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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벨탑 (2)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4. 8. 4. 18:11 Writer : 김홍덕

바벨이라는 말의 뜻은 '혼돈'이다. 이런 유래는 당연히 탑을 쌓다가 언어가 갈라져서 혼돈스럽게 되어 탑을 다 쌓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Tower of Babel
Tower of Babel by Doeki 저작자 표시변경 금지



성경에서는 원래는 이 땅 위의 모든 언어와 구음이 하나였다고 했다.(창 11:1) 그런데 사람들이 자신의 이름을 온 땅에 알리고 흩어짐을 면하기 위하여 성을 쌓았는데 하나님께서 그것을 못하게 하시려고 사람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셔서 사람들이 오히려 흩어졌다.


사람들은 성을 쌓을 때, 벽돌을 만들어 굽자고 했는데, 이것은 흙으로 만든 사람을 단련 시키자는 의미이다. 그리고 그 벽돌을 쌓자고 하는 것은 그렇게 단련된 사람들의 공적을 쌓고 쌓으면 하늘에 닿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사람들이 "사람이 스스로를 단련하면 하나님과 같이 될 것이다"라는 것이 온 땅에 알려지게 되고 그 앞에 다 모여서 흩어짐이 없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바벨탑은 옛날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도 있는 일


이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다. 오늘날도 사람들은 큰 공적을 쌓으면 사람들이 그 소문을 듣고 모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즉 온 땅에 이름을 알리는 것이다. 그리고 실재로 그렇게 하면 사람들이 모인다. 즉 그런 일을 도모하는 사람이나 모이는 사람이나 다 바벨탑을 쌓는 마음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모이면 이내 흩어진다. 왜냐하면 말이 다르기 때문이다. 정치판에서도 '민의(民意)'라는 같은 단어를 여당과 야당이 다르게 해석한다. 그러면 혼돈스럽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바벨이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세례라는 말은 하나인데, 그것을 기준으로 갈라진 교파가 몇인지 알 수 없다. 그것 역시 바벨이다.


이렇듯 사람들이 공적을 쌓아서 이름을 날리고, 또한 공적을 쌓아서 하늘에 닿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도록 하고자 하는 것은 늘 혼돈스럽다. 허나 그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 어떤 공적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고, 또한 사람을 만족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외모를 보시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이다. 그것은 속사람을 보신다는 것인데, 그것은 내용을 보시겠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사람이 쌓은 공적이나, 벽돌을 굽듯이 단련된 정도나 쌓아진 노력을 보시겠다는 것이 아니라, "너는 하나님 앞에서 누구냐?"하는 것을 보시겠다는 것이다.


성경에 '이렇게 해라', '이것은 하지마라'로 읽히는 말씀이 아무리 많아도, 하나님께서는 행동을 보시는 분이 아니다. 성경에 기록된 해라 하지마라는 것은 정확히 할 수 밖에 없고, 도저히 할 수 없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왜냐하면, 성경에 기록된 모든 '해라'와 '하지 마라'는 생명의 본성에서 나오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기도한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구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두신 원래의 정체성과 생명이 있는 사람은 늘 기도한다. 그것은 아들이 아버지 앞에서 늘 아들스러운 것과 같은 것이다. 그것이 항상 기도하는 것이다. 


전도? 생명은 장성하면 반드시 그 생명을 분화하고자 한다. 자기 안에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계시가 있다면 아무리 뜯어 말려도 하나님에 대하여 전할 수 밖에 없다. 그것이 성경에 나오는 '해라'와 '하지마라'인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성경에 나오는 말씀들을 잘 지켜서 행하고 그것을 쌓고 쌓으면 하늘에 닿아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자신이 죽어 천국에 가면 상급으로 누릴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생각이 바로 바벨탑을 쌓고 있는 것이다.


우선은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성경에 나오는 명령들은 행동의 명령이 아니다. 먼저 생명이 되고 나면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예레미야 선지자도 '다시는 말씀을 전하지 않으려 해도 마음이 불 붙는 것 같다'고 한 것이다. 


즉 개를 '멍멍'이 아니라 '야옹'하게 하려고 아무리 훈련시켜도 안되는 것이다. 그것은 울어도 때려도 안되는 것이다. 하지만 개로 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에 나오는 모든 '해라'와 '하지 마라'는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나기만 하면 다 자동으로 되는 것이지 그것을 훈련하고, 노력하고, 울고 불고, 금식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성경 말씀을 지켜 행하는 것으로 신앙의 업적을 삼으려는 모든 생각이 바벨탑을 쌓는 것



만약 그렇게 벽돌을 구워서 단련하듯 잠 오는 것을 참고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뭔가를 들어 주시고 기뻐하실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바로 그것이 바벨탑을 쌓는 것이다.(금식은 뭔가를 채워져야 할 존재인 사람의 속을 비우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벨탑은 아주 먼 옛날 이라크로 추정되는 시날 평지에서 니므롯이라는 사람이 주동하여 쌓은 찾을 수 없는 성이나 탑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을 그렇게 본다면 성경을 문자로 또한 지식으로 보는 것이다.


바벨탑은 오늘날 신앙의 업적이나 소유의 드림을 쌓아서 죽어서 상급을 받으려 하거나, 그런 결과를 하나님께서 영광스럽게 여긴다고 생각하고 부추기는 모든 것과 동참하는 것이 바로 바벨탑을 쌓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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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벨탑 (1)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4. 8. 4. 16:58 Writer : 김홍덕

노아의 홍수가 끝나고 다시 사람들이 번성하게 되면서 또 하나의 사건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바벨탑> 사건이다. 



Tower of Babel
Tower of Babel by fimoculous 저작자 표시



바벨탑은 시날 평지에 건축된 탑으로 사람들이 모여서 세상에 자기 이름을 내기 위하여 꼭대기가 하늘에 닿는 성을 쌓기로 한 것이다. 그러고 보면 건축물의 정확한 정의는 <탑>이라기 보다는 <성>이지만 '쌓았다'는 의미가 강해서인지 보통은 바벨탑이라고 하는 것 같다.


이 바벨탑 사건에 있어서 중요한 포인트가 있다면 두 가지가 아닌가 싶다. 먼저는 사람들이 성을 쌓은 목적과 방법, 그리고 다음은 하나님께서 그것을 막으신 방법 이렇게 두 가지의 중요한 포인트가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오늘 날 우리의 삶 가운데도 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바벨탑을 쌓으려 한 목적은 <세상에 자기 이름을 내기 위하여> 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방법은 성을 쌓아 하늘에 이르게 한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우리가 쌓은 성이 하늘에 닿은 사람이다'라는 것을 온 세상에 알리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성을 어떻게 쌓았는가 하면, 그것은 진흙으로 벽돌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진흙을 구워서 벽돌을 만들었다는 것은 사람을 단련시켰다는 것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 "흙"으로 사람을 만드셨다고 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에서 흙이나 땅은 늘 사람을 의미한다.


그런 흙을 구워서 벽돌을 만들었다는 것은 사람을 단련시킨다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벨탑을 만들기 위하여 진흙을 구워서 벽돌을 만들었다는 것은 사람을 단련시켜서 그 공적을 쌓아 올렸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예로부터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하면서 이 땅 위에서 뭔가 공로를 쌓으면 하늘이 기뻐하고 감복한다고 믿고 그렇게 신앙을 가져왔었는데, 그것이 하나님을 믿는 것에도 늘 적용이 되고 있다.


하지만 하나님은 가장 중요한 정체성이 <존재>의 신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어떤 행위나 공적을 기뻐하시는 분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가 전부이신 신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새벽기도회를 가고, 금식을 하고, 또 가난한 사람들에게 밥을 퍼 주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서 사람들이 하기 힘든 일들, 그런 것을 많이 하면 할수록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잠이 오지만 새벽기도회를 그리고 철야기도회를 가고, 배 고프지만 금식 기도를 하는 것이다. 바로 그런 모든 생각들이 바로 흙을 구워 벽돌을 만드는 것이고, 그런 것이 모이면 천국에서 상급이 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바벨탑을 쌓는 것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런 것을 원하지 않으셨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에게 언어를 다르게 만드셨다. 이것은 영어, 불어, 스페인어, 한국어와 같은 언어가 달라지게 하셨다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같은 나라에서 말을 해도 "말을 못 알아 듣는다"라고 하기 일쑤다. 즉 언어가 달라진 것이 아니라, 같은 말이라도 다르게 받아들여진다는 것이다. 즉 의미가 달라지게 하셨다는 것이다.



언어가 달라지게 하셨다는 것은 말의 의미를 서로 다르게 받아 들였다는 것


어쩌면 그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하나님께 혹은 신에게 공적을 쌓을 때 일치된 의견을 보이지 않는다. 막상 교회만 가도 어떤 사람은 군 선교가 제일이라 하고, 어떤 사람은 교회학교 교사가 제일이라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성가대가 최고라 한다.


즉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 중에 어느 것이 최고인가? 하는 하나의 언어에 대한 해석이 여러가지라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사람들이 갈라지게 된다. 가장 기본적인 예로 세례라는 것이 있지 않는가? 세례냐? 침례냐? 이것으로 얼마나 많은 교단들이 갈라졌는가?


바로 그런 것이 언어가 달라졌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에 회의가 필요하고, 갈라지는 일이 있고, 흩어짐이 예상된다면 그것은 다 하나님께서 바벨탑을 쌓는 것을 막는 장치라는 것을 깨닫고 빨리 돌이켜야 하는 것이다.


성경에도 사람들이 바벨탑을 쌓을 때, '흩어짐을 면하자'라면서 탑을 쌓았다. 즉 사람들은 갈라지고 흩어지는 것을 면하기 위해서 탑을 쌓았지만, 하나님께서는 벽돌을 굽듯이 사람을 단련하는 것으로 공적을 쌓는 신앙적인 모임 안에는 필연적으로 같은 말을 다르게 이해하는 갈라짐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교회에 조금만 다녀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본 적이 있는 일이기도 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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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수가 끝나고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더 이상 이런 홍수가 없을 것이라는 언약으로 구름 속에 무지개를 두셨다고 하셨다. 다시 말해서 더 이상은 물로 심판하는 것이 없을 것이라는 말씀을 하신 것이다.



Rainbow Guard
Rainbow Guard by linh.ngan 저작자 표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기실 때 베드로와의 대화를 통해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하신 언약을 다시 말씀 하신다. 이것은 홍수는 물로 죄를 씻는 세례를 예표하는 것이기 때문에, 한번 물세례를 받은 사람은 더 이상 씻지 않아도 된 된다고 하신 말씀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홍수 이후에 더 이상 홍수가 없을 것이라고 하셨다는 것은 자신이 홍수와 같은 세상에서 살 수 없다는 고백이 있는 사람은 다시 물세례를 받지 않는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무지개를 통해서 언약하신 것이다.


하지만 그냥 의식으로서의 세례나 침례를 받았다고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진정한 고백이기 때문에, 자기 안에서 부인할 수 없는 것으로 남아 있어야 하는 것이다. 즉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홍수와 같은 과정을 겪은 물세례의 과정이 있었다는 것을 아무리 부인하려 해도 부인할 수 없는 사람이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그 증거가 무지개인가?


우선 무지개는 빛이다. 무지개는 빛의 여러가지 빛깔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것이 무지개다. 즉 빛이 7가지 색상으로 아니 정확하게는 빨간색에서 보라색 사이를 그라데이션 하듯 연속적으로 변하는 모양을 하고 있는 것이 무지개다.


무지개는 빛이 여러가지 빛깔로 분산되어 나타나는 것이다. 


이러한 무지개가 더 이상 물심판이 없는 증거로 자리한 사람의 특징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다양성이다. 빛은 우리가 아는대로 하나님의 말씀이다. 천지창조도 빛이 있으라 하심에서 시작된다. 이 빛은 인식이다. 빛이 있어야 어떤 것이라도 인식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주신 빛은 그 빛이 있어야 하나님이 인식되고 믿어지는 세계인 것이다. 그것이 빛이고 그것이 하나님의 세계가 시작되는 창세기인 것이다.


그런 빛이 여러가지 연속된 빛깔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무지개를 물심판이 없을 것이라는 증거로 주셨다는 것은 홍수와 같은 세상의 학문이나 모든 것으로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이 존재의 신이신 하나님의 세계가 열리는 것이 빛이고 그 빛이 단순히 하나가 아니라 아주 다양하게 표현될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무지개는 하나님을 표현하는 것이 다양하다는 것을 보여 주시는 것


하나님은 빛이시다. 그런 빛이 다양하게 표현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다양성을 표현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다양한 모습으로 표현되는 것 그것이 바로 물심판이 다시 없을 것이라는 약속의 증거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런 분이다." 규정하는 것은 다시 물심판이 있는 상태라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아무렇게나 표현해도 된다는 말인가? 그것은 그렇지 않다. 일단 빛이어야 한다. 무지개는 잡다하게 다양한 것이 아니라, 빛이 다양하게 표현된 것이다.


빛은 모든 것의 인식이고 시작이다. 빛이 없으면 사람은 어떤 형체도 인식할 수 없다. 최전방 초소에 가면 바로 앞사람 모습도 안보일 정도로 어둡기도 하다. 바로 팔만 펴면 있는 사람도 안 보인다. 그렇게 빛이 없으면 아무 것도 인식할 수 없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라는 빛이 없다면 인생이 무엇인지도 안 보이고, 하나님이 누구신지, 그리스도는 또 누구신지, 교회는 무엇인지, 또 나는 누구인지 전혀 알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빛의 정체이다.


그런 빛이 다양하게 표현된 것이 무지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다양성을 나타내는 무지개를 더 이상 물심판이 없는 사람의 증거로 주셨다는 것은, 온전한 세례를 거친 사람은 하나님을 정형화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동성애자들이 무지개를 다양성이라는 의미에서 그들을 상징하는 깃발로 사용하는데, 그것은 오류가 있다. 왜냐하면 인생의 정체를 밝히는 빛이 다양하게 표현된 것이 무지개지, 기준도 없이 무조건 다양성을 인정하자는 것이 무지개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것은 하나님이 영이시라는 것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한다. 효를 다루는 것에 있어서 심청전이라는 표현 방식만 있는 것이 아니듯이, 영이신 하나님이 다양한 삶의 형태를 가진 사람들을 통하여 표현될 수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 다양성이다.


즉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신, 그러니까 어떤 형태로도 규정되지 않는 분이시기에 다양한 사람들의 모습과 삶을 통해서 표현되실 수 있고, 그것이 또한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이기도 한 것이다.


바로 그런 관계에 대하여 알게 되었다는 것이 세례를 받은 사람이라는 증거라는 의미가 바로 무지개를 주신 의미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세례를 거친 사람은 단 하나의 기준으로 가지고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이나 형태를 심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바로 그럴수 있다는 것이 무지개의 증거를 받은 사람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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