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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와 여자 (1)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4. 1. 18. 08:19 Writer : 김홍덕

남자와 여자는 그 차이가 분명하고, 언제나 어느 곳에서나 주제가 될 법한 이야기이다. 또한 일상적인 언론이나 사람들의 이야기 속에서 유머를 양산하는 주제이기도 하다. <여자의 말에 대한 해석>과 같은 것들이 그런 것이다. 그렇듯 다른 것으로 어려워하고, 그 어려운 것들은 문학이나 유머로 승화시키기도 하지만 기본적이고 원초적인 것은 서로가 서로를 갈망한다는 것이다.


남자들은 언제나 여자에 대한 욕심이 있다. 한번씩 생각해 보면 이 사회의 모든 법이 사람을 보호하는 것 같지만, 알고보면 결국 여자를 보호하는 것을 주 목적으로 한다 싶기도 하다. 그러니까 세상의 모든 법은 남자들이 여자만 보면 자기 유전자를 남기려는 본능에서 여자에게 선택권을 죽, 그런 본능을 통제하는 것에 법의 존재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닌가 싶은 것이다. 


남자와 여자는 절대적 공존 개념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가 없으면 나머지 하나의 개념 마저 사라지는 관계라는 것이다. 남자라는 단어조차 여자라는 존재 때문에 있는 것이다. 여자가 없다면, 남자라는 단어나 말이나 개념 조차 필요 없는 것이다. 그것이 이 둘의 관계이다. 하나님께서 성경에 <남자와 여자>를 만드셨다고 하신 것은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 또한 이런 절대적인 관계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전에 <"하나님께서 왜 사람을 만드셨을까?">라는 생각을 했다. 이 세상과 사람은 전지전능한 하나님의 하나의 놀이나 옵션인 것 같았기 때문이다. 괜히 만들어서 늘 하나님을 속 시끄럽게 하는데, 그럴 줄 알면서 왜 이것을 만드시고 생고생을 하시는가 싶었던 것이다. 내가 그렇게 생각했던 이유는 하나다. 그것은 하나님을 몰라서였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계시는 한 필연적인 것이었고, 그것은 영원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영원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영이시고, 이 세상은 현상계로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역설적으로 접근해 본다면, 사람이 만드는 모든 물건은 다 이유가 있다. 적어도 그것을 만든 사람의 능력을 입증하는 이유라도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세상의 존재 목적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이것은 내용과 형식도 남자와 여자의 관계처럼 하나가 없으면 하나는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형식 없는 내용이 없고(존재해도 없는 것과 같이 의미가 없다), 내용 없는 형식이 없다는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녹일 수 있는 물질은 없는 것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보관될 용기가 없는데 존재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이 세상과 사람을 만드신 것은 어떤 선택이 아니라, 그것은 필연적인 것이었다. 그러므로 어쩌면 이 세상은 하나님이 존재하시는 한 존재할 수 밖에 없는 것일 수도 있다.


나도 죽어본 적이 없기 때문에 천국을 직접 본 적은 없다. (개인적으로 그것을 봤다는 것은 다 거짓이라고 생각한다. 이유는 다음에 한번 밝히도록 하겠다.) 하지만 난 천국이 존재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내가 보고 만지면서 살아가는 이 세상의 내용과 본질이라는 것이 반드시 존재할 것인데, 그것이 눈에 보이지 않기 떄문이다. 즉, 이 세상의 내용이라는 개념이 있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다 형식과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남자를 위하여 베필을 만들었다고 하셨다. 베필이라는 것은 짝이 서로의 모습을 투영하는 존재이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만드신 것은 하나님의 본성이라는 내용이 이 세상이라는 형식으로 표현된 것이다. 사람 역시 하나님의 성품(image)이 사람이라는 존재로 성육신 된 것이다. 이것이 남자와 여자의 관계이다. 즉 남자와 여자라는 서로 다른 존재의 관계성이라는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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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의 갈비뼈로 여자를 만드시다 (4)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4. 1. 17. 13:36 Writer : 김홍덕

세상의 모든 것은 다 <내용과 형식>이라는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그리고 그 둘은 분명한 관계가 있다. 그것은 항상 내용이 먼저라는 것이다. 즉 내용이 먼저 있고, 그 내용이 형식으로 표현이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군복을 입어서 군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군인이라서 군복을 입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세상의 문명이 발달하면서 이것에 역행하는 일들이 많이 일어난다. 그것은 우선 눈에 보이는 것이 형식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리고 그 형식들이 날마다 급변하면서 화려한 자태를 뽐내기 때문이다. 자동차나 스마트폰과 같은 모든 것들은 다 형식이다. 자동하는 <이동>이라는 내용의 형식이고, 스마트폰은 <대화>의 형식인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점점 왜곡되면서 형식이 본질과 내용을 앞서려 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죄>요 <타락>인 것이다. 왜냐하면 생명이라는 것은 그 유전자가 먼저 있고, 그 본성이 드러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짖기 때문에 개가 되는 것이 아니라, 개라서 멍멍 짖는 것이다.


이러한 대 원칙을 가장 많이 위배하고 역행하는 곳이 바로 종교이다. 다시 말해서 사람의 행동을 바꾸면 본질이 바뀔 것이라고 생각하는 그 근간이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기도를 해서 하나님이 들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같은 본성을 가지고 있어서 하나님께서 들으시는 것이다. 주기도문 몇 번 외우면 되가 사해지고, 108배를 몇 번 하면 죄가 사해지는 것이 아니다. 그런 모든 것은 다 행위가 본질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 어리석음의 산물들이다.


성경에서도 <죄>라는 것을 행위에 두지 않는다. 아담이 범죄하였을 때, 하나님께서는 <"네가 무슨 짓을 하였느냐?">라고 물으시지 않았다. <"네가 어디에 있느냐?">라고 물으셨다. 즉 <"네가 누구냐?"> 하는 문제를 물으시는 것이다. 그 <누구>라는 것에 맞게 행동하면 하나님께서는 죄로 보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 <누구>를 그렇게 만드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자가 소를 잡아 먹는 것은 죄가 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사자의 본능이고 그러한 사자의 본능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기 때문에 그런 행동이 비록 살생이라 할찌라도 그것은 죄가 아닌 것이다. 그와 같이 사람의 모든 본능도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고, 사람 안에 성욕이나, 식욕과 같은 본능 있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아실 뿐 아니라, 그것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것으로 인한 행동들이 원죄는 아는 것이다.


이렇듯 모든 것은 어떤 존재가 가지고 있는 내용이라 할 수 있는 본능과 품성이 있고, 그것이 어떤 것으로 나타나는 것을 형식이라고 하고, 그 형식의 총화가 이 세상의 만물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이라는 본질이 표현된 것이다. 그것이 바로 천지창조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천지창조이기 때문에 그 천지창조의 과정을 표현한 모든 말씀 역시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가 세부적으로 표현된 것이고, 또 한편으로 이 천지창조의 과정이 사람을 만드시는 것에서 안식하는 것은 그것이 창조 목적의 전부라는 의미이고. 그러므로 이 천지창조는 결국 하나님의 성품이라는 내용이 인간이라는 형식으로 표현되는 것이 바로 천지창조인 것이다.


그러므로 천지창조는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표현되는 과정인 것이다. 그것은 다르게 표현해서 한 사람이 하나님을 그렇게 인식하는 것이다. 그렇게 된다는 것은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세계가 열린다는 것이고, 그렇게 된다는 것은 그 사람이 이제 하나님의 성품으로 가지고 살아가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의 성품을 가지고 살아가는 존재를 하나님께서는 아들이라고 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의 표준으로, 첫 열매가 되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을 두고 요한 사도는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고 하신 것이다. 즉 하나님의 본성과 의라는 내용이 사람이라는 형식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성경의 근간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여자를 만드시는 과정을 설명하심에 있어, 남자의 갈비뼈에서 여자를 만드셨다고 하신 것이다. 


즉 이것은 하나님께서 어떤 내용이 형식으로 나타나는 것을 설명하시는 것에 대한 말씀이다. 다시말해서 이것은 남자와 여자의 갈비뼈의 차이가 있다는 것이나, 남존여비의 말씀이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하나님께서는 내용이라는 <의>를 가지고 있으면 그 격을 남자의 격으로 보신다는 의미이다. 이것이 바로 아담의 갈비뼈로 하와를 만드셨다고 성경에 기록하신 참 의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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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의 갈비뼈로 여자를 만드시다 (3)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4. 1. 11. 07:20 Writer : 김홍덕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셨다는 것을 간단하게 표현한다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이는 것으로 표현하셨다는 의미이다. 예수님 당시에 사람들이 하나님을 보여 달라고 하는 것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나를 본 자는 하나님을 보았거늘 어찌하여 하나님을 보여 달라고 하느냐?>고 반문 하셨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이라는 의미이다. 더 정확히 아니 아주 정확히 설명한다면 예수님은 하나님이 표현된 것이라는 의미다.


예수님께서 나심에 대하여 요한복음 1장에서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라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말씀은 <로고스>를 말하는 것으로 그것은 "계획, 뜻"과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우리가 잘 아는 '레고'라는 장난감도 같은 어원이다. 그 장난감은 계획을 가지고 만드는 장난감이기 때문이다.



new cage
new cage by psiaki 저작자 표시        <레고는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장난감>



그렇듯 하나님은 보이지 않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는 분(존재)인데, 그 하나님께서 보이는 것으로, 더 정확하게는 보이는 것을 인식할 수 있는 사람에게 인식될 수 있게 나타나시는 사건이 바로 천지창조고, 예수님의 성육신이고, 남자의 뼈가 여자가 되는 사건인 것이다. 이 모든 것을 다른 표현으로 하면, 내용이 형식으로 표현되었다는 의미인 것이다.


천지창조는 하나님을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이 하나님을 인식하게 되어 하나님의 세계를 알게 되는 사건이다.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는 것은 그 사람 안에 하나님의 세계가 시작된 태초가 시작되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태초는 그 시점이 다 다를 수 밖에 없다.(하지만 구원파처럼 그 시점을 자신이 안다는 것은 또 거짓이다. 왜냐하면 이 시간은 크로노스의 시간 개념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 역시 같은 문제이다. 성경에서 땅은 늘 <사람>을 말한다. 물론 예수님께서 요셉의 아들이라는 신분으로 이 땅에 오신 것은 하나님께서 물리적인 이 세상을 만드신 것과 같은 fact이다. 하지만 그것을 믿는 것이 믿음이 아니라, 땅으로 표현되는 사람, 즉 한 개인의 마음 곧 인식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야 비로소 예수님이 그 사람에게 오셨다 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없는 사람은 예수님께서 2,000년 전에 오셨건 언제 오셨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 역시 한 개인의 마음 안에 말씀이 들어와서 그 사람이 그 말씀으로 살아가는 존재, 즉 육신이 되는 사건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과 같은 성품으로 살게 되는 것을 한 개인의 관점에서 볼 때 그 사람이 말씀이 육신이 되는 사건이 되는 것이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그 사람 안에 오시는 사건인 것이다. 예수님께서 오심을 객관적으로 신봉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천지창조나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보이지 않던, 또 알지 못했던 세계가 한 개인에게 열리는 사건인 것이다. 이것은 다 내용이 형식으로 표현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남자의 뼈가 여자가 된 말씀 역시 의가 표현된 것이다.


이와 같이 천지창조나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보이지 않던, 또 알지 못했던 세계가 한 개인에게 열리는 사건인 것이다. 물론 그것은 객관적으로 하나님께서 물리적으로 이 세상을 만드셨고, 예수님께서 2,000년 전에 실재로 오신 것에 대한 의미가 자기 안에 그렇게 열리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즉 객관적인 사실이었다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나에게 의미 있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만드시고 그 끝, 즉 목적을 사람을 만드시는 것에 두셨던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인식되시려 하심인 것이다. 그러니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인식할 수 없는 영이신 하나님을 인식하고, 보게 됨으로 내 안에 하나님의 세계가 열리고, 내 삶이 그리스도와 같이 되는 것이다. 그것이 이 성경의 근간인 것이다. 즉 하나님이라는 내용이 세상이라는, 육신을 가지신 예수님이라는 형식으로 표현된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남자의 뼈를 가지고 여자를 만들었다는 것은, 생물학적으로 남자의 뼈를 가지고 여자를 만들었다는 것을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뼈는 의를 말하는 것이므로, 하나님의 의가 표현되었다는 의미인 것이다. 그러니까 남자는 뼈가 있는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가 있으면 남자가 되는 것이고, 그 의가 표현되는 모든 형식은 여자와 같은 것이다. 이것을 보고 육신의 성별에 대한 구분을 두는 것은 한마디로 성경을 모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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