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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악과 (43) - 선악과는 관점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4. 3. 19. 10:21 Writer : 김홍덕

우리는 간혹 드라마에서 연인 중 남자가 여자에게 자신의 부족한 모습은 감추고 다가가는 경우을 각색한 것을 볼 수 있다. 더욱이 그 이유가 악한 것에 있지 않고, 자기의 연인이 실망하지 않기를 바라고 위하는 마음으로 그러는 장면을 간간히 볼 수 있다. 그 때 우리는 대부분 안타깝게 그 장면을 본다. 그건 옳지 않다고 생각하면서.


선악과는 그렇듯 우리 삶의 전반에 늘 상존하는 문제이다. 연인이든, 가족이든 솔직하게 있는 그대로 말하는 것이 두려운 것은 먼저 말하고 싶지 않은 내용이나 사실에 대하여 자기 스스로 먼저 부끄럽게 여기고 악한 것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선악과는 그런 것이다. 사람이 악해서가 아니라, 사람의 연약함이 어떤 기준 앞에서 악한 것이 되는 것이다. 즉 사람은 그대로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신 존재이다. 그런데 사람이 세상의 기준과 세상에서 배운 자기만의 기준으로 볼 때, 사람의 한 부분이 악한 것이 되는 것이다. 즉 사람이 선하고 악한 것이 아니라, 사람을 선하고 악하게 보는 것이 있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선악과인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있는 그대로를 볼 수 있어야 한다. 심지어 사람이 자랑질하고 교만한 것도 사람이라서 그렇다. 그러므로 그렇게 하는 본성 자체가 악한 것이 아니다. 다만 어떤 것이 선한 것이라고 주장하기 위하여 그렇게 하기 때문에 문제인 것이다. 선을 주장한다는 것은 그 이전에 이미 선한 것과 악한 것을 구분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사람이 화를 내는 것도 사람이라서 그런 것이다. 화가 나는 본성도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필요하다고 생각하셨기 때문에 사람에게 본성으로 주신 것이다. 다만 어떤 일에 화를 낼 것인지가 문제인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화를 내시는 부분에 화를 내어야 하기 때문에 그런 본성이 있는 것이다.


즉, 화를 내는 것 자체가 문제가 되거나 사람의 악함이 아니다. 어떤 일에 그것이 사용되어지는 것인지? 그것이 본질인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의 모든 본성은 하나님께서 목적하신 대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것에 사용되어지면 예수님처럼 성전에서 화를 낼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화내는 그 자체가 악한 것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선악과를 먹은 모습이지만, 세상적 관점, 도덕적 관점에서 보면 그래서는 안될 것 같은 모습이라도 하나님을 나타내기 위하여라면 오히려 그것이 선한 것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화를 내신 것을 두고 화 냈다는 사실 자체로 악한 것으로 볼 수 없는 것도 이 때문이다.


선악과는 어떤 각도에서 보면 과일이 아니라 관점이라고 볼 수 있다. 즉 사람이 선악과를 먹어서 죄인이 된 것이 아니라, 사람을 선하고 악한 것으로 구분하는 시각을 가진 것이 죄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아담과 하와가 먹은 선악과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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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악과 (42) - 선악과와 영지주의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4. 3. 17. 10:56 Writer : 김홍덕

반면에 이와는 달리, 사람의 부끄러움에 대하여 어쩔 수 없는 것이라는 관점을 가지고 있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영지주의다. 그러니까 이 육신의 부끄러움은 감출 수 없는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그 대안으로 육이 아닌 영만 정결하면 그만이라는 생각을 하는 것이 바로 영지주의다.


언뜻 보기에 영지주의는 방탕한 것 같지만, 그렇게만 볼 수는 없다. 사실은 개인이라는 정체성의 성결, 그러니까 인간이라는 부끄러움을 감추어야 한다는 것에는 동의하지만, 그것이 불가능하니 그저 영(靈)만 경건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아예 부끄러운 육신은 구원의 대상도, 또한 하나님이 관심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영지주의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보는 관점 역시, 예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십자가가 별 게 아니었다는 식의 생각을 한다. 하지만 이런 생각의 이면에 사람의 육신이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영혼이 구원을 받는 것이기 때문에 영만 성결하면 되고, 고백만 있으면 되지 육신의 삶이 경건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지주의와 율법주의는 어떻게 보면 뿌리는 같은데, 반응이 다른 것이다. 즉, 사람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것에는 동의하는데, 율법주의는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육신이 각종 율법을 지켜 행함으로 인간의 부끄러움을 가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고, 영지주의는 인간의 구원이 육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영혼에 국한된 것으로 규정하는 차이만 있다는 것이다.


즉, 영지주의는 사람의 육신은 악한 것으로 반면에 영은 선한 것으로 분명하게 구분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기준은 당연히 육신의 부끄러움에 대한 기준이다. 즉 그것을 악한 것으로 규정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시도는 역시 사람을 선과 악으로 분리하여 규정하는 시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즉, 선악과를 먹어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선악과를 먹은 사람은 어떤 형태든 사람의 육신에 대한 판단을 한다. 그리고 그 판단은 동일하게 육신을 악한 것으로 규정한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그 악한 것을 제하기 위하여 성경을 행동에 대한 지침으로 받아서 그것을 지키면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어떤 부류는 악한 것을 포기해 버리는 것이다. 즉, 영지주의나 율법주의나 동일하게 육신을 부정하고 악한 것으로 보는 것은 동일한 것이다.


그러므로 선악과는 사람의 육신을 악한 것으로 보고 또한 어떤 선한 기준을 정립한 다음, 그것을 선으로 규정하고 끊임없이 그것에 도전하려 한다. 그 도전에는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부와 명예에서부터 종교적인 신비함이나 경건함까지 다양하다. 그런 모든 것은 율법주의고, 반면에 육신은 구원의 대상이나 하나님의 관심의 대상이 아니라고 포기하면 영지주의가 되는 것이다.


이런 모든 반응들은 하나님께서 그 성품을 나타내시기 위하여 만드신 육신으로 삶을 사는 인간에 대하여 사람들이 맘대로 규정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규정하는 이유는 사람들이 선을 추구하여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에서 비롯되었다. 그것을 뱀은 하나님과 같이 되는 것이라고 꼬였던 것이다. 즉 사람이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마음 때문에 이 육신을 악한 것으로 규정하고, 자신들이 정한 선의 기준에 도달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사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 육신의 삶을 그런 것에 사용하게 두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이 육신의 삶을 주신 것은 이 육신의 삶의 어떤 부분은 악하고 반대로 또 육신이 어떻게 되어야 선해진다는 생각을 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이 삶 자체를 감사함으로 받고, 아담을 보시고 심히 좋았다고 하신 하나님과 같이 이 삶을 기쁘게 살아가는 것이 창조의 목적인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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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악과 (41) - 사람 + something = 천국 ??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4. 3. 15. 11:31 Writer : 김홍덕

율법은 비단 교회의 이야기 만은 아니다. 사람들의 교육과 문화 안에 있는 도덕과 예절 그리고 교양과 같은 것들도 다 율법과 같은 것이다. 그러니까 율법이라는 것은 모세로 부터 시작된 하나님의 계율이 아니라, 사람의 행동을 통제하고 관리하고 절제함으로서 사람이 더 훌륭해진다고 생각하는 것에서 비롯된 모든 사상과 철학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것은 기독교가 아닌 다른 종교나 학문에서도 얼마든지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연관성이 있다는 것은 적지 않게 신앙이 세상과 결속하는 단서가 되는 것이다. 이런 것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교회를 예로 볼 때, 교회를 더 아름답고 화려하게 지으면 지을수록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고 생각하는 그 믿음이나 세상에서 성공하면 대우하는 것은 같은 것이다.


이렇게 교회가 또한 하나님을 믿는 신앙 안에 세상적인 풍조가 자연스럽게 스며들 수 있는 것은 율법주의의 근간이 함께 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사람의 부끄러움을 감추는 것에 있어서 색깔은 다르지만 같은 메커니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즉 세상은 성공하면 사람이라는 부끄러움이 감추어진다고 생각하고, 교회는 성경을 행동으로 잘 지켜내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러한 것이 공통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둘 다가 사람에게 뭔가를 덧입히고 더하면 사람의 부끄러움이 감추어진다고 생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만드신 사람으로서는 안되고 그것에 무엇인가를 더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선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의 솔직한 모습으로는 안되고, 사람이 종교적인 행동을 해야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고 여긴다는 것이다. 사실 알고 보면 오늘날 교회가 재정적으로 독립성을 유지하면서 유지할 수 있는 근간이 여기에 있다. 그러니까 <사람 + Something = 천국>이라는 공식을 선(善)으로 설정하고 교회는 그 something의 부산물들을 장사하고 있는 것과 다름이 없다고도 볼 수 있다.


즉 사람이 하나님께 기도(something)해야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또 그래야만 천국에 갈 수 있고, 또 전도(something)해야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그래서 천국가고, 또 헌금(something)해야 천국가서 잘 살고, 청소(something)해야 하나님이 기뻐하시니 와서 청소하라는 이 모든 것이 다 그런 것이고, 이것이 다 율법주의인 것이다.


하지만 성경은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다. 무화과 나뭇잎을 걸치지 않은 사람을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심히 좋다고 하셨지, 무화과 나뭇잎으로 가린 인간은 에덴동산에서 쫓겨 났다, 다시 말해서 천국에서 쫓겨 났다는 것이다. 그리고 성경에 나오는 모든 명령은 "하라(Do)"고 하신 것이 아니다. 어떤 생명이 되면 그냥 하게 되는 것들인 것이다. 


그것은 한마디로 "사람아 네가 어떤 존재가 되라"고 하시는 것이다. 그것이면 성경의 모든 것을 다 이루고, 다 지켜 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천국도 그곳이 진정 아버지 하나님의 나라라면 아들은 언제든지 들락날락 할 수 있고, 그곳에서 일하지 않아도 되고, 벌어논 것 없고 기여하는 바 없어도 무위도식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들인 것이다. 그러므로 아들이기만 하면 되는 것이지, 천국에서 어떠하려면 뭘 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은 아들의 세계를 모르는 것이다. 그것은 종의 세계인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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