸듯하신 분이다. 


그렇다고 그 당시 지도층인 바리새인들이 나쁜 사람들이었는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 이 시대의 지도층과 비교할수도 없을 정도로 그 나라의 가치관 안에서 훌륭한 삶을 살았던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에게 도전하셨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인간의 정체성을 회복하고,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뜻을 바로 하는 것이고, 그것이 인간을 구원하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사람의 이름을 부르신 것이었다.


이렇게 말하면 "일탈"같은 생각과 행동이 다 구원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예수님께서는 일탈을 하신 것이 아니다. 인간의 정체성을 보이셨는데, 그것이 사람들이 가진 인간의 정체성,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과 다르게 스스로 정의 내린 인간의 정체성에 반한 것으로 보였기 때문에 일탈로 보였고, 그들에겐 일탈 이상으로 죽일 수 밖에 없는 모습이었던 것이다.


그런 예수님의 모습은 다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사람은 그렇게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정체성이 행위로 도덕적이고, 율법을 잘 지키고, 하나님께 어떻게, 또 무엇을 하고 드리느냐? 하는 것에 있지 않다는 것을 말씀하시려는 것이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정체성을 일깨우는 것이었고, 그것이 바로 사람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었다.


첫번째 아담은 창세기에 나오는 아담이고, 두번째 아담은 예수 그리스도라고 했다. 아담은 '붉다'는 의미고, <사람>이라는 말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사람으로 오셨다는 것, 그것은 하나님께서 아담을 만드신 것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것이다. 그 둘 다 없었던 존재가 존재하게 된 것이기 때문이다. 


Rome Chapelle Sixtine vintage
Rome Chapelle Sixtine vintage by Grégory Cassiau 저작자 표시비영리변경 금지



그 예수님의 존재, 이 땅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람의 모습이 존재하게 되었다는 그 사실, 그것은 사람으로 사는 존재들에게 그 정체성을 알게 하는 것이다. 그렇게 사람의 이름을 부르는 것, 사람의 정체성을 알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업무인 것이다. 그리고 그 이름을 듣고 자기를 알게 될 때, 사람은 하나님의 세계가 열리는 천지창조를 맛보게 되는 것이고, 그 내용이 바로 사람을 흙으로 만드셨다는 것이고, 그 직임이 또한 그렇게 사람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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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의 이름을 짓는 아담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3. 12. 16. 14:50 Writer : 김홍덕

창세기 2장에서는 아담에 이어 하와라는 베필을 지으셨다는 것을 말씀하시는데, 그 사이에 아담에게 동물들의 이름을 짓게 하시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이 말씀이 하나님께서 "사람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매 베필을 지으리라"하시고는 베필을 만드시는 말씀 사이에 들어 있다.



Adam names the animals
Adam names the animals by systemsrelaunch 저작자 표시비영리변경 금지



어떤 면에서 보면 아담이 세상의 동물들의 이름을 짓는 것은 큰 의미가 없을수도 있다. 굳이 따지자면 아담에게 <모든 것을 다스리라>고 하신 정도의 의미 정도만 부여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사람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창 2:18)">이라고 하시는 말씀에서 부터는 사람과 사람의 모든 관계와 갈등에 관한 하나님의 섭리를 말씀하시고 계신다.


성경에는 그 순서가 가끔씩은 낯설게 느껴지게 기록된 곳들이 있는데 이 말씀도 그렇다. 사람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베필을 만들어야겠다 하셨으면 바로 만드시면 될 것인데, 왜 그 사이에 아담에게 세상의 모든 동물을 불러서 그 이름을 짓도록 만드셨을까? (이런 것 까지 따지는 것을 무리한 것이라 보는 사람도 있을 수 있지만, 단순히 배치의 문제가 아니라 무엇을 말씀하시려는지를 안다면, 적어도 목회를 하는 동안 한번은 설교해야 마땅한 부분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흙으로 만드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어서 아담을 창조하셨다. 이 창조는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지으신 목적이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나타내며 사는 것임을 알게 하시려 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표현하며 산다는 것은 어떤 삶이란 말인가? 그게 중요한 문제인 것이다.


그리스도의 성품을 나타낸다는 것은 어떤 의미이고, 어떤 모양새의 삶인가??


사람의 존재 목적이 그리스도의 성품을 나타내는 것이라 한다면, 그리스도의 성품을 나타낸다는 것은 어떤 의미이고, 어떤 모양새의 삶인가? 그것이 어쩌면 신앙의 절대적인 사항이 아닐까 싶은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는 이 말씀을 그리고 이어지는 남자와 여자, 그리고 베필이라는 그 관계, 그리고 그 관계로 말미암은 타락 등에 관한 일련의 말씀들이 자기 안에 열려야 비로서 하나님의 세상이 열리는 천지창조가 자기 안에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동물들의 이름을 짓게 하셨다는 것은, 아담으로 하여금 어떤 것에 <의미>를 부여하게 하셨다는 것이다. 이름이라는 것은 단순한 호칭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명칭이고 더 나아가서 정체성이다. 특히 성경을 기록한 유대인들의 문화 안에서 이름은 그 사람의 모든 정체성을 말한다.


유대인들은 사람이 태어나면 바로 이름을 붙인다기 보다, 먼저는 "바(누구의 아들)"를 그 아비의 이름 앞에 붙여서 부르다가 그 사람의 정체성이 정해지면 그 사람의 이름을 붙였다. 예를 들어 베드로를 일컬어 '바요나 시몬'이라고 하는데 이는 베드로의 아버지는 요나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고, 베드로의 나중 이름이 시몬이라는 의미인 것이다.


즉 이름이라는 것은 그 존재의 정체성이다. 아이폰, 스마트폰, 자동차와 같은 이름들은 다 그 존재의 목적과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바로 이름이다. 그러므로 아담이 동물들에게 이름을 붙였다는 것은 아담의 책무는 <의미를 부여라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그 책무가 후에 하와를 보고, "이는 내 뼈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로다"라고 하와의 정체성에 대한 의미를 부여하게 되는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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