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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심은 하나님의 아들은 다른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는 존재로 보내신 것이 아니라, 정말 보잘 것 없는 연약한 인간 본연의 모습, 즉 아담은 부끄럽게 여긴 모습을 자신의 모습으로 인정하는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을 말씀하시기 위하여 베들레헴 구유에 나시게 하셨고, 가난한 목수의 아들이고, 빈민촌이었던 나사렛 출신이란 신분으로 보내신 것이었다. 그건 누구나의 공통 분모가 될 수 있는 것이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오늘 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할 때, 그 분이 보여주신 기적들, 즉 우리가 할 수 없는 것들을 일으키신 사실을 믿음으로 우리가 믿는 신의 차별성에 나를 귀속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자랑으로 삼는 신앙을 가진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의도와는 분명히 다른 것이다.


예수님께서 기적을 일으키심은 마치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것과 같은 기적이다. 그러하기에 하나님께서 이 온 우주를 만드셨지만 결국은 사람을 만드심으로 마치시고 안식하심은 그 창조의 목적이 사람에게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듯, 예수님의 모든 기적도 결국은 십자에게 달리셔서 보여주신 사람의 모습, 하나님 아들의 모습을 보여주심이 그 오심의 목적인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모습은 정말 초라하다. 우선 십자가라는 곳은 죄인의 자리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이다. 무엇에 대하여 죄인인가 하면, 선과 악을 판단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을 선한 것과 악한 것으로 구분하고, 하나님이 주신 인간의 정체성을 부끄러운 것으로 여긴 유대인들과 로마인들의 관점에서 볼 때 죄인인 모습이라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이것은 신앙에 있어 아주 중요한 관점이다. 우리가 죄인이 된 것은 우리의 생각과 행동으로 인함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실 때 우리의 본성으로 주신 것에서 비롯되기에 그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죄로 여기는 선악과의 관점에서 죄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오히려 선악을 판단하는 마음에서 사람들의 모든 범죄가 비롯된다. 서로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면서......


그것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죄인이 되신 이유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 것 때문이고, 또 하나는 자신을 유대인의 왕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신성 모독과 반역죄인 것이다. 사람이 가진 선악과의 관점으로 볼 때, 도무지 하나님의 아들이라 할 만한 것이 없고, 눈 닦고 봐도 왕이 될만한 건더기 하나 없는 그런 꼴과 신분으로 율법은 어기고, 성전에서 상이나 뒤집고, 창기와 죄인과 먹고 마시는 주제에 하나님의 아들이라, 유대인의 왕이라 했기에 용서할 수 없어서 십자가에 못 박히는 죄인으로 고소하고 그렇게 죽인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죽인 것은 선악을 판단하는 관점이다. 아담의 옷이 된 양의 운명과 같이 말이다. 이것이 바로 사람이 선악과를 먹고 죽게 된 것을 구하신 예수님의 구원의 역사인 것이다. 우리 대신 벌을 받으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부인하는 우리의 정체성이 우리의 진실한 정체성이고, 그것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심히 좋았던 모습이며, 하나님께서 어떤 존재가 하나님의 아들인지 보여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그 모습을 보고 우리의 정체성을 알게 될 그때에 구원이 나의 것이 되는 것이다. 십자가 밑의 백부장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십자가 밑에 있었던 백부장은 신비한 기적을 봤기 때문에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던 것이 아니다. 선악을 판단하는 관점, 유대인들의 관점으로 본다면, 백부장이 못 박은 예수가 자기 힘으로 내려오는 것을 보고서 하나님의 아들이라 고백하는 것이 정상이겠지만 그게 아니라,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면 그곳에서 내려오라'는 조롱을 들으면서도 죄인으로 죽어가는 그 모습을 보니, 그것이 하나님의 아들의 모습이라는 것을 봤다는 것이다. 그것은 자신의 모습이 바로 그 모습과 같은 것이라는 것을 보았기 때문인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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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악과 (17)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4. 2. 22. 11:16 Writer : 김홍덕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부끄러움을 양의 가죽으로 가렸다. 사람은 자신이 연약한 것을 부끄러워했는데, 그 연약한 부끄러움을 가리는 것에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연약한 양의 가죽으로 입혔던 것이다. 연약해서 부끄러워하는 것을 가리려면, 사자 가죽이나, 호랑이 가죽, 아니면 금과 같은 것으로 옷을 입어야 할 것 같은데, 오히려 그 반대인 양의 가죽을 입히신 것이다.


성경에서 양은 언제나 연약함의 상징이고, 순종의 상징이고 무엇보다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다시 말해서 연약한 그리스도가 사람이 스스로 부끄러워 하는 것을 가린다는 것이다. 연약한 그리스도라는 것은 그리스도가 육신에 관하여 제사장의 아들이나 황제의 아들로 온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부끄러워 하는 모습으로 오셔서 다시 한번 인간이라는 연약한 모습으로 아담이 부끄러워 한 인간의 모습을 가리셨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 부끄러움이 바로 사람의 정체성이요 그리스도의 정체성이고, 그런 연약함이 있어야 그리스도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을 표현하는 존재이므로, 결론적으로 사람이 가진 이 연약함이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바탕이라는 것이다.


사람들의 종교 생활을 보면 인간이 가진 갖은 욕구를 절제하면 할수록 더 경건한 사람이 되는 것으로 보인다. 식욕을 금하고 40일 금식 기도를 한다면 신앙이 아주 좋은 사람이 되고, 신부나 수녀처럼 성욕을 참고 수도한다면 이를 성직자, 곧 성스러움이 그 직업인 사람으로 인정한다. 이것이 바로 아담이 부끄러워한 모습인데도 지속적으로 그리 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선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그렇게 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경건하지 못하고 때로 악한 사람이라는 의미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 그 본성으로 두신 것에 대하여 사람이 선하고 악한 것으로 규정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선악과다. 그러므로 이것을 돌이키지 않는 신앙은 선악과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앞에서 나는 이 선악과의 문제를 종교인들이 간과한다고 했던 것이다. 진정한 신앙, 곧 자신이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심령이 된다는 것은, 나의 나 됨을 부끄러워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인간의 가장 부끄러운 모든 모습을 보여주셨는데, 그 모습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존재라고 하나님께서 영광스럽게 여기셨기 때문이다.


어떤 각도에서 보면 이것은 신앙의 근간에 관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무엇을 믿는 것인가?의 문제가 된다는 것이다. 즉,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하지 못하는 기적을 일으켰다는 점에서 우리와 달리 하나님의 아들이고, 그 분의 사랑이 우리가 지은 죄에 대한 벌을 대신 받으신 그런 구세주로 믿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의도는 사람들에게 사람과 다른 존재, 일반 사람은 할 수 없는 것을 행하는 존재를 보내서 하나님의 아들이 무엇인지 보여 주시려 한 것이 아니라, 우리와 똑같은 사람을 아들로 보내심으로 그와 동일한 육신을 가진 사람들이 자신도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하여 우리와 전혀 다를 바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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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악과 (16) - 무화과 나뭇잎과 유대인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4. 2. 22. 09:08 Writer : 김홍덕

그러므로, 선악과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 자신을 비추어 우리가 스스로 선악 간에 판단하는 존재라는 고백을 할 수 있어야 하고, 또한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면서 인간이 우리의 모습이 추하고 더럽고 부끄럽게 여겨 그것을 내 삶에서 분리하는 노력을 할 것이 아니라, 그런 모습이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음을 감사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다시 한번 이 선악과의 문제는 우리 신앙에 있어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어떤 죄인인가 하는 것을 말씀 하시는 것이라는 것을 분명히 해야한다. 즉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인 것은 행위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의 문제라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마음에 더러운 생각을 가진 것을 회개하고, 또 형제를 욕한 것과 도적질과 같은 행동을 회개하지만, 진정한 회개는 하나님께서 주신 자기 육신의 것을 더럽게 여긴 그 기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회개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선악과에 대하여 기록하여 놓으신 이유인 것이다. 


그리고 이 선악과로 인하여 사람이 자기의 모습을 부끄러워하는 것을 대속하기 위하여 어린 양을 잡고 그 가죽으로 부끄러움을 가리셨는데, 이것을 잘 살펴보면, 옷이라는 것은 그 사람의 신분을 표현하는 것인데, 양의 가죽으로 입혔다는 것은 양과 같은 존재라는 것이고, 이 양은 그리스도를 말씀하는 것이므로, 사람을 그리스도와 같은 신분으로 입히셨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이 또한 우리가 선악과에 대한 말씀을 보고 우리가 스스로 선과 악을 판단하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을 알고,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어떤 의미인지 알게 되듯,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면서 우리가 어떠한 구속을 얻은 것인지 알 수 있게 하신 하나님의 섭리가 바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이 되는 것은 죄는 사람이 짓고, 벌은 예수님이 대신 받는 그런 시스템이 아니다. 먼저는 예수님은 우리의 행위에 대한 구속을 하기 위하여 오신 분이 아니다. 행위에 관해서 라면 예수님도 그리 떳떳한 분은 아니다. 지금은 우리가 다 예수님을 신앙하는 입장이라 그렇게 말하는 것이 다소 불경스럽게 비칠지 모르지만 예수님 당시의 관습과 문화 안에서 보면 예수님은 아주 불량한 한 사람이었다. 행위에 관해서 라면 말이다.


당시, 종교와 정치가 분리되지 않은 시대이고, 유대교의 율법이 사회의 근간이던 시절이었기에, 율법을 지키지 않는 것은 지금으로 치면 법과 예의와 에티켓과 같은 모든 것을 지키지 않는 사람과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랬던 것이다. 그리고 그래서 십자가에 못 박혔다. 


다시 말해서 아담이 스스로를 부끄러워해서 무화과 나뭇잎으로 자신을 가리려 했던 것 같이, 유대인들도 율법을 행함으로 인간의 더러운 것을 감추려 했던 것이다. 물론 그 더럽고 추하다는 기준 역시 자기 안에서 나온 것이지만 말이다. 재미있는 것은 무화과 나무는 유대인의 나무이다. 이는 곧 율법을 지키는 사람들을 말한다. 아담도 무화과 나무로 인간의 부끄러움을 가렸는데, 유대인들도 율법으로 사람을 부끄러운 존재로 규정하고, 그래서 율법으로 경건하게 살아서 그 부끄러움을 감추고자 했다. 이건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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