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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의 이름을 짓는 아담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3. 12. 16. 14:50 Writer : 김홍덕

창세기 2장에서는 아담에 이어 하와라는 베필을 지으셨다는 것을 말씀하시는데, 그 사이에 아담에게 동물들의 이름을 짓게 하시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이 말씀이 하나님께서 "사람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매 베필을 지으리라"하시고는 베필을 만드시는 말씀 사이에 들어 있다.



Adam names the anima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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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면에서 보면 아담이 세상의 동물들의 이름을 짓는 것은 큰 의미가 없을수도 있다. 굳이 따지자면 아담에게 <모든 것을 다스리라>고 하신 정도의 의미 정도만 부여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사람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창 2:18)">이라고 하시는 말씀에서 부터는 사람과 사람의 모든 관계와 갈등에 관한 하나님의 섭리를 말씀하시고 계신다.


성경에는 그 순서가 가끔씩은 낯설게 느껴지게 기록된 곳들이 있는데 이 말씀도 그렇다. 사람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베필을 만들어야겠다 하셨으면 바로 만드시면 될 것인데, 왜 그 사이에 아담에게 세상의 모든 동물을 불러서 그 이름을 짓도록 만드셨을까? (이런 것 까지 따지는 것을 무리한 것이라 보는 사람도 있을 수 있지만, 단순히 배치의 문제가 아니라 무엇을 말씀하시려는지를 안다면, 적어도 목회를 하는 동안 한번은 설교해야 마땅한 부분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흙으로 만드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어서 아담을 창조하셨다. 이 창조는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지으신 목적이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나타내며 사는 것임을 알게 하시려 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표현하며 산다는 것은 어떤 삶이란 말인가? 그게 중요한 문제인 것이다.


그리스도의 성품을 나타낸다는 것은 어떤 의미이고, 어떤 모양새의 삶인가??


사람의 존재 목적이 그리스도의 성품을 나타내는 것이라 한다면, 그리스도의 성품을 나타낸다는 것은 어떤 의미이고, 어떤 모양새의 삶인가? 그것이 어쩌면 신앙의 절대적인 사항이 아닐까 싶은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는 이 말씀을 그리고 이어지는 남자와 여자, 그리고 베필이라는 그 관계, 그리고 그 관계로 말미암은 타락 등에 관한 일련의 말씀들이 자기 안에 열려야 비로서 하나님의 세상이 열리는 천지창조가 자기 안에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동물들의 이름을 짓게 하셨다는 것은, 아담으로 하여금 어떤 것에 <의미>를 부여하게 하셨다는 것이다. 이름이라는 것은 단순한 호칭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명칭이고 더 나아가서 정체성이다. 특히 성경을 기록한 유대인들의 문화 안에서 이름은 그 사람의 모든 정체성을 말한다.


유대인들은 사람이 태어나면 바로 이름을 붙인다기 보다, 먼저는 "바(누구의 아들)"를 그 아비의 이름 앞에 붙여서 부르다가 그 사람의 정체성이 정해지면 그 사람의 이름을 붙였다. 예를 들어 베드로를 일컬어 '바요나 시몬'이라고 하는데 이는 베드로의 아버지는 요나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고, 베드로의 나중 이름이 시몬이라는 의미인 것이다.


즉 이름이라는 것은 그 존재의 정체성이다. 아이폰, 스마트폰, 자동차와 같은 이름들은 다 그 존재의 목적과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바로 이름이다. 그러므로 아담이 동물들에게 이름을 붙였다는 것은 아담의 책무는 <의미를 부여라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그 책무가 후에 하와를 보고, "이는 내 뼈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로다"라고 하와의 정체성에 대한 의미를 부여하게 되는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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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사람을 만드시다 (8)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3. 12. 16. 06:22 Writer : 김홍덕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시고 그 이름을 <아담>이라고 하셨다. 아담이라는 말의 의미는 <"붉다">라는 뜻이다. 이는 흙을 의미하는 말로 <사람>이라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사람은 흙으로 만들어졌고, <사람 = 흙>이라는 말이다. 사람은 흙으로 지으졌고, 또 흙으로 돌아간다.


사람이 죽으면 흙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사람이 <살아있다>라고 할 수 없는 상태는 흙과 같다는 의미인 것이다. 이는 사람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는 영과 정신이 없으지면 죽었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살아있다>고 할 수 있으려면, 흙에 씨앗이 심기워져서 생명이 있는 나무가 되는 것 같이 사람도 하나님의 말씀이 그 안에서 심기워져서 그 씨앗의 이름을 가진 나무와 열매를 낼 수 있을 때 비로서 살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성경은 그 씨앗을 <그리스도>라고 한다.


다시 말해서, 사람은 그 육신을 단련하여 이전과 다른 강한 존재가 되는 것이나, 공부나 예절이라는 겉옷을 입는 것으로 그 정체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의 교회들은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인정 받는 것에 관하여 훈련하고, 노력하고, 성공하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근간이 잘못된 것이다.


기도를 열심히 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고 가르친다. 하지만 기도는 호흡과 같은 것이라 할려고 한다고 되는 것이다. 호흡은 본능이다. 즉 호흡을 해서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어서 호흡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도해서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이라서 기도하는 것이다. 


즉 이는 사람이 기도한다고 하나님의 생명으로 살게 되는 것이 아니라, 흙이 하나님의 말씀의 씨앗을 품어 생명이 되었을 때는 기도할 수 밖에 없는 존재가 된다는 것이다. 군복을 입어 군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군인이라서 군복을 입는 것이듯이 말이다.


또한 세상에서 성공하면 할수록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러한 관점이 현대 기독교 특히 한국 기독교의 절대적 오류라고 생각한다. 단언컨데 세상의 성공과 하나님의 영광은 절대 무관한 것이다. 세상의 성공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면 예수님은 그 당시에 반드시 사람들의 기대와 같이 왕이 되었어야 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의 사람들은 예수를 믿는데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은 농부의 영광과 같다. 다시말해서 전혀 생명이 없는 흙에 씨앗을 심어 열매를 얻는 것과 같이, 사람의 마음 속에 하나님의 말씀을 심어 그 사람이 그리스도의 성품, 곧 하나님의 형상으로 살아가는 삶을 사는 것 그것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다. 그것은 육신의 삶의 모양과는 별다른 상관이 없는 것이다. 있다면 육신의 모든 것이 다 그리스도의 삶을 나타내는 것에 사용되는 것 뿐이다. 육신은 형식이고, 형식은 내용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을 비로서 하나님께서는 사람이라고 하시는 것이다. 육신이 숨쉰다고 다 사람이 아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이다. 그리고 이것이 한 개인에게 있어 <천지창조>이고 이것을 아는 것이 세상이 열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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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사람을 만드시다 (7)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3. 12. 9. 10:49 Writer : 김홍덕

사람들이 하나님을 신앙하는 것은, 대부분의 경우 육신의 문제에 대한 도움을 얻고자 함이 주류를 이룬다. 한마디로 먹고 사는 문제에 관한 것이다. 한편으로 보면 보통의 교회에서 설교 시간에 그런 것을 다루지 않고, 고상하게 하나님을 믿는 것에 대하여 설교하는 것 같지만, 그 뼈대는 늘, <이 세상에서 성공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립시다>이다.


이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하는 것은 그야말로 미명이다. 손바닥으로 하늘 가리기라는 말이다. 정말 이 세상에서 성공하려면 죽지 않아야 한다. 성공이라는 것이 뭔가? 다른 사람 못하는 것을 이루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다 죽는 세상에서 살아 남아야 성공인 것이다. 그게 아니면 결국 다 실패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성공해서 육신이 잘 먹고 잘 살려고 한다. 그리고 그 육신의 범주에서 자녀를 위해 헌신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에 앞서서 사람이 해야 할 일이 있는데, 그것은 <나는 누구인가?>, <사람은 무엇인가?>하는 것이다. 그것이 아니면 모든 것이 다 헛된 것이다.


사람들이 육신의 삶을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그것 밖에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것 외에 다른 것에 관심이 있다면 그럴 수 없다. 그렇다 보니 모든 종교 단체의 설교 또한 결국은 육신의 문제를 얼마나 고상하게 처리할 것인가? 하는 것에 집약되어 있다. 하지만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육신의 삶이 존재하는 목적이다. 그러니까 이 육신에 깃든 자아 정체성을 밝히 아는 것이라는 것이다.


바로 그 자아 정체성에 대한 정의가 <흙으로 사람을 지으사>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사람의 정체성은 위대해지고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흙과 같이 씨앗을 품어 생명을 나타내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이미지를 씨앗과 같이 받아 그리스도의 성품을 나타내는 것이 바로 존재의 목적이라는 말씀인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의 삶이 그렇지 않다. 그저 강해지려 한다. 이 본질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천지창조의 과정을 성경을 통해 말씀하신 것이다. 즉 사람에게 새로운 세계가 열려야 하는 것을 말씀하시고자 하신 것이다. 그 세계는 바로 그리스도의 세계이다. 그렇게 말하면 사람들, 특히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아닌가 하겠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모른다고 까지 하기는 어렵지만 네피림과 같이 혼합된 종교관인 것은 분명하다. 


모든 것을 접어 두고, 더 좋은 건축 자재로 교회를 지어야 하나님이 기뻐하신다고 생각하는 그 가치관, 세상에서 성공할수록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그 가치관, 그것 하나만으로 이미 흙으로 지으진 사람이 아니라, 흙으로 벽돌을 만드는 시날 광야의 사람들과 같은 모습인 것이다. 왜냐하면 세상에서 성공하기 위하여 인간의 본성을 감추고 훈련해서 고상하고 능력있게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훈련과 노력의 과정에 기도와 교회의 강령이 도구와 기준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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