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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론 실패자가 되어 보자..

Category : 김집사의 뜰/복음 담론 Date : 2014. 2. 12. 11:15 Writer : 김홍덕

어제(2월11일)에는 스포츠 안에서 두 눈물을 보았다. 하나는 누구나 아는바와 같이 올림픽에서 이상화 선수가 금메달을 따서 흘리는 기쁨의 눈물이었고, 또 하나는 흥국생명 여자 배구단이 10연패를 끊고 승리한 다음 눈시울이 불거진 류화석 감독이다.


전지현이나 김태희 같은 화려함과는 다른 아름다움이 있는 이상화 선수의 눈물은 승리와 기쁨의 눈물이다. 물론 그 안에는 그간의 고생과 수고로움 또한 녹아 있을 것이다. 어제 그녀의 승리는 참 감동적인 것이었다. 그러하기에 그녀는 영광을 받아 마땅하다. 





한편, 평소에 큰 호감을 가지고 있는 분은 아니지만, 흥국생명 류화석 감독이 10연패를 청산하고 승리한 다음 여자 리포트의 소감을 묻는 질문에 답하지 못하고 붉어진 눈시울은 어쩜 패배자의 아픈 눈물이었다. (흥국생명은 시즌 최 하위이고, 플에이 오프 진출이 거의 불가능한 상태)





그렇게 같은 세상에 다른 의미의 두 눈물을 볼 수 있는 하루였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승리와 패배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는 일들의 반복 속에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때로 패배자가 되어 봐도 좋을 것 같다. 물론 일부러 그러는 것이 아니라, 납득할 수 있는 수고의 끝에 오는 패배는 얼마든지 즐길만한 일이 아닌가 생각한다.


사실 실패와 성공이라는 것은 남자와 여자와 같은 상호 베필의 관계이다. 남자라는 개체가 없다면 여자라는 단어조차 불요하듯, 실패가 없다면 성공이라는 것 역시 단어조차 존재할 수 없는 그런 불가분의 관계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건 같은 것의 양면과 같은 것이고, 또한 실패는 성공을 그리는 캔버스나 도화지와 같다. 혹자는 성공의 어머니라고도 했다.


어쩌면 큰 실패는 아닐지 모르지만, 나도 나름의 실패들을 겪었는데, 그때마다 나는 그것에서 멀어지려 하고, 할 수 있다면 그것을 피하고자 했다. 하지만  그건 삶도, 나 자신도, 인생도 하나님도 모르는 것이었다.


산다는 것 자체에 집중한다면 때로 청하지 않았음에도 문을 두드리는 실패를 손님처럼 맞이해 보자.
동전의 뒷면과 같이 그 뒤에는 성공이 있다.


그러나 막연히 실패가 성공과 상관이 있다고 여기면 자위하는 것은 오만이다. 그러니까 성공을 목적으로 실패를 수용하는 것은 삶을 모욕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성공과 실패는 사람의 삶 안에 있는 공존하는 것이고, 내 삶의 일부이기에 수용해 가는 것이 온전하다.


알고보면 성경의 모든 말씀이 이와 같다. 인생의 연약함, 그리고 그 연약함으로 인한 삶의 다양한 부정함, 그리고 그 부정함 속에 매몰된 것 같은 나의 삶이 원래 하나님이 보시기에 참 좋았다고 한 나의 삶이라는 것을 수용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믿는 삶이기 때문이다.


삶의 어쨋던 외형상 그 모양은 같다. 다 죽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어차피 다 같은 결과를 향해가는 우리의 삶 속에서 성공이라는 것만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때로 실패자의 눈물도 흘려보자. 사람이 타락한 것이 실패하지 않으려 애쓰기 때문임을 상기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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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선악과라는 것은 아담과 같이 어떤 것은 부끄러운 것, 또 가려야 할 것이라고 여기는 결과를 초래한다. 그리고 사람이 그런 상태에 있다는 것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죽은 것이라고 하신다. 다시 말해서, 사람이 스스로 어떤 기준을 가지고 하나님이 세상을 만드신 목적, 사람을 지으신 목적을 외면하고 다른 의의 기준을 부여하는 상태가 되는 것을 선악과를 먹었다고 표현하시고, 그런 상태는 하나님 앞에서 죽은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 바로 선악과의 말씀인 것이다.


생각해보면 사람이 당연히 무엇이 선한 것인지에 대하여 생각하고, 그것을 추구하는 것이 마땅할 것 같은데,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죄, 특히나 모든 죄의 뿌리와 같은 것을 보시는 것인가? 그것은 한마디로 사람이 가진 선의 기준이 창조의 목적 안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이 무슨 말인가 하면, 사람이 가지고 있는 선과 악의 기준이 각각 다른 것과 연관성이 있다.


그럼, 사람은 왜 각자가 생각하는 선의 기준이 다른가? 왜 그런 것인가? 그것을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이러한 고민에 앞서 현재의 교회와 성당 그리고 각종 종교에서도 무엇인 선한 것인가를 연구하고, 신앙하면서 설교하고 사람들의 삶을 바꾸어 내려 하고 있다. 하지만, 그런 모든 노력들 조차 각각이 추구하는 선과 악이 다르다는 것은 단순한 아이러니일까? 그것은 사람들의 근본이 선과 악을 판단하는 자기만의 기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다 선악과를 먹은 인생이라는 것이다.


사람들이 구분하는 선과 악의 기준은 단언컨데 사람이라는 존재성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이 선과 악을 구분하는 기준은 오직 사람의 행동과 소유와 같은 형식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얼굴이 다르듯 어떤 것을 표현하는 것이 다 다르기에 그 다른 만큼 갈등이 있고, 또한 그 만큼 선과 악의 기준이 다른 것이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이 비슷한 사람들이 모이려 하고, 같은 취미를 가진 사람이 모이고, 같은 관심사를 가진 사람들이 모이는 것이다. 그것은 자기가 생각하는 <선>과 같은 것을 선으로 여기는 <의>를 가진 사람들이 그 세를 모아 자신들의 의를 주장하려 하기 때문이다.


즉, 사람이 주장하는 모든 선이라는 것이 그 사람의 존재 자체의 정체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행동과 외모를 판단의 대상으로 두고 있기에, 그것에 대한 기준이 다 다른 것이다. 예로 간음이라는 행동에 대한 기준도 나라마다 다 다르다. 심지어 에스키모인은 외부 남자에게 자기 아내를 잠자리에 내어주는 것이 최고의 접대였다고 한다. 그것은 분명 간음이지만, 사람의 왕래가 드문 에스키모인들에게는 근친혼들로 인한 유전적 열화를 막기 위한 생존의 관습이었다.


살인도 마찬가지다. 전쟁이라는 상황이 되면, 그때는 살인의 가치가 달라진다. 오히려 많이 죽여야 선한 것이 되는 상황이 발생하는 것이다. 비단 이런 흔치 않은 상황이 아니라하더라도 우리 생활의 주변에는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하다. 실재로 한 신혼 부부가 삶은 감자를 소금에 찍어 먹을 것인가, 설탕을 찍어 먹을 것인가 하는 것으로 다투기 시작한 것이 양쪽 집안의 문화를 비난하게 되고, 결국 이혼한 사례도 있었다.


어디 그 뿐인가? 이 글을 읽는 모든 사람의 오늘 하루 일과를 돌아보면, 알고보면 별 것 아닌 것인데, 내가 해 온 방식, 내가 옳다고 하는 방식들이 달라서 이견을 보이고 조정하는데 얼마나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지 생각해 보면 사람들이 얼마나 행동과 형식에 대하여 각각의 기준이 다른지 알고보면 정말 놀라운 것이다. 


반면에, 오늘 당신은 다른 사람도 나와 같은 인간이라는 정체성을 상기하면서 어떤 문제를 해결해 보았는가? 다시 말해서, 사람을 사람이라는 그 존재 자체로 보기 위한 노력을 얼마나 했는가를 생각해 보면 우리가 얼마나 선악과를 먹은 삶을 사는지 발견할 수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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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악과 (5) - 선악과를 먹은 상태, 죽음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4. 2. 9. 11:49 Writer : 김홍덕

사람들, 특히 기독교 신앙 안에 있는 신앙인들은 선악과의 문제를 그냥 간과한다. 많은 경우 처음에 예수를 믿기로 하는 순간 그 문제는 그냥 과거의 한 모습으로 인식된다. 하지만 선악과의 문제는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다. 사람이 자기만의 기준을 가지고 어떤 것이 선한 것인지를 간택하는 삶을 사는 동안은 끊임없이 갈등을 겪게 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사람마다 무엇을 선하게 여길 것인지에 대한 기준이 다 다르기 때문이다.


다음에 다루겠지만, 그것이 바로 바벨탑이다. 사람들의 의가 개인별로 다 다르기 때문에 의사 소통이 안되는 것이고, 갈등이 일어나는 것이다. 대한민국 안에서 한글로 대화 한다고 대화가 다 되는 것이 아니듯이 말이다. 그러한 문제가 있기 때문에, 정치적 관점의 다양성 만큼, 성경을 보는 관점도 다양한 것이다. 즉, 무엇이 선한 것인지에 대하여 성경을 기준으로 판단하려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선악과는 무엇이 선한지에 대하여 말씀하기 이전에, 사람이 스스로 어떤 것을 기준점으로 삼든 간에 무엇인 선하고, 무엇이 악한지에 대하여 판단하는 그 자체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다.


우리는 먼저, 선악과를 먹은 아담의 모습을 한번 볼 필요가 있다. 선악과를 먹고 난 다음 가장 먼저 나타난 아담의 반응은 자기가 벗은 줄을 알았다는 것이다.(창 3:7) 그런데 문제는 선악과를 먹고 나니 갑자기 몸이 홀쭉해져서 입고 있던 옷이 흘러 내려서 벗은 몸이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선악과를 먹기 전에도 아담과 하와는 벗고 있었고, 그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고 창 2장 25절에 기록되어 있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 벗은 것을 부끄러워 하여 나뭇잎으로 옷을 해 입었다는 것은 벗은 것이 악한 것이라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선악과를 먹은 현상인 것이다.


그러므로 벗었다는 것을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은 선악과 인함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왜 문제가 되는가 하면, 그 벗은 것을 부끄럽게 여겨서 나뭇잎으로 옷을 해 입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벗은 것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즉 벗고 있는 것은 악한 것이라고 생각을 했다는 것이다. 선악과를 먹기 전에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는 것인데, 선악과를 먹고 나니 그렇게 되었다는 것은, 선악과로 인하여 이전에는 문제가 되지 않던 것을 이제는 문제가 있고, 악한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선악과를 먹으면 죽는다는 것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창 2:17절에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셨는데, 이것은 사람이 스스로 선과 악을 알고 판단하는 그 상태가 바로 죽은 상태라는 말씀이라는 것이다. 아담과 하와가 그것을 먹었는데 죽지 않았으니 그건 마귀의 말과 같이 하나님께서 사람이 자신과 같이 되는 것이 싫어서 엄포를 놓으신 것으로 생각할 일이 아닌 것이다. 


사람이 스스로 선한 것과 악한 것을 판단하게 되는 그 상태, 그 상태가 바로 하나님께서 보실 때 죽은 상태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살면서 어떤 것을 보고, 그것이 선한 것인지, 악한 것인지를 판단하고 자기가 생각하는 선을 관철시키기 위하여 행동을 취한다면 그 사람은 육신이 의학적으로나 생물학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아무리 팔팔하게 살아 있어도 하나님 앞에서는 죽은 사람인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그저 예수 믿는다고, 혹은 나름 도덕적으로 선하게 살려고 노력한다고 해서 선악과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닌 것이다. 이런 선악과의 문제가 해결되기 위해서는 나뭇잎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자기의 생명이 되는 사건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선악과는 성경을 보는 중요한 문제인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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