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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악과가 하나님의 형상 곧 이미지, 의와 목적이 형상화 된 것이라면, 생명과는 그 정체성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육신을 가진 존재 안에 하나님의 생명이 함께 있어야 비로써 온전한 하나님의 형상인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생명이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즉, 사람 안에 하나님의 생명이 함께 있어야 비로서 만족의 동산이 된다는 의미이다.





그런 측면에서 본다면, 에덴 동산도 하나의 사람에 비유 될 수 있다. 만족하는 사람,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 만족하고 안식 할 수 있는 사람은 에덴 동산에 비유 될 수 있다. 사실 신앙이 자라서 보면 에덴 동산이라는 곳이 따로 있는 곳이 아니라, 사람 자신이 하나님께서 주신 삶에 만족할 때, 자신의 삶과 이 세상이 에덴과 같이 참 만족할 수 있는 삶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물론 이 앞에는 <순종>이 무엇인지 정확한 체휼과 깨달음이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선악과와 생명과가 함께 있다는 것을 만족의 상태라고 할 때, 그것은 사람에게는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것은 육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 안에, 하나님의 생명이 있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이 상태가 바로 에덴 동산과 같은 상태이다. 그리고 이러한 상태의 사람은 이 세상을 만족하는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고, 그 안에서 생수의 강이 넘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상태, 즉 육신 안에 하나님의 생명이 온전히 있는 상태를 성경은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고 하고 있다. 즉 이것을 성육신(成肉身)이라고 하는 것이고, 그 첫 열매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이다. 요한 사도가 요한복음 1장에서 말씀하신 것이 바로 이런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바로 생명이신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의 육신의 모양으로 나타난 바 된 존재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잠깐 아들이라는 정체성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는 성인이 결혼하여 낳은 남자 아이를 아들이라고 한정적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본성이 육신이 된 존재가 아들인 것이다. 우리는 흔히 육신으로 낳지 않아도 아들이라는 말을 쓰곤 한다. 예를 들어 '대한의 아들'과 같은 표현들이다. 대한의 아들이라는 것은 대한민국의 염원을 실현해 낸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즉 염원이라는 무형의 의가 한 사람이라는 형식으로 표현되었을 때 우리는 그 사람을 아들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 곧 하나님의 이미지가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된 존재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인 것이다. 그 하나님의 형상과 이미지는 바로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신 목적인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통하여 자신의 성품을 표현하기 위하여 육신으로 지으셨는데, 그 육신이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면서 살도록 하신 것이 목적인 것이다. 그 목적을 잘 이루고 살면 하나님께서 보실 때 "살았다"할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생명이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바로 생명과인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창조 목적과 같이 연약한 육신을 통하여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면서 사는 존재는 하나님께서 생명과를 에덴의 중앙에 두심과 같이 그 사람을 살았다 하는 만족의 상태로 보시고 안식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존재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육신으로 난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다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육신의 모든 정체를 보여주신 것도 바로 우리가 육신을 가져서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신 사건이었던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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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악과 (37) - 에덴동산과 선악과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4. 3. 6. 11:22 Writer : 김홍덕

하나님께서는 선악과를 에덴 동산의 중앙에 두셨다고 하셨다. 그것은 에덴 동산의 핵심이 선악과라는 것이다. 물론 생명과도 같이 두셨다. 이 두 가지는 에덴동산 즉 만족의 동산이라는 곳의 중앙에 있었다. 이것은 만족의 핵심은 선악과와 생명과라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으로 표현되고, 그 육신이 생명(과)와 함께 있는 것이 만족의 동산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참 어려운 말씀일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의외로 간단한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최종적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쉬셨다. 그러니까 사람이 나오기 전까지는 계속 일을 하시다 사람이 나오자 쉬셨다는 것은 사람을 만드시는 것이 천지창조의 목적이다. 이는 바울 사도가 로마서 8장에서 말한 바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롬 8:19)"의 말씀과도 같은 의미이다.


즉, 사람은 하나님 창조의 최종 목적물이다. 이것은 가장 중요한 것이라는 의미이다. 그리고 선악과 역시 중앙에 두었다는 것은 가장 중요하다는 의미이다. 이를 단순히 그 두는 곳과 순서 상 가장 중요한 것을 의미한다고 그것이 같은 연결 고리라고 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세상과 사람을 만드셨다는 것은 영이신 하나님께서 세상과 사람으로 그 의를 표현했다는 의미이다. 즉 내용인 하나님께서 형식이 세상과 사람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이것은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내용과 형식은 분명히 같이 있는 하나이다. 형식이 있는데 내용이 없으면 생명과 목적이 없는 것이고, 형식은 있는데 내용만 있으면 그것은 아무 짝에도 쓸데가 없다. 사람에게 보이거나 만져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형식과 내용은 공존하는 것이다. 이것은 분리도 안되고 그럴 수도 없다. 이동이라는 목적과 자동차가 분리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선악과와 생명과는 같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이 선악과는 형식이라는 것을 대표한다. 즉 사람이 육신을 가졌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이 육신이 하나님의 생명 곧, 창조의 목적이 가장 중앙에 즉 핵심적으로 있어야 비로서 만족(에덴)이 된다는 의미가 바로 에덴 동산의 구조인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육신이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에덴 동산에 선악과를 두셨다는 것과 같은 의미인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만드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셨고 안식하신 것이다. 즉 만족(에덴)의 상태가 되셨다는 것이다. 즉 에덴동산과 같은 상태가 되었다는 의미인 것이다. 


그런데 하와가 그 선악과를 보고 이것을 먹으며 눈이 밝아진다고 하는 유혹에 빠져서 그것을 먹음으로 하나님의 이 구조가 파괴되는 것이다. 하와가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선악과를 보니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게 보였다고 했다. 그 이전에는 벌거벗고 돌아다니면서 봐도 아무렇지도 않았던 선악과가 말이다.


이것은 사람이 육신으로 사는 자기의 삶을 하나님과 같이 되는데 사용하려고 자신의 것으로 주장한다는 의미이다. 그것이 바로 먹은 것이다. 그 과정에서 사람이 나서 세상을 살다 보니 세상의 모든 요소들이 인생을 잘 단련하면 하나님과 같이 될 것이라고 유혹하고 있는 것과 같기 때문이고, 그것이 보암직도 먹음직도 하게 보여서 결국 먹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먹은 선악과는 사람을 세상의 기준으로 선한 것과 악한 것으로 구분하는 시각을 가지게 되고, 그 기준에 따라 선하다 여기는 것을 주장하게 되고, 악하다고 생각하는 자신의 삶을 부끄럽게 여기고 감추려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부끄러움은 누구나 가진 것이다. 인간이기만 하면 말이다. 그리고 또한 그 선한 기준 역시 나라와 시대와 또 무엇보다 사람마다 다 다른 것이다. 어느 것 하나 같지 않다는 것은 그것은 맞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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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육신을 가졌다는 것이 선악과를 먹은 것이라는 것은 태어나면서 자동적으로 선악과를 먹은 상태가 된다는 것이라기 보다 하와가 뱀을 만나듯 사람이 자라면서 세상의 가치관이 자기 안에 들어오면서 점점 인생의 가치를 하나님처럼 되려 하는 것에 둔다는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사람이 육신을 가졌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에덴 동산에 선악과를 두셨다는 의미와 같은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런데 사람이 이 육신을 가진 것을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하는데 목적을 두고 삶을 살아가면 아무런 문제가 없을텐데, 하와에게 뱀이 한 말과 같이, 이 세상을 자기 안에 수용해 가면서 점점 자신이 인간이라는 것을 외면하려 하고 좀 더 고상해지려 하고, 40일 금식을 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는 것과 같이, 더 고상해지고 금욕적이고 인간의 연약함을 부끄러워하여 율법의 무화과 나뭇잎으로 인간임을 감추려 하게 되는 것이 바로 이 육신의 삶을 선과 악으로 먹어 버리는 사건이 된다는 것이다.


사실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에덴에 두셨다는 것은 인간을 육신으로 지었다는 의미와 같은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사람을 시험하려고 에덴 동산에 선악과를 두신 것이 아니라, 영이신 하나님께서 그 의를 표현하시려 인간을 지으셨는데, 그것을 하와가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먹은 것과 같이, 이 육신을 하나님과 같이 되게 하려고 마음을 먹는 순간 사람이 선악과를 먹은 것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은 마치 뱀이 하와를 유혹했듯 세상을 보고 그것을 좇기 시작하는 순간이니 것이다. 그러므로 선악과는 존재하는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하와가 먹어 문제가 되었듯, 사람도 이 육신의 삶을 하나님처럼 되게 하려는 그 순간 선악과를 먹은 것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육신 자체가 선악과를 먹은 것이라는 것이 아니라, 이 육신은 선악과가 에덴에 존재한 것 처럼 존재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다만 그것을 에덴의 일원으로 두느냐? 그러니까 이 육신이 하나님의 동산에 적합하게 살아가느냐? 아니면 이것을 하나님과 같이 되려 하느냐?의 문제인 것이다.


이런 것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이 그러하다. 앞에서 칼에 대하여 설명한 적이 있는데, 가정에 있는 식칼이 가끔 끔찍한 흉기가 되기도 하는 것을 언론에서 볼 수 있다. 식칼에게 날카로움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은 에덴 동산에 선악과를 두셨다는 것과 같다. 그런데 그것이 목적에 부합되지 않게 사용되었을 때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목적을 벗어난 사용이라는 것이 우리가 뉴스에서 봐서 알듯이, "내가 선하고 너는 악하다"는 의지를 집행하는 과정에서 목적의 오류가 발생하는 것이다.


즉 사람의 육신이라는 것은 육신이라는 것을 가졌다는 그 자체가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만드시고 보시기에 좋았다 하신 것이니 이 세상의 그 누구도 그것을 부정하다 할 수 없는데, 사람의 존재 목적을 벗어나 삶을 이끌어 가기 시작하는 그 순간이 바로 선악과를 먹은 것이 되는 것이다. 식칼이 흉기가 되면서 목적을 벗어날 그 때가 사람이 자기 주장을 관철 시키는 순간이듯, 사람이 그 목적을 벗어나는 순간의 이유는 삶을 자기의 것으로 먹고, 그것으로 하나님과 같이 되려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결과 사람과 세상을 보고 선한 것과 악한 것으로 구분하는 주장을 하게 되는 것이다.


바로 이런 과정을 설명하는 사건이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은 사건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단순한 불순종의 사건이 아니다. 이것을 불순종으로 봐야 하는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명령에 대한 불복종의 행동이 아니라, 창조 목적에 대한 불복종, 불순종으로 봐야 하는 것이다. 그 목적을 벗어난 것이 바로 하나님과 같이 선과 악을 판단하는 것이기 때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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