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 2619

(창세기) 사람을 만드시다 (1)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3. 11. 4. 09:32 Writer : 김홍덕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만드실 때 흙으로 만드셨다. 세상에 좋고 강하거나 아름다운 것이 얼마든지 있는데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 하필이면 흙으로 만드셨을까? 다른 것도 아니고 하나님 자신을 표현할 존재를 만드시면서 말이다. 이렇게 말하면 괜히 문제를 도입하기 위하여 이렇게 말하는 것인 아닌가 싶겠지만 그것은 아니다.


사람들이 늘 강해지고 위대해지고 아름다워지려고 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자신을 표현할 존재를 만드심에 있어 강한 재질이나 아름다운 것으로 만드시지 않았다는 것을 강조해 보고 싶은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흙>으로 만드셨다는 것을 망각하면서 살 때가 많기 때문이다. 그것은 망각하면 안 되는 것이다. 궁극적으로는 그것을 망각한다는 것은 바로 <죄>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사람을 만드신 원재료인 흙이다. 이것은 아무것도 아닐 수 있다. 하지만 이 세상의 모든 식물은 다 여기서 난다. 단 하나의 씨로 인하여 이 흙이 생명이 되는 것이다. 나무와 채소의 모든 것은 다 흙으로 부터 온 것이다. 그리고 식물이든 동물이든 다 죽으면 흙으로 돌아간다. 이 흙이 바로 사람의 정체성이다. 하지만 육신의 정체성이 흙이라는 것을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천지창조의 과정에서 사람을 흙으로 창조하셨다는 것은 사람의 정체성에 대한 말씀인 것이다. 사람이 무엇이냐? 그리고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그리고 또 왜 창조되었는가? 하는 모든 것이 이 안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설명하는 것이 바로 천지창조의 과정인 것이다.


천지창조의 과정은 지구나 우주가 어떻게 생성되었는지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이것은 결국 천지창조라는 것을 인식하는 사람에게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며, 그것은 하나님의 세계가 열리는 것이라고 했고, 하나님의 세계를 인식하고 이 세상을 하나님의 세계로 인식하며 사는 사람을 성경은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사람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천지창조는 결국 사람을 만드심으로 종결된다. 그것은 이 천지창조의 목적이 사람을 만드시는 것에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태초라는 것이 한 사람에게 어떤 세계가 열리는 것이라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한 사람에게 어떤 세계가 열리는 것이나, 한 사람이 하나님이 안식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나, 둘 다 사람이 목적이고 주체라는 점에서 같다는 것이다.


그렇다 사람은 하나님의 창조 목적의 본질이다. 그리고 누군가가 무엇을 만들었다는 것은 결국 자신을 나타내기 위함인 것이다. 휴대폰은 누가 만들어도 자기 상표를 꼭 붙인다. 자기가 만들었다는 것이다. 삼성이 자기가 만든 스마트폰에 사과 모양을 그리지는 않는다. 심지어 아이폰에서 돌아가는 프로그램 조차 잘 만들지 않는다. 자기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인 것이다.


성경에도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 <우리의 형상대로>라고 하셨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내고자 하신 것이다. 이것에 대하여는 앞에서 아주 길게 포스팅을 했다. 이것은 물리적인 형체가 아니라 <이미지>고 내용이라는 것을 말이다.


(계속)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

이 천지창조의 과정 속에서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볼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보여주신 삶의 모습들이 고스란히 창조의 과정 속에 있기 때문인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자신을 아브라함 보다 먼저 있었다고 하셨고, 아버지께서 세상을 만드실 때에 함께 계셨다고 하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자신을 빛이라고 하셨다. 예수님께서 온 몸에서 빛이 났다는 말씀이 아니다. 이것은 천지를 창조하실 때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하심으로 한 사람 안에서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있기 시작했다는 의미라고 했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라는 정체성 곧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두신 목적과 의를 알게 되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빛이라고 하신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친히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심으로 창조의 과정 속에서 사람이 바다 같은 세상의 것으로 자기 정체성을 해갈할 수 없다는 것을 보이심과 같이 사람이 세례를 받아 하나님 앞에 자기를 고백하심을 보여 주신 것이다. 그리고 해와 같이 빛을 내시는 분, 다시 말해서 빛 그 자체는 아니지만 빛이 어떤 형상이 되었듯이, 하나님의 말씀이 예수님이라는 형상이 되시는 성육신을 보이셨고, 


또한 씨 있는 식물을 먹거리로 주심으로사람의 마음 밭에 하나님의 말씀을 뿌린다고 하심과 같은 것이다. 또한 동물에 관해서도 땅에 기는 것과 들짐승과 육축(가축)으로 구분하신 것은 결국 가축이 주안점인데, 이는 주인 있는 그러니까 순종하고, 그 생존의 목적이 주인에게 있는 생명이라는 것을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십자가에 달리심과 같은 것이다.


이렇듯 창조의 전 과정은 그리스도의 정체성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이 모든 창조의 과정은 다 사람에게 수렴한다. 다시 말해서 이 모든 창조는 결국 사람을 만드시기 위한 과정이었다는 것이다. 창세기로 본다면 아담과 하와를 만드시기 위한 과정이 천지창조의 과정이었다는 것이다.


특히나 사람을 만드시는 장면은 정말로 인상 깊고 성경적으로나 또한 우리 사람에게 아주 중요하고 의미가 있는 말씀이다. 먼저 가장 주목할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 <흙>으로 만드셨다는 것이다. 궤변처럼 반문해 본다면 세상에 좋은 재료가 얼마나 많은데 하필이면 흙인가? 하지만 이것이 매우매우 중요한 하나님의 <의>라는 것을 간과할 수 없는 것이다.


이제 다음 포스트 부터 사람에 대하여 깊이 있게 다루어 볼 예정이다. (계속)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

각 시대마다 그리스도에 대한 개념이 있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의 기준에 의하면 예수님은 그리스도가 아니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스스로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을 때 유대인들은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들이 생각하는 그리스도가 아니었다. 예수님의 모습이나 신분이나 행적은......


<그리스도>라는 이름의 뜻은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의미인데, 고대 시절 머리에 기름을 부었다는 것은 왕과 신께 계시를 받는 선지자, 그리고 제사장 이렇게 세 부류의 사람에게만 있는 임명 의식이었다. 고로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은 왕이요 제사장이요 선지자인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당시 기름은 재산이기도 했고, 또한 당시에는 기름이 치료재로도 많이 사용되었다. 그래서 상처난 곳에 기름을 바른다는 표현이 성경에도 많이 나온다. 그러므로 기름은 육신에게 있어 가난과 병든 것에서 구하는 것에 사용되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그런 역할을 하는 사람에게 기름을 부었던 것이다.



머리에 기름을 부을 때 감람나무 열매의 기름을 머리에 부었다. <사진출처 : segibak.or.kr>



예수님께서 그리스도로 오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사람들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이 목적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는 세가지 이름이 있는데, 하나는 예수, 그리고 그리스도 또 끝으로 임마누엘이 있다. 예수는 <우리를 죄에서 구원할 자>라는 의미이고, 그리스도는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함께 계신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기능과 정체성과 상태를 각각 말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히브리어로는 <메시야>인데, 지금 이 시대의 말로 바꾸면 영웅(Hero)이 될 것이다. 즉 사람이 벗어나고 싶은 괴로운 자리에서 벗어나게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 많은 영화들이 영웅을 그리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나 이 시대의 영웅들은 대부분, 그 추구하는 바가 다르기도 하지만, 한 가지 절대로 간과할 수 없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아무나 되기 어렵다는 것이다.



관련 포스트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 (창세기) 천지창조 첫째 날 - 빛이 있으라(2)



아무나 되기 어려운 영웅은 결국은 나를 위한 영웅이 아니다. 우선 내가 처한 곳에서 구원해 줄 수는 있어도, 늘 내 곁에 있는다는 것도 아니고, 스파이더맨 처럼 내가 어려울 때 마다 불러야 하는데, 그때 마다 온다는 보장도 없는 것이다. 결국은 내가 그런 사람이 되지 않는 한, 영웅은 한시적인 것이다. 마치 구약 시대의 선지자들 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리스도는 누구나 될 수 있는 정체성이다. 다시 말해서 누구나 자신을 죄에서 그리고 삶의 곤고함에서 구원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하시기 위하여 오신 분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누구인지 알게 하시기 위하여 오신 분이시다. 그것도 하나님 앞에서 말이다. 천지를 창조하신 주재이이신 하나님 앞에서 말이다.


그 그리스도의 정체성이 무엇인지를 성경 전부가 말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성경의 시작, 아니 하나님과의 관계가 시작되는 시작, 그 하나님의 세상의 시작이 되는 창세기의 천지창조 역시 그리스도의 정체성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이기만 하면 누구나 다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살 수 있고,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셨기 때문이다. 지으셨다는 것은 목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고. 지으신 이의 목적은 자신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을 나타내시게 되는 그 성품을 성경은 <그리스도>라고 하는 것이다.


(계속)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