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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악과 (46) - 선악과와 교회(2)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4. 4. 12. 11:51 Writer : 김홍덕

오늘날 한국 교회가 대중들의 외면을 받는 이유가 있다면 그건 <배타성>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니까 교회는 끊임 없이 <악>에 대한 배타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악>이 배타성의 대상이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게 여겨질 수 있다. 교회는 <선함>을 추구하는 곳이므로 끊임 없이 악을 멀리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라 생각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교회는 <악>이 없으면 존재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마치 병이 없다면 병원이 존재할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악>이 교회의 근간이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병원이 병을 치료하기 위함이듯, 교회는 <악>에서 사람을 회복 시키는 것이 그 존재 목적이라는 것이다.


그렇듯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와 목적이 <악>에서 사람을 구하는 것이라고 할 때, 악함을 멀리하고 싶은 사람이 교회를 찾을 때, 안심이 되고 회복되고 평안을 얻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사람이 교회의 문을 처음 두드릴 때는 당연히 악한 세상에서 피하여 안식 할 수 있고, 또한 악한 자신을 회복하려는 마음이 출발점이라는 것이다.


세상에서 교회로 사람이 온다는 것은, 세상에서 쉬지 못하는 마음이 교회에서 쉴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세상과 교회는 가치관이 분명히 달라야 한다. 세상에서 사람을 보고 평가하는 가치관과 교회가 사람을 평가하는 가치관이 달라야 한다는 것이다.


세상이 사람을 평가하는 것은 형식이다. 즉 사람이 가진 근본적인 정체성이 그 사람의 정체가 아니라, 소위 말하는 세상이 요구하는 스펙이 그 사람의 정체성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평가는 필연적으로 흔히 말하는 Loser, 즉 패자를 만든다. 패했다는 것, 그것은 악한 것이다. 승자의 기준, 즉 세상이 요구하는 <선>에 미달이라는 것이다.


세상에서 그런 심판을 받은 사람이 교회에 오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시고 안식하심과 같이 사람도 교회에 오면 세상의 기준에서는 죄인되었던 자아가 평안을 얻을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교회의 정체성이다. 그래서 율법에서는 안식일을 지키라고 한 것이다. 즉 교회에 사람이 모이면 안식하는 날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날짜로 주일이나 안식일을 지키라는 것이 아니다.)


교회가 그런 공동체가 되려면 우선적으로 선과 악에 대한 기준이 세상과는 달라야 한다. 즉 어떤 기준점을 정하고 그 양단을 선과 악으로 구분하는 구조가 교회 안에 그대로 있다면 그곳은 안식 할 수 없다. 그것이 설사 복음의 기준이라 해도 사람은 안식 할 수 없다. 


그것이 교회지만 지금은 사람들이 교회를 안식의 대상이 아니라, 피로감과 거부감을 느끼는 곳이 되었다는 것은 그런 교회의 본질에서 벗어났다는 것이다. 그것은 교회조차 교회가 정한 기준에 따라 사람이 선한 존재와 악한 존재로 구분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배타성 앞에서 사람들은 좌절하고 돌아서서 <개독교>라 욕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이런 현상조차 바로 알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운 현실이다.


교회는 분명히 <악>에 대하여 배타성과 또한 선과 악에 대하여 분별하는 기준을 가져야 한다. 하지만 <악>의 기준은 분명히 하나님의 기준이어야 하고, 세상과는 달라야 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세상과는 전혀 다른 평안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이 배타성을 성경은 <거룩>이라고 한다. 구분된 것이라는 것이다.


<악>에 대한 기준이 다름이 분명하다는 것은, 세상의 법과 같이 사람이 만든 기준에 의하여 심판하거나 평가하는 그런 법이 <악>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교회라는 공동체는 어떤 기준에 의하여 사람의 정체성이 결정되지 않는 곳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사람을 평가하는 그 어떤 기준도 없는 곳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가 유일하게 경계하고 유일하게 악으로 규정해야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사람을 평가하는 것이다. 사람을 평가한다는 것은 그 기준이 무엇이든 그 법이 세상의 법에 뿌리를 두고 있다. 예수님께서 젊은 관원에게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한 선생이라 하느냐?" 하셨는데, 이는 사람이 선과 악에 대하여 규정하는 그것이 <악>이라는 것을 말씀하심인 것이다.


교회는 세상과 다른 기준을 가져야 한다. 세상이 어떤 기준을 가지고 사람을 선하고 악한 사람으로 구분하는 세계라면 교회는 사람을 선하고 악한 사람으로 구분하는 그 <악>에서 벗어나야 한다. 세상의 기준으로 사람의 형식과 표현을 판단하는 그 법에서 벗어남으로 세상에서 그런 판단에서 무거운 짐 진 사람들이 쉴 수 있는 곳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교회가 선악과에 대한 모습인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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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머니 볼>

Category : 김집사의 뜰/복음 담론 Date : 2014. 4. 10. 22:18 Writer : 김홍덕




근래의 영화 중에서 가장 감명 깊었던 것을 꼽으라면 아마 <머니볼>이 아닌가 싶다. 야구를 좋아하니 야구 영화인 머니볼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다. 머니볼은 진정한 변화에 관한 이야기다. 그리고 그 변화가 승리라는 것을 녹여 놓은 영화이기 때문이다.


<야구는 비싼 선수를 사는 것이 아니라 우승을 하는 것이다.>로 시작한 영화는 내용 내내 새로운 야구 철학을 가진 "빌리 빈"이라는 단장의 야구 철학이 펼쳐지는 이야기를 해 간다. 많은 돈이 아니라, 정확한 통계적 분석에 따른 효율적인 야구가 야구라는 세계를 바꿀 수 있다고 믿는, 그리고 그 철학으로 야구를 바꾸려 하는 한 단장의 이야기다.


빌리 빈의 철학이 여러가지 난관에 부딪히는데, 그 중에서 감독이 빌리 빈이 원하는 선수를 출전시키지 않고, 계속 이름 값 위주의 선수들을 출전 시키는 것을 막기 위하여 다 트레이드 시키는 장면, 빌리 빈의 철학의 기반이 되는 피터(영화 속 인물)와의 대화 속에서 <'우리는 착각하고 있다'>라는 말을 기점으로 철학이 관철되는 방향으로 전개된다. 


그 대화 속에서 빌리 빈 단장은 '나는 44살의 고졸에 대학에 보내고 싶은 딸이 있다'는 말을 한다. 그것은 그 때문에 안주해서는 안된다는 말이었다. 그 이후 팀은 기적의 20연승을 하게 된다. 하지만...... 결국은 그들은 챔피언이 되지 못한다.


그러나 그 공로를 눈 여겨 본 빅 마켓 구단인 보스턴이 빌리 빈 단장을 1,250만 달러라는 거금으로 보스턴 단장직을 제안하지만 그는 고민 끝에 <"여기서 이기고(우승) 싶다">며 이를 거절한다. 하지만 거절하는 그의 마음은 자신은 실패했다고 생각한다.


그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피터는 원하지 않는 빌리 빈을 데리고 한 영상을 보여준다. Jeremy Brown이라는 선수의 영상을 보여 준다. Jeremy Brown은 100킬로가 넘는 거구에 발이 느려서 2루타는 엄두도 낼 수 없는 선수인데, 그 영상 속에서는 큰 타구를 치고서 맘 먹고 2루로 달리다 1루 베이스를 조금 지나서 넘어져서 아웃 될까 싶어 엉금엉금 기어서 1루로 돌아 온다. 하지만 상대팀 야수들이 그에게 2루로 가라고 손짓하고 다른 야수는 글러브 조차 벗고서 뛰라고 독려한다. 그의 타구는 홈런이었던 것이다.


그 장면은 피터가 야구를 바꾸려 한 빌리 빈 단장의 머니 볼이 패배한 것이 아니라 승리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었고, 또한 머니 볼의 주제가 함축된 장면이었다. 그리고 영화의 엔딩에서 빌리 빈 단장의 철학을 도입한 보스턴이 2년 뒤 밥비노의 저주를 풀고 월드시리즈를 우승했다는 자막을 보여줌으로 빌리 빈이 비록 시즌 마지막 경기는 이기지 못했지만 야구를 바꾸려 한 그의 목표가 이루어졌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즉 전투는 졌지만 전쟁은 이겼다는 것이다.


이 영화가 그리고 그 주제가 또한 그 마지막 장면으로 함축된 것이 나에게 감동이 되는 것은 삶의 목표에 대한 재고를 하게 하기 때문이다. 빌리 빈에게 야구를 바꾸는 것이 있다면, 나에게는 신앙에 대한 삶의 목적은 어떤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나, 영광을 얻는 것이나, 신앙의 체계를 정립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 그것이라는 것을 상기해 본다.


그리고 또 빌리 빈이 말한 착각, 대학에 딸을 보내고 싶고, 고졸이라는 절박감을 근거로 자신의 철학을 믿고 살아가는 것에 모든 것을 걸지 않았던 그 착각, 그 역시 나의 삶에서도 없어야 할 것이 아닌가 내내 생각해 보는 영화 <머니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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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악과 (45) - 선악과와 교회(1)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4. 4. 5. 16:22 Writer : 김홍덕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힘들게 여겨지는 것은 같은 것을 반대쪽에서 보는 것과 비슷하다. 보통 신앙인들에게 있어 신앙생활은 참 어려운 것으로 인식이 된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하시고 예수님의 짐은 가볍다고 하셨다. 그런데 사람들이 어렵게 여긴다는 것이다.


이것은 계속되고 있는 선악과의 문제 그 자체 같다. 즉 같은 것을 어떻게 보느냐? 하는 것에 관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만드시고 보시기에 좋았다고 했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부끄럽게 여기는 그것이 바로 선악과의 문제인 것이다. 신앙생활이 힘든 것이 바로 그것 때문이다.


즉 사람을 사람 그대로 본다는 것이 어려운 것은, 사람을 사람 그대로 보는 일이 힘들고 어려운 일이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그렇게 보는 안목을 가지기가 힘들다는 의미이다. 그것은 역설적으로 그렇게 볼 수 있다면 선악과의 문제가 해결이 되는 것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사람을 사람 그대로 보는 그런 관계가 된다면 그것은 참 자유로운 공간이 될 것이다. 사람이라서 그래서 보여지는 어떤 행동이나 생각들이 사회적 관점으로 보면 부끄러운 것인데, 어떤 관계 안에서는 그것이 그렇지 않다면 그 공간, 그 관계는 그야말로 안식을 주는 관계일 것이다. 하나님의 안식도 바로 그런 것이다.


기본적으로 사람들은 <가정>이라는 기초적인 공동체에서 사회 생활을 시작하게 되는데, 자연적으로 접하는 관계, 공동체 중에서 가장 원초적이지만 가정은 그 구성원을 사회적인 능력으로 평가하는 것이 약하다. 판검사 아들이 더 이쁘고, 노동하는 아들은 보기 싫은 그런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앙 안에서 그런 공동체와 관계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교회>가 될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교회는 그런 공간으로서의 자리를 점점 이탈해 가고 있다. 다른 것 볼 것 없고, 목사를 뽑을 때 학력과 경력을 보고, 잘로를 선출할 때 사회적 지위를 보고 뽑아 임직식 때 과도한 헌금을 내야하는 구조 그것으로 이미 모든 것이 끝난 것이다. 즉 사회적, 세상적 기준이 그대로 교회 안에서의 자리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교회가 이렇게 된 것은 한마디로 교회가 큰 교회가 되려 하기 때문이다. 즉 사회적인 기준을 기반으로 잘 되는 교회를 꿈꾸고 되려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현상을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성공하면 성공할수록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는 그 한마디다. 수능 시간표에 맞추어 기도하는 것이 바로 그 철학 위에 있다.


교회가 선악과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교회가 점점 태릉선수촌이 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즉 사람의 신앙과 삶을 판단하고 그 가운데서 선한 것을 발라내려 하고 있다. 게다가 그 선한 기준이 세상에서 온 것이라는 것은 얼마나 허망한 마음이 들게 하는지..... 


사람의 선은 발라내는 것이 아니라 우러나야 하는 것


선악과의 문제가 교회와 관련하여 중요한 것은 사람이 안식 할 수 있는 공간이 되지 못하고 있는 이유가 바로 사람에게 선을 발라내려 하기 때문이다. 사람의 선은 우러나야 하는 것인데 말이다. 즉 사람이 연약하기 때문에 교회에 오는 것이고, 그 연약함을 개조하기 위하여 교회에 오는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서 가진 그 모습 그대로를 감추지 않아도 쉴 수 있어야 하는 공동체가 되기를 위하여 예수님께서 오신 것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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