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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이별은?

Category : 잡동사니 Date : 2014. 6. 6. 13:28 Writer : 김홍덕

얼마전 LG 감독에 선임된 

양상문 감독에 대하여 김성근 감독이 

<거절에도 예의가 있는 사람>이라고 했다.


김감독이 

양감독에게 전화로 코치 제의를 했었는데,

다음 날 부산에서 서울로 비행기를 타고 와서

정중하게 거절했다는 일화를 들면서......


살아가면서 가끔씩 겪게 되는 이별들이 있다.

내가 이별의 주최자가 되기도 하고,

반대로 남겨진 사람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어떤 모양에 처해도, 이별은 아름답지 않더라

그러니까 <아름다운 이별>은 없어 보인다.


그래도 우리는 이별을 겪게 된다.

그리고 어떨 때는 떠난 이를 기다리기도 하고

또 가끔은 붙잡아 보기도 원망도 한다.

그리고는 지친다. 


그렇듯 살면서 이별이 아름답지는 않지만

적어도 예의는 있었으면 좋겠다.


떠난 이는 절 떠난 중이니 절을 원망 말고

남겨진 이는 뒷 통수를 가렵게 하지 말자.

어쩌다 돌아고자 할 때 감정 상하지 않게 말이다.


생각해보면 이별 전에 함께 한 시간들,

그때는 서로에게 정말로 진실하지 않았겠는가?

지금이야 설사 원수가 되었다 해도

그때는 아마 진실된 시간들이었을 것이다.

그 진실에 대해서라도 예의를 가지면 좋겠다.

그게 사람 사는 작은 품격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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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보는 바른 성경적 관점

Category : 김집사의 뜰/복음 담론 Date : 2014. 6. 5. 11:29 Writer : 김홍덕

신앙인에게 있어 <세상>은 어떤 의미인가? 기본적으로 신앙을 가진 모든 종교에 있어 세상은 신앙의 터전인 교회나 절과 같은 곳에 대비되는 곳이다. 좀 과한 비교이긴 하지만 선과 악의 이분법적 양자대결로 본다면 악의 영역에 해당하는 곳이라는 의미이다.





성경에서도 마찬가지로 세상은 바다와 같이 모든 것이 다 혼합되어 있고, 하나님께서 보실 때 <죄악이 만연한 공간>으로 정의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다 보니 성경에서는 세상을 애굽으로 상징되고, 또한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종살이 했던 것과 같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세상에서의 삶은 종살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분명히 어떤 종교든 그 안에서 본다면 세상은 경계의 대상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것은 세상의 철학과 의에 대하여 동의하는 삶을 살게 되지 않도록 하는 경계이지, 육신이 속해서 살아가는 삶의 터전이기도 한 세상을 무우 자르듯이 외면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분명히 성경도 이 세상을 애굽이다, 또한 세상의 모든 오물을 수용하는 바다와 같은 곳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안에 두신 이도 역시 하나님이시다. 그것은 육신은 세상에 속하는 것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기 때문인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고, 하나님이 보실 때 이 세상에서 사람이 속해 있는 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여기신다면, 예수를 믿는 순간 다른 공간으로 이동이 일어나야 할 것이다. 하지만 세상은 그렇지 않다. 그러므로 우리가 세상 가운데 살아가는 것에 대하여 정확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


사람들은  실재로 이런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에, 교회라는 장소를 신성하게 여기고 있다. 하지만 하나님은 무소부재(계시지 않는 곳이 없으신 분)의 신임을 생각하면, 장소적으로 교회라는 공간이 거룩하고 세상이 부정하다는 식의 사고 방식은 선악과적 사고 방식에 기인한 것이다.


세상은 우리 삶의 바탕이다. 그리고 이 세상은 우리가 복음이라는 것에 대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것을 드러내는 바탕이 되는 곳이고, 또 복음의 삶을 표현하는 그라운드이기도 한 것이다. 우리가 세상에서 거룩한 존재가 되는 것은 머리, 곧 생각과 의가 세상과 같지 않아야 하는 것이지, 육신의 삶이 구분된 공간으로 이동하고 몰입하라는 말씀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육신은 세상에 속한 삶을 제대로 살아가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세상을 사는데 그 삶이 구분되어야 하는 것이다. 즉 세상이 없다면 구분이 될 기준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은 복음을 표현하는 도화지와 같은 곳이다. 우리는 그 안에서 충실이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세상의 사고방식과 의와 철학과 가치관에 물들지 않고도 얼마든지 세상을 살아 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복음을 누리는 삶인 것이다. 한 마디로 소금물인 바닷 속에 물고기가 살지만 그 고기가 짜지 않음과 같이 우리도 살아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고, 복음을 신앙한다는 것은 세상과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구분되는 것이다.(거룩이란 구분된다는 뜻) 즉 도화지에 그린 그림은 도화지와 분리하는 것이 아니라, 도화지를 충분히 점유하면서 구분되는 것이다. 이것을 분리하면 그림이 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을 무조건 경멸하고, 외면하고, 하나님께서 만드시고 운영하는 가정이나 나라와 같은 구조를 단지 신앙이라는 이름 하나로 멀리하고 외면하는 것은 절대로 옳은 생각이 아니다. 이것은 세상의 법이 하나님의 법 위에 있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법을 모르면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이 세상에 오실 때, 세상 사람들은 잘 오지 못하는 곳에서 복음을 전하면서 "이 복음을 듣고 이리 와서 구원을 받아라"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당시 이스라엘에서 가장 천한 동네의 말 구유에서 나시고 나사렛이라는 천한 동네에서 사셨다. 이곳은 세상 사람조차 부정하게 여기는 곳이다.


예수님께서도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실 때, 그렇게 누구나 부정하게 여기는 곳에 오셨는데, 교회가 신앙이 생기고 하나님을 섬긴다고 세상과 공간적으로 분리하고, 개념적으로 분리를 도모하는 것은 성경을 잘 모르는 것이다. 이는 선악과적 개념이고 거룩의 개념을 모르는 것이고, 복음이 세상을 이기지 못할 것이라고 복음의 능력을 폄하 하는 것이다.


나는 이런 생각을 해 본다. <사람이 만든 종교는 사람이 뜸한 곳으로 가고, 하나님은 그 아들을 세상의 가장 천한 곳으로 보내심과 같이 하나님을 신앙하는 것은 할 수 있는대로 사람들 속으로 간다>라고 말이다. 아마 이는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세상은 분명히 부정한 곳이 맞다. 하지만 부정하다고 이곳을 버릴 수 없다. 이는 육신을 가짐을 부정하는 것이다. 이 육신이 아무리 산 속에 숨어 본들 세상 안인데, 어떻게 이 육신을 가지고 세상을 부정할 수 있단 말인가? 하나님의 말씀은 그것이 아니라, 의와 가치관에 대하여 세상에 속하지 말라는 것이다.



[교인의 성경 보기/주기도문] - (주기도문)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고 Ⅳ  



그리고 그렇게 세상에 속하지 않은 가치관과 의를 가지고 세상에서 살아서 그 구분됨을 나타내라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말 구유에 보내심이 사랑이셨듯, 우리가 그렇게 세상에서 구분되어 살면 그것이 사랑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심 같이,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세상 사람들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 것이라"하심과 같이 사람들이 우리의 삶을 보고 하나님을 믿을 것이다. 십자가 밑의 백부장 처럼 말이다. 이것이 바로 세상이라는 도화지에 하나님을 그려내는 것이다.


신앙이 투철해지고, 순도를 높이려고 할수록 세상에서의 삶을 외면하고 등안시 하고 격리적인 삶을 도모하기도 한다. 나도 역시 그런 세월을 제법 오래 살았다. 하지만 그것은 성경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이었다. 세상은 분명 부정하지만, 외면하는 곳이 아니라 우리가 삶으로 살아 내어 그 삶으로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도화지와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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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성장과 교훈, 그리고 안다는 것

Category : 김집사의 뜰/복음 담론 Date : 2014. 5. 29. 17:17 Writer : 김홍덕

성경을 읽고 공부하고, 또 그 뜻하시는 바가 어떤 것인지 알아가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신앙의 한 면이 아닌가 싶다. 어려서부터 그렇게 신앙이라는 것을 삶의 한 부분 혹은 그 이상으로 알고 살면서 늘 가졌던 생각이 있는데 그것은 <"이 끝은 어디란 말인가?"> 하는 것이었다.


교리에 매몰된 신앙 안에서 보면 마치 구원이 신앙의 종착점인 것 같이 가르치고 그렇게들 살아가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기독교의 신앙은 구원이라는 그것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구원이 궁극의 목표가 되면 향간에 문제가 되고 있는 구원파와 같은 정신 무장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게 삶의 전부가 되니 말이다.


이 블로그를 통해서 많이 이야기 하지만, 태초라는 것은 이 물리적인 세상이 열리는 것에 대한 말씀이 아니다. 물론 그런 시작이 있었겠지만, 21세기를 사는 사람은 그 누구도 본 바 없고, 알기 힘든 일이다. 그런데 우리가 늘 창세기를 대하고 공부하는 것은 오늘 나와 상관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는 것이다.


오늘 나와 상관이 있다는 것은 나에게 어떤 태초가 있어야 할 것이다. 육신적으로 본다면 태어나면서 우리는 육신의 삶을 시작하는 나의 태초가 시작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태초는 나에게 혹은 우리 중 어느 한 사람에게 하나님의 세계가 열리는 시점을 태초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구원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세계가 자기 안에 열리는 시작일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은 신앙의 절대적 목표가 아니라 하나님의 세계가 한 인생의 가치관에서 시작되는 시점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이 태초이고 그것이 구원인 것이다.


다만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면, 하나님의 세계가 열리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하나님이 옳다고 여기시는 가치관의 세계가 열리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저 하나님께서 육신의 문제를 구할 수 있는 자격이라는 것이 그리스도인인양 사는 것은 미안하지만 구원이라 할 수 없다.


여튼 이렇게 하나님의 세계가 시작이 되었다면 그러면 그 끝은 어디란 말인가? 그러니까 우리가 어디까지 살아가고 어떤 경지에 이르러야 시험을 통과하듯 신앙의 상태가 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있는 것이다. (이건 구원이 목표인 신앙 세계에서는 고민거리도 아니다.)


한마디로 우리의 신앙이 어떻게 어디까지 자라야 그리스도의 분량이 되는 것일까? 만약 어떤 수준에 미치지 못한다면 구원도 다 백지화 된다는 것인가? 그리고 천국에서 상급은 어떻게 된다는 것인가? 하는 문제들은 교회 안에 늘 있는 문제이다. 하지만 이런 문제들은 정상적인 개념이 아닐 수 있다.


신앙이라는 것이 자라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에 대하여 어떤 등급이 있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등급이라는 것은 객관적인 등급을 말하는 것이다. 신앙을 행여 평가해야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분량에 얼마나 충실한가'> 하는 문제 그 뿐이다.


다시 돌아와서 우리의 신앙이 어디까지 자랄 것인가? 하는 문제는 일면 답이 없다. 나는 그것에 대하여 결혼이라는 것을 가지고 한번 생각해보고자 한다. 사람은 어지간하면 다들 결혼을 한다. 그래서 결혼이라는 것을 잘 안다. 심지어 하지 않은 사람도 안다고 착각하는 것이 결혼이다.


생각해보면 구원이나, 또 어떤 말씀 하나, 그러니까 성경의 한 말씀을 알게 된다는 것은 결혼식과 같은 것이다. 이제 구원을 알았고, 그 말씀을 결혼을 해서 결혼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구원도 시작이고, 말씀이 자기의 것이 되는 그 순간도 시작이라는 것이다.


이는 성경을 기록한 유대인들의 <안다>라는 개념과도 같은 것이다. 유대인들에게 '여자를 안다'는 것은 여자와 동침한 적이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미혼자가 결혼이라는 제도를 알고 있듯, 어떤 여자의 이름이나 얼굴을 아는 것을 안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아는 것이고, 또한 이것은 시작이다.


그러므로 구원도 그렇고 어떤 말씀을 아는 것도 그렇다. 그러므로 신앙이라는 것은 그 시작에서 부터 어떻게 자랄 것인가 하는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결혼 부부들의 삶이 참 다르다는 것을 우리가 보는데, 그와 같이 신앙이라는 것이 어떻게 삶으로 나타나는지 또한 그렇듯 다르다는 것이다.


어떤 부부는 평생을 너무 사랑하면서 살아서 영화의 주제가 될 정도로 살기도 하고, 어떤 부부는 몇 일을 못 가서 이혼을 하기도 한다. 이는 결혼을 알고, 그 결혼을 얼마나 충실한가 하는 것에서 차이가 나는 것이다. 물론 이혼이라는 것이 불가피할 수도 있겠지만, 돈이나, 외도와 같은 것은 다 결혼에 충실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니까 말씀으로 보면 깨달은 바를 충실이 이행하며 산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상대에 대한 삶 이외의 문제가 더 중요해졌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혼을 한 사람도 미혼자에 비해서는 분명히 결혼을 아는 사람이다. 성공적인 결혼의 삶을 살았는가 하는 것은 다른 문제지만, 분명히 그 사람들에게 결혼은 경험하고 체휼된 것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신앙이란 끝이 없는 것이고, 절대적인 기준이 없는 것이다. 마치 결혼처럼. 어떤 부부는 그들의 사랑을 위하여 취미를 즐기고, 어떤 부부는 또 멀리 떨어져 살기도 하고, 또 어떤 부부는 남이 보기에 민망할 정도로 애정을 과시하면서 살기도 한다.


사실 결혼이라는 제도를 유대인의 관점에서 본다면, 남자라는 내용과 여자라는 형식이 만나는 것이다.  이는 성경적인 관점이기도 하다. 실제로 남자들은 명분을, 여자들은 방법과 형식을 중요하게 여긴다. 이는 하나님이라는 내용이 사람이라는 형식과 결합이 되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사>하는 사건의 예표이기도 하다.


신앙이라는 것도 하나님의 의가 육신이라는 형식의 삶을 가지 사람에게 어떻게 하나가 되어 나타나는가 하는 것이 바로 신앙인 것이다. 이것은 결혼과 동일한 모양이다. 그래서 성경에서 예수님을 신랑으로 교회와 성도들을 신부로 표현하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라는 의와 내용이 사람이라는 형식을 통해서 드러난다는 것이다.


이렇듯 결혼이라는 것을 통하여 신앙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볼 때, 구원이라는 것도, 또 성경의 어떤 말씀을 깨닫는 것은 결혼을 하는 순간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어떤 객관적 기준에서 자람이 있고, 성장을 평가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은 분명한 것이다.


부부는 이렇게 결혼을 시작으로 그 삶과 사랑을 표현하고 누리며 산다. 이는 말씀도 신앙도 같은 것이다. 그것에는 절대적인 방법이나, 표준적인 방법이 없다. 그러므로 신앙이 자란다는 것도 다 자신들의 분량의 문제이다. 그 분량 안에서 얼마나 내용이 형식으로 나타나는가 하는 것이 바로 성장이고 그리스도로 자란다는 개념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도 <"다 사도나 선생이겠느냐?">라고 했고, 또 몸의 비유를 통해서 다 눈이나 손이 될 수 없다고 한 것이다.(고전 12장) 그리고 이것은 또한 다른 사람의 신앙 생활을 평하고 나무라고 하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오직 방법이 있다면, 예수님이 사람을 제자를 꾸중한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것을 다 이루셨다 하심 같이, 자기의 결혼 생활, 자기가 신앙을 깨닫고 시작한 삶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아는 것이고 자라는 것이다.


이는 결혼 안에 있는 부부생활이라는 생활이 모두 알지만 또한 누구나에게 비밀이듯이, 신앙도 그런 것이다. '너희 부부의 성생활이 왜 그러냐?' 하지 않음과 같이 '네 신앙이 왜 그 모양이냐?', '왜 자라지 않느냐?'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냥 자기가 교훈이 되게 사는 것,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법인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이 자란다는 것은 구원으로 보면 구원의 시작에서 그 구원을 받은 사람을 보고 '나도 저렇게 살아야겠다'는 마음이 들게 하는 것이고, 신앙 안에서 교훈도 그와 같이 자기의 삶을 살아갈 뿐인데 그것을 보고 '나도 저렇게 살아야겠다'는 마음이 들게 하는 것이 교훈인 것이다. 이는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신앙의 자람은 이런 것이다. 또한 교훈도 이런 것이다. 하나님의 의와 같은 내용이 삶이라는 형식으로 얼마나 잘 표현되어서 그것을 보는 사람이 그렇게 살고 싶어지도록 하는 삶과 과정, 그것이 자라남이고, 그것이 그리스도의 분량이 이르는 것이다. 생각해 보라 그 세계의 무궁함이 얼마나 끝이 없을지...... 그리고 그것이라면 또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라는 것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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