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 2649

선악과 (21) - 선악과와 십자가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4. 2. 26. 00:15 Writer : 김홍덕

베드로나 제자들 마저 예수님에 대한 이해는 어려운 것이었다. 하지만 이 어려움은 하기 힘들어서 어려운 것이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 되겠는가?'하는 믿음이 없어서 그런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이 연약하고 부족한 모습이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겠는가?'하는 반문이 사람을 망설이게 하기 때문이다.


중학교 3학년 때, 중등부 전도사님이 그 당시에 많은 학생들이 가지고 싶어했던 <파카45>라는 만년필을 설교 중에 갑자기 "이것을 아무에게나 줄테니 원하는 사람은 나와서 받아가라" 라고 했는데, 모두가 머뭇거리고 있었다. 나도 가지고 싶었지만 '설마'싶었는데, 교회에 잘 나오지도 않던 신입 회원이 나가서 받았다. 그리고 그것은 그 학생의 것이 되었다. 그건 그 자리에 있던 그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일이었던 것이다.



마치 그런 것처럼,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과 같은 삶을 사는 것은 그 누구라도 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40일 금식기도 하면 하나님께서 더 기뻐하신다면, 그것 못하는 연약한 사람은 어쩌란 말인가?, 또 세상에서 성공할수록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가르친다면, 모든 분야에서 1등이 아닌 사람은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이 되겠는가? 그래서는 하나님의 구원이 공평할 수 없는 것이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인간이기만 하면 그 모습 그대로, 일정한 주기로 배설도 해야 하고, 젊은 날에는 넘치는 정욕을 불사르는 시절을 보내기도 하고, 배고프면 훔쳐서라도 먹고 싶고, 나를 괴롭히는 것에는 화가 나는 모든 인간, 그 모습 그대로 가지고 있어도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는 세계가 하나님의 세계인 것이다. 바로 그것을 말씀하시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은 육신을 가지고 이 땅에 오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오시기 이전에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하나님이 기뻐하는 사람의 정체성은, 일주일에 2번 이상 금식하고, 창기와 세리와 놀지 않아야 하고, 언제나 성전에 가서 제물을 바칠 수 있는 경건한 삶을 살아야 했다. 그리고 그런 삶을 살수록 더 메시야에 가까워지고, 당연히 메시야는 그런 삶의 최고봉의 모습으로 올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직접 육신으로 오셔서 이 모은 의문과 그런 삶을 살지 못하는 사람들의 속박을 푸신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런 인간의 추한 모습들을 스스로 악한 것으로 규정했다. 왜냐하면 선악과를 먹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생각하는 인간의 모습,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에서 벗어나서 인간의 욕구와 연약함을 감추고 고상해질수록 더 선한 것이라는 이분법에 매몰되고 그것을 연단 시켜 왔던 것이다. 마치 바벨탑을 쌓기 위해 벽돌을 구워 단단하게 한 것처럼 말이다.(사람이 흙으로 만들어졌으니 벽돌을 구웠다는 것은 사람을 연단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범하는 모든 죄의 뿌리인 것이다. 즉, 인간의 존재 목적, 창조의 목적인 인간의 정체성이 회복되지 않는다면, 제 아무리 선한 일을 해도, 그것은 자수하지 않은 간첩이 기부하고 선행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즉, 무엇을 행할 것이냐? 이전에 나는 누구인가? 하는 것이 먼저인 것이다. 그 누구인가? 하는 것만 정해지면 그것에 맞게 행하는 것이 생명이다. 경례한다고 군인이 아니라, 군인이라서 경례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므로 이 모든 것이 선악과의 문제인 것이다. 사람이 선과 악을 안다는 것은 선한 것과 악한 것으로 인간을 판단한다는 것이다. 자기 자신과 사람의 모든 모양과 인간의 모든 관습들을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인간이 스스로를 악하게 규정하고 부끄러워한 모습,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오셨고, 십자가에서 인간의 정체가 무엇인지 보여주심으로 그것을 보고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는 사람은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 바로 선악과와 십자가의 관계이고, 에덴동산에서 바쳐진 양과 예수님의 구속인 것이다.


(계속)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

우리 사람의 모습은 알고 보면 참 초라하다. 사람들이 치즈 케익을 먹을 때, 부스레기가 떨어질까 조심하는 모습을 본 적 있는가? 나이가 많던, 잘 살던 못살던, 그 얼마 안되는 부스레기에 조심하는 이유가 뭘까? 옷에 떨어진다고 큰일이 나는 것도 아니고, 그게 아까워서 일까? 여튼 사람은 그렇게 찌질하다. 그리고 서로가 감출 뿐 알고 보면 모두 다 똑 같다. 인간이라서, 또한 하나님께서 사람을 그렇게 만들어 놓았으므로......


잘 차려 입고 만나는 사람들은 예절이 있다. 밥 먹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한다. 뭐는 어떻다 등등. 마치 대변도 보지 않는 사람들처럼 고상하게 사람들을 대하면서 그 고상함을 깨는 것에 대하여 서로 얼마나 조심하고, 그것이 깨졌을 때, 불쾌해 하고 더 나아가서 상대를 예의 없는 사람이라고 매도하기도 한다. 이 모든 것의 뿌리는 고상하지 않으면 악한 것이라는 기준이 있어서 이다.


이러한 기준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한마디로 사람은 혼자 있거나 가족끼리 있을 때는 자유롭게 있다 상대가 바뀌면 태도가 바뀐다. 물론 그것이 나쁜 것은 아니다. 다만 그렇게 사는 기준이나 사람들이 갈등을 일으키는 그 모든 기준이 같기 때문이다. 즉 사람의 행동과 소유의 어떠함이 선한 것이 되기도 하고, 악한 것이 되기도 하는 것, 그 안에는 사람이 어떤 것은 선한 것으로, 어떤 것은 악한 것으로 간주하는 기준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기준으로 인간이라는 존재를 심판하고 그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것들을 감추려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것을 감추는 기준을 수립했다. 그것에는 예의라는 것에서 법이라는 법이라는 강력한 것 까지 다양한 단계지만 동일한 것은 인간의 나약함을 감출수록 선한 것이 되고, 그런 것을 잘 감추는 사람일 수록 훌륭한 사람이 되는 법 아래 있는 것이다.


예수님 역시 그랬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이 땅에 왔다고 하면서, 창기와 세리와 놀고, 사람의 연약함을 감추기 위하여 만든 법들을 무시하니 유대인들에게는 도저히 용납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 하나님의 아들은 정말로 화장실도 안 가는 그런 고상함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존재였다. 


그래서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하고, 길에 서서 기도하는 고상함이 모여야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로마의 군대와 맞서도 이길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왕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초라하게 인간의 실체를 드러내면서 십자가에 죽어가고 있으니 이것을 보고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고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는 일반 백성들 뿐 아니라 3년 동안 예수님을 따라 다닌 제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힐 것이라 하니, 다 도망갔고, 빌라도의 뜰 까지 따라 갔던 베드로도 여종의 질문에 "나는 그가 누구인지 모르겠고, 그가 나와 어떤 관계인지 모르겠다"고 말했던 것이다. 그것은 단순한 배신이 아니었다. 그것은 베드로와 제자들이 생각한 메시야와 전혀 다른 모습으로 죽어가는 예수님이 누군지 모르겠다는 것이고, 그 분과 자신의 관계가 무엇인지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즉 배신이 아니라 혼돈 속의 고백이었던 것이다.


(계속)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

선악과 (19) - 구속의 법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4. 2. 23. 13:40 Writer : 김홍덕

백부장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그는 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고 고백한 것은 참 의미가 있는 말씀이 아닐 수 없다. 이는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또한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는 근거가 어디에 있는 것인지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많은 관점이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속했기 대문에 구주로 고백한다는 것은 다 알고 있지만, 그 메카니즘, 그러니까 그 구속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에 대해서는 명확하지 않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벌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여기는 것이 전부이라 할 수 있다.(특히 이런 관점은 시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그러니까 예수님 이후의 죄는 어떻게 사할 것인가? 하는 문제 말이다.)


곰곰히 생각해 보면 2,000여년 전에 대한민국을 기준으로 보면 지구를 1/3이나 돌아가야 하는 거리에 있는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에서 한 죄인이 십자가에 달려 죽었는데, 그 피가 오늘 나의 죄를 사하고 나를 구원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근거가, 예수님께서 실재로 그렇게 했다는 것 그것 하나 만으로 믿는다는 것은 깔끔한 이해는 아니다.


백부장은 정말 초라한 인간의 모습을 봤다. 사형 당하는 죄인, 벌거벗고 당시 최고 극형의 형틀에 못 박혀 죽어가는 한 사람의 모습을 봤다. 그 명패에는 유대인의 왕이라고 적혀 있고, 불과 몇 일 전,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구하소서!" 환호하던 무리들이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면 거기서 내려와 보라"는 조롱을 받고 있는 연약한 모습을 본 것이다. 바로 아담이 감추고 싶어서 가렸던 그 모습으로 죽어가는 모습을 말이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 아들의 모습이더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법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신 방법이라는 것이다. 바로 그 예수님의 모습을 보니, 하나님의 아들이 무엇인지 알게 되는 것, 또 그 모습이 바로 나의 모습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하나님 앞에 고백하게 되는 그것이 바로 구속의 법인 것이다.


이 법은 시대와 방법에 무관한 것이다. 사람이 사람에게서 듣고 보기만 하면 그것을 듣고 본 사람이 그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이 자기의 모습이고, 그것을 하나님께서 아들로 삼은 모습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면 사람 안에 자신도 그렇게 감추고 싶었던 인간의 연약하고 추한 모습들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하나님께서 아들로 인정할 수 있는 정체성이라는 것에 감사하고 놀라워할 수 밖에 없는 그 법이 바로 구속과 십자가의 법인 것이다.


그 예수님을 상징하는 어린 양이 선악과를 먹고 스스로 부끄럽게 여긴 아담의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하여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이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이유가 사람이 선악과를 먹고 스스로 선과 악을 알게 되어 규정하게 됨으로 인간이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부끄러워 하고 그것을 감추려 한 것을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그것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이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는 자격이라는 것을 보여주시려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구속이고, 우리가 선악과를 먹은 죄를 벗는 법인 것이다.


(계속)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