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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악과 (10) - 아담이 부끄러워 한 것은?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4. 2. 16. 19:57 Writer : 김홍덕

선악과를 먹은 아담은 뭐가 부끄러웠을까? 하와는 자기 아내이고, 에덴동산에는 둘 밖에 없는데 그게 그렇게 부끄러운 것일까? 결혼한 부부에게 있어 벗은 모습이 부끄러운 것일까? 아니면 하나님께서 자신의 벗은 모습을 본다는 것이 부끄러웠다는 것일까? 정말 그럴까? 아니다. 적어도 결혼해본 사람은 이게 그렇게까지 부끄러운 것은 아님을 알 것이다. 게다가 보는 사람도 없는데 말이다.


아담이 느낀 부끄러움은 육신의 벌거벗음에 대한 것이 아니다. 초라한 인간의 모습이 부끄러웠다는 것이다. 뱀이 선악과를 먹으면 사람이 하나님과 같이 된다고 했다. 바로 그래서 부끄러웠던 것이다. 이것이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아담이 보기에 자신의 모습이 너무 보잘 것이 없어 보였다는 것이다. 하나님에 비해서 말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낯을 피해서 숨은 것이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한 신인데 비하여 사람은 그의 피조물이고, 하나님은 영이신지라 고통도 피곤함도 화장실 가는 것도 없고 죽음도 없는데, 사람(아담이라는 말의 뜻은 <사람>이다.)은 자기의 모습을 보니, 너무 연약하고 보잘 것 없어서 부끄럽다고 여기게 되었다는 것이다. 선악과를 먹고 나니 말이다. 이것이 부끄러워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에 대하여 조치를 취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모습이 하나님과 같지 않다는 것에 두려웠다는 것이다.


사람이 스스로의 모습을 보면, 자기 안에서 많은 탐욕의 생각과 성적인 욕망과, 또 뭔가를 하려하면 피곤해서 아파서 그리고 까먹어서 못하는 것이 부지기수인데, 그런 스스로의 모습을 보니 부끄럽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모습을 없애고 좀 더 도덕적인 인간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하고 그래야만 제대로 된 인간이라고 여기는 선과 악의 기준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선악과를 먹은 현상인 것이다.


실재로 이후에 나오는 모든 성경의 기록들 중에 사람이 범하는 모든 죄는 이와 같이 사람이 하나님과 같이 되려 하는 것이다. 그래서 흙으로 만들어진 사람이 흙을 구워서 벽돌을 만들어 하늘에 이르려 했던 것이다. 이것은 바로 사람이 흙 자체로는 악하고, 좀 더 강하게 만들면 하늘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벨탑 사건의 핵심이고 이것이 바로 선악과의 결과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선악을 아는 것을 원하지 않으신 것이다. 


사람에게는 본능이라는 것이 있다. 식욕, 성욕, 명예욕과 같은 것은 생존 본능이고 기본적인 욕구들이다. 그런데 이런 것은 나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것을 절제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가르친다. 이것이 바로 아담이 벗은 것을 부끄러워했다는 그 부끄러움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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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악과 (9) - 선악과의 현상, 부끄러움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4. 2. 16. 13:23 Writer : 김홍덕

벗었다는 것에 대하여, 하나님이나 선악과 먹기 전의 아담과 선악과를 먹은 다음의 아담은 입장 차이가 있다. 즉, 하나님과 선악과를 먹기 전의 아담은 벗었으나 부끄러워 하지 않았다. 이것은 사람의 외목에 대하여 어떤 의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선악과를 먹은 아담의 태도는 달랐다.


선악과를 먹은 아담은 우선은 벗었다는 것을 부끄러워했다.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뭐가 잘못되었다는 것은 다음에 이야기하더라도, 우선은 뭔가에 대하여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했다는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가장 핵심 중의 핵심이다. 그리고 다음으로는 부끄러움을 가리려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뭇잎으로 옷을 해 입었다. 그리고 선악과를 먹은 아담의 행동은 그것에서 그치지 않았다.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숨었다. 그리고 두려워했다.


이것이 선악과의 효과(?)이고 실체이다. 그러므로 선악과는 단순히 하나님의 명령에 불복종한 사건이 아니다. 이로 인해서 불복종한 마음이 사람에게 생겼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뱀이 유혹할 때 "하나님처럼"이라는 단서가 있었다. 즉 선과 악을 안다는 것을 하나님처럼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반역과 같은 것이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음으로 인하여 아담은 이전과 다른 존재가 되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사람의 모습에 대하여 판단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핵심이다.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시고 그 모습을 보셨을 때, 심히 좋았다고 했다. 그때 아담이 어떤 명품 옷을 입고 있었던가? 그것이 아니었다. 그냥 벗은 몸 그대로였다.


이것은 단순히 육신의 의복의 이야기가 아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의복은 그 신분을 말하는 것이다. 이는 성경의 전반에 있는 관점이고, 유대인들의 가치관이기도 하다.(성경은 유대인이 기록했다) 다시 말해서 벗은 것이 부끄러웠다는 것은, 사람이 사람 그대로의 상태로 있는 것이 부끄럽고 잘못된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지으시고 심히 좋다고 하셨는데, 사람이 사람 그대로 있는 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 그대로의 모습은 어떤 것인가?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 먼저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만드셨다고 하셨다. 여기서 형상이라는 것은 이미지라고 앞에서 포스트 한 바가 있다. 이미지는 내용이고 본질인 것다. 어머니라는 이미지가 있고, 각자의 어머니가 집에 있는 것이라는 것이다. 각 가정에 있는 모든 어머니는 어머니라는 이미지의 실체인 것이다.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 (창세기) 천지창조 여섯째 날 (7) - 하나님의 형상 = 이미지(image)



그러므로 사람은 하나님의 이미지가 형상화된 존재라는 것이다. 우리가 자신의 어머니를 통하여 어머니라는 이미지를 알게 되듯, 사람이라는 이 존재를 통하여 하나님이라는 이미지이자 인간 존재의 본질적 목적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바로 그런 존재가 인간이라는 것이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람의 정체성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인가, 곧 하나님이라는 본질을 표현하는 인간은 굳이 옷이 필요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육신의 의복이 필요없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인간이라는 그 본질 이외에 다른 것을 입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인간이라는 본질 이외에 '사람이 사람 구실을 하려면 예의가 있어야 한다.', '사람이 사람처럼 살려면 돈이 있어야 한다.'와 같이 <인간 + Something>이라는 구조를 선으로 보고 이것을 추구하고, 이것에 반하면 악이라고 정의하면서 역사를 이끌어 온 것이다. 선악과를 먹은 아담이 벗은 것을 부끄러워했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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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ere You At?
Where You At? by godserv 저작자 표시비영리



선악과를 먹은 아담에게 하나님께서 하신 질문은 아주 중요한 문제일 수 있다. 우리가 일상에서 어떤 사람의 잘못을 꾸중할 때, 기본적인 관심사는 "Do"이다. 다시 말해서 "무슨 짓을 했느냐?"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아담 역시 먹지말라고 한 것을 먹은 나쁜 행동을 했다. 그런데 하나님의 질문은, <"네가 어디에 있느냐?">이다.


아담이 숨었기에 그렇게 물으셨다고 하기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너무 무한하다. 당신이 창조한 아담이 얼마나 넓은지는 모르지만 에덴 동산 어디에 숨었다고 못 찾는다고 할 수 있겠는가?  적어도 하나님께서 아담이 어디 있는지 모를 분은 아니라는 것에는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데, 왜 질문이 "어디에 있느냐?"였을까?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물으시는 질문 속의 "어디"라는 것이 장소의 시각인가? 그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아담이 지금 나무 뒤에 있느냐? 아니면 나무 위에 있느냐? 하는 것과 같은 장소(place)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아담에게 아담이 있어야 할 자리에 있느냐? 하는 것을 물으시는 것이다.


이 하나님의 질문을 이해한다는 것은 어쩌면 성경의 기본적인 관점을 이애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성경의 말씀이 행위에 관한 것이거나, 현상계에 관한 말씀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천지창조가 이 현상계의 창조과정을 설명하기 위하여 기록한 말씀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유대인의 왕이라는 것이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의 왕이라는 것이 아니듯이 말이다.


성경은 행위 규범에 관한 말씀이 아니라 존재 규범에 관한 말씀이고, 이 세상의 이치를 설명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이 세상으로 표현된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세계를 설명하기 위한 것이고, 이 땅 위의 나라들을 설명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설명하기 위하여 이 땅에 나라들이 있는 것이며, 예수 믿는 사람이 어떻게 행동하라고 가르치신 것이 아니라, 그 안에 하나님의 성품이 있으면 어떤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라는 알지 못하면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하신 질문은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비밀 중의 비밀에 속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선악과를 먹는 것은 어떤 행동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정체성의 문제라는 것을 말씀하시고 계신다는 것이다. 즉 선악을 알게되는 나무의 열매를 먹어 그것과 같은 상태가 된 존재, 즉 선악을 알게 된 상태가 문제가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물으신 질문의 핵심인 것이다.


즉, 선악과를 먹음으로 벌거벗은 것이 부끄럽지 않았던 상태가 아니라, 그것이 부끄러운 상태 곧 잘못된 것이고 악한 것이라고 판단하게 된 아담의 상태를 물으시는 것이라는 것이다. 먹지말라고 한 것을 어긴 행동에 관한 질물이 아니라, 지금 너의 정체성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창세기 3장(7~11절)에 나오는 하나님과 아담의 대화는 이를 아주 분명하게 말해주고 있다. 아담은 '하나님께서 어디에 있느냐?'라고 묻자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라고 했다. 부끄러워서 옷을 해 입었으면 된 것일텐데, 그것이 왜 두려운 상태라는 것인가? 이는 마치 길 잃어버린 아이와 같은 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의 정체성이 상실된 두려움을 아담이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누가 너의 벗을 것을 고하였느냐?"라고 다시 물으시면서, "네가 먹지말라고 한 실과를 먹었느냐?"하신다. 다시말해서, 아담이 벗은 것을 부끄러워하고, 두려워하는 이유가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를 먹음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분명하게 말씀하시고 계신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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