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 2619

선악과는 그렇듯 사람을 볼 때, 선한 것과 악한 것으로 구분하는 관점이다. 이는 사람 자체를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으로 구분하는 것과 또한 한 사람의 행동에 있어서 선한 것과 악한 것을 구분하는 것 모두 다를 포함한다. 사실 이는 어쩌면 어쩔 수 없는 것일지 모른다. 그러나 사람이 그런 관점을 가진 것은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사람이 세상에서 세상의 가치관을 가지고 보기 때문에 그렇다.


사람이 그런 관점을 가지지 않고 사람을 대하는 대표적인 공동체가 가정이다. 가정이라는 곳은 사회적인 역량을 기준으로 잘하는 것과 못하는 것을 구분함이 덜하다. 법적으로도 가족의 범죄를 은닉하는 것은 무죄다. 이것은 세상적인 기준으로 그 구성원의 선과 악을 판단하는 것 보다, 가족이라는 연결 고리가 더 우선한다.


그래서일까? 사람들은 가정을 가장 원초적인 안식처로 인식한다. 그리고 어려운 상황 중에서도 가정은 늘 지켜내려고 한다. 사람이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람을 선하고 악한 것으로 구분하고 판단하는 세상적 관점을 피하여 쉴 수 있는 공동체의 안식을 사모하고 기억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역설적으로 본다면, 사람은 서로를 선하고 악한 것을 판단하는 관점에서 벗어나는 것을 갈망하고 그런 상태에서 안식하는 존재라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아마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은 부끄러워하는 사람을 만드시고 만족하시고 안식하셨던 것과 연관이 있는 것이라 생각이 된다. 즉 사람은 사람 그대로의 모습을 인정 받을 때 평안을 느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사람을 볼 때, 그 사람의 선한 것은 무엇이며, 그 사람의 악하고 연약한 것은 무엇인지 파악하는 것을 불편해 한다. 비록 그것이 의도적인 것이 아니라고 해도 말이다. 그렇다면 사람은 그런 판단이 없는 자리를 편하게 여긴다는 것이고, 이것은 우리가 사람을 어떻게 대할 것인지에 대한 해답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셔서 보여주신 것이기도 하다. 즉,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보여주신 것이 사람이 사람을 선하고 악한 것으로 구분하는 것이나 판단하는 것에서 떠나는 것을 말씀하시고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것이 그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인간의 참 모습이 어떤 것인지, 사람의 정체성이 어떤 것인지 보여주셨다.


그러므로 선악과의 문제가 해결되는 사람, 즉 구원을 받은 사람의 모습은 사람을 사람 그 자체로 인정하는 사람이라는 의미이다. 사람이 사람 그 자체로 인정한다는 것은, 사람을 볼 때, 돈이 없다고 멸시하지 않는 것이고, 욕망이 있다는 것이 악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고, 신앙이 없다고 죄인 취급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게 쉬운 일이었다면 하나님의 아들이 땅에 까지 와서 죽임을 당할 이유가 없었을 테니까......


(계속)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

선악과 (43) - 선악과는 관점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4. 3. 19. 10:21 Writer : 김홍덕

우리는 간혹 드라마에서 연인 중 남자가 여자에게 자신의 부족한 모습은 감추고 다가가는 경우을 각색한 것을 볼 수 있다. 더욱이 그 이유가 악한 것에 있지 않고, 자기의 연인이 실망하지 않기를 바라고 위하는 마음으로 그러는 장면을 간간히 볼 수 있다. 그 때 우리는 대부분 안타깝게 그 장면을 본다. 그건 옳지 않다고 생각하면서.


선악과는 그렇듯 우리 삶의 전반에 늘 상존하는 문제이다. 연인이든, 가족이든 솔직하게 있는 그대로 말하는 것이 두려운 것은 먼저 말하고 싶지 않은 내용이나 사실에 대하여 자기 스스로 먼저 부끄럽게 여기고 악한 것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선악과는 그런 것이다. 사람이 악해서가 아니라, 사람의 연약함이 어떤 기준 앞에서 악한 것이 되는 것이다. 즉 사람은 그대로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신 존재이다. 그런데 사람이 세상의 기준과 세상에서 배운 자기만의 기준으로 볼 때, 사람의 한 부분이 악한 것이 되는 것이다. 즉 사람이 선하고 악한 것이 아니라, 사람을 선하고 악하게 보는 것이 있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선악과인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있는 그대로를 볼 수 있어야 한다. 심지어 사람이 자랑질하고 교만한 것도 사람이라서 그렇다. 그러므로 그렇게 하는 본성 자체가 악한 것이 아니다. 다만 어떤 것이 선한 것이라고 주장하기 위하여 그렇게 하기 때문에 문제인 것이다. 선을 주장한다는 것은 그 이전에 이미 선한 것과 악한 것을 구분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사람이 화를 내는 것도 사람이라서 그런 것이다. 화가 나는 본성도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필요하다고 생각하셨기 때문에 사람에게 본성으로 주신 것이다. 다만 어떤 일에 화를 낼 것인지가 문제인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화를 내시는 부분에 화를 내어야 하기 때문에 그런 본성이 있는 것이다.


즉, 화를 내는 것 자체가 문제가 되거나 사람의 악함이 아니다. 어떤 일에 그것이 사용되어지는 것인지? 그것이 본질인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의 모든 본성은 하나님께서 목적하신 대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것에 사용되어지면 예수님처럼 성전에서 화를 낼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화내는 그 자체가 악한 것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선악과를 먹은 모습이지만, 세상적 관점, 도덕적 관점에서 보면 그래서는 안될 것 같은 모습이라도 하나님을 나타내기 위하여라면 오히려 그것이 선한 것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화를 내신 것을 두고 화 냈다는 사실 자체로 악한 것으로 볼 수 없는 것도 이 때문이다.


선악과는 어떤 각도에서 보면 과일이 아니라 관점이라고 볼 수 있다. 즉 사람이 선악과를 먹어서 죄인이 된 것이 아니라, 사람을 선하고 악한 것으로 구분하는 시각을 가진 것이 죄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아담과 하와가 먹은 선악과이다.


(계속)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

선악과 (42) - 선악과와 영지주의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4. 3. 17. 10:56 Writer : 김홍덕

반면에 이와는 달리, 사람의 부끄러움에 대하여 어쩔 수 없는 것이라는 관점을 가지고 있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영지주의다. 그러니까 이 육신의 부끄러움은 감출 수 없는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그 대안으로 육이 아닌 영만 정결하면 그만이라는 생각을 하는 것이 바로 영지주의다.


언뜻 보기에 영지주의는 방탕한 것 같지만, 그렇게만 볼 수는 없다. 사실은 개인이라는 정체성의 성결, 그러니까 인간이라는 부끄러움을 감추어야 한다는 것에는 동의하지만, 그것이 불가능하니 그저 영(靈)만 경건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아예 부끄러운 육신은 구원의 대상도, 또한 하나님이 관심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영지주의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보는 관점 역시, 예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십자가가 별 게 아니었다는 식의 생각을 한다. 하지만 이런 생각의 이면에 사람의 육신이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영혼이 구원을 받는 것이기 때문에 영만 성결하면 되고, 고백만 있으면 되지 육신의 삶이 경건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지주의와 율법주의는 어떻게 보면 뿌리는 같은데, 반응이 다른 것이다. 즉, 사람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것에는 동의하는데, 율법주의는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육신이 각종 율법을 지켜 행함으로 인간의 부끄러움을 가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고, 영지주의는 인간의 구원이 육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영혼에 국한된 것으로 규정하는 차이만 있다는 것이다.


즉, 영지주의는 사람의 육신은 악한 것으로 반면에 영은 선한 것으로 분명하게 구분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기준은 당연히 육신의 부끄러움에 대한 기준이다. 즉 그것을 악한 것으로 규정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시도는 역시 사람을 선과 악으로 분리하여 규정하는 시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즉, 선악과를 먹어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선악과를 먹은 사람은 어떤 형태든 사람의 육신에 대한 판단을 한다. 그리고 그 판단은 동일하게 육신을 악한 것으로 규정한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그 악한 것을 제하기 위하여 성경을 행동에 대한 지침으로 받아서 그것을 지키면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어떤 부류는 악한 것을 포기해 버리는 것이다. 즉, 영지주의나 율법주의나 동일하게 육신을 부정하고 악한 것으로 보는 것은 동일한 것이다.


그러므로 선악과는 사람의 육신을 악한 것으로 보고 또한 어떤 선한 기준을 정립한 다음, 그것을 선으로 규정하고 끊임없이 그것에 도전하려 한다. 그 도전에는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부와 명예에서부터 종교적인 신비함이나 경건함까지 다양하다. 그런 모든 것은 율법주의고, 반면에 육신은 구원의 대상이나 하나님의 관심의 대상이 아니라고 포기하면 영지주의가 되는 것이다.


이런 모든 반응들은 하나님께서 그 성품을 나타내시기 위하여 만드신 육신으로 삶을 사는 인간에 대하여 사람들이 맘대로 규정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규정하는 이유는 사람들이 선을 추구하여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에서 비롯되었다. 그것을 뱀은 하나님과 같이 되는 것이라고 꼬였던 것이다. 즉 사람이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마음 때문에 이 육신을 악한 것으로 규정하고, 자신들이 정한 선의 기준에 도달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사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 육신의 삶을 그런 것에 사용하게 두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이 육신의 삶을 주신 것은 이 육신의 삶의 어떤 부분은 악하고 반대로 또 육신이 어떻게 되어야 선해진다는 생각을 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이 삶 자체를 감사함으로 받고, 아담을 보시고 심히 좋았다고 하신 하나님과 같이 이 삶을 기쁘게 살아가는 것이 창조의 목적인 것이다.


(계속)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