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 2602

신앙과 삶, 어느 것이 먼저인가?

Category : 김집사의 뜰/복음 담론 Date : 2013. 11. 12. 23:34 Writer : 김홍덕

교회의 청년에게 일자리를 하나 소개해 주었다. 평일은 잔업이 있지만, 수요일은 잔업이 없고, 근로기준법에 의한 것이 아니라 달력 공휴일은 다 쉬고 토요일도 쉬는 주 5일제 나름 근로조건이 좋은 자리였고, 이전에 나의 팀원이었던 녀석이 과정으로 있어서 좀 부탁을 했었는데 이력서 달라고 연락이 와서 당사자에게 연락을 했다.


근데, 이 청년의 반응이 평일 구역 예배에 가기 힘들고, 어쩌고 하면서 다시 연락 주겠다더니,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며 그 자리를 고사를 한다. 거리가 약간 멀긴 하지만 유류대도 반 정도는 지원해 주는 회사인데 아쉬웠다. 그 청년에겐 좋은 자리라고 나는 생각했기 때문이었다.(물론 지금 이 청년에 대한 설명이 전부는 아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그에게는 정말 하고 싶은 일이 있을 수 있다. 아무리 내가 평소에 본 모습이 그런 것과 거리가 있어 보일지언정 그가 그렇다면 그런 것으로 받는 것이 도리이다. 내가 사람 마음 알수는 없으니 말로 듣고 그것을 받으면 된다. 하지만 이것을 이렇게 단순하게 받기까지 내 마음에 아무 경륜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게다가 신앙 생활에 다소 지장이 있을 것 같아서 좀 꺼려하는 모습에 여운이 남는다. 과연 신앙생활을 위하여 삶의 현실을 물릴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하여 말이다. 나도 예전에 좀 심각하게 그런 생각을 하면서 살았었기 때문이다. 신앙을 율법적으로 알 때도 그러했고, 성경이 존재의 말씀이라는 것을 알고서도 그러했다.


하지만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씩 알게 된 것에 따르면, 삶의 모든 현실적은 문제들은 분명히 신앙과 관련이 있다. 하지만 단언코 방향은 제한적이다. 그러니까 삶의 모양을 바꾼다고 신앙이 바뀌지는 않는다. 신앙이 바뀌면 삶의 모양은 바뀐다. 다시 말해서 기도를 열심히 하면 신앙이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신앙이 자라면 기도를 하게 된다는 것이다.


기도를 열심히 하면 신앙이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신앙이 자라면 기도를 하게 된다

개가 짖는 것이지, '멍멍'소리를 내서 개가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결국 신앙은 삶이다. 삶이 참 구질하고 추악한 면 또한 많지만 이 인간의 삶의 모습은 도화지와 같은 것이다. 이런 배경이 없으면 신앙이란 것이 구분될 수도 없고, 어떤 것이 좋은 신앙인지도 알 수 없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신앙은 삶으로 표현되고 삶을 지배하는 것이다. 생명이란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신앙은 생명의 법에 의거한다. 다시말해서 유전 인자가 표현되는 것이라는 것이다. 개가 짖는 것이지, '멍멍'소리를 내서 개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그 안에 있는 사람은 삶의 모든 것을 다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로 채울 수 있다. 그리스도의 본성은 숨길 수 없기 때문이다.


직장을 구하거나 삶의 어떤 과정을 겪어야 할 때, 때로 우리는 신앙생활에 제약을 받을 수 있다. 그러다보면 어떨때는 손해를 감수하고 그런 제약을 떨치기도 한다.(상황과 사람에 따라 다르다.) 하지만 어떤 시절에는 신앙적인 것을 지키기 위하여 삶의 조건을 후위로 두는 것, 그것이 정당할 때가 있다. 그러나 결국은 신앙이 삶을 지배하게 될 것이고, 그 때는 그런 모든 것을 수용할 수 있고, 또한 그런 갈등 속에 다양한 결정을 내리는 사람들의 삶을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김집사의 뜰 > 복음 담론' 카테고리의 다른 글

때론 실패자가 되어 보자..  (0) 2014.02.12
신앙이 얼마나 절대적 사안인가?  (0) 2013.11.25
작은 디아코니아  (0) 2013.09.05
해도 되고, 안해도 되고  (0) 2013.09.03
시끄러운 기독교인  (0) 2013.06.30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

(창세기) 사람을 만드시다 (4)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3. 11. 10. 11:03 Writer : 김홍덕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의 상황과 지금의 상황을 비교해 보면 크게 다르지 않다. 물론 사회적인 상황과 문화와 기술 등은 전혀 다른 세계이고, 기독교라는 상황 또한 전혀 다르지만 사람의 상태와, 또한 사람이 하나님을 대하는 기본적인 관념은 그때나 지금이나 다를 것이 전혀 없는 상황이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오신 소득이 전혀 없는 것이냐?라고 할 수 있겠지만, 어차피 한 개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받아 들이는가 하는 것에 따라 그 사람에게 예수님이 의미가 있는 것이지, 달력으로 2,000년 전에 예수님께서 오셨다고 모든 사람에게 예수님의 의미가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은 천지창조의 개념과도 같은 것이다. 다 눈 뜨고 세상을 숨 쉬며 살아가지만, 어떤 이는 하나님 앞에서 죽은 자와 같다. 그것은 태초 이전의 사람이라는 의미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모든 것이 한 사람의 상태적 시간 개념과 의미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받아 들여지고 또한 하나님의 태초가 열리는 것이지, 물리적인 세상과 달력의 시간으로 태초나 예수님이 이미 오신 분은 아닌 것이다.


예수님께서 2,000년 전에 오셨고, 또 언제인지 정확히는 추정할 수 없지만 이 물리적인 세상이 시작되었다 하더라도, 어떤 한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두신 뜻을 제대로 아는 세계가 열리지 않았다면 서기 10,000년이라 해도 그 사람에게는 아직 태초가 없는 것이고, 예수님과 지금 같이 밥을 먹고 있다고 해도 예수님께서 왜 오셨는지에 대한 하나님의 의를 바로 알지 못한다면 그에게 예수님은 그냥 식객일 뿐 구세주는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목적을 가지고 오셨는지, 하나님께서 한 사람의 마음 안에 여시는 태초는 어떤 것인지를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아니, 우리 모두가 이미 사람이기에 이렇게 글을 쓰고 또 컴퓨터를 이용해서 읽고 있는데 아직 사람이 아니라는 이야기인가? 


미안하지만 많은 이들에게는 <"그렇다">라고 답을 할 수 밖에 없다.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라는 것은 생물학적, 또한 철학적 개념으로서 인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흙으로 만들어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하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태초가 열리고 그 하나님의 창조 섭리 안에서 경륜의 과정을 겪고 자신이 흙으로 만들어진 사람이라는 고백을 낼 수 없다면 미안하지만 하나님 앞에서 그는 산 사람은 아니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지금의 교회들이나 예수님 당시의 유대교나 다를바가 별로 없다. 왜냐하면 지금의 교회는 흙으로 지은 사람,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아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려 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가진 관념과 메커니즘과 같은 방식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흙이라는 고백이 아니라 하나님 앞이라는 미명 아래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가르치고 믿기 때문인 것이다.


(계속)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

(창세기) 사람을 만드시다 (3)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3. 11. 10. 07:17 Writer : 김홍덕

생물학적으로 잘 살고 있는 사람을 두고 '무엇에 대하여 어둡고 맹인이다', 또는 '아직 태초가 열리지 않았다.'라고 하는 것은 금방 이해가 되지 않는 일 일수도 있다. 하지만, 군대에 가 보지 않은 사람은 군에 대한 이야기를 아무리 많이 들어도 군대가 어떤 곳인지 알 수 없듯이, 알고 공존한다고 다 자기의 세계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창세기로 시작하는 성경은, 우리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세계가 열리지 않은 존재로 보기 때문에 살아 있는 육신의 눈으로 이 창세기를 읽게 하신 것이다. 즉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이 육신으로 살아 있어 산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살아 있는 존재로 볼 수 있는 상태가 무엇인지를 알게 하셔서 그런 존재가 되게 하시기 위하여 성경을 통하여 말씀하시고,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하여 모른다. 사람들은 하나님이라는 이름도 알고, 또 교회에 나오지 않아도 하나님이라는 정체성에 대하여 알고 있다. 하지만 그들이 아는 것은 슈퍼맨을 아는 것과 같다. 하지만 그렇게 아는 하나님은 본 적도 없고, 접해 보지도 않은 가상의 존재와 같을 뿐이다.


창세기 4장에는 아담의 셋째 아들 <셋>에 대한 말씀이 있는데, 여기에 재미 있는 말씀이 하나 있다. 창세기 4장 26절에 <"그때에 비로서 사람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라고 하는 말씀이다. 아니, 아담 때 부터 계속 하나님과 사람들이 말도 했고, 심지어 동생을 죽인 가인도 하나님과 대화 했는데, 셋의 때가 되어서야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니? 그게 무슨 말인가?


이는 그 때가 되어서야 비로서 사람들이 하나님을 <여호와>로 인식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존재의 하나님으로 인식했다는 의미인 것이다. (이 부분은 다음에 다룰 수 있으면 좋겠다. 아주 상세한 설명이 필요한 부분) 그러니까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바로 알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셋의 때가 되었을 때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세계가 열리는 태초가 있었다는 표현과도 같은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하나님을 어떻게 모른다는 것인가? 그것이 아주 중요한 포인트가 될 것이다. 이것에 대하여 생각하기 위해서 예수님 당시를 생각해 보자. 그 당시 모든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알고 있었고, 성전도 있고, 예배도 있고, 하나님의 말씀도 있었고, 선지자 제사장 서기관 등등 하나님을 섬기는 모든 것이 다 있었는데, 왜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표현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는가? 하는 것을 생각해 봐야 한다.


이것은 한 마디로, 유대인들이 아는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즉 예수님이 오실 당시 모든 유대인들과 세상 사람들은 다 하나님에 대하여 알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다시 말해서 세상의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태초가 열리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신 것이다.


(계속)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