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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앞에서 세상의 모든 것은 다 내용(목적)과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 특히 종교인들이 형식을 잘 갖추면 목적이 달성될 것이라고 믿고 가르친다. 십일조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고 한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자가 십일조를 하는 것이다.


구약은 옛날 약속이 아니다. 성경에서는 읽는 이들마저 간절함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하나님께서는 형식에 치중된 사람의 형태를 안타까워 하신다. 징계도 하시고 달래기도 하신다. 오죽하면 하나님께서 누가 성전 문을 좀 닫았으면 좋겠다고 하시겠는가? 목적을 잃고 제사라는 형식에 매몰된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간절함이다.


지금 이 시대의 사람들, 특히 종교인들도 이것과 전혀 다를바 없다. 오히려 더 심각한데도 달력으로 예수님 이후의 시대를 산다고 구약의 말씀은 자기를 향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미안하지만 지금이 서기 5,000년이라 해도 형식을 갖추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고 여기는 모든 신앙과 생각은 예수님 오시기 전은 고사하고 천지도 창조되지 않은 시대를 사는 것이다.


그런데, 참 신기하게도 사람들은 성경과 연관없이 사는 것 같지만 마시는 물을 상수(上水)라고 하고 버리는 물을 하수(下水)라고 한다. 그리고 상수를 사용하면 하수가 된다. 성경에서는 궁창 위의 물, 그리고 궁창 아래의 물이라고 하셨다. 성경에서 말하는 궁창 아래의 물은 세상의 것은 늘 형식에 대한 것이다.


이 모든 궁창 아래의 물과 같은 형식을 행하면 본질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는 삶은 버리는 물, 곧 하수와 같은 것이고, 이것이 모이면 바다가 되듯이 이런 생각들이 모이면 세상이 되는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고 계신다. 그러므로 그곳에 있으면 죽게 된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 세례고 그것이 바다에서 뭍이 드러나는 것이다.


또한 상수를 사용하면 하수가 되듯, 본질이 있으면 형식은 자동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멍멍' 짖어서 개가 되는 것이 아니라, 개라서 '멍멍'하고 짖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것이 열려지지 않으면 자기가 사는 시대가 서기로 몇 천년 아니 몇 만년이라 해도 그에게는 하나님의 천지창조는 없는 것이다. 신약의 시대? 그건 착각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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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 우리는 <먹기 위해 사는가?> 아니면 <살기 위해 먹는가?>라는 질문을 농담처럼 나누기도 한다. 이것에 대한 성경적인 해답은 <먹기 위해 사는 것>이다. 사람이 먹기 위해서 산다는 것은 음식에 관한 것이 아니다. 사람은 늘 그 안에 무엇인가를 채우려고 한다는 것이다.


사람이 자기 안에 채우기를 가장 원하는 것은 당연히 그 정체성이다. 이것은 갈증이다. 모르면 목 마르다. 그래서 이것은 육신으로 본다면 물을 마시는 것과 같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은 늘 물로써 표현된다. 수가성 여인에게 예수님께서 <네 속에서 생수가 넘쳐나리라>하신 것은 여자가 물을 계속 뿜어 낸다는 말씀이 아니다. 사람의 정체성에 대한 것을 늘 공급할 수 있는 사람이 될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자기 정체성에 대한 해갈을 위해 평생의 시간과 육신의 힘을 소비한다. 그러나 어떤 물은 마시면 마실수록 갈증이 나게 된다는 것을 성경은 말씀하고 계신다. 이것은 수가성 여인에게서도 볼 수 있는데, 남편을 다섯이나 갈아 치웠다는 것이 그것이다. 그 갈증이 세상적인 비난 속에서도 찾아 헤매는 것이라는 의미다.


또한 육신으로도 바닷물을 마시면 갈증이 더해져서 죽는다고 한다. 이는 참 묘한 것이다. 지구의 70%가 바다인데 그것은 먹지 못하고 실재로 사람이 마실 수 있는 물은 지구상 물의 겨우 1% 정도라는 것이 참 놀랍다. 이는 세상의 모든 철학과 행위와 율법 중심의 모든 종교와 과학과 돈과 명예와 쾌락 등 바다와 같이 널리고 널린 것으로는 갈증이 해갈되지 않고 그것은 마시면 마실수록 더 갈해져서 결국 죽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이 그리스도의 정체성, 곧 사람이 왜 창조되었고, 우리가 왜 존재하는가 하는 문제를 해결한 자리에 이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어떤 물을 마셔야 하는지에 대하여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둘째 날과 셋째 날을 통해서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궁창 위의 물, 즉 세상의 것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마셔야 한다는 것과, 궁창 아래의 물이 모여 있는 바다에서 땅이 드러나듯이 세상의 모든 철학과 행위와 율법 중심의 모든 종교와 과학과 돈과 명예와 쾌락 안에서는 자기 정체성을 해갈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세례를 받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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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신앙의 여정에서 <세례>는 절대적인 과정이다. 다분히 형식적인 면이 있기는 하지만 모든 교회, 천주교와 기독교 외에 여기서 파생된 신양성경을 경전으로 채택한 거의 모든 종교에 있어서 세례는 중요한 신앙 과정이다. 물론 종이로 나타나는 세례증서가 신앙의 여정이라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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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라는 것은 헬라어로 밥티스마라는 말로 '물에 잠기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신앙 생활을 하기 위해서, 아니 한 사람이 존재의 목적과 정체성을 알아 가는 과정에 물에 들어가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알지 못한다면, 매일 세례를 받아도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세례를 주신 것은 당연히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세례 증서 때문은 아니다.


세례는 사람이 물에서 살 수 없다는 것을 알게 하는 것에 그 목적이 있다. 다시 말해서 물에 잠기게 하는 것은 죽는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그 물에서 나온다는 것은 다시 사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즉 물에 잠겨서는 살 수 없다는 것을 알게 하시기 위하여 세례를 주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셋째 날의 창조 과정이다. 천지창조 셋째 날, 뭍이 바다에서 드러나게 되는 과정으로 말씀하고 계신다. 



 천지창조 셋째 날 

 바다에서

 땅이 드러남

 세례

 물 속에서 

 흙인 인간이 잠겼다 나옴 



이것은 사람이 바다 안에서 살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을 말씀 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이 바다가 궁창 아래의 모든 물을 모은 곳이라는 것임을 생각하면 형식과 세상의 부귀영화와 물질과 도덕적 행함을 통해서 자기 정체성에 대한 갈증을 해갈하려는 삶은 마치 물에 잠긴 것과 같이 죽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어 그것을 하나님 앞에서 고백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인격을 가진 삶으로 가는 과정으로 이것을 바다에서 뭍이 드러나게 하신 창조의 과정으로 표현하신 것이다. 사람은 땅과 같은 흙으로 지은 존재니 말이다.


성경에서 바다는 항상 세상을 의미한다. 바다는 지구상의 모든 물이 모이는 곳이다. 그것이 더럽고 깨끗하고를 가리지 않고, 그것이 어떤 것에 사용되었던 다 모이는 곳이 바다다. 그야 말로 세상을 대변하는 광활한 지구의 표면인 것이다. 사람의 존재 형식에 관한 모든 것을 추구하고 그것이 모여있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바다에서 땅이 드러나는 것과 같이, 사람도 그런 모든 세상적인 것에서 밖으로 나오는 과정을 겪어야만 천지창조의 과정에 속한 사람이 되는 것이며, 그렇게 되어야 그리스도를 알고 인잔의 존재 목적과 삶의 목적을 밝히 알게 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 바로 천지창조의 셋째 날인 것이다. 그래서 이 천지창조는 그리스도의 성품이 사람의 것이 되는 과정인 것이다.


한 사람이 그리스도의 성품을 그 정체성으로 삼아 살게 되는 과정에는 필연적으로 사람의 존재 형식에 속한 돈과 명예와 도덕과 고상함과 같은 모든 형식을 추구하는 삶으로는 자신의 생명이 하나님 앞에서 죽은 자와 같다는 것을 고백하고 그 세계에서 나오게 되는 과정을 천지창조의 과정에서는 바다에서 쿹이 드러나는 것으로, 또한 세례로 표현하신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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