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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고 또한 그리스도이시다. 예수라는 이름은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자’라는 의미이고, 그리스도는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의미로 제사장과 왕의 신분을 가진 사람이라는 의미이다.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자’라는 예수라는 이름은 직임이요 ‘기름 부음을 받았다’는 그리스도라는 이름은 신분에 관한 예수님의 이름이다. 이름은 정체성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정체성이 바로 예수고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그런 예수님께서 사람을 구원하시려고 하늘의 보좌를 버리고 오셨다. 그리고 이 땅에 오셔서 사람들이 할 수 없는 기적을 행하시고 끝내는 사람들을 위하여 십자가라는 엄청난 고통을 감수하셨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예수님을 바라 볼 때 ‘과연 그분이 우리와 같은 사람인가?’ 하는 의심을 하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보통 사람은 물 위를 걸을 수도 없고, 죽은 사람을 살릴 수도 없기 때문이다.


더욱이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음을 당하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셔서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하늘에 오르시는 모습을 보여주셨다. 그런 예수님에 대하여 사람들은 육신을 가지신 것이 아니라 신과 같은 존재, 혹은 우리와 다른 육신을 가진 존재라고 생각을 했고, 지금도 그렇다.


그런 생각은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너무나 당연한 생각일지 모른다. 어떻게 사람이 죽었다 살아나고, 또 육신을 가진 상태로 하늘에 오르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으려고 한다면 그 능력의 차별성을 인정하고 싶게 된다.


그러다보니 ‘십자가에서는 잠깐 기절한 것이다’라든가 아니면 ‘원래 신이라서 죽지 않았다’와 같은 이론들이 초대 교회에 은근히 자리 잡게 되었고, 이러한 사상은 결국 영지주의라는 사상이 되어 신앙에 있어서 육신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그런 영지주의 사상은, 단순히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승천하는 모습을 이해하기 힘들어서 예수님이 육신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육신을 부인하고 싶은 마음과 결합된 것이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것이 중요한 점이다.


영지주의는 단순히 예수님의 육신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가 육신임을 부인하는 것


사람들은 자기 안에서 일어나는 욕망들과 연약함 그리고 추함을 배척하고 자신의 삶에서 축출되기를 희망한다. 자기 안에서 잊을만하면 다시 나타나는 성욕이나 분내는 것과 같은 추하다 생각되는 본능이나, 마음으로 원하는 것을 쉽게 하지 못하는 육신이 늘 원망스럽다.


그리고 그러한 요소들은 자신이 하나님을 믿는 것에 있어 장애 요인이라고 생각한다. 즉 그런 마음이 드는 자신을 하나님께서 받아주시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자신을 그렇게 만드셨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인 줄도 모르고 말이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자기 안에서 그런 것이 없어지기를 기도하고 신앙의 힘으로 극복하려고 한다. 하지만 해 보면 그것은 결코 가능한 일이 아니라는 것 앞에서 또 좌절하게 된다. 그 역시 하나님께서 사람을 그렇게 만드셨다는 것을 부정하기 때문에 좌절하는 것이다.


그러다 사람들은 결국 예수님이 우리와 다른 존재라는 말에 현혹된다. 그것은 자신이 육신을 부정하는 것에 대한 명확한 해석과 탈출구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지주의가 각광을 받는 것이다. 육신은 하나님을 믿는 것과 무관하다고 하니 말이다.


바로 이러한 상황에 대하여 요한 사도는 심각한 문제로 봤다. 그래서 자신이 만난 예수님은 그런 신적인 예수님이 아니라 우리와 같은 육신을 가진 존재였다는 것을 전하고자 했다. 왜냐하면 그것은 신앙의 본질적인 요소이기 때문에 그렇다.


요한 사도가 말한 그런 관점은 오늘날도 있는 문제다. 다시 말해서 영지주의라는 것이 초대교회 시대에 잠깐 있었던 이단 사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늘날도 육신으로 오신 예수를 부인하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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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요한은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을 전하고자 요한 1서를 기록했다고 시작한다. 이 말씀에 대하여 요한복음에서는 ‘육신이 된 말씀’이라고 했고, 요한 1서에서는 ‘보고 듣고 만진바 된 말씀’이라고 했다.


이 말씀은 성경을 대하는 모든 이들이 알 수 있듯이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을 만나는 순간이 하나님 세계의 태초라는 것을 기반으로 생명의 말씀이라는 것은 생명이 시작되는, 그러니까 세계를 살고 인식하는 시작이 예수님을 만나는 것에서부터 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영이시고 또한 신이시기 때문에 그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 역시 사람과는 완전히 다른 존재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어떨 때는 예수님은 화장실도 가지 않으실 것 같은 존재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것은 한마디로 예수님은 우리와 다른 육신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은 물 위도 걷고 죽은 사람도 살리는 우리와 다른 존재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도 요한은 예수님에 대하여 설명하기를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분이라고 했다. 그리고 자신은 그 예수님을 보고 듣고 만진바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예수를 전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요한 1서다.


여기서 요한 사도가 말하고 있는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은 우리와 동일한 육신을 가진 존재라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것이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우리와 동일한 존재와 동일한 정체성을 가져야 우리가 예수님과 동일한 신분이 될 수 있는 당연한 이치 때문이다.


만약 예수님의 육신이 우리와 다르다면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은 예수님과 같은 육신을 가진 존재만 된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에 있어서 아주 아주 중요한 문제이다. 예수님이 우리와 다른 존재라면 우리의 구원은 요원한 것이고, 다른 존재로서 우리의 죄를 대신할 요량이었다면 굳이 우리와 같은 육신으로 이 땅에 오실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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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일서 1장 1절) 생명의 말씀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한1서 Date : 2014. 8. 16. 09:07 Writer : 김홍덕

생명의 말씀



사도 요한은 요한 1서를 시작하면서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이라고 했다. <생명의 말씀>이 태초부터 있었다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더 정확하게는 <생명의 말씀>이 있어 시작된 태초라는 의미가 더 정확하다.


어떤 세계든 입문하는 시점이 있다. 우리는 그것을 <시작>이라 한다. 그와 같이 하나님의 세계에 대하여 눈을 떠는 시점이 있는데 그것을 성경에서는 <태초>라고 한다.


물론 분명히 하나님께서 이 지구라는 행성을 포함한 우주와 세계를 만드신 것은 신앙의 근간이다. 하지만 그마저도 하나님 믿는 신앙의 세계가 그 사람에게 시작이 되지 않으면 믿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이 말하는 태초는 하나님의 세계가 한 사람 안에서 시작되는 시점이라는 것을 내재한 말씀이다. 요한 사도에게 그런 시작이 있었는데, 바로 <생명의 말씀>을 만나면서부터 라는 의미가 바로 1장 1절의 말씀이다.


이 <생명의 말씀>은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러므로 요한 사도가 말하고 있는 <태초>는 적어도 그에게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시점이 태초였다. 그리고 사도 요한이 그것을 전하고자 했다. 그러므로 이 성경을 읽는 사람들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시점이 바로 <태초>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시점이 바로 <태초>



예수님께서는 직접 자신이 <생명>이라는 말씀을 하셨다. 사도 요한은 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말씀하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라고 했다. 생명의 말씀에 관해서 전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요한 사도가 만난 이 생명의 말씀은 요한에게 있어 새로운 세계가 열리게 했다는 것이 바로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요한 사도가 전하고자 한 것이 그것이라는 것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동일한 사건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예수 그리스도를 안다고 할지 모르지만,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새로운 태초가 열린 것과 아는 것은 엄연히 다른 것이다. 엑셀이라는 프로그램은 어지간한 사람들은 알지만 그것으로 업무나 학습에 세계를 누리는 것은 엄연히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특히 기독교를 종교로 삼고 있는 사람들은 잘 안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요한 사도가 그리스도에 대하여 기록할 당시의 유대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직접 만난 사람도 수없이 많은 시점일 때 기록되었다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요한 사도가 볼 때 예수님을 직접 만난 사람조차도 생명의 말씀으로 시작된 세계를 누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느꼈기 때문에 이 성경을 기록하고자 했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은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만나지 못한 사람들의 시대라는 점을 감안하면 하나님의 세계가 열리는 태초를 온전히 경험하고 누리는 삶에 대한 바른 만남이 필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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