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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과 (8)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4. 5. 15. 06:08 Writer : 김홍덕

창세기의 에덴 동산에 나오는 생명 나무와 선악과는 까마득한 옛날, 정말 그랬으면 좋을 것 같은 에덴 동산에 있었던 나무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것은 결국 오늘 나의 이야기가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하여 오늘 나에게 이것을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즉 오늘 나는 선악과를 먹은 사람은 아닌지, 그리고 나에게 하나님이 보실 때 살아 있다 할 만한 것이 있는 사람, 그러니까 생명 나무의 열매를 먹을 수 있는 사람인지를 돌아보는 말씀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하여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조금 돌아 보았다.


성경을 객관적인 사실로서 믿는 것도 중요하다. 어쩌면 현대 문명 아래서 교육을 받은 사람들에게 있어 과학적 상식, 그리고 사회적인 관념을 넘어서 이 모든 것을 사실로 믿는다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어렵게 믿었다 하더라도, <"오늘 나에게 어떤 말씀인가?"> 하는 것이 없다면, 정말로 성경이 내게 어떤 의미일까? 생각해 보아야 한다.


성경이 오늘 나에게 어떤 말씀인가 ? 하는 것이 없다면 성경이 내게 무슨 유익인가?


선악과와 생명과 로만 성경을 설명한다면(물론 그건 당연히 가능한 일이다), 사람과 또 하나님께서 지으신 세상의 모든 일들을 선한 것과 악한 것으로 구분하는 생각과 관념을 가지고 살아서, 늘 사람 사이에서 문제가 되고 또한 스스로 분이 나는 삶을 살던 사람이 그것을 버리고 하나님께서 보실 때 살아 있다고 할 수 있는 생명을 가진 사람이 되는, 그리고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사람이 선하고 악한 것을 판단하는 삶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늘 다툼이 일어나고 스스로 분을 내는 것이다. "이렇게 해야 하는데 왜 그러느냐?"하는 그 생각, 그것이 우리에겐 너무 익숙한 것이라서 벗어 볼 생각조차 못했을지 모른다.


그렇다보니 사람과 사회가 추구하는 이상이 결국 어떤 것을 선으로 보고 매진할 것인가?로 고착되었다. 하지만 그것이 아니라 알고 보면 너나 나나 둘 다 같은 인간이기에 같은 일에 실수하고, 같은 것을 감추고 싶어한다. 결국은 자신이 처한 형편 상 남들보다 조금 더 잘 할 수 있는 것이 <사람은 이래야지>하는 기준이 되어 있을 뿐이다.


하지만 아주 조금 더 잘하는 그 선함도 하늘에서 보면 63빌딩이나 단층 주택이나 다를 것 없듯, 하나님이 보실 때 아무 것도 아니고, 올림픽에서는 늘 기록이 갱신되고 우승하는 사람이 바뀌어 나타나듯이 내가 '사람은 이래야지!'하는 세계에 있어 나보다 더 잘 지키는 사람은 항상 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의 삶의 목적은 그런 것을 지키며 사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실재로 그렇게 사는 것이 힘들고, 아무리 해도 끝이 없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이 그것에 있지 않기 때문인 것이다. 해적이 아무리 열심히 일하고 자신들이 서로 충성해도 언제나 도망 다녀야 하고 죄인인 것 처럼 말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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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과 (7)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4. 5. 13. 15:43 Writer : 김홍덕

생명은 이렇듯 하나님께서 보실 때 살아 있다고 할 수 있는 존재를 말하는 것이다. 굴러가지 않는 자동차는 아무리 번듯해도 이동하고자 하는 주인 앞에서는 그저 생명이 없는 고철 덩어리인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이것은 비단 생명 나무에 국한 된 것이 아니라, 성경의 모든 말씀, 그리고 세상의 모든 이치가 그것이다.


생명 나무가 그렇고 하나님 앞에서 살아 있다는 것이 그런 것이라는 것을 이야기 했다. 그런데 더 중요한 문제가 있다. 그것은 왜 그런 이야기를 기록해 놓고 사람이 알기를 원하셨는가 하는 문제인 것이다. 사실 그것이 없으면 성경의 비밀이 아무리 놀라워도 아무 소용 없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성경과 복음의 고객 혹은 대상은 사람이다. 즉 사람이라서 성경을 읽고, 사람이라서 그리스도가 복음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사람이 그것을 알지 못하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고, 사람이 그것을 안다는 것은 자신의 이야기로 누리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늘 관여하시고 또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셔서 사람으로 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지고 살아가기를 바라시는 것은 하나님의 입장에서 본다면 하나님 당신을 표현하는 절대적인 존재가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형식이 없으신 존재이신데, 그 존재를 드러내고자 사람을 만드셨다는 것이다.


이것은 비단 사람 뿐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존재를 나타내시기 위하여 만드셨다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중에 사람을 하나님의 image대로 만드신, 그러니까 하나님의 이미지를 표현하는 존재로 만드시고 세상의 모든 것을 다스리라고 하신 것이다.


세상을 다스리라고 하셨다고 하니, 사람들은 물을 거꾸로 솟게 하거나, 하늘에서 불이 내리게 하거나 바위를 염력으로 날리는 것을 다스리는 것으로 착각한다. 이렇게 말하면 '그건 정말 착각이지'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와 동일한 생각을 하고 산다.


자연을 정복하고, 지구 상에 있는 것을 사람의 위대함과 편리함을 위하여 이용하게 되면 될수록 위대하게 생각하고 심지어 그런 결과물을 교회에 가져와서 영광을 얻기도 한다. 예를 들면 큰 공사를 성공했다고 감사 헌금을 드리는 것과 같은 것이 그와 같은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이 세상을 다스리는 것은 정복하는 것이 아니다. 세상이나 사람이나 다 하나님의 존재와 영광을 표현하기 위하여 지어진 것이기에, 사람들이 이 세상의 모든 것을 활용하여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것이 만물을 다스리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모든 만물이 존재하게 된 목적으로 이끄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모든 일을 사람에게 맡기신 것이다. 그것이 사람의 본분이고 만물의 본분이며 사람의 존재 목적이고 만물을 다스리는 것이지, 사람들의 생각처럼 자연의 법을 극복하는 것이나,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것을 하나님처럼 되는 것이라고 여기는 것은 오히려 하나님의 목적에 대항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보실 때 살아 있다고 여길 수 있는 사람은 자신에게 주신 육신의 삶을 순종함으로 받고 그 자체가 하나님께서 심히 기뻐하신 모습이라는 것을 알고 살아서 하나님께서 사람 만드신 목적대로 하나님의 성품을 잘 표현하면서 사는 그것이 바로 생명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자신의 이야기이고, 또한 자신이 존재하는 목적이며, 또 살아가는 이유가 되는 사람이 되었을 때 생명이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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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과 (6)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4. 5. 12. 11:40 Writer : 김홍덕

살아있다는 것은 육신이 숨 쉬고 있다는 것 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물론 그것은 기본이고 당연히 살아 있다는 범주에 속하는 일이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라는 것이다. 어떤 세계 안에서 '살아 있다'고 하는 것은 그 세계가 추구하는 목적에 일치하고, 그 목적에 부합하는 모습을 보인다는 것을 뜻한다.


조폭 영화 안에서 "살아 있네"라는 대사가 있었는데, 그것은 주먹이 아직 쓸만 하다는 의미였다. 즉 주먹을 사용하는 세계의 성격에 부합하는 모습이 아직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렇듯 <살아 있다>는 표현은 우리 생활 깊숙이 사용되고 있다. 그것은 살아 있다는 것에 대한 본능적 개념이 깔려 있다는 것이다.


그것처럼 하나님 앞에서도 <살아 있다> 하고, <생명이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목적과 의도하심에 부합된 모습을 가진 존재일 때 살아 있고 생명이 있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자연 속에 있는 돌이라도 하나님께서 그것을 만드신 목적 안에 제자리를 지키며 존재하고 있다면 그것은 살아 있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생명 나무라는 것은 실제로 나무의 과실과 같은 것이었겠지만 그것 자체를 먹는 것으로 생명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생명이라 여기시는 정체성을 먹었는가 아닌가 하는 문제라는 것이다. 만약 생명 나무의 열매를 먹는 실제 행동이 있어야만 한다면, 지금 시대의 사람은 절대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존재가 될 수 없을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생명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목적 안에 있을 때 생명이 있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생명 나무의 열매인 생명과인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시고 매겨주신 자리는 하나님처럼 되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을 표현하는 존재였는데 그것에서 벗어난 자리인 선과 악을 판단하는 자리에 있는 상태는 생명과를 먹을 수 없는 존재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실 때, 그 형상대로 만드셨다고 했다. 이는 하나님의 이미지를 표현하셨다는 것이다. 어머니라는 이미지가 있고 모든 사람에게 어머니가 있는 것이듯, 영이신 하나님이라는 이미지가 사람으로 표현이 되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사람의 창조 목적이고 존재 목적인 것이다.


그런데 사람이 하나님의 이미지와 성품을 표현하는 표현 양식으로서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존재 형식과 능력 자체를 동일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닮는 것이라고, 또 하나님처럼 되려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이 육신이라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그렇게 될 수 없기 때문에 이를 부정하게 여기고, 이를 개선하려고 한다. 이것이 바로 벗었다는 것을 부끄러워 한다는 것이고, 사람이 그렇게 된 것은 선악과를 먹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이러한 모습은 스스로를 개발하고 능력을 향상 시키고 대단한 사람이 되려 하는 모든 것을 한마디로 함축하면, <다른 사람이 하지 못하는 것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려는 것으로 나타나고, 또한 이것을 성공이라 한다. 다시 말해서 사람, 그 이상의 존재가 되려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인간의 모든 노력이고 삶이라는 것이다.


사람이 그렇게 사람 이상이 되려 하고, 사람을 개조해서 이루어낸 결과를 성공이라 하여 영광스럽게 여기는 것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육신의 삶의 원래 모습으로는 안된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만약 주신 그대로 모습이 영광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반면에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원래 모습을 보시고는 "심히 좋았더라" 하셨다. 즉 지금 사람들이 사람을 생각하는 것과 하나님의 생각이 달랐다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목적과 의도와는 다른 것이다. 그리고 목적과 의도와 다르다는 것은 하나님이 보실 때, 살아 있다고 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죽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죽은 존재에게 생명 나무의 열매는 먹을 수 없는 것이다. 먹는 것은 먹은 존재와 먹히는 대상이 같아지는 과정인데, 그럴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불 칼로 생명 나무를 지키셨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이 보실 때 살아 있다고 하기 어려운 것들이 다 태워 없어지기 전에는 생명 나무에 갈 수 없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 바로 생명 나무에 대한 말씀과 불 칼에 대한 말씀인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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