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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악과 (29) - 존재의 신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4. 3. 1. 11:54 Writer : 김홍덕

흔히 사람들이 성경의 말씀을 '그리스도인으로 살려고 하면 이렇게 해야 한다.'라는 <행위에 대한 규범>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을 행위의 신으로 모욕하는 것이다. 엄연히 하나님의 이름 여호와는 "I am who I am"이다. 이는 <나는 나다>라는 의미로 볼 수 있다. 이 하나님의 이름은 오직 Be동사만 있다. 즉 하나님은 존재의 신이시다. 그리고 이것은 풍랑이는 바다 위를 걸어오신 예수님께서 "내니 두려워 말라"라고 하신 것과 같은 의미이다. 이것의 원어적 표현은 "에고 에이미(ego eimi)" 역시 같은 의미이다.


하나님께서 존재의 신이라는 것은 정말 정말 중요하다. 이것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어떤 행동을 해서 기쁘시게 할 수 없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사람의 눈에 Do, 즉 '이렇게 하라'로 읽히는 모든 성경은 실제로는 어떤 생명이 되기만 하면 그렇게 살 수 밖에 없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 생명은 당연히 그리스도의 생명이다.


갈라디아서에는 성령의 9가지 열매가 나온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라고.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이런 열매를 맺기 위하여 노력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또 그렇게 살려고 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조금이라도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다. 정확히 말해서 하나님께서 존재의 신이라는 것을 모르는 것이다.


분명히 바울 사도는 성령의 9가지 <열매>라고 했다. 열매는 어떤 나무이기만 하면 된다. 즉 먼저 어떤 열매를 얻으려면 그 열매가 열리는 나무를 심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의 열매는 그 마음 안에 성령이 있으면 굳이 노력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이것은 먼저 사람의 심령 안에 성령이 거하시기만 하면 아무리 말려도 그 9가지 열매는 맺힐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이 생명이고, 이것이 존재의 법이다. 그리고 이것이 하나님의 법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고 인간이라는 부끄러움을 인정하기만 하고, 나머지 삶은 아무렇게나 살아도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복음을 알면 알수록 성경에 나오는 모든 말씀을 잘 준행하며 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영지주의자들은 이것을 몰랐던 것이다. 하지만 영지주의는 옛날의 사상 만은 아니다. 지금도 역시 그런 사상은 만연하다.


지금의 교회들은 큰 교회가 되려고 한다. 이건 건물을 크게 지으려고 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뭐든지 크고 좋은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세상에서 성공하면 할수록, 인간의 부끄러움을 감추고 고상해지면 고상할수록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은 다 큰 교회, 즉 위대함을 추구하는 것이다. 즉, 인간의 부끄러움을 감추면 감출수록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는 의미이다. 이는 이때까지 말해 온 것처럼 선악과의 산물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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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악과 (28) - 거듭남 vs. 영지주의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4. 3. 1. 08:54 Writer : 김홍덕

그러므로 성경에서 하나님이 보시는 유일한 악함인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없다는 생각을 제외한 그 어떤 것도 하나님께서는 문제를 삼지 않으신다. 그렇다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다는 것만 인정하면 아무나 죽여도 되고, 성적인 완전 개방도 문제가 되지 않는 세상이 되는 것인가? 라고 반문하겠지만,


사람이 사람을 죽이거나, 다른 사람을 해롭게 하는 뿌리는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하게 하는 선악과에 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하나님의 아들, 또한 그리스도가 될 수 없다는 생각을 하는 것과 사회적인 문제는 그 뿌리가 같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생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또한 서로의 죄를 사할 수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절대로 사람을 해롭게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람을 향해서 '이것이 선하다', 혹은 '이렇게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인간이라는 정체성은 수정하거나 개조할 것이 없는 온전한 존재라는 것을 안다는 것(이것은 하나님의 생각과 동일한 생각이기도 하다.)을 안다는 것이고, 이것은 자신이나 또한 다른 사람이 인간이라는 것이 전혀 부끄럽지 않다는 것을 안다는 것이다. 그것을 아는 사람은 사람을 하나님의 목적 앞에 늘 유익하지 해롭게 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생명이기 때문이다. 생명체는 태어나면 그 종으로만 살지 다른 종으로 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을 만나서 사람에 대한 생각을 바꾸어낸 사람을 <거듭났다>고 하는 것이다. 즉 다른 생명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생명이 되었다는 것은 절대로 다르게 살 수 없다. 그 생명을 죽일 수는 있어도 개로 살았던 것을 고양이로 살았다고 할 수 없고, 개를 죽일 수는 있어도 "야옹"하게 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서, 그러니까 혼돈 중에 있다가 하나님의 세계가 열린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거듭나게 된다. 이것을 성경을 거듭남이라고 한다. 사람의 부끄러움을 율법의 무화과 나뭇잎으로 가리던 사람이 사람 앞에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처럼 인간이라는 것을 보여주며 살아 그 삶을 보는 사람이 또한 그렇게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며 살게 하는 그런 생명이 되는 것, 그것이 바로 거듭남이다.


그러므로 이 <거듭남>의 과정을 지나서 그리스도의 생명이 된 사람에게, '사람이 하나님의 성품으로 살 수 있다는 것만 믿으면 내 맘대로 하며 살아도 된다'와 같은 생각은 들 수 없는 것이다. 개가 '나도 야옹' 해 봐야지 하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영지주의는 잘못된 것이다. 적어도 하나님의 세계가 바로 열리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 자기 모습이 발견된 사람이라면, 세상도 정말 열심히 살고, 누가 봐도 경건한 삶을 살 수 밖에 없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에는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하여 살았다면, 이제는 사람에게 사람의 정체성을 알게 하기 위하여 사는 것으로 삶의 목적이 치환되었을 뿐이다. 하지만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전부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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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어떤 관점에서 보면 성경의 모든 말씀은 사람을 하나의 정체성으로 보느냐? 아니면 사람 안에 있는 각 양의 본성들을 나누어서 보느냐 하는 문제로도 볼 수 있다. 이는 다르게 말해서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할 온전한 존재로 볼 것인지, 아니면 부정함을 가지고 있는 존재로 볼 것인지에 대한 문제라는 것이다.


이것은 중요한 문제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느냐? 아니면 절대로 그럴 수 없느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유대인들이나 로마인들의 관점에는 예수님이 보여주신 인간의 모습은 절대로 하나님의 아들이나 왕이 될 수 없는 것이지만, 하나님과 십자가 밑에 있던 백부장, 그리고 이후의 많은 사도들과 초대교회 성도들은 이 평범한 사람들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시고 믿었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세상, 그러니까 하나님의 세계 안에서는 선과 악은 단 하나 뿐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관점에 합당한 것과 아닌 것 그것 뿐인 것이다. 즉 사람이 하나님의 성품대로 사는 그리스도의 삶을 살 수 있느냐? 아니면 본연의 사람으로는 되지 않고, 사람의 추하고 악한 것을 종교적인 계율과 훈련으로 배제 시켜야만 살 수 있다는 그 두 가지 관점이 있고, 전자는 하나님 앞에서 선한 것이며, 후자는 악한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사람이 판단하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다. 


마태복음 9장에서 예수님께서 침상에 메고 온 중풍 병자를 고치실 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면서 고치심을 보고 그것을 참람하다고 생각하는 유대인들의 생각을 "너희가 어찌하여 악한 생각을 하느냐?(마 9:4)"이라고 하셨는데, 사람이 사람의 죄를 사하는 것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을 <악한 생각> 즉 악한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사람의 죄는 하나님만 사할 수 있는데, 사람이 그것을 대신한다는 것은 신성 모독이라고 생각하는 유대인들의 생각은 초라한 인간의 모습을 가진 주제에 하나님을 대신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유대인들의 생각이 바로 악한 생각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생각의 뿌리는 사람의 본성을 분리해서 보고 그 중 사람의 어떠한 요소는 절대로 하나님의 역할을 대신할 수 없는 존재로 사람을 자리 매긴다는 선악과에 근간을 둔 생각이 유대인의 생각이고 악한 생각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선과 악을 판단한다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성품으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의 삶을 살 수 없다고 생각하게 하고, 그런 모든 생각은 악한 것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선악과의 문제는 신앙의 근간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셔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의 형식으로 지으셨는데, 선악과를 먹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성품을 표현하기 위하여 부여한 사람의 연약함을 추하고 악한 것으로 본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사람의 잘못된 생각, 그것을 하나님께서는 악한 것으로 보실 뿐 아니라, 그런 상태에 있는 사람들을 목적을 상실한 죽음의 상태로 보시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같은 육신으로 오셔서 선악과를 먹고서 죄 가운데 있는 사람들의 생각, 알지 못하고, 땅이 혼돈하며, 하나님의 세계가 열리지 않은 세계를 하나님의 세계로, 또 그리스도의 정체성으로 살게 하는 생명이 있는 존재로 살 수 있도록 하신 것이 그리스도의 사역이고 성경의 근간이 되는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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