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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과 (6)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4. 5. 12. 11:40 Writer : 김홍덕

살아있다는 것은 육신이 숨 쉬고 있다는 것 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물론 그것은 기본이고 당연히 살아 있다는 범주에 속하는 일이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라는 것이다. 어떤 세계 안에서 '살아 있다'고 하는 것은 그 세계가 추구하는 목적에 일치하고, 그 목적에 부합하는 모습을 보인다는 것을 뜻한다.


조폭 영화 안에서 "살아 있네"라는 대사가 있었는데, 그것은 주먹이 아직 쓸만 하다는 의미였다. 즉 주먹을 사용하는 세계의 성격에 부합하는 모습이 아직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렇듯 <살아 있다>는 표현은 우리 생활 깊숙이 사용되고 있다. 그것은 살아 있다는 것에 대한 본능적 개념이 깔려 있다는 것이다.


그것처럼 하나님 앞에서도 <살아 있다> 하고, <생명이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목적과 의도하심에 부합된 모습을 가진 존재일 때 살아 있고 생명이 있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자연 속에 있는 돌이라도 하나님께서 그것을 만드신 목적 안에 제자리를 지키며 존재하고 있다면 그것은 살아 있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생명 나무라는 것은 실제로 나무의 과실과 같은 것이었겠지만 그것 자체를 먹는 것으로 생명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생명이라 여기시는 정체성을 먹었는가 아닌가 하는 문제라는 것이다. 만약 생명 나무의 열매를 먹는 실제 행동이 있어야만 한다면, 지금 시대의 사람은 절대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존재가 될 수 없을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생명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목적 안에 있을 때 생명이 있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생명 나무의 열매인 생명과인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시고 매겨주신 자리는 하나님처럼 되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을 표현하는 존재였는데 그것에서 벗어난 자리인 선과 악을 판단하는 자리에 있는 상태는 생명과를 먹을 수 없는 존재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실 때, 그 형상대로 만드셨다고 했다. 이는 하나님의 이미지를 표현하셨다는 것이다. 어머니라는 이미지가 있고 모든 사람에게 어머니가 있는 것이듯, 영이신 하나님이라는 이미지가 사람으로 표현이 되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사람의 창조 목적이고 존재 목적인 것이다.


그런데 사람이 하나님의 이미지와 성품을 표현하는 표현 양식으로서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존재 형식과 능력 자체를 동일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닮는 것이라고, 또 하나님처럼 되려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이 육신이라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그렇게 될 수 없기 때문에 이를 부정하게 여기고, 이를 개선하려고 한다. 이것이 바로 벗었다는 것을 부끄러워 한다는 것이고, 사람이 그렇게 된 것은 선악과를 먹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이러한 모습은 스스로를 개발하고 능력을 향상 시키고 대단한 사람이 되려 하는 모든 것을 한마디로 함축하면, <다른 사람이 하지 못하는 것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려는 것으로 나타나고, 또한 이것을 성공이라 한다. 다시 말해서 사람, 그 이상의 존재가 되려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인간의 모든 노력이고 삶이라는 것이다.


사람이 그렇게 사람 이상이 되려 하고, 사람을 개조해서 이루어낸 결과를 성공이라 하여 영광스럽게 여기는 것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육신의 삶의 원래 모습으로는 안된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만약 주신 그대로 모습이 영광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반면에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원래 모습을 보시고는 "심히 좋았더라" 하셨다. 즉 지금 사람들이 사람을 생각하는 것과 하나님의 생각이 달랐다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목적과 의도와는 다른 것이다. 그리고 목적과 의도와 다르다는 것은 하나님이 보실 때, 살아 있다고 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죽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죽은 존재에게 생명 나무의 열매는 먹을 수 없는 것이다. 먹는 것은 먹은 존재와 먹히는 대상이 같아지는 과정인데, 그럴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불 칼로 생명 나무를 지키셨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이 보실 때 살아 있다고 하기 어려운 것들이 다 태워 없어지기 전에는 생명 나무에 갈 수 없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 바로 생명 나무에 대한 말씀과 불 칼에 대한 말씀인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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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과 (5)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4. 5. 6. 11:48 Writer : 김홍덕

십자가는 인간의 모습을 설명하는 자리이다. 인간의 모습을 설명하는 자리가 마련되었다는 것은 그것을 설명해야 할 필요가 생겼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자리를 떠난 사건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 설명을 하실 필요가 있었다는 것이다. 


원래 하나님께서 천지를 만드시고, 에덴 동산을 만드시고, 사람을 만드셨을 때는 그것을 설명하는 사건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것이 진작 필요했다면 창조 때 만드셨을 것이다. 하지만 십자가를 통하여 사람의 자리와 정체성을 설명하시려 하신 것은 사람이 그 자리를 떠난 사건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하나님이 되려고 먹었다는 것이다. 즉 사람이 사람의 자리를 떠나 하나님처럼 되려 했다는 것이다.


그 결과 사람은 자기가 벗었다는 것을 부끄러워 했다. 다시 말해서 자신이 육신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부끄러워했다는 것이다. 무언가를 부끄러워했다는 것은 감추고 싶다는 것이고, 그것은 잘못되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무언가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는 것은 잘된 것과 잘못된 것을 판단하는 기준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벗었다는 것을 부끄러워 했다는 것은 어떤 기준으로 볼 때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사람이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하면 이 육신은 안된다고,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은 이유가 <하나님처럼 되려>했던 것이었는데, 그 기준으로 보니 벗었다는 것, 육신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잘못된 것이고 부끄러운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무화과 나뭇잎으로 부끄러움을 가렸다. 이는 성적 수치심을 유발하는 부위를 가렸다는 것이 아니다. 육신이라는 것을 무화과 나뭇잎으로 가렸다는 것이다. 무화과는 성경을 기록한 유대인들에게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숫자 4를 죽을 사자로 생각하듯이, 그들에게 무화과는 율법이요, 유대인의 나무로 인식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는 율법으로 육신의 부끄러움을 가리려 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어린 양을 잡아서 그 가죽으로 옷을 해서 아담과 하와에게 주었다고 하셨다. 바로 그 사건이 십자가 사건의 예표인 것이다. 즉 무엇으로 사람이 육신이라서 부끄럽다고 생각하는 것을 가릴 것인가 할 때, 어린 양의 희생으로 그것을 가린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은혜인 것이다.


그러한 이유로 하나님께서는 십자가의 자리를 만드신 것이다. 그 십자가의 사건의 주인공은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에 대한 사랑의 정도를 표현하기 위하여 아들을 죽이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서 보여주고자 하신 사람의 원래 자리가 하나님의 아들의 자리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를 지신 것이다.


그것은 십자가에 하나님의 아들이 달리신 사건이기도 하고, 또한 그 십자가를 통해서 자신의 모습이 회복되는 사건을 겪은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사건이기도 한 것이다. 즉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들이 지은 죄에 대한 벌을 대신 받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렸기 때문에 구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의 아들의 모습을 보니 그것이 자신의 모습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됨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사건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미운 오리 새끼가 날아가는 백조를 보고 자신이 백조인 것을 알게 되는 것과 같은 사건인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처럼 되려고 먹은 선악과에서 비롯된 십자가의 사건은 십자가를 보고 사람이 육신을 가졌기 때문에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되도록 하셨다는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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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과 (4)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4. 5. 4. 21:07 Writer : 김홍덕

하나님께서 생명나무를 화염으로 지키시게 된 계기는 다 아는 바와 같이 선악과 사건 때문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 나무 열매도 따 먹고 영생할까 하노라(창 3:22) 

하시고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 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셨다고 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생명 나무를 지키시는 계기가 된 사건은 선악과의 사건 때문이고, 지키신 이유는 선악을 알게 된 사람들이 영생을 얻게 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재밌는 표현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그들의 손을 들어"라는 표현이다.


생각해보면 열매 따 먹는데 굳이 손을 들어 따 먹는다는 것을 언급할 이유는 없을지도 모르는데, 그러한 표현을 하신 것은 손이라는 것이 어떤 행동, 즉 행위를 대표하는 신체 부위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도 손과 발에 못을 박았다고 했는데, 이것도 사람의 행동을 예표한다. 그러니까 사람의 행동으로는 십자가에서 내려올 수 없다는 것을 표현하신 것이다.


이것은 영생이라는 것이 어떠해야 하는 것인지 생각해보게 한다. 지금 생명 나무를 불 칼로 지키시게 된 계기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과실을 먹은 사건 때문이었다. 그 사건이 어떤 사건인가? 그것은 사람의 육신에 대한 관점의 변절이 발생한 사건인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보실 때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는 사람의 모습이 선한 것과 악한 것으로 판단하는 대상이 된 사건인 것이다. 하나님처럼 되려는 마음 때문에......


그런 사람이 손을 들어 생명 나무의 과실을 먹어서 영생에 이르게 된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안목을 가지고 사람을 선과 악으로 판단하는 사람이 행위로서 영생 하려는 것이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그것은 용납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불 칼로 생명 나무를 지키신 것이다.


생명은 앞에서 포스트 한 바와 같이 하나님이 보실 때 살아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우리 사람들이 아무리 숨 쉬고 건강하게 살아도 어떤 관점에서는 죽은 사람일 수 있다. 예를 들어 북한의 경우 민주주의, 그리고 자유라는 관점에서 볼 때 동토(凍土) 즉 '죽은 땅'이라고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즉 자유라는 관점에서 보면 북한이라는 사회는 죽은 것이라는 것이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보실 때 '살아 있다'고 하실 수 있는, 그러니까 <생명이 있다>고 할 수 있는 존재가 있는데, 적어도 사람을 선과 악으로 판단하거나 행위로 영생 곧 구원을 받으려고 하는 존재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이 생명과를 지키시는 이유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하나님께서 혹시나 있을 사람의 도전이 걱정이 되어 생명 나무를 불 칼로 지키신 것이 아니라, 생명은 그런 것이 아니기 때문인 것이다. 그래서 생명 나무에 가서 그 열매를 따 먹으려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두신 불을 지나서도 살아 남을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불 칼을 두신 이유가 선악과를 먹은 사람이 영생을 얻게 되어서는 안되는 것이기 때문이라면, 이 불칼로 태우고자 하는 것은 사람이 가지고 있는 선악 간에 판단하는 심령인 것이다. 또한 사람이 행위로 영생을 얻으려는 마음 또한 태워져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시기 위하여 불 칼을 두신 것이지, 사람이 하나님 몰래 이것을 먹을까 적정이 되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뜻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볼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 개인 개인에게 있어 매우 중요한 사건인 것이다. 우리는 생명 나무의 열매를 먹고 영생을 얻어야 하는데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불 칼로 지키고 계시니 <'우리가 어떻게 하면 그 열매를 먹을 수 있을까?'> 하는 문제에 대한 해답이 십자가에 있기 때문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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