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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악과 (31) - 사람을 보는 두 관점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4. 3. 3. 15:20 Writer : 김홍덕

선악과는 결론적으로 하나님께서 당신을 표현하시기 위하여 지으신 사람과 이 세상 그리고 이 세상의 일을 사람이 선하다 혹은 악하다 규정하는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부정한 사람의 모습은 말로 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화장실 가는 것에서 부터, 사람을 죽이고 싶어 하는 독한 마음까지 그 정도와 종류가 너무 많고 다양하다. 


하지만 이런 모든 것이 하나님이 보실 때는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기에 유용한 것이라고 생각하시는 것에 반해, 사람은 그것을 부정하게 여긴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이 스스로 어떤 것은 선하고, 어떤 것은 악한 것이라고 규정하는 그 본성에 의해서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심지어 교회 마저 사람의 그런 본성들을 교화시키는 것에 총력을 다하고 있는 실증이다. 즉, 교회에서도 사람을 부정하게 보고, 그것을 사람 안에서 절제 하도록 시키고, 금욕 하도록 하여, 세상에서 경건한 사람이 되라고 하고 있다. 그러나 그런 모든 부정함은 그 자체가 부정한 것이 아니고, 사람이 그것을 부정하게 볼 뿐이다. 물론 하나님은 그것을 부정하게 보시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가 죄인인 것은 행위 때문이 아니라, 세상이 가지고 있는 사람을 부정하게 보는 그 관점의 법으로 볼 때, 사람이 죄인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죄인 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예수님도 그것 때문에 죽으셨고, 그 죽음을 하나님께서는 부활로 이끄셨다. 즉, 그것 때문에 죽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죄와 악으로 여기시고, 또한 죽은 것과 같이 여기는 것은 사람이 가진 본성의 연약함을 다스리지 못한다고 사람을 부족한 존재로 또한 죄인으로 만드는 기준이 하나님의 의라고 우기고, 그것을 선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의 생각과 모든 행위가 하나님 앞에서 완전한 범죄인 것이다.


우리는 모두 먼저 하나님 앞에서 자신과 세상을 선한 것과 악한 것으로 나누던 죄인이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오심으로 그런 모든 것을 죄로 여겨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던 나의 모습이 원래 하나님께서 만드신 내 모습이 아니라 그런 관점 앞에서는 털 깍는 자 앞의 양과 같이 끌려 갈 수 없을 정도로 그런 관점은 오히려 나를 죄인으로 만들어 십자가에 못 박힐 수 밖에 없는 그런 존재가 나의 모습이라는 것을 깨달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회복되는 것이다. 이것이 구원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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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악과 (30) - 노아 방주의 부정한 짐승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4. 3. 2. 22:13 Writer : 김홍덕

사람을 선악간에 판단하는 것은 단순하거나 분리된 명제가 아니다. 사람을 선악간에 판단하는 것은 결국은 교회의 모양 마저 바꿀 수 있다. 즉 교회가 하나님을 믿는 것에 있어서 선한 것만 축출하려는 시도를 계속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무엇이 선한 것이고 어떤 것이 악한 것인지 판단하는 나름의 기준을 가질 수 밖에 없다. 그러다 보니 교회도 신앙에 관한 태릉 선수촌이 되려 한다는 것이다.


특히 앞에서 정의 내린 큰 교회, 즉 세상에서 성공하고 고상해질수록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하고 가르치는 기성 교회들의 경우, 하나님을 잘 믿고, 또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신앙이라는 것은, 공부 잘하고, 성공하고, 부자되고, 명예를 얻을 수록 기뻐하신다고 가르친다. 한 마디로 그것이 하나님이 주시는 복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즉 인간에게 복이라는 것이 그것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것은 사람들에게 배타적이다.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교회에 나오지 않고, 개독교라 비난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느낀다. 교회가 차별성을 추구하고 있으며, 그 범주에 들지 못하면 지옥에 간다고 느끼게 하는 것이 그 정책이라고. 그런데 그 차별성이 하나님과 같은 기준이라면 상관이 없겠지만, 인생의 복이 돈과 명예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무엇보다, 사람을 선한 부분과 악한 부분으로 나누어 분리하고, 그것은 결국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으로 구분하게 된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찾아온 관원처럼.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방주 안에 짐승들을 태울 때 부정한 짐승도 태우라고 했다. 사실 하나님께서 부정한 분이 아니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만드신 것은 그 어떤 것도 부정한 것이 없다. 하나님은 불량을 만드시는 멍청한 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실제로 부정한 짐승이라는 표현은 노아의 방주 때 처음 나오지만 어떤 것이 부정한 것인지에 대한 정의는 모세의 시대에 율법과 함께 확립된다.(그러므로 부정한 것은 율법을 주신 목적과 함께 해석되어야 한다.)


노아의 방주는 교회를 뜻하는데, 이 방주에 부정한 짐승을 태우라고 하신 것은 교회가 부정한 것을 수용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부정함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는 사람의 눈에 부정해 보이는 것을 말한다. 교회라는 곳은 오히려 사람이 그리스도의 삶을 살 수 없다는 영지주의와 악한 생각을 가진 사람은 수용해서는 안된다. 하지만 사람의 기준에 부정한 것은 얼마든지 교회 안에서 안식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교회라는 곳은 선악의 기준을 가진 세상 모든 사람의 관점에서 볼 때 죄인이고 부정한 사람들이 안식 할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당연히 세상의 관점에서 부정한 존재가 된 첫 번째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런데 지금의 교회는 오히려 세상에서 성공하면 할 수록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악한 생각을 가르치고 강조하여, 예수님과 같이 세상의 선악 기준에 의하여 부정하게 된 사람들을 배척하고 있다. 이런 모든 것이 다 선악과의 결과이다.


그러므로 사람을 사람 그 자체로 보는 것은 교회의 존재 목적과 연결되어 있고, 이것은 노아의 방주에 왜 부정한 짐승이 탈 수 있는지 연결이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 즉 선과 악을 판단하는 기준을 가진 사람은 사람을 하나님께서 만드신 사람 그 자체로 볼 수 없다. 그러므로 사람을 사람 그 자체로 볼 수 있다는 것은 사람 안에서 사람을 볼 때 선과 악의 기준에 따라 나누는 관점을 가지지 않고, 보기엔 연약해 보이고 뭔가 고쳤으면 하는 그 모습이 하나님께서 만드시고 심히 기뻐하셨던 모습이라는 것과 동일한 관점을 가진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을 그런 관점으로 볼 수 있도록 표본이 된 사건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므로, 사람을 사람 그대로 본다는 것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그 초라한 모습이 나의 죄를 대신해서 벌을 받는 모습이 아니라, 바로 나의 정체성을 보여 준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구속인 것이며, 그런 관점으로 두세 사람이 모인다면 그것이 바로 부정한 짐승이 탈 수 있었던 노아의 방주와 같은 교회가 되는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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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악과 (29) - 존재의 신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4. 3. 1. 11:54 Writer : 김홍덕

흔히 사람들이 성경의 말씀을 '그리스도인으로 살려고 하면 이렇게 해야 한다.'라는 <행위에 대한 규범>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을 행위의 신으로 모욕하는 것이다. 엄연히 하나님의 이름 여호와는 "I am who I am"이다. 이는 <나는 나다>라는 의미로 볼 수 있다. 이 하나님의 이름은 오직 Be동사만 있다. 즉 하나님은 존재의 신이시다. 그리고 이것은 풍랑이는 바다 위를 걸어오신 예수님께서 "내니 두려워 말라"라고 하신 것과 같은 의미이다. 이것의 원어적 표현은 "에고 에이미(ego eimi)" 역시 같은 의미이다.


하나님께서 존재의 신이라는 것은 정말 정말 중요하다. 이것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어떤 행동을 해서 기쁘시게 할 수 없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사람의 눈에 Do, 즉 '이렇게 하라'로 읽히는 모든 성경은 실제로는 어떤 생명이 되기만 하면 그렇게 살 수 밖에 없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 생명은 당연히 그리스도의 생명이다.


갈라디아서에는 성령의 9가지 열매가 나온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라고.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이런 열매를 맺기 위하여 노력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또 그렇게 살려고 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조금이라도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다. 정확히 말해서 하나님께서 존재의 신이라는 것을 모르는 것이다.


분명히 바울 사도는 성령의 9가지 <열매>라고 했다. 열매는 어떤 나무이기만 하면 된다. 즉 먼저 어떤 열매를 얻으려면 그 열매가 열리는 나무를 심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의 열매는 그 마음 안에 성령이 있으면 굳이 노력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이것은 먼저 사람의 심령 안에 성령이 거하시기만 하면 아무리 말려도 그 9가지 열매는 맺힐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이 생명이고, 이것이 존재의 법이다. 그리고 이것이 하나님의 법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고 인간이라는 부끄러움을 인정하기만 하고, 나머지 삶은 아무렇게나 살아도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복음을 알면 알수록 성경에 나오는 모든 말씀을 잘 준행하며 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영지주의자들은 이것을 몰랐던 것이다. 하지만 영지주의는 옛날의 사상 만은 아니다. 지금도 역시 그런 사상은 만연하다.


지금의 교회들은 큰 교회가 되려고 한다. 이건 건물을 크게 지으려고 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뭐든지 크고 좋은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세상에서 성공하면 할수록, 인간의 부끄러움을 감추고 고상해지면 고상할수록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은 다 큰 교회, 즉 위대함을 추구하는 것이다. 즉, 인간의 부끄러움을 감추면 감출수록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는 의미이다. 이는 이때까지 말해 온 것처럼 선악과의 산물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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