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 2619

(창세기) 사람을 만드시다 (5)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3. 12. 6. 13:44 Writer : 김홍덕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만드시는 재료(?)로 <흙>을 사용하셨다. 정말 특이한 것은 세상의 모든 다른 것의 창조는 단지 말씀으로만 하셨는데, 유일하게 사람만 흙으로 만들었다고 말씀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람의 정체성을 아주 분명히 하신 말씀이 아닌가 생각된다. 아울러, 이는 이 모든 천지창조의 과정이 사람에게 포커스가 맞춰져 있다는 것에 대한 부연 설명도 될 수 있을 것 같다.


무엇보다 흙이라는 것은 사실 자연계에서도 강도나 가치로 볼 때, 우수한 것은 아닌 물질이다. 강하기로 따지만 철이나 다이아몬드가 있고, 가치로 본다고 해도 금과 은은 물론 역시 다이아몬드와 같은 것이 있는데, 그 자체로는 뭐 하나 만들수도 없고, 어디가나 있는 것이라 크게 가치가 있는 것도 아닌 흙이 바로 사람의 근본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기대하시는 것이 강함이나 능력이나 보석같은 아름다운 가치나 고상함의 가치가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다시 말해서 흔히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 처럼 <남보다 더 잘하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귀하게 여기실 의사가 사람을 창조할 때 부터 없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이 되었던 다른 신이 되었던 간에 그 신앙하는 대상이 사람을 기뻐하는 것으로 강함이나 위대함 그리고 고상함과 도덕적인 것을 생각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흙으로 만드셨다는 것을 모르거나 부인하기 때문인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좀 심도 있게 이야기 한다면 사람의 정체성을 떠난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이 되었던 그 자리를 이탈한 것을 죄(하말티아, '과녁을 벗어나다'는 의미의 헬라어로 "죄"를 의미)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의 앞에서 사람이 죄가 되는 것이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을 때, 그 이유는 단 하나였다. <하나님처럼 되는 것> 그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위대해지려고 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흙이라는 인간의 정체성에 반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이 하나님 앞에 죄가 되는 것이다.(선악과는 정말 상세히 다룰 예정) 


흙은, 강함이나 위대함이나 고상함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아주 아주 절대적인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모든 생명의 모태라는 것이다. 모든 식물들이 흙에 뿌리를 두고 있고, 그 열매를 먹는 것에서 먹이 사슬이 시작된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모든 생명에게 있어 흙은 물 만큼이나 중요한 요소인 것이다.



사과나무의 모든 성분은 땅에서 왔다. 하지만 사과씨로 인한 것이기에 사과나무가 된 것이다.(사진 출처 : www.moontaknet.com)



하지만, 흙은 그 자체가 생명이지는 않다. 하지만 모든 식물의 성분은 다 흙에서 비롯된다. 다시 말해서 모든 생명은 다 흙이다. 그래서 죽으면 흙으로 돌아 간다. 사과씨가 땅에 떨어져서 사과 나무가 되는 것은 사과 씨가 나무가 된 것이 아니다. 사과 씨로 인하여 그 부근의 흙 안에 있는 성분들이 물과 햇빛과 함께 사과나무가 된 것이다. 그러므로 사과나무의 모든 것은 다 흙에서 온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람의 정체성이다. 다시 말해서 사람과 흙과 마찬가지로 생명 그 본질은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생명은 하나님이 보실 때 살아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을 말한다. 육신이 살았다고 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실 때 살아 있어야 하는 것이다. 시계가 멀쩡하지만 시간이 가지 않으면 주인 입장에서는 죽은 것과 마찬가지로, 사람이 아무리 육신이 멀쩡하게 살아 있어도 창조자의 목적이 없으면 죽은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씨와 같이 흙과 같은 사람 안에 들어 오게 되면, 그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 즉 하나님의 이미지가 형상화 되는 것이다. 그런 존재를 성경은 <그리스도>라고 한다. 하지만 그 사람은 사과나무의 모든 성분이 다 흙에서 비롯되었듯,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리스도와 같이 살아간다 해도 그 사람은 그냥 그 사람일 뿐이다. 


즉 원래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하여 그리스도와 같은 성품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사과씨로 인하여 흙이 사과 나무가 되듯이 말이다. 그러다 사과나무가 사과 열매를 맺지 못하는 상태가 되면 다시 흙으로 돌아가듯이, 사람도 그 안에 하나님의 씨와 같은 말씀과 이미지와 호흡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죽은 존재가 되는 것 역시 같은 이치이다.


(계속)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

신앙이 얼마나 절대적 사안인가?

Category : 김집사의 뜰/복음 담론 Date : 2013. 11. 25. 12:57 Writer : 김홍덕

11월은 본의 아니게 조금은 바쁜 세월을 보내고 있는듯 하다. 자연스레 포스팅도 자주 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 저녁에 티비로 배구중계나 보고 있을 때는, '이러니 뭐라도 하자' 마음 먹고 몸을 일으켜보려 해도 그게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다고 여기서 포기할 것도 아니지만 말이다.


나는 가끔씩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이 삶에서 얼마나 절대적인가 하는 문제를 생각해 보곤 한다. 어떤 날들은 교회 생활이 너무 재미있기도 하고, 반대로 어떤 날들은 교회에 가는 것이 참 부담스럽게 여겨질때가 있기도 하다. 또 한 때는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던 사람이 어느날 소원해지는 것을 보면서, '두렵지 않은가?', '어느 것이 진실된 모습인가?' 생각해보기도 한다.


고등학교 시절 친구들과 같이 다니던 교회에 교회 이전 문제를 논의한 적이 있었는데, 거의 이전 쪽으로 교회의 의견이 모일 때 쯤, 한 원로장로께서 검은 양복에 검은 넥타이를 메고 나와서 "교회를 이전하려면 나를 밟고 가라"는 말 한마디에 이전이 없던 일로 된 적이 있었는데, 한 친구가 이 일을 보고 교회를 떠났었다.


어떻게 전 교회의 의견을 한 사람이 뒤집는가 하는 것이 그의 말이었다. 그리고 그는 다른 교회에 열심히 출석했다. 이젠 가끔씩 부모님들 돌아가시면 만날 수 있는 세월을 보내다 만났을 때 자기 교회에 대한 자랑이 보통이 아니었다. 그런 그가 얼마 전에 만났을 때 이제는 어떤 교회도 다니지 않는다고 했다. 그가 자랑하던 교회에서 장립집사 피택이 되었는데, 헌금액이 너무 많아 포기했다는 것이다.


그 친구를 요즘 생각해 본다. 고등학교때 같이 다니던 교회의 문제나, 장립집사 헌금이 너무 많은 문제와 같은 것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가 무엇이든 그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그런 문제보다 절대적인 것이었는가? 하는 것을 생각해보는 것이다. 우리에게 있어 신앙이 얼마나 절대적인 사안인가를 생각해 보는 것이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소위 말하는 <먹고 사는 문제>가 삶의 절대적인 문제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과연 그것이 인간으로 가진 문제의 전부일까를 생각해 보는 것이다. 그리고 때로 한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면, 그에게 하나님을 믿었다는 그 과거와 지금을 통틀어서 과연 하나님을 믿는 것이 절대적인 문제일까 싶은 것이다.


사람이 그렇듯 신앙이 삶의 절대적인 사안이 되지 못하는 것은 신앙이라는 것이 먹고 사는 문제와 같은 삶의 한 행위와 방법에 관한 것으로 전락했기 때문이라 생각이 된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 행여 하나님이 아니라 할찌라도, 오늘 <나는 누구인가?>하는 문제가 모든 먹고 사는 문제보다 절대적인 사안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나는 그 친구를 또 만날 것이다. 그 때 행여 신앙에 대하여 이야기할 기회가 있다면, 나는 그에게 '너에게 신앙은 한번도 절대적 사안이 아니었나 보다'라고 말해 줘야겠다 생각한다. 친구니까? 그리고 이 블로그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에게도......

'김집사의 뜰 > 복음 담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창조 경제타운  (2) 2014.02.19
때론 실패자가 되어 보자..  (0) 2014.02.12
신앙과 삶, 어느 것이 먼저인가?  (0) 2013.11.12
작은 디아코니아  (0) 2013.09.05
해도 되고, 안해도 되고  (0) 2013.09.03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

신앙과 삶, 어느 것이 먼저인가?

Category : 김집사의 뜰/복음 담론 Date : 2013. 11. 12. 23:34 Writer : 김홍덕

교회의 청년에게 일자리를 하나 소개해 주었다. 평일은 잔업이 있지만, 수요일은 잔업이 없고, 근로기준법에 의한 것이 아니라 달력 공휴일은 다 쉬고 토요일도 쉬는 주 5일제 나름 근로조건이 좋은 자리였고, 이전에 나의 팀원이었던 녀석이 과정으로 있어서 좀 부탁을 했었는데 이력서 달라고 연락이 와서 당사자에게 연락을 했다.


근데, 이 청년의 반응이 평일 구역 예배에 가기 힘들고, 어쩌고 하면서 다시 연락 주겠다더니,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며 그 자리를 고사를 한다. 거리가 약간 멀긴 하지만 유류대도 반 정도는 지원해 주는 회사인데 아쉬웠다. 그 청년에겐 좋은 자리라고 나는 생각했기 때문이었다.(물론 지금 이 청년에 대한 설명이 전부는 아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그에게는 정말 하고 싶은 일이 있을 수 있다. 아무리 내가 평소에 본 모습이 그런 것과 거리가 있어 보일지언정 그가 그렇다면 그런 것으로 받는 것이 도리이다. 내가 사람 마음 알수는 없으니 말로 듣고 그것을 받으면 된다. 하지만 이것을 이렇게 단순하게 받기까지 내 마음에 아무 경륜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게다가 신앙 생활에 다소 지장이 있을 것 같아서 좀 꺼려하는 모습에 여운이 남는다. 과연 신앙생활을 위하여 삶의 현실을 물릴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하여 말이다. 나도 예전에 좀 심각하게 그런 생각을 하면서 살았었기 때문이다. 신앙을 율법적으로 알 때도 그러했고, 성경이 존재의 말씀이라는 것을 알고서도 그러했다.


하지만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씩 알게 된 것에 따르면, 삶의 모든 현실적은 문제들은 분명히 신앙과 관련이 있다. 하지만 단언코 방향은 제한적이다. 그러니까 삶의 모양을 바꾼다고 신앙이 바뀌지는 않는다. 신앙이 바뀌면 삶의 모양은 바뀐다. 다시 말해서 기도를 열심히 하면 신앙이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신앙이 자라면 기도를 하게 된다는 것이다.


기도를 열심히 하면 신앙이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신앙이 자라면 기도를 하게 된다

개가 짖는 것이지, '멍멍'소리를 내서 개가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결국 신앙은 삶이다. 삶이 참 구질하고 추악한 면 또한 많지만 이 인간의 삶의 모습은 도화지와 같은 것이다. 이런 배경이 없으면 신앙이란 것이 구분될 수도 없고, 어떤 것이 좋은 신앙인지도 알 수 없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신앙은 삶으로 표현되고 삶을 지배하는 것이다. 생명이란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신앙은 생명의 법에 의거한다. 다시말해서 유전 인자가 표현되는 것이라는 것이다. 개가 짖는 것이지, '멍멍'소리를 내서 개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그 안에 있는 사람은 삶의 모든 것을 다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로 채울 수 있다. 그리스도의 본성은 숨길 수 없기 때문이다.


직장을 구하거나 삶의 어떤 과정을 겪어야 할 때, 때로 우리는 신앙생활에 제약을 받을 수 있다. 그러다보면 어떨때는 손해를 감수하고 그런 제약을 떨치기도 한다.(상황과 사람에 따라 다르다.) 하지만 어떤 시절에는 신앙적인 것을 지키기 위하여 삶의 조건을 후위로 두는 것, 그것이 정당할 때가 있다. 그러나 결국은 신앙이 삶을 지배하게 될 것이고, 그 때는 그런 모든 것을 수용할 수 있고, 또한 그런 갈등 속에 다양한 결정을 내리는 사람들의 삶을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김집사의 뜰 > 복음 담론' 카테고리의 다른 글

때론 실패자가 되어 보자..  (0) 2014.02.12
신앙이 얼마나 절대적 사안인가?  (0) 2013.11.25
작은 디아코니아  (0) 2013.09.05
해도 되고, 안해도 되고  (0) 2013.09.03
시끄러운 기독교인  (0) 2013.06.30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