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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사람을 만드시다 (4)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3. 11. 10. 11:03 Writer : 김홍덕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의 상황과 지금의 상황을 비교해 보면 크게 다르지 않다. 물론 사회적인 상황과 문화와 기술 등은 전혀 다른 세계이고, 기독교라는 상황 또한 전혀 다르지만 사람의 상태와, 또한 사람이 하나님을 대하는 기본적인 관념은 그때나 지금이나 다를 것이 전혀 없는 상황이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오신 소득이 전혀 없는 것이냐?라고 할 수 있겠지만, 어차피 한 개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받아 들이는가 하는 것에 따라 그 사람에게 예수님이 의미가 있는 것이지, 달력으로 2,000년 전에 예수님께서 오셨다고 모든 사람에게 예수님의 의미가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은 천지창조의 개념과도 같은 것이다. 다 눈 뜨고 세상을 숨 쉬며 살아가지만, 어떤 이는 하나님 앞에서 죽은 자와 같다. 그것은 태초 이전의 사람이라는 의미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모든 것이 한 사람의 상태적 시간 개념과 의미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받아 들여지고 또한 하나님의 태초가 열리는 것이지, 물리적인 세상과 달력의 시간으로 태초나 예수님이 이미 오신 분은 아닌 것이다.


예수님께서 2,000년 전에 오셨고, 또 언제인지 정확히는 추정할 수 없지만 이 물리적인 세상이 시작되었다 하더라도, 어떤 한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두신 뜻을 제대로 아는 세계가 열리지 않았다면 서기 10,000년이라 해도 그 사람에게는 아직 태초가 없는 것이고, 예수님과 지금 같이 밥을 먹고 있다고 해도 예수님께서 왜 오셨는지에 대한 하나님의 의를 바로 알지 못한다면 그에게 예수님은 그냥 식객일 뿐 구세주는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목적을 가지고 오셨는지, 하나님께서 한 사람의 마음 안에 여시는 태초는 어떤 것인지를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아니, 우리 모두가 이미 사람이기에 이렇게 글을 쓰고 또 컴퓨터를 이용해서 읽고 있는데 아직 사람이 아니라는 이야기인가? 


미안하지만 많은 이들에게는 <"그렇다">라고 답을 할 수 밖에 없다.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라는 것은 생물학적, 또한 철학적 개념으로서 인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흙으로 만들어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하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태초가 열리고 그 하나님의 창조 섭리 안에서 경륜의 과정을 겪고 자신이 흙으로 만들어진 사람이라는 고백을 낼 수 없다면 미안하지만 하나님 앞에서 그는 산 사람은 아니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지금의 교회들이나 예수님 당시의 유대교나 다를바가 별로 없다. 왜냐하면 지금의 교회는 흙으로 지은 사람,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아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려 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가진 관념과 메커니즘과 같은 방식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흙이라는 고백이 아니라 하나님 앞이라는 미명 아래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가르치고 믿기 때문인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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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사람을 만드시다 (3)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3. 11. 10. 07:17 Writer : 김홍덕

생물학적으로 잘 살고 있는 사람을 두고 '무엇에 대하여 어둡고 맹인이다', 또는 '아직 태초가 열리지 않았다.'라고 하는 것은 금방 이해가 되지 않는 일 일수도 있다. 하지만, 군대에 가 보지 않은 사람은 군에 대한 이야기를 아무리 많이 들어도 군대가 어떤 곳인지 알 수 없듯이, 알고 공존한다고 다 자기의 세계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창세기로 시작하는 성경은, 우리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세계가 열리지 않은 존재로 보기 때문에 살아 있는 육신의 눈으로 이 창세기를 읽게 하신 것이다. 즉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이 육신으로 살아 있어 산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살아 있는 존재로 볼 수 있는 상태가 무엇인지를 알게 하셔서 그런 존재가 되게 하시기 위하여 성경을 통하여 말씀하시고,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하여 모른다. 사람들은 하나님이라는 이름도 알고, 또 교회에 나오지 않아도 하나님이라는 정체성에 대하여 알고 있다. 하지만 그들이 아는 것은 슈퍼맨을 아는 것과 같다. 하지만 그렇게 아는 하나님은 본 적도 없고, 접해 보지도 않은 가상의 존재와 같을 뿐이다.


창세기 4장에는 아담의 셋째 아들 <셋>에 대한 말씀이 있는데, 여기에 재미 있는 말씀이 하나 있다. 창세기 4장 26절에 <"그때에 비로서 사람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라고 하는 말씀이다. 아니, 아담 때 부터 계속 하나님과 사람들이 말도 했고, 심지어 동생을 죽인 가인도 하나님과 대화 했는데, 셋의 때가 되어서야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니? 그게 무슨 말인가?


이는 그 때가 되어서야 비로서 사람들이 하나님을 <여호와>로 인식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존재의 하나님으로 인식했다는 의미인 것이다. (이 부분은 다음에 다룰 수 있으면 좋겠다. 아주 상세한 설명이 필요한 부분) 그러니까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바로 알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셋의 때가 되었을 때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세계가 열리는 태초가 있었다는 표현과도 같은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하나님을 어떻게 모른다는 것인가? 그것이 아주 중요한 포인트가 될 것이다. 이것에 대하여 생각하기 위해서 예수님 당시를 생각해 보자. 그 당시 모든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알고 있었고, 성전도 있고, 예배도 있고, 하나님의 말씀도 있었고, 선지자 제사장 서기관 등등 하나님을 섬기는 모든 것이 다 있었는데, 왜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표현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는가? 하는 것을 생각해 봐야 한다.


이것은 한 마디로, 유대인들이 아는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즉 예수님이 오실 당시 모든 유대인들과 세상 사람들은 다 하나님에 대하여 알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다시 말해서 세상의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태초가 열리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신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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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사람을 만드시다 (2)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3. 11. 5. 10:30 Writer : 김홍덕

누군가의 어머니도 또 누군가의 아버지도 다 이 세상을 떠난다. 그렇지만 그 자녀들에게 부모의 이미지는 늘 있다. 다만 부모가 세상을 떠난 다음에는 이미지만 있고 실체가 없는 것이다. 창세기에서 말씀하고 있는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의 이미지라고 했다. 즉 하나님의 이미지가 형상화된 존재가 바로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사람의 정체성이다.


<관련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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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에 대하여 바울 사도는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빌 2장)" 이라고 했고, 요한 사도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요 1장)"이라고 했다. 이것은 하나님이 인간이 되심에 대하여 말씀하심이다. 이것은 흔히 말하는 <빙의>와 같이 하나님이 사람 속에 들어 오신 것과는 좀 다른 이야기다.


사람이란 하나님의 이미지가 형상이 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사람과 하나님은 형식과 내용의 관계라는 것이다. 즉 하나님은 내용이고 사람은 그 형식이라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다. 사람이 있는데 그것에 하나님이 마치 귀신 들린 것 처럼 그 사람 안에 기거하는 형태는 아니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사람 따로 하나님 따로가 아니라, 사람은 곧 하나님의 한 표현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왜 중요한가 하면 사람들은 하나님께 기도를 하는데 그 내용이 보면 사람에게 필요한 것을 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구하는 것이 대부분 하나님께서 사람의 필요를 들어 주시기를 기도한다. 그것은 하나님과 사람의 필요가 다르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그렇게 생각한다.


하지만 하나님의 생각은 다르다. 하나님은 그 뜻이 우리에게 이루어지기를 원하신다. 우리가 또 우리 육신의 일이 잘 되므로 하나님께서 좋아하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과 사람은 그 구하는 것이 다르다. 사람은 육신이라는 형식을 가지고 있어서 그 형식에 맞는 것을 구하나,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그 영이 표현되는 형식을 원하신다.


어떻게 보면 다를 것 없는 이 차이는 <무엇을 좋은 것으로 여기는가?> 하는 것에서 구분이 된다. 사람들은 세상에서 성공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한다. 년말 각종 시상식에서 교회 다니는 유명인들의 수상 소감과 같은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런 것이 아쉬운 분이 아니시다. 


사람들이 흠모하는 세상에 있는 모든 좋은 것을 다 그 분이 만드셨다. 그게 필요한 분이 아니시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이유가 사람이 이 세상의 어떤 것으로 성공하는 것을 보시기 위하여 사람을 만드신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사람에게 두신 목적은 그런 위대함이나 고상함이나 화려함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알려 주신 분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이시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무엇을 보여 주셨는가? 하는 것을 본다면 사람을 만드신 목적을 알 수 있고, 그 목적을 자세히 보면 천지창조의 과정 속에 이미 하나님께서 그 뜻을 보이셨음을 알 수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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