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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에서 아담의 자손은 두 갈래의 계보를 따라 가게 된다. 하나는 가인의 계보이고, 또 하나는 아벨을 대신하여 주신 아들 셋의 계보이다. 창세기 4장 후반부에는 가인 후순에 대한 족보가, 5장에서는 셋 자손의 계보가 기록되어 있다.


성경에서 족보를 설명하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 이름마다 의미가 있기 때문에, 어떤 사람 개인의 신앙 여정에 따라 어떤 계보의 어떤 아비 밑에서 어떤 의미의 이름이 태어 나는 것인가 하는 것이 각각의 신앙 여정을 설명하는 고백으로 이어질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개인적으로 신학을 전공하지 않았기 때문에 각각의 이름의 의미를 설명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라, 생략하고자 한다. 하지만 족보를 보면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낳는 세계"라는 것이다. 이는 "만들어지는 세계"가 아니라는 것이다.


신앙을 공로로 쌓아 간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낳는 세계가 아니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사실 오늘날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차별성을 잃은 것은 하나님 앞에 공로를 쌓고 세상에서 얻은 재화를 교회에 얼마나 기여하는가가 신앙의 척도가 되고 있다는 것이 안타깝기는 하다.


노아는 성경에서 가장 오래 산 사람으로 기록된 '므두셀라'의 손자이다. (웃기는 것이지만 영화 노아에서는 므두셀라가 마법사처럼 나오기도 했다.) 그런 노아의 때가 되었을 때 성경에서 시대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사람이 땅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창 6:1-2)


그 이유로 인하여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년수를 120세로 줄이시고, 더 나아가서 사람 만드신 것을 후회하시고 그 모든 것을 지면서 다 쓸어 버리시겠다고 다짐을 하셨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아들은 누구며, 사람의 딸은 누구인가?"> 아들은 하나님의 아들이고, 딸은 사람의 딸이라는 것은 또 무엇인가, 아들을 낳든 딸을 낳든 간에 어쨋든 남자와 여자가 있어야 하는 것인데, 이것은 도무지 어떤 표현이란 말인가?


먼저 성경에서는 족보를 표현할 때,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아버지가 아들을 낳는 것으로 표현되고 있다. 이는 아들이라는 존재를 남자라는 생물학적 존재를 한정짓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 혹은 그 부모의 신앙이 육신으로 표현된 존재를 아들이라고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을 때, 예수님께서 생물학적으로 남자라서 아들이라고 표현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두신 뜻이 성육신되었기 때문에 아들이라고 하신 것이다. 이것을 모르면 어머니 하나님이나, 어버이 하나님과 같은 엉뚱한 소리를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들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가진 사람들의 그 신앙이 육신으로 표현된 존재들을 의미하는 것이다. 반대로 딸이라는 것은 성경이 육신적인 여자를 한정 짓는 표현으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또한 알아야 하는 것이다.


성경에서 여자는 숫자에도 세지 않는다. 실제로 그런데, 그렇다고 이것이 육신으로 여자인 사람들을 무시하라는 의미는 아니다. 성경을 문자 그대로, 글자 그대로 지키려고 하는 사람들이 범하는 오류가 이슬람에서 여자를 어떻게 대하는지를 보면 그 참혹함을 알 수 있다.


성경은 그런 의미가 아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여자는 하나님의 생각이 그 안에 없는 모든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이는 역사적으로 인류의 족보가 남자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는데, 이것은 남자의 유전 정보를 가문으로 인정한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셨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말씀과 계시가 있는 사람은 아들 곧 남자의 격으로 성경이 말씀하고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육신이 남자라도 여자의 격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는 의미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 앞에서 신부인 것이다. 이것은 육신이 남자냐 여자냐 하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이 왜 중요한가 하면, 그것을 그렇게 받을 수 없다면, 성경을 자기 이야기로 받는 것이 안되기 때문이다. 성경에 나오는 남자와 여자, 아들과 딸이라는 표현이 육신으로 아들과 딸로 받는다는 것은 성경이 자기의 이야기가 아니라 문자적으로 받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고, 그렇게 되면 성경이 자기에게는 그저 역사책이나 기록물에 불과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 알아야 할 것이 있다면, 그렇게 성경을 문자적으로 받는 사람은 설사 자신이 남자라서 아무리 성경을 자기에게 유익되게 해석을 해도 그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여자에 불과한 존재라는 것이다. 이것을 깨닫지 못하면 이슬람에서 여자를 비참하게 대하는 것과 전혀 다를바 없는 신앙이 되고, 어머니 하나님이라는 헛소리를 하게 되기 때문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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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인과 아벨 (6)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4. 6. 14. 15:57 Writer : 김홍덕

가인이 죽인 아벨을 대신하여 주신 아들 셋과 그 셋이 아들을 낳아 이름을 에노스라 했을 때에 대하여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셋도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창 4:26)


이는 정말로 재미 있는 말씀이 아닐 수 없다. 어쩌면 이 한 절이 가인과 아벨이 주는 모든 교훈이 함축된 말씀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에노스가 태어 나서야 사람들이 <여호와>라는 이름을 불렀다는 것이다. 여호와는 하나님의 이름이다. 그리고 이름은 정체성이다.


즉 하나님의 이름을 제대로 불렀다는 것은 하나님의 본성에 대하여 바로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다는 것은 하나님을 존재의 하나님으로 깨닫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호와라는 이름은 스스로 있는 자, 곧 존재의 신이라는 것이다. 그런 하나님을 존재의 신으로 인식하고 불렀다는 것은 존재의 하나님을 믿기 시작했다는 것이고, 하나님을 존재의 하나님으로 믿는다는 것은 자신의 신앙이 존재의 신앙이 되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또한 여기서 이름을 불렀다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는 의미라고 해석들을 하는데, 그것도 참 의미가 있다. 제사(예배)의 문제로 죽은 아들을 대신하여 얻은 아들의 속심령에서 에노스가 나오자 사람들이 하나님을 여호와로, 그러니까 존재의 하나님을 예배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한 개인의 신앙에 있어서도, 아벨의 계보를 따른 셋, 즉 양의 제사를 드리다 죽은 아들을 대신하여 낳은 아들에게서 "죽을 수 밖에 없는 자(에노스)" 라는 고백이 나왔다는 것은, 사람이 양과 같이 연약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고백이 있으면 하나님을 존재의 신으로 바로 예배하게 된다는 말씀이다.


오늘 우리가 이 가인과 아벨 그리고 셋의 말씀을 읽으면서 이것을 알지 못하고, 그냥 "질투해서 사람을 죽이면 안된다 "라는 교훈만 얻는다면 그것은 성경을 겉만 보는 것이고, 문자적으로 보는 것이며, 거저 역사책으로 보는 것에 불과하다.


요한 사도는 이렇게 말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게 하실 것이요(요일 1:9)


죄는 당연히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것은 선악과를 먹고 인간이 부끄럽다고 여긴 아담의 마음이며, 수고한 것을 제사로 열납해야 한다며 동생을 죽인 가인의 마음이다. 즉, 사람의 연약함을 인정하지 않는 마음이라는 것이다.


그런 죄가 있다고 고백한다는 것은 인간이 연약한 존재라는 것을 시인하는 것이다. 그런 시인함이 바로 셋의 고백인 것이다. 셋이 아들의 이름을 "에노스"라고 한 고백이 바로 그것이라는 것이다. 그런 고백이 있으면 하나님께서 그를 깨끗하게 하신다고 했다. 즉 그 예배를 받으신다는 것이다. 제사를 받으신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여호와로 불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누구나 하나님을 여호와로 부를 수 있어야 한다. 말로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아담이 부끄러워했던 인간인 내 모습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인정해야 하나님을 여호와로 부를 수 있다. 그리고 수고가 아니라 양과 같은 운명을 제사로 받으심을 인정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존재로 인정하고 부르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아벨의 제사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죄를 고백하는 것이며, 그것이 우리를 깨끗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없으면 신앙은 아무 것도 아니다. 그냥 세상에서 성공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하는 가인의 마음 뿐이다. 그런 마음은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신다. 평생을 수고해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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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인과 아벨 (5)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4. 6. 14. 15:37 Writer : 김홍덕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연약한 양과 같은 운명으로 드려진 제사이고, 아벨이 드린 양을 바치는 제사와 같은 것이다. 그것을 개인 개인의 교훈으로 가져 온다면 사람이 연약하고 때로 추하기도 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사람들 앞에서 그렇지 않은 척 해도 화장실의 모습은 다 똑같다. 그래서 화장실은 밀폐된 것이다.


모든 사람 안에는 가인과 같은 마음이 있다. 즉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은 양이나 드리는 것이 아니라, 땀 흘려 노력하여 얻은 소출과 같은 세상의 성공을 하나님께서 받으실 것이라는 마음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종교든지 다 세상에서 성공한 것을 신앙하는 신이 기뻐한다고 가르친다.


하지만 하나님은 다르시다. 그런 제사를 받지 않으시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의 교회들도 가인의 제사를 드린다. 그리고 하나님을 믿겠다는 사람들에게 가인의 제사를 독려하고, 아벨과 같이 자신의 연약함을 고백하면 신앙 없는 것으로 취급해 버린다. 아벨을 죽이는 것이다.


십자가는 너무 연약한 것이다. 그런 제사를 드리는 곳에는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 십자가에 달리는 것이 두려울 수는 있지만, 그렇게 되지 않을까봐 두려워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가인의 제사와 같이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온전한 제사라고 믿는 사람들은 실패를 두려워 한다. 그렇게 될까봐 두려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되지 않을까 두려워 한다.


하지만 십자가는 다르다. 그렇게 될까 두려워 하고, 그렇게 되지 않을까 두려워 하지 않는다. 설사 그것인 신앙에 관한 것이라 해도, 그렇게 될까 두려워 한다면 다 가인의 제사이다. 교회에서 욕 먹을까 두렵다면 그 교회는 가인의 제사를 드리는 곳이다. 그렇게 되지 않을까봐 두려워야 그것이 아벨의 제사인 것이다.


그런 가인에게 자손들이 났는데,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두발가인이다. 두발가인은 최초로 철을 다룬 사람이다. 영화 노아에서는 어이 없이 나오지만, 그렇더라도 한가지 동일한 것은 세상의 성공과 육신의 성공을 최고로 아는 것에서는 동일하다.


 

<영화 노아는 좀 어이 없었다>


가인의 자손, 즉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제사로 받아져야 한다는 마음이 낳은 것들은 두발가인과 같은 것이라는 것이다. 가인 자손들의 이름이 가진 의미를 하나 하나 알지는 못하지만 결국 가인의 그런 사상이 표현된 것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반면에 하나님께서 가인의 손에 죽은 아벨을 대신하여 아들을 또 주셨는데, 그 이름은 <셋>이다. 이 이름의 어원은 '대신하다'라는 의미라고 한다. 그에게서 아들이 낳는데 그 이름을 '에노스'라고 했다. 그 에노스라는 이름의 뜻은 "죽을 수 밖에 없는"이라는 의미라고 하는데, 이는 인간이라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셋이 아들의 이름을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라고 지었다는 것은 자신 안에 그런 마음이 있었다는 것이다. 아들은 늘 그 사람의 속사람이 표현된 것이기에 이는 셋의 고백인 것이다. 즉, 셋과 에노스의 세대가 되니 사람이 죽을 수 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라는 것을 고백했다는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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