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 2603

이렇듯 이때까지 사람들은 하나님의 구원에 역행 했다고 볼 수도 있다. 즉, 누구나 받을 수 있는 구원과 영광이 아니라, 세상에서 성공하고, 종교 안의 계율을 잘 수행하는 사람일수록 신앙이 좋은 사람으로 치부되어 왔던 것이다. 하지만 이는 사람의 본성을 선한 것과 악한 것으로 나누고 악한 것을 배제하고 선한 것을 추구해 온 노력에 대한 치하로서 구속과 종교적 영광이 주어졌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모든 것들은 전부 인간의 본성을 무시하고 절제하면 할수록 더 좋은 결과를 낳은 것들이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그런다고 그 본성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죽을 때 까지 있는데, 사람이 만든 선과 악의 기준에 따라 그것을 통제한 상태로 거룩하다 칭함을 받는 것일 뿐이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사람의 모습에 역행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 도전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사람들이 생각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이 인간의 본성을 드러나게 하시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것으로 사람의 본성을 억제하는 법으로 삼았기 때문에 보시다 못한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그들이 억제하고 숨기려는 인간 본연의 모습으로 보내신 것이다. 그렇게 오신 분이 바로 육신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인간이기만 하면 다 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모든 사람이 다 하는 결혼을 하지 않으면 성직자가 된다는 식의 발상은 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 목적으로 세운 것에 반항하는 행동인 것이다. 예수님과 바울이 결혼하지 않은 것은, 그것보다 더 중요한 삶이 있었기 때문이지, 결혼하면 신앙이 안 좋은 사람이고, 사도나 사제 혹은 성직자가 되려면 결혼을 하면 안되는 것이라서 그런 것이 아니다.


그런데 그렇게 금욕적인 것을 신앙의 모습으로 보는 것은 사람을, 또 자신이 사람이라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그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하여 시대 상황, 나라, 문화 무엇보다 개인별로 다 다른 기준으로 감추고, 그렇게 감출수록 선한 것이라는 생각과 이론 속에 사람들이 매몰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세상은 선을 주창하는 사람들로 인해서 늘 시끄러운 것이다. 선에 대한 기준이 다 다르기 때문에 시끄러울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것이 바벨탑에서 말이 달라졌다는 것과 같은 것이기도 하다.


그렇게 사람들은 각양의 관점에 따라 선한 것에 대한 기준이 다르지만, 인간이라면 모두가 만날 수 있는 공통 분모가 있는데, 그것은 모두가 인간이라는 그 자체이다. 그러므로 이 하나님의 구원이 모두에게 공정한 것이 되려면, 인간이기만 하면 되는 것이어야 한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공의인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 것이었다.


인간의 모습 그 자체라는 것은 제사장과 같은 종교적 신분이 아니어도 된다는 것이다. 또한 황제와 같이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이 아니어도 된다는 것이다. 사람의 마음 속에는 세리와 같은 마음이 있기에 예수님은 세리와 친구였고, 또 누구나 음욕을 가지고 있기에 창기와 친구셨던 것이다. 그리고 인간이라면 누구나, 다른 사람이 가진 선과 악의 기준에 의하여 죄인이 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죄인들과 친구셨던 것이다. 


즉 그런 세리 같고, 창녀 같고 선과 악의 기준으로 죄인이 될 수 밖에 없는 모든 인간의 본성들이 바로 하나님께서 만드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던 인간의 모습 그 자체이고 그것이 바로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을 가진 존재라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하여 오셨던 분이 예수 그리스도인 것이다.




by claude.attard.bezzina 저작자 표시비영리변경 금지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보고서, 이때까지 세상의 법과 각양의 사람들이 나에게 들이대는 선과 악의 기준에 따라 죄인이 되었던 나의 정체성이 오히려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던 인간의 모습이라는 것을 깨달을 때 그것에서 구원이 비롯되는 것이라는 것이다. 바로 그렇게 사람들에게 사람이 무엇인지, 사람의 전부를 집약적으로 보여주신 곳이 바로 십자가의 자리인 것이다.


십자가의 자리는 제사장들이 가진 선과 악의 기준으로 볼 때, 절대로 메시야가 될 수 없는데 하나님의 아들이요 메시야라 했기 때문에 죄인이 되었고, 또한 로마 황제와 같이 세상에서 성공하지도 못했으면 유대인의 왕이라고 하는 것도 로마 곧 세상의 법으로 볼 때 죄인이 된 모습이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게다가 그런 자리에서 스스로 구원할 수 없는 그런 존재라는 것 까지 보여주신 것이다. 즉, 세상의 법과 종교적인 선과 악의 기준에 의하여 죄인이 된 사람은 자기의 생각으로 그 자리에서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하여 가시관을 쓰셨고, 자신의 행동으로 구원할 수 없기 때문에 손과 발에 못 박히신 것을 보여주신 것이었다. 


그리고 또 자신이 가진 신분이나 지위로도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하여 벌거벗겨진 것이었다. 그런 모든 것은 다 나뭇잎으로 자신의 부끄러움을 가리는 것과 같은 것이라는 것이다. 바로 그 모습을 보고 내가 선과 악을 판단하는 기준에 의하여 죄인이 되는 존재구나 깨달을 때에 하나님께서 구원을 하시는 역사가 있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모습이고, 에덴 동산에서 희생 당한 어린 양의 모습인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십자가에서 예수님을 살리신 것과 같이 십자가의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자신의 모습이 바로 그런 존재라는 것을 부끄럽지만 극복하고 고백할 때,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는 은혜를 주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인간이 자신의 모습을 알기 이전의 상태, 곧 인간의 모습을 부끄러워하는 상태, 다시 말해서 사람이 스스로 선과 악을 알고 판단하는 죽은 자리에서 살리셨다는 것이다. 


사람이 스스로 선하고 악한 것을 판단하는 선악과를 먹은 자리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보기에는 멀쩡해도 시간이 가지 않아 죽은 시계처럼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이 두신 목적을 상실하여 죽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이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자신의 정체성을 회복하는 사람은 예수님을 보내신 것이 구원이 되는 것이다. 마치 에덴 동산에서 부끄러움을 가려주기 위하여 가죽이 된 어린 양과 같이 말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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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악과 (21) - 선악과와 십자가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4. 2. 26. 00:15 Writer : 김홍덕

베드로나 제자들 마저 예수님에 대한 이해는 어려운 것이었다. 하지만 이 어려움은 하기 힘들어서 어려운 것이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 되겠는가?'하는 믿음이 없어서 그런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이 연약하고 부족한 모습이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겠는가?'하는 반문이 사람을 망설이게 하기 때문이다.


중학교 3학년 때, 중등부 전도사님이 그 당시에 많은 학생들이 가지고 싶어했던 <파카45>라는 만년필을 설교 중에 갑자기 "이것을 아무에게나 줄테니 원하는 사람은 나와서 받아가라" 라고 했는데, 모두가 머뭇거리고 있었다. 나도 가지고 싶었지만 '설마'싶었는데, 교회에 잘 나오지도 않던 신입 회원이 나가서 받았다. 그리고 그것은 그 학생의 것이 되었다. 그건 그 자리에 있던 그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일이었던 것이다.



마치 그런 것처럼,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과 같은 삶을 사는 것은 그 누구라도 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40일 금식기도 하면 하나님께서 더 기뻐하신다면, 그것 못하는 연약한 사람은 어쩌란 말인가?, 또 세상에서 성공할수록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가르친다면, 모든 분야에서 1등이 아닌 사람은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이 되겠는가? 그래서는 하나님의 구원이 공평할 수 없는 것이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인간이기만 하면 그 모습 그대로, 일정한 주기로 배설도 해야 하고, 젊은 날에는 넘치는 정욕을 불사르는 시절을 보내기도 하고, 배고프면 훔쳐서라도 먹고 싶고, 나를 괴롭히는 것에는 화가 나는 모든 인간, 그 모습 그대로 가지고 있어도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는 세계가 하나님의 세계인 것이다. 바로 그것을 말씀하시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은 육신을 가지고 이 땅에 오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오시기 이전에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하나님이 기뻐하는 사람의 정체성은, 일주일에 2번 이상 금식하고, 창기와 세리와 놀지 않아야 하고, 언제나 성전에 가서 제물을 바칠 수 있는 경건한 삶을 살아야 했다. 그리고 그런 삶을 살수록 더 메시야에 가까워지고, 당연히 메시야는 그런 삶의 최고봉의 모습으로 올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직접 육신으로 오셔서 이 모은 의문과 그런 삶을 살지 못하는 사람들의 속박을 푸신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런 인간의 추한 모습들을 스스로 악한 것으로 규정했다. 왜냐하면 선악과를 먹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생각하는 인간의 모습,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에서 벗어나서 인간의 욕구와 연약함을 감추고 고상해질수록 더 선한 것이라는 이분법에 매몰되고 그것을 연단 시켜 왔던 것이다. 마치 바벨탑을 쌓기 위해 벽돌을 구워 단단하게 한 것처럼 말이다.(사람이 흙으로 만들어졌으니 벽돌을 구웠다는 것은 사람을 연단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범하는 모든 죄의 뿌리인 것이다. 즉, 인간의 존재 목적, 창조의 목적인 인간의 정체성이 회복되지 않는다면, 제 아무리 선한 일을 해도, 그것은 자수하지 않은 간첩이 기부하고 선행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즉, 무엇을 행할 것이냐? 이전에 나는 누구인가? 하는 것이 먼저인 것이다. 그 누구인가? 하는 것만 정해지면 그것에 맞게 행하는 것이 생명이다. 경례한다고 군인이 아니라, 군인이라서 경례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므로 이 모든 것이 선악과의 문제인 것이다. 사람이 선과 악을 안다는 것은 선한 것과 악한 것으로 인간을 판단한다는 것이다. 자기 자신과 사람의 모든 모양과 인간의 모든 관습들을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인간이 스스로를 악하게 규정하고 부끄러워한 모습,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오셨고, 십자가에서 인간의 정체가 무엇인지 보여주심으로 그것을 보고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는 사람은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 바로 선악과와 십자가의 관계이고, 에덴동산에서 바쳐진 양과 예수님의 구속인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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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람의 모습은 알고 보면 참 초라하다. 사람들이 치즈 케익을 먹을 때, 부스레기가 떨어질까 조심하는 모습을 본 적 있는가? 나이가 많던, 잘 살던 못살던, 그 얼마 안되는 부스레기에 조심하는 이유가 뭘까? 옷에 떨어진다고 큰일이 나는 것도 아니고, 그게 아까워서 일까? 여튼 사람은 그렇게 찌질하다. 그리고 서로가 감출 뿐 알고 보면 모두 다 똑 같다. 인간이라서, 또한 하나님께서 사람을 그렇게 만들어 놓았으므로......


잘 차려 입고 만나는 사람들은 예절이 있다. 밥 먹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한다. 뭐는 어떻다 등등. 마치 대변도 보지 않는 사람들처럼 고상하게 사람들을 대하면서 그 고상함을 깨는 것에 대하여 서로 얼마나 조심하고, 그것이 깨졌을 때, 불쾌해 하고 더 나아가서 상대를 예의 없는 사람이라고 매도하기도 한다. 이 모든 것의 뿌리는 고상하지 않으면 악한 것이라는 기준이 있어서 이다.


이러한 기준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한마디로 사람은 혼자 있거나 가족끼리 있을 때는 자유롭게 있다 상대가 바뀌면 태도가 바뀐다. 물론 그것이 나쁜 것은 아니다. 다만 그렇게 사는 기준이나 사람들이 갈등을 일으키는 그 모든 기준이 같기 때문이다. 즉 사람의 행동과 소유의 어떠함이 선한 것이 되기도 하고, 악한 것이 되기도 하는 것, 그 안에는 사람이 어떤 것은 선한 것으로, 어떤 것은 악한 것으로 간주하는 기준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기준으로 인간이라는 존재를 심판하고 그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것들을 감추려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것을 감추는 기준을 수립했다. 그것에는 예의라는 것에서 법이라는 법이라는 강력한 것 까지 다양한 단계지만 동일한 것은 인간의 나약함을 감출수록 선한 것이 되고, 그런 것을 잘 감추는 사람일 수록 훌륭한 사람이 되는 법 아래 있는 것이다.


예수님 역시 그랬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이 땅에 왔다고 하면서, 창기와 세리와 놀고, 사람의 연약함을 감추기 위하여 만든 법들을 무시하니 유대인들에게는 도저히 용납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 하나님의 아들은 정말로 화장실도 안 가는 그런 고상함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존재였다. 


그래서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하고, 길에 서서 기도하는 고상함이 모여야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로마의 군대와 맞서도 이길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왕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초라하게 인간의 실체를 드러내면서 십자가에 죽어가고 있으니 이것을 보고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고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는 일반 백성들 뿐 아니라 3년 동안 예수님을 따라 다닌 제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힐 것이라 하니, 다 도망갔고, 빌라도의 뜰 까지 따라 갔던 베드로도 여종의 질문에 "나는 그가 누구인지 모르겠고, 그가 나와 어떤 관계인지 모르겠다"고 말했던 것이다. 그것은 단순한 배신이 아니었다. 그것은 베드로와 제자들이 생각한 메시야와 전혀 다른 모습으로 죽어가는 예수님이 누군지 모르겠다는 것이고, 그 분과 자신의 관계가 무엇인지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즉 배신이 아니라 혼돈 속의 고백이었던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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