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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악과 (26) - 사람은 나눌 수 없는 존재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4. 2. 28. 15:42 Writer : 김홍덕

사람이 가진 연약함이라는 것은 사람이 어떤 것은 취하고 어떤 것은 배제하려는 이분법적 사고의 결과물이다. 그런 이분법적 사고는 당연히 선악과에서 비롯되었다. 그렇다면 만약 그런 이분법적 사고가 없다면, 사람들이 통상적으로 감추고 싶어 하는 인간의 모습이 연약하다는 관념도 뿌리가 이분법적 사고와 선악과에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나와 같이 일하는 사람이 인도에 출장을 갔는데, 나름 괜찮은 레스토랑에 갔는데, 사람들이 손으로 음식을 먹는 것을 보고 구역질을 할 번 했었다고 했다. 우리의 관점에서는 터무니 없이 비위생적인데 인도 사람들 적어도 그 식당의 사람들에게 손으로 음식을 먹는 것은 아무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스스로 감추고 싶어하고, 또 사람이 스스로 연약하고, 그래서는 안될 것 같은 본성들이 정말로 연약하고 부정한 것이라 이름을 메기는 것이 적당한가 하는 기본적인 질문부터 해 봐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육신을 가진 사람의 모습이 보기에 심히 좋았는데, 사람 특히 선악과 이후의 사람들은 그것을 추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즉 사람의 모습은 하나 인데 관점은 두 가지라는 것이다.


즉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연약하다고 생각하고 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본성이 과연 추한 것인가? 하는 문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선악과 이전에는 그것을 부끄러워하지도 않았고, 하나님도 너무나 좋았다고 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부끄럽게 여기는 것 보다 먼저 있었기도 했다. 


하지만 사람에 대한 관점을 누가 가질 수 있느냐? 하는 문제에 집중해 본다면, 사람을 누가 만드셨는가? 하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사람은 하나님께서 만드셨기 때문에 누가 뭐라 해도 하나님의 관점에서 정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창조물이나 내가 다스릴 존재에 대한 정의는 그 주인이 내린다는 것이다. 그것은 이견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스티븐 잡스가 스마트폰을 만들고 이름을 <아이폰>이라고 명명했다. 이것에 대하여 세상의 누구도 이의를 달 수 없다. 그가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단지 이름을 붙이는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기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부여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사람의 본성에 대하여 어떤 관점을 가지셨는가? 하는 문제는 동떨어진 문제에 논평을 하듯이 정의를 내리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이 선악의 관점, 이분법적 관점에서 부정하게 여기는 사람의 모습을 하나님께서는 단순히 선한 것이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하나님께 선한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 그것은 하나님께는 선하고 귀한 것이라는 의미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선악과의 관점으로 바라보는 사람의 본성과 모습은 원래 악하거나 연약한 것이 아니라, 사람을 지으신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너무 귀하고, 좋고, 선한 것이고, 또 하나님께 있어서도 그런 의미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사람이 하나님이라는 이미지가 형상화 된 존재라는 측면에서 이 사람은 하나님의 일부이고 하나님의 한 모습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 사람의 본성을 악한 것으로 규정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악한 존재로 보는 것과 같은 것이다.


즉, 사람은 어떤 부분은 악하고 어떤 부분은 선한 그런 존재가 아니라, 존재하는 전부, 사람이라는 정체성 전부, 그 안에 어떤 것이 들어 있고, 선악과를 먹은 관점으로 볼 때, 그것이 어떻게 비쳐지더라도 사람의 모든 모습은 하나님의 이미지가 형상화된 존재로 그 정체성의 일부를 분리하거나 나누어서 선하고 악한 것으로 규정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이다. 만약 사람의 본성을 선한 것과 악한 것으로 나누는 관점이 있다면 그냥 그런 관점이 있을 뿐 사람은 절대로 그런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즉, 사람은 선하고 악한 것으로 나눌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을 나눈다면 그렇게 나누는 시각만 있을 뿐, 사람은 부정하지 않다는 것이다. 사람에게 악한 것이 있다면 오직 하나, 바로 그것, 사람을 선한 것과 악한 것으로 나누어 보는 그 관점만이 사람이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악인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을 찾아온 젊은 관원이 예수님을 보고 "선한 선생이여"라고 했을 때, 예수님께서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하느냐?"라고 반문하셨는데, 이것은 예수님이 선한 분이냐 아니냐에 대한 답변이 아니라, '네가 누군데 사람을 선하다 악하다 하느나?'하는 반문인 것이다. 그러시면서 이어진 예수님의 말씀이 "오직 하나님 한분만 선하다"고 하신 것이다. 그러니까, 선과 악에 대한 기준과 판단은 하나님께만 있는 것인데, '왜 네 안에 그것을 판단하는 기준을 가지고 있느냐?'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그 본성의 모든 것이 다 하나님께서 지으실 때 목적대로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하는 존재이기에, 그 어느 하나를 나누어서 부정하게 여겨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것을 부정하게 여기는 것은 단 한 가지 사람이 부정해서가 아니라, 사람을 보는 관점이 부정해서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색안경 때문이라는 것이다. 선악과라는 색안경 때문일 뿐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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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사람이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라는 것은 어떤 것인가?' 라는 문제가 있을 수 있다. 혼자 조용히 인정하는 것이야 뭐 별 문제가 없겠지만, 인간의 욕망을 마음껏 표현하고 사는 것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란 말인가?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오히려 율법의 무화과 나뭇잎으로 사람의 부끄러움을 감추는 것 보다 더 많은 문제를 야기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아주 중요한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을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창조하고 방치하였는가? 하는 문제가 바로 그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선악과와 관련하여 가장 궁금한 문제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것은 반드시 자신의 것으로 알고 넘어가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또 한 가지는, 우리는 늘 자신의 욕구를 발산하려는 마음과 그것을 절제하는 사이에서 외줄 타기를 하고 있는 인생들이기에 성경을 나의 이야기로 받아서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 지금까지 내 마음대로 하고 싶은 마음을 겨우 참고 살고 있는데, 그것을 참는 것이 하나님께 범죄하는 것이라고 이야기 해 간다면, 그것은 사회를 혼란하게 하는 면죄부 같은 것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이것이 바로 영지주의의 뿌리이기도 하다)


이제 이러한 문제들에 대하여 하나씩 이야기 해 보기로 하자. 먼저는 사람이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한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하여 이야기 해 보면, 이는 어떤 면에서는 별로 어려운 것이 아닐 수 있다. '왜 하나님께서 알면서 선악과를 두셨는가?' 하는 것이나, '본능 표출의 자유'라는 쟁점에 비해서 보면 그렇다. 하지만 그렇다고 쉬운 것은 아니다. 이때까지 사람들이 이것을 몰라서 자신을 복종시키듯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 사람이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한다는 것은 말 그대로 사람의 모습을 인정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 말이 쉽게 자신의 것의 될 수 있느냐? 하면 그것은 그렇지 않다. 역설적으로 이것은 노아의 방주에 왜 부정한 짐승도 태웠는가? 하는 것과 연결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노아의 방주에 왜 부정한 짐승을 태웠는지를 모른다면, 사람을 사람으로 인정하는 것은 어렵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을 사람으로 인정한다는 것은 노아의 방주에 부정한 짐승을 태운 것과 연결이 되어 있다는 것은 물론 하나님께서는 선악과가 문제가 될 줄 몰랐을까? 아니면 그것을 알면서 왜 만들었을까? 하는 문제와도 당연히 연결되어 있고, 거의 기본적이고 필연적으로 이런 문제는 <영지주의>와도 연결되어 있으며, 교회가 어떤 공동체인가? 하는 문제까지 연결된 종합적인 관점의 시작인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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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예수님을 통한 구원의 역사는 이런 죽음에서 사람을 살리는 구원인 것이다. 생물학적, 의학적 죽음에서 살리는 것이 아니라. 즉, 예수님의 구속의 역사와 십자가는 사람으로 하여금 사람이 원래 하나님께서 지으신 목적 안으로 들어가도록 하시기 위하여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인 것이다.


<죄>라는 것의 어원은 '하마티어'이다. 이것은 '과녁을 벗어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즉 자리를 벗어난 것이다. 이 자리는 지리적 좌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정체성의 자리, 좀 이해를 돕는다면 '학생이 학생다워야지?'할 때 그 자리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보시는 사람의 죄는 어떤 행동에 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래 가지셨던 창조 목적의 자리에 사람이 있느냐?, 아니냐?의 문제인 것이다. 그래서 범죄한 아담에게 가셔서 "네가 어디에 있느냐?"라고 물으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스스로 선하고 악한 것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사람의 정체성을 이분법적으로 나누어서 사람의 어떤 요소들을 악한 것으로 분리하고, 그것을 정죄하고 개조하려는 것은 창조주에 대한 명백한 반역인 것이다. 그것이 죄고 그것이 죽음 가운데 있는 것이다. 바로 그 상태에서 원래 하나님께서 목적하신 사람의 자리로 사람이 돌아오게 하시기 위하여 오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다. 사람의 연약함과 추함, 즉 사람이 선과 악의 기준으로 판단하는 사람의 모습을 가지고는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없다는 그 기준 때문에 죄인이 되셔서 죽으셨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예수님은 그것 때문에 죽으신다는 것을 아시면서도 그것을 보여주심으로 말미암아 그 기사를 보는 모든 사람들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이 자기의 모습이라는 것을 볼 수 있게 하셨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는 죽으시면서 까지 당신이 가지셨던 그 육신을 가진 인생이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셨다는 것이다. 이는 예수님께서 심문 받으시는 과정에서도 단호하게 보여주셨는데,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행적에 대하여 송사를 했지만 그것에 대하여는 일언 반구도 하지 않으셨다. '성전을 사흘 만에 짖는다더라' 등등 그런 행적에 관한 송사는 일절 대답 않으시다가,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말하라(마 26:63)"는 심문에는 "네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마 26:64)"라고 답하시고,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마 27:11)"라고 묻는 빌라도의 말에, "네 말이 옳도다(마 27:11)이라고 답하셔서 죽음을 자초하셨다.


즉, 다른 많은 송사들은 아무리 인정하고 사실이 되어도 죽을 죄는 아니지만, 단 두 가지 죽을 수 밖에 없는 두 가지 송사에만 그렇다고 답을 하신 것이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이나 로마인들이 볼 때, 예수님의 모습은 절대로 하나님의 아들이나 왕이 될 수 없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는 그 보잘 것 없는 모습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고, 바로 유대인의 왕이었기 때문에, 아무리 그 말을 하면 죽는다고 해도 그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시려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셨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인 것이다. 선악의 기준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유대인이나 로마인들의 눈에는 도저히 왕이나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없는 이 초라한 인간의 모습, 그들의 관점에서 보면 십자가에 못 박아서 죽여야 하는 그런 인간의 모습,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유대인의 왕이 되는 모습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직접 그 초라한 사람의 모습으로 오셔서 육신을 가진 인생에게 가장 중요한 목숨을 바쳐서 그것을 보여주신 은혜라는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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