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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순도

Category : 김집사의 뜰/복음 담론 Date : 2014. 9. 1. 09:41 Writer : 김홍덕


Tons of money
Tons of money by pfala 저작자 표시변경 금지



신앙의 한 측면을 <돈>에 비유해 보자. 돈이란 사실 무형의 가치에 대한 대용특성이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이루거나 가진 모든 것을 바꾸어낼 수 있고, 또한 상황에 따라 가치가 달라지며, 또 사람이 가진 가치 기준에 따라 또 달라진다.


한 마디로 돈은 사람들이 가진 모든 가치를 대변하는 '공약수'인 것이다. 그리고 또한 역으로 사람들이 가지고 싶어하거나 필요로 하는 모든 것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이 돈이다. 어쩌면 돈이라는 것은 후자, 그러니까 필요한 모든 것으로 바꾸어내기 위하여 모으고 바라는 것이다.


신앙의 두 가지 큰 특성을 하나는 진정성, 즉 순도라는 것과 또 하나는 보편성, 즉 확장성이 있다. 순도라는 것은 얼마나 신앙의 원리에 다른 것이 섞이지 않았는지에 대한 것이고, 보편성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보편적으로 수용도리 수 있는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신앙의 순도가 흐려지면 세상의 것을 받아 들인다. 다시 말해서 '세상에서 성공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하는 가치관은 순도가 완전히 흐려진 것이다. 돈으로 치면 한 장의 종이에 달러화와 원화를 같이 인쇄한 것과 같다. 한 마디로 가치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 있어 세상적 가치관은 놀라울 정도로 많이 침투해 있다. 교회에서 헌금을 많이 하거나 수고를 많이 하면 인정 받을 수 있다는 것은, 세상이 가지고 있는 가치관과 같은 것이다. 헌금하고 수고하는 것이 나쁜 것이 아니라, 그것이 좋은 신앙이고 교회에서 인정 받는 것을 염두에 두었다면 그렇다는 것이다.


꽃이 꽃이라서 향기가 나듯이, 자기 안에 교회에 헌금할 수 밖에 없는 마음이 있어 그것이 표현된 것과 헌금을 해야할 것 같아서, 또 천국가서 잘 살기 위한 복선을 가지고, 또 교회의 장로가 되기 위해서 한다면 그것은 그냥 방향제와 같은 것일 뿐이다. 인위적인 것이다. 방향제가 자연이 아닌 제조물이듯 그런 신앙도 순수한 것은 아니다.


반대로 너무 순도만을 고집하는 신앙은 문제가 있다. 신앙 안에서 믿는 바가 어떻든 그것에 매몰되어 부모도 버리고 세상을 그저 종살이라고 하며, 또 신앙이 없으면 무조건 짐승 취급하는 것도 문제다. 그것은 보편성이 없는 것이다.


신앙이 보편성이 없는 것은 돈으로 치면, 돈을 모으는 것 그것에 몰입된 가치관과 같다. 돈을 모아서 필요한 곳에 쓰지 않고 그저 모으기만 하는 삶, 그러니까 돈이 인생의 목적인 삶에 비유될 수 있다. 신앙은 그런 것이 아니다.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이 믿는 신앙의 자부심으로 인하여 일방적으로 세상을 비난하고, 예수 믿지 않거나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을 악하다고 한다. 하지만 그런 기독교인들의 삶이 세상 사람들에 비해 선하지 않다. 도덕적 측면에서도 특별히 나을 것이 없다.


기독교인들의 의는 삶이 의로워서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의롭게 여기심 때문이다. 예수 믿는다는 것 자체가 세상의 모든 기준에 대하여 의로운 사람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런 세계에 있어서 부족한 것은 인정도 하고 책임도 질 수 있어야 한다.


세상은 어떻게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를 그리는 도화지와 같다.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을 나타내는 삶을 살도록 하는 대상들이지, 예수 믿지 않는다고 복음을 모른다고 비난하고 단절해야 하는 대상들이 아니다. 비난은 더더욱 하면 안되는 것이다.


전도라는 것은 서울역 광장에서 사람들을 피곤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복음을 삶을 살아서 그 삶의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나도 저런 삶을 살아야 겠다"라는 마음이 들도록 하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 믿는 것에 바대나 동의하지 않는다고 사람을 감동시키는 수고를 배제하고 심지어 부모를 버리고 집을 나와서 신앙생활 하는 것은 전혀 보편성이 없는 것이다. 


그런 것은 돈이 삶의 목적인 것과 같다. 돈은 필요하고, 또한 인생 살면서 하고 싶은 것을 하기 위하여 모으는 것이지, 돈을 모으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듯, 신앙의 순도 또한 그런 것이다. 신앙이 순수해져야 하는 것은 모든 사람, 또한 이 세상과 연합될 수 있기 위하여 순도를 높이는 것이지, 순도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모든 액체에 있어서 물은 가장 순도가 높은 것이다. 모은 수용성 액체로 변화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하여 하수와 같은 오수들은 정화해서 순도를 유지하는 것이다. 이 순수한 물은 순수한 물로 있기 위하여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먹고 또 다른 음료로 확장되기 위하여 순수하게 하는 것이다. 



Water Drop!...
Water Drop!... by ramesh.rasaiyan 저작자 표시비영리



돈을 모으는 것이 그렇게 어떤 것이라도 확장할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이듯, 물을 정화하는 것도 그렇듯이 신앙의 순도도 그런 것이다. 신앙에 몰입되기 위하여, 예수 잘 믿고 세상과 차별성을 자부심으로 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예수님께서 종되셨듯 것 처럼 살아서 사람들이 예수님처럼 살고 싶은 마음을 가지도록 하는 것이다.


복음은, "의인이 죄인을 위하여 죄인되는 세계'이다. 하나님의 아들이고 죄가 없으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세상의 심판자와 같이 와서 사람들에게 신앙 없다고 호통을 치시거나 욕하고 흠담하고 비난하기 위하여 오신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자신이 죄인이 되고 수고하고 심지어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그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로 사는 삶을 살고 싶어지도록 한 것이다. 그것이 사람 안에서 일어나는 심판이다. 그러므로 사람을 보고 신앙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예수님의 방식이 아닌 것이다.



수고한 삶의 가치를 돈이라는 집약된 가치로 모으는 것은 그 집약된 가치를 다른 것으로 바꾸어 내기 위한 것이다. 물을 순수한 물로 만드는 것 역시 순수한 물을 모아두기 위한 것이 아니라, 마시고 또 다시 마실 수 있는 다른 물이 되기 위한 것이다.


그렇듯, 신앙이라는 것 역시 한 없이 순도가 높은 진정성을 가져야 하나 그것이 목적이 아닌 것이다. 이는 한 없는 보편성을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이라는 것에 있어서 진정한 순도와 진정성은 보편성을 동반한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오히려 순수한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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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일서 1장 1-4절) 나타나신 생명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한1서 Date : 2014. 8. 27. 06:36 Writer : 김홍덕

살아 있다는 것


생명은 ‘살아 있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살아 있다는 것은 단순하게 생물학적 혹은 의학적인 개념만으로 한정된 의미가 아니다. 살아 있다는 것은 어떤 의미와 목적에 부합되게 존재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사람들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살아 있다’는 의미가 그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시간을 알려주지 못하는 시계는 죽었다고 한다. 반면에 기계라 할지라도 의도대로 작동이 되면 무의식적으로 살아 있다고 말하곤 한다.


생명이라는 것은 그런 것이다. 즉 의학적으로 숨을 쉬고 있는 것을 생명이 있고, 살아 있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 목적에 맞는 모습을 보여 주는지 아닌지가 생명이고 살아 있다는 정의라는 것이다. 그 일부로서 의학적 생명이 있는 것이다.


생명이 그렇다고 하는 것은 목적에 맞는지의 여부가 곧 죄와 사망의 정체성이라는 의미이기도 한 것이다. 그래서 죄와 사망은 늘 동일한 개념으로 말씀하시고 있는 것이다. 즉 ‘죽었다’는 것과 ‘죄’는 동일한 개념이라는 것이다.


죄와 사망이 동일한 것은 목적이 상실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 역시 존재하는 목적을 먼저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것을 모르면 생물학적으로 멀쩡해도 사람은 살았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삶을 선택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살아가면서 자신의 존재 목적에 대하여 탐구하고 고뇌한다. 그것을 고뇌하고 탐구한다는 것은 자신이 생물학적으로 살아 숨 쉬면서 영위하고 있는 각양의 삶의 모습과 추구하고 이루고자 하는 것이 자신의 존재 목적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살아 있다’ 할 수 있는 목적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 그것은 주인에게 있다. ‘이동’이라는 목적을 원하는 주인에게 고장 나고 오래된 자동차는 죽은 것이다. 하지만 고철 자체가 목적인 고물장수에게는 살아 있는 것이다. 주인에게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사람은 자기 스스로의 삶에 대한 주권이 있지 않다. 주권이 있다는 것은 시작과 끝을 주관한다는 것이다. 자동차의 주인이라는 것은 자동차를 사는 시점과 팔거나 폐차하는 시점을 정할 수 있다는 의미와 같은 것이다.


그런데 사람은 자신의 삶에 대한 시작도 또한 끝도 스스로 정할 수 없다. 자살이 끝을 스스로 정하는 것 같아 보이지만 살만하고 자기 원하는 것이 있는데 스스로 죽는 사람은 없다. 즉 자살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삶의 여건을 스스로 주관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존재 목적은 자기 안에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의 존재 목적은 분명히 신에게 있다. 그리고 <존재>의 목적이라면 오직 <존재>의 정체성을 가진 신에게 사람의 존재 목적이 있다.


사람들에게는 많은 신이 있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는 술의 신도 있고, 우리나라에는 화장실에도 귀신도 있다 했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신은 다 행위와 소유의 신이다. 사람들이 그 신을 대하는 것이 그 신의 정체성이기 때문이다.


‘풍요와 다산’ 그것이 사람들에게 신에게 바라는 전부이다. 하지만 그런 것은 존재와 자기 정체성에 대한 신앙이 아니다. 그런 모든 것은 다 삶의 목적과 무관하게 그저 육신이 살아가는 동안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한 풍족함을 추구하는 것일 뿐이다.


세상의 모든 신을 대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그런 것이다. 그것이 그렇다는 것은 세상의 모든 신이 다 풍요와 다산의 신이고, 사람들이 그 신을 신앙하는 단 두 가지 방법은 자신의 소유를 드리는 것과 그 신의 이름으로 수고하는 공로를 드리는 것 그것뿐이다. 산신령이든 부처든 뭐 어떤 신이라도 사람들이 섬기는 방식은 단 두 가지 그것뿐이고, 바라는 것은 오직 하나 육신의 삶의 풍요 그것뿐이다.


그런데 사람이 알고 있는 모든 신(神)중에 유일하게 존재의 신이 있는데 그 분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이름은 ‘여호와’인데 그 뜻이 ‘스스로 있는 자’라고 하셨다. 즉 하나님은 사람이 원하는 어떤 재화나 용역을 풍요롭게 하는 신이 아니라, 그저 그냥 단순하게 존재하는 신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은 그저 있기만 하는 신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존재의 신이며, 그 신을 만나는 것은 어떤 존재로서, 어떤 정체성으로 또한 어떤 관계로 만날 것인지가 중요한 신이라는 것이다. 바로 그런 하나님이 이 세상을 만드셨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은 온 세상을 만드신 전지전능한 하나님이지만 그 능력으로 사람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너는 나에게 어떤 의미, 어쩐 관계, 어떤 존재냐?”라는 마음으로 사람을 만나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사람이 하나님께 무엇을 바랄 것인가?’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바로 그 하나님의 정체성이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일생의 의문인 ‘나는 누구인가?’의 명제와 연결된 것이고, 그 안에 해답이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을 아는 것이 하나님을 아는 것이고, 사람의 존재 목적을 아는 것이다.



우리가 익히 아는 대로 하나님은 이 세상을 만드셨다. 그것은 당연히 사람도 하나님이 만드셨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만드신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바로 그 목적을 알고, 그 원하시는 바대로 하나님을 섬길 때 비로소 <살아 있다>할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흔히 ‘자연은 살아 있다’라고 한다. 그것은 정말 맞는 말이다. 왜냐하면 자연은 하나님이 만드신 목적대로 오차 없이 잘 운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직 유일하게 사람만이 하나님의 목적에서 벗어나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서 벗어난 것은 선악과로 인한 타락에서 비롯되었는데,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서 벗어났음을 단편적으로 알 수 있는 알 수 있다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을 섬기고 믿고 기도하는 모습에서 볼 수 있다.


그것은 존재의 하나님이신 여호와에게 기도하고 바라는 것이,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를 아는 것이나 자신의 존재 목적을 이루는 것에 있지 않고, 존재의 하나님께 풍요를 얻기 위해 소유와 공로를 드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것이고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고 이것이 바로 죄며 이런 삶의 모습이 바로 하나님 앞에서 생명이 없는 삶의 모습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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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과 형식의 방향성으로 보는 생명

Category : 김집사의 뜰/복음 담론 Date : 2014. 8. 24. 13:21 Writer : 김홍덕

<내용과 형식>에는 방향성이 있다. 누가 뭐라고 해도 항상 내용이 먼저 있고, 그리고 그 내용이 형식으로 표현되는 방향성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방향성을 가진 것이 또 하나 있는데 그것은 <생명>이다. 모든 생명은 안에서 밖으로 나고 또한 안에서 밖으로 자란다.


항상 내용이 먼저 있고, 형식이 뒤 따르는 것


다시 말해서 생명체도 유전자와 그 생명의 정체성을 가진 씨나 알과 같은 것이 그 생명의 성체로 표현되는 것이다. 즉 유전자가 가진 독특한 유전정보가 생명의 성체로 표현되는 세계가 바로 생명의 세계이다.


하지만, 이와는 반대로 '밖에서 안으로' 또는 형식만 만들어가는 세계가 있는데 이것은 공산품과 제조물의 세계이다. 이것은 생명과는 전혀 반대적인 개념이다. 생명은 안에서 밖으로 낳아지는 세계이고, 물건은 만들어지는 세계라는 것이다.


이것은 기독교 신앙에 있어 아주 중요한 관점이다. 즉, 성경에 나오는 모든 말씀이 <하나님의 의>, 또한 하나님이 보실 때 살아 있다고 할 수 있는 <생명>이 한 사람 안에 있으면 모든 것이 이루어지고 언뜻 보면 "하라"라고 비쳐지는 말씀들이 생명의 본성으로 인하여 누구도 금할 수 없는 행동이고 표현이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 날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신앙의 관점은 매우 안타깝지만 내용과 형식, 그리고 생명이 가지고 있는 방향과는 반대 방향에서 신앙을 보고 있다. 다시 말해서 안에서 밖으로, 그리고 생명의 본성이 있으면 자연스럽게 표현되는 신앙 양식이 아니라, "지켜 행하면 하나님의 생명이 된다"는 방향으로 가고 있기 때문이다.


교회에서는 흔히, '기도는 성도의 호흡'이라고 한다. 그것은 아주 훌륭한 표현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 다음이다. "기도는 성도의 호흡이므로 믿는 사람들은 기도해야 한다."라고 한다. 정말로 이 말이 맞는 말이라고 생각하는가? 이건 방향이 거꾸로 된 것이다.


믿는 사람이기 때문에, 믿는 사람의 호흡이 기도인 것이다. '호흡이 먼저인가? 아니면 유전자와 같은 호흡하는 생명의 본성이 먼저인가?' 당연히 본성과 정체성이 먼저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생명이 있어야 호흡이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성도라야 호흡인 기도를 하는 것이지, 기도한다고 성도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성도라면 기도에 대해서는 걱정 안해도 된다. 생명은 그냥 호흡하니 말이다. 이것을 교회가 대단한 것 처럼 가르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것을 주장한다는 것은 오히려 성도들이 살아있지 않다고 보는 것과 비슷한 것이다. 


더 구체적으로 본다면 <성령의 9가지 열매>에 대한 관점이 그렇다. 보통의 교회는 "예수 믿는 사람이니 성령의 9가지 열매를 맺는 삶을 살도록 노력해야 한다."라고 한다. 이게 정말 맞는 말인가? 사과는 사과나무이기만 하면 열리는 것이다. 고로 사람의 마음 안에 <성령>이 있다면 9가지 열매는 노력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성령의 9가지 열매는 노력으로 맺는 것이 아니라, 셩령이라는 생명만 있으면 열매처럼 자연스럽게 열리는 것


그것을 그렇게 가르치는 것은 가르치는 사람은 열매라는 것이 생명 세계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생명을 모른다는 것이고, 그것을 듣고 '아멘!'한다는 것은 자신도 생명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심각한 것은 그런 상황이 어떤 상황인지 모르고, 또 외면한다는 것에 있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하나님의 영과 의를 표현하면 어떻게 되는지를 설명하는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그 표현된 것을 좇으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하나님의 의와 생명이 무엇인지를 표현된 것을 통하여 알아라는 것이다. 그것이 성경에 기록된 모든 내용이다.


그런데 성경에 기록된 것을 보면서 그 표현된 것을 따라하고, 지켜내면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생명의 방향성에 반대되는 개념이고, 그것은 <낳는 세계>가 아니라 <만드는 세계>의 생각과 삶이다. 한마디로 그것은 성경을 모르는 것이고, 하나님의 섭리에 반대하는 것이다. 방향이 반대니까?


성경의 모든 말씀은 지켜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그렇게 표현되는 원 내용을 알아야 성경을 아는 것이다. 그러면 모든 것은 그저 이루어진다. 사과나무가 사과를 맺는 것은 쉬운 정도가 아니라 자연스러운 것이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을 가지면 어떤 삶을 사는 것인지에 대한 말씀이므로 사람의 마음 안에 그리스도의 정체성만 있다면 성경은 지켜 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지 않으려 해도 자꾸 성경을 이루어내는 삶을 살 수 밖에 없는 것이 되는 것이다.


정말로 사람의 마음 안에 내용이요 본질이며 생명의 정체성인 그리스도의 본성이 있다면, 성경의 모든 말씀은 그렇게 살지 않으려 몸부림쳐도 오히려 살면 살수록 성경을 이루어가는 삶이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본질이고 내용이다. 그러니 어쩌랴? 그저 그리스도만 제대로 전하면 그만인 것이다. 아니 그것 뿐이다. 신앙이란 것은, 또한 교회가 할 일이라는 것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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