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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뜻

Category : 김집사의 뜰/복음 담론 Date : 2014. 7. 14. 16:24 Writer : 김홍덕

얼마 전 국무총리 선임 과정에서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이 문제가 되었다. 그러니까 우리나라가 식민지배를 받은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교회에서 말했다는 것 때문에 문제가 되었다. 물론 그것은 정치적인 문제였지만 사람들은 정말로 하나님의 뜻을 오해한다.


사람들은 늘 어떤 선택지 앞에서 어느 것을 선택해야 하는지 고민할 때 그 중에서 어느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를 알려고 한다. 


대학부 시절에 지금은 대구의 대표 교회의 담임목사가 된 선배를 좋아하는 두 명의 누나가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 이를 조정하는 대학부 교사 집사님이 계셨다. 지금의 사모가 된 사람은 당사자인 선배가 하나님의 뜻이라 생각했고, 교사인 집사님은 다른 누나가 하나님의 뜻이라고 했다.


어떤 이들은 아이가 문과를 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아니면 이과를 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알고 싶어 한다. 어떤 이는 동쪽으로 이사 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아니면 서쪽으로 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알고 싶어 한다.


하지만 이런 문제들을 하나님의 뜻을 보는 모든 고민은 다 삼류 중의 삼류요 하나님을 무당으로 만드는 추하고 추한 개념이다. 왜냐하면 이런 고민을 한다는 것은 한 마디로 하나님의 뜻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이름은 여호와이시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는 의미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존재의 하나님이시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존재에 관하여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하지 않고, 일과 행위와 소유와 장소에 대하여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한다.


사람들이 그렇게 자기가 살면서 선택해야 하는 행동들, 삶의 모양들, 또 신분의 선택과 같은 것에 대하여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하는 것은 먼저는 하나님을 소유와 행위의 하나님을 알기 때문이고, 또 하나는 그렇게 아는 하나님께 혼나면 안되겠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은 '내가 지금 버스를 탈까요?, 아니면 지하철을 탈까요?"와 같은 것에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뜻은 내가 어떤 사람이 되는가 하는 것에 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나는 누구인가?> 하는 정체성에 관하여 뜻을 가지고 계신 분이시지 내가 어떤 것을 선택할 것인지에 대하여 관심이 있으신 분이 아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그런 뜻을 감추시는 분이 아니시다. 즉 다시 말해서 궁금할 일이 없는 것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두신 모든 뜻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이셨고, 또한 살아가면서 필요한 재화와 용역은 이 세상을 만드실 때 이미 다 주셨기 때문이다.


즉 먹고 사는 문제, 살아가면서 삶의 일부로서 선택해야 하는 문제들은 대부분 이미 답이 있고, 또한 어느 것을 선택해도 어지간한 것이라면 다 무관한 문제들인 상황이다. 다만 자기가 하고 싶은 것과 현실 사이에 명분이 필요해서 하나님을 끌어 들일 뿐이다.


반대로 사람들은 자신이 어떤 존재이어야 하는 것인지에 대하여는 하나님의 뜻을 찾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삶의 모양과 관련된 문제들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찾는다. 만약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게 된다면 그런 문제는 하나님의 뜻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아들과 종에 있어서도 아들은 어떤 행동을 해도 늘 아들이다. 아들은 행위나 성과로 심판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종은 결과가 중요하기 때문에 일일이 주인의 뜻을 물어야 한다. 빗자루 놓는 자리 하나까지도. 하지만 아들은 그렇지 않다. 빗자루를 내다 버려도 아들이라는 것은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이것을 할까요? 저것을 할까요?>라고 물을 것이 아니라, 자신을 만드시고 세상에 두신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하는 것이 먼저이다. 그것만 알고 나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굳이 묻지 않아도 얼마든지 선택할 수 있다. 물론 전혀 궁금하지도 않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에 관한 분명한 답이다. 그 하나님의 뜻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보이셨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머리에 가신관을, 손과 발에 못이 박히시고 벌거벗겨지고 창에 찔린 그 모습이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알레 하시려 하는 하나님의 뜻이다.


이는 사람의 생각(머리의 가시관)이나 행동(손과 발의 못)이나 신분(옷=신분)이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뜻은 외면하고 오히려 생각과 손과 발과 옷과 같은 신분에 영향을 주는 것에 대한 하나님의 뜻만 찾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보여주신 뜻은, 하나님께서 그 성품을 표현하시기 위하여 사람을 만드셨다는 것과, 그 성품이라는 것은 존재의 하나님이신 하나님의 정체성이요, 또한 사람이 볼 때 부정하고 악해 보이는 이 육신을 가진 삶이 하나님께 아들과 같은 삶이라는 것을 보여 주시고자 했기 때문에 아들이 육신으로 오셔서 십자가에서 그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그것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에 행동의 성과와 신분과 부와 명예와 같은 것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십자가에 아들을 죽게 보이셨는데, 사람들은 오히려 행위오 소유에 대한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이것을 할까요?, 저것을 할까요?'와 같은 행위의 문제나, '어떤 직업이나 공부를 할까요?'와 같은 소유나 신분에 관한 문제를 알기 위하여 기도하면 할수록 하나님의 화를 돋구는 것이고, 그런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하면 할수록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또한 자신에게 두신 뜻에서 멀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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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의 홍수 (13) - 의인과 교회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4. 7. 14. 15:43 Writer : 김홍덕

방주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어쩌면 방주에 부정한 짐승과 정한 짐승이 같이 탑승했다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부정한 것이 정한 것과 함께 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방주의 주인인 노아가 의인이었기 때문이고, 또한 방주가 지금의 교회에 대한 예표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리고 그것이 그렇다는 것은 의인의 조건이 어떤 것인지, 또한 교회가 어떠해야 하는 것인지에 대한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부정한 것과 정한 것을 공존시킬수 있는 사람과 공동체 그것이라는 것이다.


선악과의 문제로 볼 때, 선악과와 선악과를 먹은 것은 다른 명제이다. 선악과 자체는 어떤 것으로도 문제가 될 수 없다. 그것은 선악과가 에덴 동산의 중앙에 있었다는 것이 방증하는 것이다. 그것도 하나님께서. 다만 그 선악과를 먹고서 사람이 선과 악을 알게 되려 한 것이 죄의 근원이 된 것이다.


이것은 선한 것과 악한 것을 분리하면 죄가 된다는 것이지 공존한다는 그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사람은 누구나 다 부정한 삶의 특성과 본성이 있는데, 그런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구원을 영원토록 받을 수 있단 말인가?


다만 문제가 되는 것은 그런 사람을 선한 것과 악한 것으로 본성을 나누어 악한 것을 삶에서 분리하려 하려는 시각이 문제의 죄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먼저는 사람을 심판함이고, 다음으로는 사람은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지 사람이 서로 만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이 사람을 보고 선하다 악하다 구분하는 것은 사람이 사람을 심판하는 것이니,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사람, 그것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사람을 자기가 가진 선과 악의 기준으로 심판하는 자리에 이르렀기 때문에 그것이 죄가 되는 것이라는 것이다.


반대로 사람을 볼 때, 그 안에 부정한 것이 있다는 것을 알지만 세상에서 분리된 방주로 들일 수 있는 사람은 노아와 같이 의인이라는 것이다. 또한 그럴 수 있어야 교회라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모습을 보기가 어렵다. 사람은 굳이 남이 아니라도 스스로가 자신 안에 있는 본성을 심판하여 그런 모습으로는 하나님께 갈 수 없다고 하여 자신의 일부를 저주하고, 교회도 부정한 것은 용납할 수 없다고 외치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인지 모르겠지만 박정희 대통령이 어릴적에 유년주일학교를 간적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검정 고무신을 신고 놀다가 예배당 마루바닥을 시커먼 발로 돌아다니니까 그것을 누가 꾸중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 이후 박정희 대통령이 교회를 나가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들은적이 있다.


그 이야기가 실제로 박정희 대통령의 이야기인지는 모르겠지만, 굳이 그게 사실이 아니라도 그런 모습은 교회에서 늘 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모습은 교회의 참 모습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말하자면 선악과가 있는 것이 아니라 먹어버린 교회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어떤 것은 여기에 있어서는 안될 것이라고 자기가 가진 정함의 법으로 규정하기 때문이다. 그런 규정을 할 수 있다는 것은 그 안에 어떤 선과 악에 대한 판단 기준이 있다는 것이고, 그것을 성경은 선악과를 먹은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의인인 노아의 방주, 그러니까 의인이 주인이되는 교회는 그래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방주의 참 모습도, 또한 교회의 참 모습도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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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0일 작정기도

Category : 김집사의 뜰/덕이의 신앙 이야기 Date : 2014. 7. 13. 09:22 Writer : 김홍덕

덕이의 고등학교 시절에서 부터 1,000일간 빠지지 않고 기도하는 것을 계힉했었다. 그리고는 기독교 서점에 들러서 다이어리를 하나 구입한 덕이는 매일 매일 기도한 것을 간략하게 기록했었다.


하지만 그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살다보면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도 어쩌다 끼니도 건너뛸 수 있는데, 1,000일간 하루도 쉬지 않고 기도를 하겠다고 맘 먹고 그것을 일일이 기록하였다는 것은 쉬운 일은 분명 아니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것이 어려운 일인가 아닌가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덕이가 볼 때는 기도했다고 기록한 다이어리의 기록들이 정말로 기도했다고 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기억해 보면 그때의 기록들은 어쩌면 기록 달성을 위한 노력에 불과했다. 즉 기도를 위한 기도가 아니라, 1,000일을 채우려는 기도였다고 할까? 그리고 그 마저도 채운 것으로 간주하고 싶은 것일 뿐이었다.


그 다이어리의 기록으오만 본다면 분명히 1,000일을 달성했었다. 하지만 그것을 완주한 것으로 본다면 그것은 양심이 없는 것이다. 그냥 그건 실적을 위한 몸부림에 불과했다.


기도가 되었든 어떤 것이든 그 본연의 본질적인 목적이 있고 그리고 그 다음에 형식이나 성과가 있어야 한다. 그러니까, 그 마음에 정말로 기도하는 본성이 있어서 하루 하루 기도하다 보니 1,000일이 되고 하는 것이지, 1,000일을 작정하고 기도한다고 뭐 특별한 것이 없는데도 그것을 꼭 달성하고 싶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1,000일만 기도하고 말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런데도 그런 보여주기식의 쇼를 했던 것은 신앙의 내용이 없었기 때문이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어쩃던 그런 눈 가리고 아웅식의 신앙적 업적이 뭐 대단한 자랑처럼 생각했던 덕이였다. 아마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은 주변의 사람들에게 제법 피곤한 모양이었을 것이다.


신앙은 내용이 있으면 형식은 절대로 분리할 수 없는 모양으로 자연스레 따라온다. 즉 개로 태어났다면 절대로 짖는 것을 금할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기도는 그 마음 안에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한 간절함이 있다면 1,000일만의 문제가 아니라, 그야말로 쉬지 않고 기도하게 되는 것인데, 그 시절의 덕이는 그런 비밀을 몰랐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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