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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의 홍수 (6) - 홍수를 일으키신 목적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4. 6. 27. 10:33 Writer : 김홍덕

노아의 홍수를 읽고 설교하고 묵상함에 있어 중요한 것은 어떤 것이 있을까? 그런 관점에서 볼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홍수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목적일 것이다. 


그 하나님의 목적은 홍수의 원인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즉 홍수의 원인이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아내로 삼고 그 결과 네피림이 나왔다는 것에 있다고 했다. 그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에 있어 세상에서 좋은 것을 가지고 가면 더 기뻐하실 것이라는 생각과 같은 것이라고 했다.


그럼 그것이 홍수가 일어난 이유라면 목적은 또 무엇인가? 단순히 사람들이 타락하고 그것을 벌하시는 것이 목적의 전부라면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만든 세상과 사람이 불량이라고 시인하는 것이고, 그것은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에 흠집이 나는 일일텐데 말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서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만든 사람을 스스로 죽이시는 신이구나!'하는 것은 사건의 목적은 보지 않고 현상만 보는 관점일 뿐이다. 적어도 하나님을 신으로 인정한다면 그리고 더 나아가서 신앙한다면 하나님께서 그러신 것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럼 하나님께서 홍수를 일으키신 목적이 무엇인가? 이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신 목적을 먼저 생각해 보면 된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된 사람을 만드셨다고 했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천지창조와 사람을 지으신 것이 <하나님 스스로를 표현하시기 위함>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사람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하고자 만드신 인격체인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형상은 형이하학적 그리고 실존적 형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미지> 즉 누군가 "하나님!"이라고 말하거나 생각할 때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이미지를 말하는 것이고, 사람이 바로 그 이미지를 알 수 있게 표현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이 표현되기를 원하셨다는 것이다. 그런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이 결혼하여 네피림과 같은 육신과 형식이 장대하고 위대한 존재가 나오는 것을 싫어하셨다는 것은 그것은 하나님의 이미지가 아니라는 의미인 것이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것이다. 이것을 알 수 없다면 홍수는 그저 옛날에 있었던 사건, 그리고 과학적으로나 역사적으로 증명해서 내가 믿는 믿음의 우월성을 확보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는 기록과 역사일 뿐이다.


이 노아시대의 홍수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이 어떤 존재인지를 설명하고자 사람을 만드셨는데 사람이 그것을 떠났기 때문에 돌이키게 하시는 것을 목적으로 하신 사건이다. 만약 그렇지 않고 벌을 주시는 것 만을 목적으로 했다면 굳이 노아의 가족을 통하여 재기의 기회를 주실 이유가 없을 것이다. 아예 새로 만들지.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홍수를 일으키신 것은 벌을 주시고자 하심이 아니라, 원래 하나님의 창조목적으로 사람을 이끌기 위하심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노아를 통하여 방주를 짓게하고 또 그 안에 어떤 생명을 태우고 하는 것들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이 네피림을 낳는 방법이 아니라 방주를 통하여 보여주신 하나님의 의도하심에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형식이 위대하고 장대한 것으로 하나님을 표현하고자 하시는 것을 사람에게 기대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기대하시는 것은 노아 방주 이후에 나오는 감람나무고, 또한 포도주와 같은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감람나무는 예수님 당시에 기름을 만들던 나무 열매 였다. 그리스도라는 말은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의미이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셨는데 겟세마네라는 말의 뜻은 <기름짜는 틀>이라는 의미라고 한다. 그리고 예수님은 스스로를 "나는 포도나무"라고 하셨다.


즉 하나님께서 홍수를 일으키신 목적은  물에 빠진 사람이 물 속에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닫듯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에 있어 세상의 딸들의 아름다움과 같은 고상함, 위대함, 부와 명예와 같은 것을 취하여 위대해지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그것으로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하시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왜 그런가 하면, 홍수가 일어나는 과정에 대하여 기록되기를 하늘의 물과 땅의 물이 동시에 터져서 합쳐졌다고 했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뜻을 세상의 뜻과 합하면 홍수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즉 물은 넘쳐나지만 정작 사람은 다 죽게되는 홍수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음에 있어,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 안에서 살아가려고 세상의 부와 명예 그리고 고상함과 위대함과 성공을 이루면 더 하나님을 잘 믿는 것이라고 생각하겠지만 홍수가 나서 물에 빠지면 우리가 물 속에서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닫듯이 그렇게는 살 수 없다는 것을 알게 하시기 위함인 것이다.


이 홍수의 물이 어디서 나왔는가? 하늘의 물과 땅의 물이 합쳐진 것이 아닌가? 즉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결혼한 것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네피림이라는 거대한 종족이 나왔듯, 하늘의 물과 땅의 물의 합쳐지니 큰 물이 나서 홍수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홍수가 나면 사람이 그 안에서 살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물에 빠지면 그 안에서 사람이 살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것이 <세례>의 의미이다. 즉 세례는 사람이 물 속에 들어갔다 나오는 것인데, 그것은 사람이 물 안에서 살 수 없다는 것을 알게 하시기 위한 것이다.


사람이 물 속에서 살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한 것인데, 그것이 왜 세례의 의미냐? 여기서 말씀하시는 물은 강에 흐르는 물이 아니라 네피림과 같은 위대함을 낳게 하는 신앙, 하나님의 말씀과 세상의 논리와 아름다운 것을 결합한 홍수 같은 물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것을 강에 흐르는 물로서 예표하셔서 의식으로 만드신 것이 바로 <세례>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홍수를 일으키신 목적은 사람으로 하여금 세상의 것을 결합해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감람유를 부음 받은 사람, 또한 포도주와 같은 사람인 그리스도로 나오기를 바라시기 것이 목적인 것이다. 


그것이 노아의 시대에 홍수로 표현하셨고, 지금 이 시대에 노아의 홍수를 읽고 듣는 이들에게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그리스도와 같이 섬기는 것이지 세상에서 성공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고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고백하는 것이 바로 세례의 의미인 것이지, 세례증서나 발행하면서 교인 증명서 기능을 하기 위하여 받는 의식이 아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이 노아의 홍수에 관한 말씀을 읽으면서 이것을 알지 못한다면, 홍수도 의미 없고, 세례도 하나님 앞에서 의미가 없는 쇼에 불과한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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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의 홍수 (5) - 홍수의 원인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4. 6. 25. 12:52 Writer : 김홍덕

노아의 때에 온 땅이 여호와께 패괴(개역한글)하였다(창 6:11)고 했다. 이는 부패(개역개정)하다라는 뜻이다. 단어의 의미를 조금 더 생각해 본다면, 부패했다는 것에 대한 영어성경의 단어는 Corrupt인데 이 의미에는 '원형이 손상된', '순수성을 잃은'과 같은 의미도 있다.


이는 노아의 홍수가 하나님이 보실 때 세상이 부패하고 그 원형을 잃었기 때문이라 생각하셨다는 것인데, 성경의 족보로 보면 아담의 타락에서 부터 몇 백년이 지난 시간이지만, 한 개인으로 보면 그것은 같은 순간에 있는 일일수도 있다. 왜냐하면 성경은 오늘, 나에 대한 말씀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노아의 시대에 홍수를 일으키시고, 또 그것을 기록하신 이유가 있다면, 오늘 그것을 읽는 이들의 마음 안에 노아 시대의 타락한 마음이 우리에게 있었다는 것이고, 또한 홍수로 그것을 쓸어버리시듯 오늘 나의 마음과 삶에서 그것을 씻기시려는 의도가 있으시기 때문이다.


근본적으로 이 노아의 홍수는 우리에게 있어 세례와 같은 것인데, 세례 요한의 세례를 회개의 세례라고 누가복음에 기록이 되어 있듯이, 세례가 우리의 죄를 씻는 예식인 것 같이, 노아의 홍수 역시 우리에게 또 그 당시 세상에게 있어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을 씻어 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하나님께서 씻어버리고자 하신 것이 무엇인가 했을 때, 그것은 부패와 폭력(충돌하다는 의미도 있음)이고 그런 것이 있게된 원인이 뭔가 했을 때,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아내로 취하여 네피림이라는 위대한 족속을 낳았기 때문이었다.


이 네피림은 장대한 사람이라고 했는데, 이는 육신으로 장대한 사람이라는 의미보다, 사람들이 위대하다고 느낄 수 있는 결과물들이라고 했다. 이는 자손, 특히 아들이라는 존재가 그 부모의 의와 뜻이 육신으로 태어난 것이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의 아들들의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아내로 삼고자 하는 그 마음이 육신이 된 존재가 바로 네피림이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에 있어 사람의 철학과 재물과 화려함과 고상함과 같은 것이 더해지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며,


그것은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을 신앙하는 것에 있어, 세상에서 좋다고 여기는 것으로 하나님을 섬기면 하나님께서 좋아할 것이라 믿는 마음이며, 교회가 화려하고 좋은 건축물과 시설물을 가지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고, 신앙인이 세상에서 성공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이라 생각하는 마음이다.


이것은 오늘 우리의 마음에 다 있는 일이고, 또 있었던 일이다.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이 신권이어야 한다는 것이나, 예배때 단정한 옷을 입고 가야 한다고 하는 것과 같은 것들이 다 그런 것이다.[각주:1] 필자도 예전에는 늘 그랬다. 주일예배 때는 늘 속옷도 갈아 입고 단정한 차림으로 갔었다.


하지만 그때 그랬던 것은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렇게 해야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러지 않는다. 지금도 예배에 갈 때면 적어도 운동화에 어울리는 차림은 지양한다. 이는 다소간은 오랜 습관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기본적으로 내가 그러고 싶어서 그러는 것 뿐이다.


이러한 사람의 마음, 즉 세상에서 좋다고 하는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하고 심지어 그렇게 해야한다고 생각하는 마음은 전부 홍수의 원인이고 하나님께서 싫어하신 타락한 마음인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아내로 삼은 것과 같은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노아의 시대에는 장대한 사람인 네피림이 나왔다면, 지금의 시대에는 화려한 건물로 지어진 맘모스형 교회가 나왔고, 우리의 신앙은 세상에서 성공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이라는 마음으로 세상에서 위대해지고 장대한 교회와 기독교인들의 모습이 나온 것이다. 이것이 바로 홍수의 원인이고, 우리가 회개해야 하는 마음이다.



  1. 이는 예배 때 남루한 옷을 입어야 한다거나 그러는 것이 좋다는 의미는 아니다. 새 옷을 입었을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고 의도적으로 그러는 것과, 자기 마음이 참 그러고 싶어서 그러는 것과는 구분되는 마음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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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단과 정통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교회 Date : 2014. 6. 24. 18:16 Writer : 김홍덕

근자에 구원파니 유병언 회장이니 하면서 떠들석하다. 그런 논란의 한켠에 <이단>이라는 것이 있다. 여러 정의가 있겠지만, 개인적으로 하나의 관점을 생각해 본다면 <"사람이 신격화 되는가?">하는 문제가 아닌가 생각이 된다.


성경을 경전으로 삼는 많은 교회나 종교들에서 파생된 이단들의 공통점이 있다면 그것은 <교주>가 있고, 또한 그 교주가 하나님과 동격 혹은 하나님과 혈연관계적 위치의 존재라는 개념이나, 혹은 동일한 능력이나 능력의 위임을 받았다는 등의 홍보가 있는 경우가 많다.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은 성경에 그런 표현들이 제법 있기 때문이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너희가 나보다 더 큰 일을 할 수 있다"고 하신 요한복음 14장 12절의 말씀이 아닌가 싶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요 14:12)


성경은 예수님이라는 하나님의 아들의 오심과 기능과 능력을 기반으로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를 설염해가고 있다. 그러한 말씀의 기반 위에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도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신앙을 전하고 있다.


성경은 분명히 사람이 하나님과 같은 존재가 될 수 있는 여지를 두고 있다. <하나님의 형상>이라든가, 야곱이 에서를 보고 '하나님을 보는 것 같다'고 한 것, 또한 예수님께서 '아버지와 예수님이 하나이다'(요 17장)라고 하신 것과 같은 말씀들이 그런 여지가 있다.


하지만 사람은 하나님이 될 수 없다. 더 엄밀히 말하면 하나님 처럼 될 수 없다. 아니 사람이 하나님처럼 되어야 할 이유가 없다. 하나님이 계신데, <하나님처럼> 행동하는 존재가 있어야 할 이유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더욱이 사람이 하나님이 될 수는 없다.


사람들이 말하는 <하나님처럼>, 혹은 <예수님처럼>이라는 표현 속에는 다분히, 사람이 할 수 없는 기적을 행하는 능력에 관한 기대와 그런 능력을 가졌을 때 받는 사람들의 주목에 대한 욕망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적도 다 목적이 있는 것이지, 사람이 하나님처럼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럼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는 어떤 것인가? 그것은 하나님은 내용이시고 사람은 형식이라는 관점이다. 즉 하나님은 의와 뜻을 가지고 계신 분이고 사람은 그것을 표현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말씀이 육신이 된 것이다.


예수님이라는 존재가 바로 그렇게 하나님의 뜻을 표현하는 육신으로 이 땅에 오셨기 때문에 육신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과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블로그에서 자주 말해가고 있듯이 <아들>이라는 존재가 바로 아버지의 뜻과 의가 육신이 된 존재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시고, 


또한 예수님과 동일하게 육신을 가지고 있는 보통의 사람들도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을 표현하는 삶을 살아갈 때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다는 것이 바로 성경의 말씀이다. 이것이 바로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이고,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의미이고, 이것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자동차로 본다면, 자동차의 본 목적이 이동이라는 내용이고, 쇠로 만든 자동차는 형식이다. 즉 하나님은 자동차에 비유하면 이동이라는 목적이시고, 쇠로 만든 자동차는 바로 육신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함께 있어 이동이 가능해지면 그것이 바로 하나가 된 것이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 것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단의 교주들을 보면 적어도 사람이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있다는 것 까지는 깨달은 사람들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들이 몰랐던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자신이 하나님을 대신한다는 생각을 했다는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을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표현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대신하는 것이다. 그런데 많은 이단들이 하나님처럼 되려 하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이 될 수 없다. 육신이 죽지 않고 사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데, 어떻게 영이신 하나님과 같이 영원할 수 있겠는가? 문선명도 죽었는데 말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대신하는 것은 하나님은 육이 없으신 영이기 때문에 그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할 육신으로 살아가는 것으로 하나님을 대신하고 하나님을 표현하는 것이 존재의 목적인 것이다.


이러한 것이 구분이 되지 않으면 몇가지 특징이 나타난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높임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처럼 되려 한다는 것은 남들이 하지 못하는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으로 착각하기 때문에 그런 능력을 바탕으로 그렇게 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너희도 이렇게 할 수 있다"는 꿈을 심으며 교주가 되어 간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고 하셨다. 이것이 바로 온전히 하나님을 아는 것과 이단의 결정적인 차이이다. 그런 측면에서 본다면, 현재의 많은 맘모스 교회의 당회장에 대한 예후를 어떻게 볼 것인지 또한 분명한 것이 아닌가 싶다.


이단이라는 것에 대한 정의가 교세로 판단이 나기도 하는 세상이다. 한 때는 순복음도 이단이라고 했는데, 교세가 커지니 정통이 되고, 신천지도 이단으로 밀어 붙이는 것이 힘에 부치는지 인정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목소리가 나오는 것을 보면 이단과 정통의 기준이 많이 변질된 것이 아닌가 염려스럽다.


신앙에 정통이 있다면, 그것은 사람이 하나님처럼 되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표현하는 것에 있으며, 세상의 방법에 따라 성공할수록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다고 생각하는 변질된 교리가 아니라, 이 연약한 육신, 버리고 싶고, 서로 흉 보고 싶은 이 육신을 하나님께서는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심을 기억하고, 이 연약한 육신이 하나님을 표현하는 온전한 도구라는 것을 아는 것이 바로 정통의 신앙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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