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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의 홍수 (3) - 네피림(Nephilim)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4. 6. 18. 16:22 Writer : 김홍덕


Nephilim figures
Nephilim figures by Leonard John Matthews 저작자 표시비영리동일조건 변경허락  
<네피림은 거인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신앙의 한 단면을 말씀하시는 것>



네피림에 대하여 사람들은 '성경의 최대 난제' 중의 하나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도 그럴 것이라 생각이 되는 것은 실존하는 거인들을 볼 수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이 된다. 물론 '하나님의 아들들'이나 '사람의 딸들'이 무슨 의미인지도 모르기 때문에 더욱 그럴 수 있다 생각이 된다.


사람들에게 네피림과 같은 성경 속의 말씀이나 표현이 어려운 것은, 자기 안에 그것에 대응되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눈을 본 적이 없는 아프리카 사람들에게 '겨울에 내리는 눈'이라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일까를 생각해 보면 된다.


그러니까 성경은 내 안에 말씀과 연결되는 것이 없으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성경의 난제라는 것이 생기는 것이다. 즉, 네피림이라는 것이 어렵게 여겨진다면, 그 사람은 분명히 성경을 문자로 읽고 있는 사람이고, 성경에 기록된 것이 실재 사건이라고 믿는 것이 믿음이라고 여기는 사람이고, 이분법적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성경이 오늘 나의 이야기로 읽혀진다면, 성경에 나오는 사건에 대하여 나의 고백이 뒤따를 수 밖에 없다. 네피림이라는 것 역시 그렇다. 하나님을 믿는 것에 사람의 방법이 아름답게 보여서 그런 방법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자기의 모습을 본 적이 있다면, 네피림은 아무런 난제도 아니다.


왜냐하면 네피림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아들들'로 표현된 하나님을 표현하는 마음이 '사람의 딸들'로 표현된 사람이 만든 문화나 과학이나 재화로 꾸며지면 좋을 것이라 생각하여 화려해진 신앙의 모습을 두고 거인이라고 표현한 것이기 때문이다.


아들이라는 것이 육신으로 낳은 남자 자식이기도 하지만, 성경이 의미하는 것이 '그 부모의 의가 육신으로 표현된 자식'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것들이라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반면에 '사람의 딸들'이라는 것은 성경적 관점으로 볼 때, (성)씨를 가지지 않은 사람을 여자나 딸이라 하듯이 하나님의 의를 가지고 있지 않는 사람들을 여자의 격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딸들'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가지지 않은 방법들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성경 전반에 걸쳐서 나오는 남자와 여자를 이해하는 것에 도움이 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네피림(Nephilim)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에 사람의 방법을 동원한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섬기는 것에 돈이 있으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나, 하나님을 섬기는 것에 고상하면 좋겠다는 것이나, 세상에서 성공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다 네피림이라는 것이다.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 세상에서 볼 때 고상 것이나 부유한 것이 바로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보니 '하나님을 섬기는 것에 저렇게 하면 좋겠다'라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사람의 딸들을 아내로 취했다는 말씀인 것이다.


이것은 실로 엄청난 위대함을 낳았다. 지금의 교회를 보자. 왜 교회가 그렇게 화려해야 하는지 설명할 방법이 없다. 오직 유일한 이유가, '기왕이면 다홍치마'라는 논리이다. 다시 말해서 좋은 것으로 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람의 딸들을 취한 하나님의 아들들의 모습인 것이다.


또한 개인의 신앙도 그렇다. "서울시를 하나님께 바치겠다" 같은 말들이 그렇다. 서울시는 하나님께 바치고 말고 할 것이 아니다. 정말로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기에 굳이 바칠 이유도 없고, 또한 하나님께서 그런 것을 좋아라 하시는 분이 아닌 <존재의 신이신 여호와>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렇게 하면 위대해 보인다. 그것이 네피림이다. 금식기도나 전재산 헌금과 같이 사람들이 듣거나 볼 때 "와~~!" 할 수 있는 것들이 다 그런 것이다. 물론 신앙의 여정에 있어 그럴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이라 생각하고 하면 다 네피림과 같은 것이다.


네피림은 노아 시절에 실존했을 존재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타락한 천사(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이 결혼한 결과물이 아니다. 설령 그렇다면 2,000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무관한 말씀이고 노아의 홍수는 그저 신화나 동화 같은 이야기일 뿐이다. 그렇다는 것은 그것을 사실이었다고 증명하거나 믿는다고 신앙이 좋은 것은 될 수 없다. 과학적 능력이 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라면 몰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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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eleton Find 2 by barracuadz 저작자 표시비영리동일조건 변경허락



네피림은 어떤 거인들의 이야기가 아니다. 오늘 내가 하나님을 믿는 것에 어떤 마음으로 믿는가에 대한 거울과 같은 말씀이다. 내가 오늘 존재의 신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신앙하는데 있어, 나의 어떤 행위나 감투나 고상한 모습이나 화려한 재화가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것이 다 네피림이고, 이러한 것은 노아의 홍수와 같은 세례를 거쳐야 하는 회개의 대상이라는 것을 깨닫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말씀인 것이다.


변화산에 올라간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는 변화된 예수님과 또 엘리야와 모세를 보았다. 그러자 베드로가 '여기가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고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라고 날 뛰자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는 하늘의 소리가 들려 눈을 떠 보니 예수님만 있었다고 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에는 심지어 모세도 엘리야도 필요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모세가 받은 돌판에 새겨서 사람이 먹을 수 없는 율법이나 아무나 할 수 없는 엘리야의 기적 같은 것도 필요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과 결합하면 좋을 것이라는 것은 다 하나님께서 싫어하신 네피림이기 때문이라는 것이 또한 성경의 말씀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말씀을 읽을 때에, '네피림이 뭐지?'라고 의문을 가질 것이 아니라, "나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에 있어 세상적인 것이 있으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가?"라는 솔직한 질문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내 안에 있는, 또한 오늘날 교회의 모습에서 네피림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진정한 고백을 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알래스카를 다녀온 아프리카 사람이 될 것이다. 그러니까 '눈'이라는 것이 전혀 난제가 아닌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그것처럼 성경의 말씀도 그렇게 알아 가는 것이다. 그렇게 나의 이야기로 들릴 때 성경은 절대로 어려운 말씀이 아닌 내 일기와 같은 책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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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 홍수가 발생하게 된 계기가 무엇인가 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그것을 아내로 삼았다는 것이 출발점이었다. 아내로 삼았다는 것은 그 베필로 더불어 나의 정체성과 의를 표현한 아들을 낳겠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이점이 중요한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고 살아야 하는 사람 그리고 사람 안에 누구나 가지고 있고 그렇게 살아야 하는 본성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아들은 그 아버지의 의가 성육신된 존재이기 때문이고, 또한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이미지가 형상화된 삶을 살도록 지음 받은 인간이기에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면서 사는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아내로 취했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데 사람의 방법을 베필로 삼았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에 인간적인 방법이 좋아 보여서 그것을 아내로 삼아 한 몸이 되어 아들을 낳으려 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성경에서 그 사이에서 난 아들들을 <네피림(용사)>이라는 장대한 사람들이 태어났다고 말씀하시고 있다. 이것은 골격이 큰 사람이 태어났다는 의미가 아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에 위대함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는 의미이다.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과 법이 가진 아름다움이라는 것이다. 즉 이것은 교회로 치면 좋은 건물을 가지고 있으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것인데, 그것을 아름답게 꾸며 봤자 하나님 보시기에는 그게 그것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예배 드릴 때, 수억원의 오르간이 있으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아내로 삼았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것이 이 블로그를 통해 지속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큰 교회>의 모습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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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rgos Cathedral – Catedral de Burgos HDR 4 by marcp_dmoz 저작자 표시비영리동일조건 변경허락



사람들이 그런 생각을 하게 되면 맘모스형 교회가 나오고, 기업형 교회가 나오고, 한마디로 네피림과 같이 장대한 모습의 결과물들이 나온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아내로 삼았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것이 큰 교회 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모든 사람의 마음 안에 이런 본성이 있다는 것이다. 즉 누구나 하나님을 섬기는 것에 있어 금식도 하고, 좋고 비싼 것으로 하나님께 드리려 하고, 가장 고상한 방법으로 신앙생활을 하려고 하는데, 바로 이것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아내로 삼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런 모습을 보고 하나님께서 인간을 땅에서 쓸어버리시려고 마음을 먹었다는 것을 우리는 명심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쓸어 버리려 했다는 것은 하나님께 의미가 없어졌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죽은 목숨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선악과를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하신 그 죽음이란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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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에서 아담의 자손은 두 갈래의 계보를 따라 가게 된다. 하나는 가인의 계보이고, 또 하나는 아벨을 대신하여 주신 아들 셋의 계보이다. 창세기 4장 후반부에는 가인 후순에 대한 족보가, 5장에서는 셋 자손의 계보가 기록되어 있다.


성경에서 족보를 설명하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 이름마다 의미가 있기 때문에, 어떤 사람 개인의 신앙 여정에 따라 어떤 계보의 어떤 아비 밑에서 어떤 의미의 이름이 태어 나는 것인가 하는 것이 각각의 신앙 여정을 설명하는 고백으로 이어질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개인적으로 신학을 전공하지 않았기 때문에 각각의 이름의 의미를 설명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라, 생략하고자 한다. 하지만 족보를 보면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낳는 세계"라는 것이다. 이는 "만들어지는 세계"가 아니라는 것이다.


신앙을 공로로 쌓아 간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낳는 세계가 아니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사실 오늘날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차별성을 잃은 것은 하나님 앞에 공로를 쌓고 세상에서 얻은 재화를 교회에 얼마나 기여하는가가 신앙의 척도가 되고 있다는 것이 안타깝기는 하다.


노아는 성경에서 가장 오래 산 사람으로 기록된 '므두셀라'의 손자이다. (웃기는 것이지만 영화 노아에서는 므두셀라가 마법사처럼 나오기도 했다.) 그런 노아의 때가 되었을 때 성경에서 시대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사람이 땅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창 6:1-2)


그 이유로 인하여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년수를 120세로 줄이시고, 더 나아가서 사람 만드신 것을 후회하시고 그 모든 것을 지면서 다 쓸어 버리시겠다고 다짐을 하셨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아들은 누구며, 사람의 딸은 누구인가?"> 아들은 하나님의 아들이고, 딸은 사람의 딸이라는 것은 또 무엇인가, 아들을 낳든 딸을 낳든 간에 어쨋든 남자와 여자가 있어야 하는 것인데, 이것은 도무지 어떤 표현이란 말인가?


먼저 성경에서는 족보를 표현할 때,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아버지가 아들을 낳는 것으로 표현되고 있다. 이는 아들이라는 존재를 남자라는 생물학적 존재를 한정짓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 혹은 그 부모의 신앙이 육신으로 표현된 존재를 아들이라고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을 때, 예수님께서 생물학적으로 남자라서 아들이라고 표현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두신 뜻이 성육신되었기 때문에 아들이라고 하신 것이다. 이것을 모르면 어머니 하나님이나, 어버이 하나님과 같은 엉뚱한 소리를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들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가진 사람들의 그 신앙이 육신으로 표현된 존재들을 의미하는 것이다. 반대로 딸이라는 것은 성경이 육신적인 여자를 한정 짓는 표현으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또한 알아야 하는 것이다.


성경에서 여자는 숫자에도 세지 않는다. 실제로 그런데, 그렇다고 이것이 육신으로 여자인 사람들을 무시하라는 의미는 아니다. 성경을 문자 그대로, 글자 그대로 지키려고 하는 사람들이 범하는 오류가 이슬람에서 여자를 어떻게 대하는지를 보면 그 참혹함을 알 수 있다.


성경은 그런 의미가 아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여자는 하나님의 생각이 그 안에 없는 모든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이는 역사적으로 인류의 족보가 남자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는데, 이것은 남자의 유전 정보를 가문으로 인정한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셨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말씀과 계시가 있는 사람은 아들 곧 남자의 격으로 성경이 말씀하고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육신이 남자라도 여자의 격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는 의미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 앞에서 신부인 것이다. 이것은 육신이 남자냐 여자냐 하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이 왜 중요한가 하면, 그것을 그렇게 받을 수 없다면, 성경을 자기 이야기로 받는 것이 안되기 때문이다. 성경에 나오는 남자와 여자, 아들과 딸이라는 표현이 육신으로 아들과 딸로 받는다는 것은 성경이 자기의 이야기가 아니라 문자적으로 받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고, 그렇게 되면 성경이 자기에게는 그저 역사책이나 기록물에 불과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 알아야 할 것이 있다면, 그렇게 성경을 문자적으로 받는 사람은 설사 자신이 남자라서 아무리 성경을 자기에게 유익되게 해석을 해도 그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여자에 불과한 존재라는 것이다. 이것을 깨닫지 못하면 이슬람에서 여자를 비참하게 대하는 것과 전혀 다를바 없는 신앙이 되고, 어머니 하나님이라는 헛소리를 하게 되기 때문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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