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 2619

방주에는 분명히 지금의 우리가 가진 지식으로 다 이해하기 힘든 탑승객들이 탑승했다. 하지만 그것을 이해하는 것이 믿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방주는 하나님께서 세상의 죄악을 다 쓸어버리시고자 홍수를 일으키실 때, 그 심판에서 살아 남아야 하는 존재들을 태우는 배였다.


그러므로 방주의 탑승객은 죄악이 만연한 세상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존재가 누구인가가 중요한 문제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바로 방주의 탑승 대상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또한 방주가 <교회>라는 이유이기도 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방주에 탑승한다는 것은 교회의 구성이 되는 자격이라는 의미이고, 또한 그 탑승자들의 정체성이 방주의 규격이고 교회의 정체성이라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방주에 탑승한 탑승객들에게 있어서 논제가 될 수 있는 것은 단연 <부정한 짐승>이다. 타락한 세상에서 살려야 하는 것을 태운 방주라고 할 때 정한 짐승을 태우는 것은 너무 당연한 것이지만, 부정한 짐승을 태우는 것은 선뜻 이해하기 쉬운 일은 아니다.


게다가 처음에는 암수 한쌍식이라고 하셨다가 다음에는 정한 짐승은 7쌍씩, 부정한 짐승은 2쌍씩이라고 명시하시지만 뭐가 정한 것이고, 뭐가 부정한 것인지에 대하여는 알 수 없다. 쉽게 생각하면 노아의 방주 이전에 부정하다고 생각되는 짐승은 뱀 정도가 유일하다.


돼지와 같이 굽과 되새김질과 같은 것을 기준으로 정하고 부정한 짐승을 구분하는 것은 모세시대에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노아 시절에 어떤 짐승이 정하고 어떤 짐승이 부정한지를 가늠할 수 있는 단서가 없다고 봐야 한다.(물론 신학적 고찰은 있겠으나, 필자는 신학자가 아니므로 그것까지 미치지는 못한다)


오히려 이 말씀은 숫자가 가진 수리적인 개념이 아니라 의미적 개념으로 볼 수 있다. 7[각주:1]은 일곱개라는 의미기도 하겠지만 성경에서는 원래 정하고 온전한 의미를 숫자로 표현할 때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정한 짐승은 7쌍이라는 표현은 정하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라 생각된다.


또한 부정한 짐승은 두쌍씩이라고 했는데 성경에서 2라는 숫자는 기본적으로 부정한 숫자가 아니다. 흔히 아는 부정한 수는 6으로 우리는 알고 있다. 2에 대한 또 다른 성경 말씀은 증거에 관한 것이다. 즉 율법에서 증인은 2명이 되어야 한다고 되어 있다는 것이다.(창 21:27, 신 17:6, 요 8:17)


즉 2는 어떤 것에 대한 증거, 보증과 같은 의미를 가진다고 볼 수 있는데, 어떤 짐승인지는 모르지만 부정한 짐승을 2쌍으로 태우라고 하신 것은 교회 안에 부정한 것에 대한 의미를 어떻게 볼 것인지에 대한 말씀이 아닌가 생각된다.


다시 말해서 부정한 것에 대하여 서로 증거가 된다는 의미인 것이다. 즉 너나 나나 다 부정한 존재라는 것이 증거가 되는 곳이 교회라는 의미라고 볼 수 있다. 즉 이는 교회가 어떤 사람을 부정하다고 규정하는 곳이 아니라, 서로가 원래 하나님 앞에서 부정한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는 곳이고, 그런 사람이 바로 방주에 탈 수 있다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지금 노아 시대에 하나님께서 땅의 모든 죄악을 쓸어 버리시기 위하여 홍수가 일어난 마당에 하나님께서 부정하게 여기시는 것이 홍수의 피난처인 방주에 탄다는 것은 사실 말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부정하다는 것을 서로 인정하고 자신이 부정하다는 증명을 받은 사람은 탈 수 있는 피난처가 바로 방주고 교회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부정하다는 것을 증명 받은 존재는 방주 곧 피난처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문둥병에 관한 규례에서도 오히려 온 몸이 문둥병으로 희어진 사람은 정하다는 판단을 받는 것과 비슷하다. 즉 교회라는 곳은 자신이 부정한 사람이라는 것을 증거로 공인 받은 사람이 들어가는 곳이라는 것이다.


또한 교회는 정한 것과 부정한 것이 공존하는 곳이라는 것도 아주 중요한 말씀이다. 심판을 받는 세상의 피난처인 방주 안에 정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이 함께 타는 곳이라는 것이다. 원래부터 정한 것만 타는 것도 아니고, 또한 부정함을 공인받고 고백한 사람만 타는 곳도 아니라는 것이다.


방주는 이렇듯 정한 것과 부정한 것이 함께 타는 곳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교회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교회는 하나님 앞에 순전한 신부인데, 그 신부가 순전한 것은 정한 것과 부정한 것이 공존할 수 있어서 순전한 것이라는 말씀인 것이다.


이것은 마치 선악과[각주:2]와 같다. 선악과도 선한 것과 악한 것이 함께 있는 과실이다. 그런데 아담이 선악과를 먹으니까 자신을 부끄러워했다는 것은 선과 악을 분리했다는 것이다. 즉 자신이 부끄러워하는 그 육신을 인정하지 않아서 부끄러워했고 감추려 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방주에는 악한 것은 없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방주 안에 부정한 것도 두 쌍씩 태우라고 하셨다. 그것이 교회라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선악과를 먹고 어떤 것을 선과 악으로 나누어 어떤 것은 부끄럽고 버릴 것으로 여기는 것이 교회의 모습이 아니라, 사람의 육신이 부정하고 연약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증거를 받았을 때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곳이 교회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계속)




  1. 전통적으로 7은 하나님을 의미하는 숫자 3과 사람과 땅을 의미하는 숫자 4의 합으로 하나님과 사람이 연합한 상황을 의미하는 뜻에서 온전하고 정한 의미를 가진다고 하기도 함 [본문으로]
  2. 선악과에 대하여는 이 블로그에 길게 설명하였으므로 해당 포스트를 참조 바랍니다. [본문으로]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

노아의 홍수 (10) - 방주의 탑승객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4. 7. 7. 11:16 Writer : 김홍덕

노아가 만든 방주의 규격은 길이가 300규빗, 너비가 50규빗, 높이가 30규빗이라고 되어 있다. 이는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정확히 몇 미터인지는 알 수 없다. 아무도 노아의 규빗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규빗을 SI계 단위인 미터(M)로 환산하는 것도 어리석은 짓이다.





노아가 만든 방주의 규격은 어떤 것이 들어가기에 적합한 규격이라는 점을 생각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어떤 것이 들어가도록 만들어진 공간인지가 중요한 것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들어갈 것을 생각하고 만드는 것이 기본적인 개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방주 탑승객(?)중에 우리가 정확히 알 수 있는 것은 노아의 가족 8명과 나중에 나오는 비둘기와 까마귀 정도이다. 나머지는 정한 짐승 각 7쌍과 부정한 짐승 각 2쌍이라고만 성경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아는 동물들을 방주에 태운다고 할 때, 정말로 다 탑승이 가능할까?


코끼리를 정한 짐승으로 봐야하는지 모르겠지만 만약에 그렇다면 14마리가 들어가면 한 마리당 몸길이를 6m정도로 보면 그 길이만 84미터에 해당하고, 기린도 그렇게 보면 높이가 5.5m에 해당한다. 그런데 규빗을 50센티로 본다해도 방주는 길이 150미터에 높이 15미터에 불과하다.


이런 이야기를 해 보는 것은 성경을 그런 관점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다. 우리가 아는 과학적인 상식으로 본다면 에버랜드에 있는 동물도 다 탈 수 없는 크기에 불과한 것이 노아가 만든 방주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것은 동물들이 탓겠지만, 홍수에 동물들이 죽을까봐 태운 것이 아니라, 어떤 의미를 가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단순하게 생각하도 하나님께서 다시 만들 수 없어서 태운 것은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어떤 동물을 태웠느냐? 하는 문제나 어떤 짐승이 정한 것이고, 어떤 짐승이 부정한 것인지를 구분하기 위한 말씀이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성경에 기록된 말씀은 문자 그대로의 일들이 있었을 것이라는 것을 의심하지는 않는다. 죽은 사람이 부활하는 것이 기록된 것이 성경이다. 그러므로 물리적으로 볼 때 불가능한 공간이라서 방주에 우리가 아는 짐승들이 다 타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바른 판단은 아니다.


하지만 성경이 그런 모순을 넘는 기적이 있다는 것을 믿으라는 것 만을 목적으로 기록된 말씀인가 하는 것에 있어서, 상식과 과학에 반하는 일들이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으로 말미암아 실현되었다는 것을 믿는 것이 믿음일지, 아니면 그것이 오늘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시기 위하여 그런 기적과 같은 일들을 행하셨는지 알고 자신의 말씀으로 받는 것이 믿음일지에 대하여 생각해 봐야 한다는 것이다.


방주에 짐승들이 어떻데 다 탑승했는지를 연구하는 하는 것은 믿음이 아니다. 설사 그것을 연구해서 알게 되었다 해도 왜 그랬는지를 모르면 모르는 것이다. 고대 성형문자나 오래된 문자를 해석해서 그것을 언어로 표시했다고 아는 것인가? 아니면 왜 옛날 사람들이 그런 일을 했고, 그것을 기록했는지를 아는 것이 그 문자를 아는 것인가?


성경의 말씀이 바로 그런 것이다. 개인적으로도 어떤 방법일지는 모르지만 그 당시에 있던 모든 동물들을 성경의 기록되어 있는 것과 같이 방주에 다 탑승을 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은 나에게 의미가 있는 말씀은 아니다. 다시 말해서 그것을 믿는다고 방주가 나와 상관이 있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계속)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

노아의 홍수 (9) - 세상과 교회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4. 7. 6. 23:22 Writer : 김홍덕

노아의 방주는 성경에 대하여 묵상하고 공부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교회>의 예표라고 이야기 한다. 방주가 교회의 예표가 된다면 홍수는 당연히 세상이 될 것이다. 흔히들 이야기 하는 죄악이 넘치는 세상에서 생명을 지킬 수 있는 곳이 교회라는 것이다.


방주가 교회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방주는 당연히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방주가 그리스도 또한 교회가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서 구원자가 되신다는 것이다. 이 방주는 지금 하늘의 창과 깊은 샘들이 터져서 발생한 홍수 상황에서 유일한 피난처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신앙하는 것에 있어, 세상의 방법을 도입하고 세상의 법칙이 동원되어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자아 정체성에 대한 해갈에 필요한 물이 넘쳐나서 오히려 마실 수 없는 홍수가 된 상황에서 피난처가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사람들의 갈증, '왜 사는가?', '나는 누구인가?'와 같은 자아 정체성의 갈증에 있어 유일한 해답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이고, 이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상황에 있어 피난처가 되시는데, 그것은 하늘의 창과 깊은 샘이 터져서 물이 넘쳐나는 상황에서 피난처라는 것이다.


지금의 시대는 문화와 지식과 철학과 과학이 넘쳐나는 세상이다. 과학은 사람의 근원을 과학적으로 찾고자 생물학을, 또는 우주과학을 연구하고, 철학과 인문학은 사람 내면의 생각들을 연구하고 있고, 세상적인 문화는 갈증을 잊게 하는 즐거움을 끊임 없이 쏟아내고 있다. 한마디로 물이 넘쳐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어느 누구 하나 그런 것 안에서 세상에 존재하는 자아의 정체성을 알고 만족하는 사람이 없다. 큰 스님도, 재벌 총수도 대국의 대통령도 어느 누구 하나 다른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볼 때 공감할 수 있는 해답을 찾았다는 사람이 아직은 없다.


그렇다면 교회들은 또 어떤가? 교회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전함으로 사람들에게 하나님과 인간의 정체성을 설명하는 것에서 멀어지자 세상의 각종 법과 좋은 것을 교회 안으로 끌어 들이고 있다. 예를 들어 교회를 화려하게 짓는 것과, 다양한 시설을 교회 안으로 가져와서 신앙에 활용하고자 한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어느 것 하나 세상을 극복할 수 없는 상황이다. 작정하고 발전하는 세상의 일부를 교회 안에 가져와서 승부가 될리가 없는 것이다. 이것은 교회 학교의 실질적 문제이다. 교회가 성경말씀을 동영상과 같은 세상에서 좋은 것으로 아무리 만들어도, 세상이 만든 만화를 이길 수 없는 상황인 것이다.


이런 것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아내로 취한 것과 같은 것이다. 성경 말씀을 동영상으로 만들면 문제가 해결될 줄 알고, 교회를 편하고 좋은 시설로 만들면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 믿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다소간의 문제해결에 영향을 주는 것 같지만 수박 겉핡기에 불과한 상황이다.


진정한 문제의 해결은 성경 말씀을 화려한 CG로 동영상을 만들고, 교회의 시설을 최첨단으로 하거나 휴양할 수 있는 곳을 만든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해답은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하게 아는 것, 그것 뿐이다. 방주는 그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아는 것, 그것이 바로 노아의 방주인 것이다.


(계속)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