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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의 홍수 (7) - 회개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4. 6. 30. 10:20 Writer : 김홍덕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있어 노아 홍수는 헐리웃 영화의 소재로나 사용되고, 가끔씩 성경 이야기로 들을 수 있는 신화 같은 이야기로 남아 있다면 개인의 신앙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교회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말로 <"성경의 한 구절만 확실히 자기 것이 되어도 확실한 구원의 삶이다">라는 말이 있다. 그렇다는 것은 성경의 어떤 구절도 다 오늘 각 개인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노아시대는 우리보다 몇 천년 전의 일이고, 지금의 상식이나 과학적 지식으로 참 이해하기 힘든 일이지만,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본다면, 각 개인의 신앙 여정에서 노아 홍수의 사건이라 할 수 있는, 그러니까 그렇게 고백할 수 있는 사건이 없다면, 그 신앙은 홍수 이전의 신앙일 뿐이다.


그리고 그런 고백이 없는 홍수 이전의 신앙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에 있어 세상에서 성공한 것, 세상에서 아름답게 보이고 위대한 것을 더하면 좋은 신앙이라고 생각하는 네피림의 신앙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각 개인의 신앙 여정에 있어 정말로 중요한 말씀이 아닌가 싶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노아의 홍수와 같은 여정을 고백한다는 것은 물세례와 그와 함께하는 회개의 신앙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에 세상의 좋은 것을 더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는 신앙이 자신의 것이고 자신의 모습이었다는 고백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 고백이 진정한 세례이다. 이런 세례가 없다면, 바둘기가 물고 온 감람나무와 첫 수확물인 포도주로 상징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그 안에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고 사는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삶을 사는 삶이 아니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얼마나 형식을 중요시 하는 신앙을 가지고 살았는지, 아니 또 지금도 살고 있는지 놀랍다. 성경에서 여자를 도입할 때는 그 의미가, 형식이라고 볼 수 있다. 즉 내용과 의는 남자의 격으로, 형식은 여작의 격으로 설명하신다. 이는 육신으로 남자와 여자의 이야기가 아니다. 격이 그렇다는 것이다.


사회도 의와 내용이라는 것이 성씨로 대변된다. 그래서 전통적으로 남자를 씨에 여자를 밭에 비유하지만 이것을 육신의 문제로 보는 것이 바로 여자의 격을 가진 신앙이다. 육신으로 남자라도 육신의 성별을 대단한 것으로 여긴다면 그건 여자의 격이다. 


옛날 러시아 교회에서 성전 기물에 파리가 빠지면 파리가 거룩해 지는가? 아니면 성전 기물이 부정해 진 것인가? 싸웠다고 하는데, 이런 것이 바로 여자의 신앙인 것이다. 그 교회 안에 신부나 남자만 살고 있었다 해도 그 교회의 모든 사람은 다 하나님 앞에서 여자의 격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좋아했다고 하셨는데, 그것이 바로 오늘날 신앙에 있어 형식을 잘 갖추면 좋다고 생각하는 것이라는 것이고, 또한 하나님께서 스스로를 표현하고자 하신 세상이라는 형식의 결과물을 좋게 여겨 교회에 또한 신앙에 접목 시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을 살아간다해도, 교회에서 신앙의 본질보다 형식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과, 또 개인의 신앙에 있어 세상에서 성공하고 좋은 것으로 자신을 치장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신앙이 바로 홍수가 일어나는 원인인 것이다.


그렇게 보면 모든 사람에게 특히 기독교인이라는 사람들의 삶에 얼마나 그런 요소가 많은지 살펴보면 놀라울 따름인 것이다. 바로 그런 마음들, 그런 신앙의 자세들이 청산되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홍수로 나타난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 어느 시절을 살더라도, 노아 홍수의 말씀을 읽으면서 스스로를 돌아보아 자신이 하나님 앞에 형식의 아름다움과 세상의 아름다움 그리고 세상에서의 성공이 하나님을 기쁘게 한다고 여긴 마음이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면 그는 필시 홍수를 겪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세례를 받은 신앙이 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진정한 회개를 하는 것이다. 세례 요한의 때에도 세례는 회개하고 받는 것이었다. 즉 돌이킨 마음의 증거가 세례였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물 속에서는 살 수 없다는 회개의 마음이 물 속에 들어갔다가 나오는 세례 의식을 통하여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는 것이 바로 세례인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물 속에서 살 수 없다. 그것을 알기 때문에 물에 빠지면 나오려고 하는 것이다. 물에 빠진 사람이 물 속에서 나온다는 것은 <"나는 물 속에 살 수 없는 사람이요">라는 고백의 실재적 행동인 것이다. 바로 그것이 세례고 노아의 홍수인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자신의 신앙을 돌아보아 형식을 잘 갖춘다고, 주일날 예배에 빠지지 않는다고, 성경을 꼬박꼬박 읽고 있다고, 또 전도를 수백명 했다고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생각하는 모든 신앙은 다 여성의 격이고,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취한 신앙에 불과한 것이다.


필자 개인적으로도 군에서 받은 봉급도 십일조를 모아 드리고, 예배시간은 지각도 하지 않으려 했고, 학생 때 가장 정장은 교복이니, 빨래할 시간이 일요일 뿐인데도 예배에 교복을 입고 갔고, 주일학교 교사가 교과서인 성경 한번 보지 않아서 되겠냐며 성경을 몇번 완독했던 그런 신앙생활을 했었다.


하지만 그런 것은 다 형식이었다. 생명이라는 것은 본성만 있으면 행동은 금하려 해도 할 수 밖에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삶을 살아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세상의 형식을 취한 네피림의 신앙이 나의 신앙이라는 고백을 하고서 가진 그리스도의 마음이 굳이 의지를 가지지 않아도, 예배에 최선을 다하고, 단정한 차림으로 예배에 가게 하였다.


다시 말해서 사람의 마음 안에 온전한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으면 형식은 금하려 해도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생명이고, 형식은 그 결과일 뿐인 것이다. 즉 개를 죽일 수는 있어도 야옥하며 울게는 할 수는 없는 것이 바로 생명의 본성인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 역시 그런 것이다. 노아의 때에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과 같이 신앙에 있어 형식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버리고 온전히 홍수와 같은 세례, 즉 자신의 신앙이 형식에 메인 신앙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고백한다면 그것은 노아의 홍수가 자신의 사건이 되는 사람인 것이고, 그 사람이 물 속에 들어가지 않아도 진정한 세례를 받은 사람이 되는 것이고, 그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의 마음이 감람 나뭇잎과 포도주와 같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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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에 대한 착각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교회 Date : 2014. 6. 28. 08:58 Writer : 김홍덕

최근에 세월호 사건과 관련하여 도피 중인 유병언이라는 사람이 구원파 교회 내에서 설교한 동영상이 간간히 뉴스에 나오고 있다. 어제도 어떤 프로그램을 보다가 한 커트 보여 주었는데 그곳에서 그는 이런 말을 한다.


<출처 : 노컷뉴스>

나는 어머니에게 내가 잘못 했지만 잘못했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때는 어머니가 복음을 몰랐기 때문이다.


뭐 대충 저런 말이었는데, 이야기하고자 했던 것은, '내가 잘못했고, 그 대상이 어머니라 해도 어머니가 복음을 모르기 떄문에 잘못했다는 말을 할 필요가 없다. 즉 복음을 안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뭐 그런 이야기인 것 같다.


복음이고, 구원파고 뭐 이런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참 어이없는 말이지만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은 그런 말에 열광할 수 있다. 그 교회 안에 다니고 있는 사람으로 시부모나 또한 다른 가족과 갈등이 있을 떄 저런 설교를 듣는다면, 가족과의 갈등에 있어 자기가 선한 존재라는 믿음을 주기 때문이다.


어쩌면 저런 마음은 한번쯤은 가져보는 것이 아닌가 싶다. 나 역시도 오랫동안 교회를 다니다, '성경 말씀이 존재의 말씀이구나!, 믿어야 하는 사실을 기록한 말씀이 아니라 나를 위한 말씀이구나!' 라는 것을 알게 되고 그것이 복음임을 알았을 때, 유병언과 비슷한 생각을 했던 적이 있다.


그런데 그것은 복음을 정말로 모르는 것이다. 나 역시 그런 생각을 벗어나는데 제법 시간이 오래 걸렸지만 결론적으로 복음이 복음다운 것은 깨달았다는 것이 남을 섬기게 하는 것이 되었을 때 복음이 복음다운 것임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을 그렇게 아는 것은 환상 중에 하나님을 만나는 것과 같은 기적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성경 말씀을 제대로 읽는 눈만 있으면 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 마 20:28)


예수님의 이 말씀은 복음이든 하나님의 계시든 간에 먼저 알게 되었다는 것은 모르는 사람을 무시하고 맘대로 비난해도 되는 자격을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사람을 섬기고 자신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행복하게 하기 위한 수고를 감당하게 되어야 그것이 제대로 된 복음이다.


그렇게 복음을 모르는 사람이 복음을 알게 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 역시 당연한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이라도 더 하나님의 성품을 온전히 표현하는 존재가 되기를 바라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복음을 먼저 알았다고, 잘못한 것이 분명하고 또한 어머니인데 복음을 모르니 무시하는 자격을 주는 것이 복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실 오늘 날 기독교가 사회로 부터 외면 받고 있는 것은 이런 태도에 기인함이 크다. 언제나 믿지 않는 사람을 대할 때 '지옥갈 사람'이라는 전제를 깔고 대한다는 것을 사람들이 느끼기 때문이다. 태도의 공손함과는 다르다. 부드러운 말이라도 일단 시작을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복음이라는 것을 안다는 사람들도 이런 태도를 많이 가지고 있음을 봤다. 복음대로 살지 못하는 사람을 늘 꾸중하고, 보기만 하면 훈계하고, '그래 살아서 되겠냐?'는 맥락의 말들을 앞에서나 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쉬지 않고 말하는 것이다.


나는 그런 태도에 회의가 들었다. 하나님을 먼저 알았다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다. 만약 그것이 복음을 가진 권리(?)라면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실 것이 아니라 심판대를 이 땅에 만들고 사람들을 불러 늘상 꾸중하고 훈계하셨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늘 가까이 있고 문제 일으키는 제자들도 잘 꾸중하지 않으셨고, 하나님의 말씀을 모르는 창녀나 세리와 같은 죄인들과 함께 하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결국 십자가를 지셨다. 그것이 예수님의 훈계요 꾸중이고 섬김이었다.


결국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모습을 보고 백부장에서 부터 시작하여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었고,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예수님께서 사람을 보고 '그렇게 살아서 되겠느냐?'가 아니라 이렇게 사는 것이다 보여주신 것이다. 그것도 십자가라는 극한의 모습으로 말이다. 


바로 이런 모습이 복음을 먼저 아는 사람의 모습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아는 것이다. 복음을 먼저 알았다고 복음을 모르는 어머니를 무시하거나 또 누군지 알지 못하는 불특정 다수인들을 싸잡아서 마냥 죄인 취급하는 것은 복음의 바른 모습이 아니다.


복음을 안다는 것은 복음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 자기 주장에 매몰된 사람들을 긍휼이 여기는 것이지, 나이들고 어른이 되면 복음을 꺠달을 수 없다고 한정 짓거나 또 복음을 모르는 가족을 떠나야 제대로 교회 생황을 하는 것이라거나, 복음을 모르면 행복할 권리도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류다.


복음은 그런 것이 아니다. 복음은 먼저 꺠달은 사람이 깨달아야 할 사람을 섬기는 것이다. 그들이 사회와 세상의 관념에 찌들어 있어도 그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수고해야 하는 것이다. 어떤 계층, 어떤 마음을 가진 부류를 한정 짓고 전도와 섬김의 대상에서 맘대로 제외하는 권리를 주는 것이 복음을 먼저 아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결국 유병언은 이것을 몰랐다. 대부분의 이단 교주들이 그렇다. 먼저 남다른 계시를 깨달은 것은 가능할 수 있지만 그것으로 섬김을 받고, 그것을 모르는 사람을 무시하고 꾸중할 수 있는 권리가 생긴 것으로 착각한 사람들은 다 그렇게 이단이 되는 것이다.


복음은 사람을 섬기는 것이다. 이것은 신앙한다는 것이나, 그들의 주장에 동조하고 세상의 법을 따라 살아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복음은 복음을 아는 사람이 알지 못하는 사람을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는 수고를 감당하는 것이다. 그것이 섬김이고 그것이 제대로 아는 복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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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의 홍수 (6) - 홍수를 일으키신 목적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4. 6. 27. 10:33 Writer : 김홍덕

노아의 홍수를 읽고 설교하고 묵상함에 있어 중요한 것은 어떤 것이 있을까? 그런 관점에서 볼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홍수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목적일 것이다. 


그 하나님의 목적은 홍수의 원인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즉 홍수의 원인이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아내로 삼고 그 결과 네피림이 나왔다는 것에 있다고 했다. 그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에 있어 세상에서 좋은 것을 가지고 가면 더 기뻐하실 것이라는 생각과 같은 것이라고 했다.


그럼 그것이 홍수가 일어난 이유라면 목적은 또 무엇인가? 단순히 사람들이 타락하고 그것을 벌하시는 것이 목적의 전부라면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만든 세상과 사람이 불량이라고 시인하는 것이고, 그것은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에 흠집이 나는 일일텐데 말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서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만든 사람을 스스로 죽이시는 신이구나!'하는 것은 사건의 목적은 보지 않고 현상만 보는 관점일 뿐이다. 적어도 하나님을 신으로 인정한다면 그리고 더 나아가서 신앙한다면 하나님께서 그러신 것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럼 하나님께서 홍수를 일으키신 목적이 무엇인가? 이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신 목적을 먼저 생각해 보면 된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된 사람을 만드셨다고 했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천지창조와 사람을 지으신 것이 <하나님 스스로를 표현하시기 위함>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사람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하고자 만드신 인격체인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형상은 형이하학적 그리고 실존적 형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미지> 즉 누군가 "하나님!"이라고 말하거나 생각할 때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이미지를 말하는 것이고, 사람이 바로 그 이미지를 알 수 있게 표현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이 표현되기를 원하셨다는 것이다. 그런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이 결혼하여 네피림과 같은 육신과 형식이 장대하고 위대한 존재가 나오는 것을 싫어하셨다는 것은 그것은 하나님의 이미지가 아니라는 의미인 것이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것이다. 이것을 알 수 없다면 홍수는 그저 옛날에 있었던 사건, 그리고 과학적으로나 역사적으로 증명해서 내가 믿는 믿음의 우월성을 확보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는 기록과 역사일 뿐이다.


이 노아시대의 홍수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이 어떤 존재인지를 설명하고자 사람을 만드셨는데 사람이 그것을 떠났기 때문에 돌이키게 하시는 것을 목적으로 하신 사건이다. 만약 그렇지 않고 벌을 주시는 것 만을 목적으로 했다면 굳이 노아의 가족을 통하여 재기의 기회를 주실 이유가 없을 것이다. 아예 새로 만들지.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홍수를 일으키신 것은 벌을 주시고자 하심이 아니라, 원래 하나님의 창조목적으로 사람을 이끌기 위하심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노아를 통하여 방주를 짓게하고 또 그 안에 어떤 생명을 태우고 하는 것들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이 네피림을 낳는 방법이 아니라 방주를 통하여 보여주신 하나님의 의도하심에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형식이 위대하고 장대한 것으로 하나님을 표현하고자 하시는 것을 사람에게 기대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기대하시는 것은 노아 방주 이후에 나오는 감람나무고, 또한 포도주와 같은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감람나무는 예수님 당시에 기름을 만들던 나무 열매 였다. 그리스도라는 말은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의미이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셨는데 겟세마네라는 말의 뜻은 <기름짜는 틀>이라는 의미라고 한다. 그리고 예수님은 스스로를 "나는 포도나무"라고 하셨다.


즉 하나님께서 홍수를 일으키신 목적은  물에 빠진 사람이 물 속에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닫듯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에 있어 세상의 딸들의 아름다움과 같은 고상함, 위대함, 부와 명예와 같은 것을 취하여 위대해지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그것으로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하시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왜 그런가 하면, 홍수가 일어나는 과정에 대하여 기록되기를 하늘의 물과 땅의 물이 동시에 터져서 합쳐졌다고 했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뜻을 세상의 뜻과 합하면 홍수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즉 물은 넘쳐나지만 정작 사람은 다 죽게되는 홍수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음에 있어,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 안에서 살아가려고 세상의 부와 명예 그리고 고상함과 위대함과 성공을 이루면 더 하나님을 잘 믿는 것이라고 생각하겠지만 홍수가 나서 물에 빠지면 우리가 물 속에서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닫듯이 그렇게는 살 수 없다는 것을 알게 하시기 위함인 것이다.


이 홍수의 물이 어디서 나왔는가? 하늘의 물과 땅의 물이 합쳐진 것이 아닌가? 즉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결혼한 것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네피림이라는 거대한 종족이 나왔듯, 하늘의 물과 땅의 물의 합쳐지니 큰 물이 나서 홍수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홍수가 나면 사람이 그 안에서 살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물에 빠지면 그 안에서 사람이 살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것이 <세례>의 의미이다. 즉 세례는 사람이 물 속에 들어갔다 나오는 것인데, 그것은 사람이 물 안에서 살 수 없다는 것을 알게 하시기 위한 것이다.


사람이 물 속에서 살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한 것인데, 그것이 왜 세례의 의미냐? 여기서 말씀하시는 물은 강에 흐르는 물이 아니라 네피림과 같은 위대함을 낳게 하는 신앙, 하나님의 말씀과 세상의 논리와 아름다운 것을 결합한 홍수 같은 물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것을 강에 흐르는 물로서 예표하셔서 의식으로 만드신 것이 바로 <세례>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홍수를 일으키신 목적은 사람으로 하여금 세상의 것을 결합해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감람유를 부음 받은 사람, 또한 포도주와 같은 사람인 그리스도로 나오기를 바라시기 것이 목적인 것이다. 


그것이 노아의 시대에 홍수로 표현하셨고, 지금 이 시대에 노아의 홍수를 읽고 듣는 이들에게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그리스도와 같이 섬기는 것이지 세상에서 성공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고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고백하는 것이 바로 세례의 의미인 것이지, 세례증서나 발행하면서 교인 증명서 기능을 하기 위하여 받는 의식이 아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이 노아의 홍수에 관한 말씀을 읽으면서 이것을 알지 못한다면, 홍수도 의미 없고, 세례도 하나님 앞에서 의미가 없는 쇼에 불과한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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