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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 경제타운

Category : 김집사의 뜰/복음 담론 Date : 2014. 2. 19. 06:16 Writer : 김홍덕

어느 날 창조경제타운에 올린 나의 작은 아이디어가 생활에 몇 가지 변화를 가져왔다. 최근 2주 내 3군데의 언론과 인터뷰가 있었다. 신문과 라디오 그리고 어제는 월간 중앙까지......사실 내 아이디어는 별게 아니다. 그런데 이제는 나의 사는 이야기까지 뉴스가 되려 하고 있다. 어느 정도는 예상한 일이었지만, 막상 경험해보니 생소한 일임에는 분명하다. 그리고 좋은 일은 좋은 일이다.




창조경제타운 홈페이지




이것이 나에게 의미를 주고 있는 것은 작아 보이지만 나의 생각에 변화가 있었고, 그 생각의 결과 혹은 연장선 상에서 일어난 일이 아닌가 하여 이 일이 흔히 말하는 대박이 나는 일이 아니라고 해도 내 삶에 있어 교훈이 되고 긍정적인 의미가 있다고 생각이 된다.


나는 예전에는 <하면 된다>라는 것을 믿지 않았다. 종교적인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께서 다 하시고 나는 그것에 은혜로 포함되어야만 뭔가 이루어지는 것이지 사람이 한다고 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고, 그냥 사회인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도 비슷하게 뭔가 돈도 준비되고 여건이 조성되어야 비로서 내가 뭔가 할 수 있다고 믿었었다.


하지만 어느 날, 돈 빼고는 나보다 가진 것이 없는 한 사람을 보았다. 조그마한 회사 하나 운영하는 것으로 사람들에게 훈장 노릇하고 자신이 선생인 듯 착각하는 한 사람을 본 것이다. 나는 얼마간 그 사람의 삶을 지켜 봤다. 직원들은 그의 훈장 노릇에 피곤해 하지만 아랑곳 하지 않는 그였지만, 단 한 가지 돈에 관해서는 나름 열심이었다. 문제는 거저 열심이기만 했지만......


그의 삶을 보며 나는 '다소 착각과 환상 속에 살지만 그래도 저렇게 열심히 하는구나! 그런데 나는 이때까지 뭐했나?'하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 날 이후 나는 당장 눈 앞에 있는 일들을 할 수 있는 대로 하려 했다. 그래서 머리 속에 있던 아이디어를 특허로 출원해야지 하다 남들이 제품화 하는 것을 몇 차례 본 기억을 교훈 삼아 마침 그 때 TV에서 홍보하는 <창조경제타운> 사이트에 내 아이디어를 올린 것이었다.


그리고 뭔가 투철한 마음이나, 기억에 남는 열정을 가졌던 것 같지는 않지만, 일이 진행되는 동안 하나씩 그때 그때 해야 할 것을 하려 했던 것 같다. 무엇보다 아이디어를 제품으로 만들 회사를 찾는 일에 그러했다. 그건 지금에 생각해 보면 참 어려운 일이었고, 영업보다 힘든 일이었는데, 그냥 그 순간 할 일은 그것이라 여기고 하나씩 했었다. 한 회사로부터 1억 가까운 투자를 유치하는 것이 쉬운 일인가? 그냥 단순한 아이디어 하나로 말이다.


그렇게 그냥 닥친 순간이 요구하는 것을 하나 하나 하다 보니 이제 특허 기술 이전에 대한 협약도 마치고 제품 개발 단계에 진입했고, 이런 케이스가 정부가 기획한 창조경제타운의 취지에 맞을 뿐 아니라, 제 1호 케이스가 되어 작은 부분이지만 국가적인 주목을 받고 있다.


생각해보면 이 세상에 대하여 사사로이 늘 불만도 많고, 작은 것을 바로잡으려고 신고하고 항의하던 나의 삶이었다. 그러다 이 세상은 내가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순종 하는 것이라는 것을 깊이 깨달은 것이 나에게 큰 변화고 교훈이었다. 내가 그렇게 이 세상에 순종 해야 된다고 생각하게 된 것은, 이 세상은 이미 육신을 가진 내가 살려고 하면 수명이 닿는 동안 살 수 있게 하나님께서 다 주신 상태이므로, 내가 하나님께서 언제 주시나 기도하고 바라기만 하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아니 그것은 오히려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이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내 육신의 삶에 필요한 것들을 제공해 주시기를 기다리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하나님께서 주신 삶과 그 삶의 터전인 이 세상에 순종하면 된다. 왜냐하면 공중 나는 새도 다 먹이시는 하나님이시기에, 정신 차리고 보면 육신으로 사는 것은 얼마든지 살 수 있게 이미 다 주신 상태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필요한 것이 있다면, 세상을 바꾸려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조성한 삶에 순종하고 또한 그렇게 순종하며 살 수 있는 세상과 삶이 있음에 감사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오히려 세상과 삶을 변화시켰다. 이것은 변화된 신앙관의 결과이다. 


이전에는 이 세상을 그저 종살이나 할 수 없어 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이 세상은 도화지다. 좀 깊이 있게 말해 본다면 사람의 연약함과 그 연약함으로 힘들게 살아야 하는 삶과 그 터전인 세상은 도화지라는 것이다. 여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이미 조성해 놓으신 세상에 그 일부로 육신으로 하는 삶은 주신 사회적 체계, 국가적인 의와 법에 맞추어 살면 되게 되어 있다.


하나님이 주신 성품 곧, 그리스도와 같은 삶을 사는 것 또한 이것이다. 변화를 주창해서 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삶에는 이미 필요한 것 주셨고, 이 삶이 억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종살이 같아 보여도 이것은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터전이다. 이런 모든 것을 주셨음을 믿고 순종하고 살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나는 지난 몇달간 그저 내 앞에 닥친 일들을 하나씩 하는 것 밖에 하지 않았다. 그것도 100%도 아니다. 그냥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은 했다. 이 세상은 하면 되도록 하나님께서 주심을 믿고, 순간 순간에 순종했던 것이다. 그것이 기대하지 않았던 결과를 낳았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깨달았던 것이 나에게 체휼되는 시간들이 흘러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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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이 선악과 문제의 핵심은 결국, 사람이 자기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느냐? 아니면 하나님께서 '네가 어디에 있느냐?' 물으시는 자리, 곧 인간 본연의 정체성을 떠난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으시는 자리에 있느냐?의 문제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사람이 하나님이 사람에게 매겨 놓으신 사람의 자리가 있는데, 적어도 그 자리가 스스로 선하고 악한 것을 판단하는 자리는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고자 하시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선악과의 문제라는 것이다.


사람은 본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 곧 하나님의 이미지요 성품을 표현하시기 위한 형식이고, 그 표현에 가장 적합한 존재가 바로 육신이라는 형식을 입은 사람이라 생각하셨기에 그렇게 창조하셨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이 그 육신을 부끄러워 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통하여 표현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성품을 부인하는 것이고, 그것은 하나님께 반항하는 것이며, 또한 창조의 목적과 인간의 정체성 자체를 부인하는 것이라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사람이라는 것을 부인하고 부끄러워 하는 것이 왜 생겼는가? 하면 그것이 바로 사람이 선하고 악한 것을 스스로 판단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이 바로 에덴동산에 나오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와 관련된 말씀이라는 것이다. 역설적으로 본다면 사람이 사람이라서 부끄러워하는 것이 있다는 것이 바로 선악과를 먹은 상태라는 말씀인 것이다.


사람은 기본적으로 연약하다. 동물의 세계로 본다고 해도 육체의 능력이 상위권이라고 할 수 없다. 힘이나 속도 등 모든 면에서, 그리고 물 속이나 공중에는 아예 접근이 안된다. 하지만 이 모든 것 보다 사람이 부끄럽게 여기는 것은 본능에 관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본능적인 행동을 비난한다는 것이다. 자기도 그런 본능이 있는 육신을 가진 존재이면서 말이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예수님이 육신으로 오셨다는 것을 믿을 수 없는 것이다. 어떻게 육신을 가진 사람이 물 위를 걷고, 죽은 뒤에 살아나느냐? 하는 관점이 그것이다. 하지만 요한 사도는 예수께서 육신으로 오신 것을 부인하는 것은 적그리스도라고 분명히 말했고,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오신 것을 부정하는 것을 영지주의라고 하며 이것은 초대 교회 시절 가장 심각한 신앙적 문제였었다.


예수님께서 기적을 보이시고, 또한 죽음에서 살아나신 것도 하나님의 천지창조와 같은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 분명히 예수님께서는 물 위를 걷고,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오천명을 먹이고 죽음에서 부활하셨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사람에게 그것을 따라 하라고 그것을 보이신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이는 천지창조가 물리적인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세계가 열리는 것에 관한 것을 말씀하시기 위하여 세상을 창조하신 것처럼, 예수님의 기적 역시 하나님께서 사람의 정체성을 설명하기 위하여 보이신 것이라는 것이다. 그것을 보지 못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문자적으로 본다는 것이고, 그것은 천지창조에 대한 창세기의 말씀이 물리적 세상을 만드신 과정을 만드신 것이라고 제한적으로 읽는 것이며, 예수님의 삶을 따라 하는 것이 예수님을 믿는 잘못된 관점이라는 것이다.


바로 그런 관점이 영지주의를 낳은 것이다. 다시 말해서 육신을 가진 사람, 그 육신의 본능에 따라 식탐이 있고, 이성에 대한 욕구가 있는 그런 모습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으며, 예수님이 육신으로 오셨다는 것은 우리의 그런 것을 가진 육신으로 오셨다는 것이니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인간이 인간을 부끄럽게 여긴다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성정을 가지신 분이라고 했고, 찌르면 물과 피가 나오는 분이시며, 십자가에 매달면 죽을 수 밖에 없는 육신을 가지신 분이었다. 우리의 육신과 같은 그 육신 말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는 이 육신을 가지신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셨던 것이다. 그래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신적인 능력을 발휘하여 내려올 수 없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육신으로 오셨기 때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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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악과 (12) - 벌거 벗었다는 것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4. 2. 18. 09:20 Writer : 김홍덕

이렇듯, 사람은 사람이라 연약한 것에 대하여 늘 부끄러워 한다. 그래서 그 부끄러움을 해결하려고 행동하고 소유를 늘려간다. 그리고 그 가진 것을 기준으로, 또는 사람이라 부끄러운 것을 가리기 위한 행동의 어떠함과 소유의 정도가 선함과 악함의 기준이 된다. 즉, 많이 가지면 선하고, 도덕적이면 선한 것이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치명적인 오류가 있다. 이것이 다 삶의 본질이 아니라 형식이라는 근본적인 문제점은 제쳐두더라도 사람마다, 시대마다, 나라마다, 문화마다 그 선함과 악함의 기준이 다르다는 것이다. 알카에다의 폭탄테러도 그 세계의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선한 것이라고 신앙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반대로 미국의 입장에서 보면 그것을 막는 것이 선한 것이다. 



알카에다는 자신들이 선하다는 생각을 가졌기에 911테러를 자행한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선과 악을 판단하는 것이 다 다르기 때문에 세상이 혼란스러운 것이다. 그래서 선악과는 이 세상의 모든 혼란과 갈등의 원인이 서로 다른 것을 선으로 여기는 사람들의 갈등에서 비롯된 것이다. 즉 사람이 선하고 악한 것을 스스로 판단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나 안타깝게도 그렇게 선과 악을 판단하는 기준들 중에 이 세상의 사람 누구 하나 빠짐없이 공감할 수 있는 표준화된 선이나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것이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은 인간의 존재 목적이 행동의 어떠함과 소유의 어떠함으로 판단되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인 것이다. 해적이 아무리 자기들끼리 의리가 끈끈하고 그 사회가 잘 돌아가고 그 안에서 행복하더라도, 국가에 반항하는 단체로 있는 한 행복하면 행복할수록 죄인이 되는 것처럼, 사람은 그 존재 목적이 회복되지 않고,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물으신 "네가 어디에 있느냐?'에 대한 답을 얻지 못한다면, 스스로 옳다 여기는 선을 주장하면 주장할수록, 또 행복하면 행복할수록 하나님께 더 죄인이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선악과를 먹고 스스로 선과 악을 판단하는 상태를 하나님께서는 죽은 존재로 보기 때문이다.


우리가 시계를 대할 때, 아무리 그것이 고급 시계라 할지라도 시간이 맞지 않다면 그것을 보고 우리는 "시계가 죽었다"고 하지 않는가? 바로 그것과 같이 사람도 하나님께서 지으신 자리를 벗어나서 하나님께서 나에게 "네가 어디에 있느냐?"고 물으시는 상황이 되게 내가 선악과를 먹고 소유와 행위에 대한 선함과 악함에 대한 기준을 가지고 살아간다면 그 삶에서 아무리 자기가 하나님을 부르고 예수님을 "주여! 주여!" 할지라도 이것은 시간을 알려주지 못하는 시계에게 보석을 박는 것과 같은 것일 뿐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만드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셨다. 그 사람이 지금의 사람과 다르지 않다. 아담이 벌거벗었다는 것은 아담 역시 흙으로 만들어졌기에 그 몸이 철에 비해 약하고, 바다에서는 물고기보다 못하며, 하늘에선 참새보다 못한 그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또한 그 본성에는 성욕과 식욕과 같은 본성이 또한 그대로 있는 존재라는 것을 벌거벗은 것이라고 표현하신 것이다.


그것이 부끄럽지 않을 때가 있었다는 것이다. 바로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기 전에는 그랬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때는 도무지 어떤 때인가? 그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 맞게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기에 그 벌거 벗음이 유익함을 알고서 살아가는 그 상태에 있을 때, 그 때는 벌거벗은 것이 부끄럽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네가 어디에 있느냐?'고 하신 것이다. 다시 말해서 <"네가 벌거벗은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자리에 있느냐?">라고 물으신 것이다. 다시 말해서 <"네가 연약한 인간이라는 것이 부끄럽지 않는 자리에 있느냐?"> 라고......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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