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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에 대하여...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교회 Date : 2014. 7. 11. 17:21 Writer : 김홍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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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는 제사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뭐 이견이 없는 것이 아닌가 싶다. 예전에는 접촉신앙이라는 것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제사의 제물에 손을 대고 그 제물이 대신해서 제물로 드려지는 것이다.


십일조에 대하여 이야기 하면서 설명한 바와 같이, 우리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그 존재와 성품을 표현하실 것이 없기 때문에, 이를 표현할 존재가 필요해서 만드신 것이 바로 사람이다. 


그래서 창세기 하나님의 형상(image)대로 사람을 만들었다고 하신 것이다. 즉 사람을 보면 하나님을 알 수 있게 만드셨다는 것이다. 이미지라는 것이 그런 것이다. 실체가 없는 것을 어떤 것을 보았을 때 연상이 될 수 있고 알 수 있는 것이 이미지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사람이 제물이 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인생이 하나님을 표현하는 것에 사용된다는 것이다. 즉 그 사람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을 발견하고 알 수 있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바로 그런 삶이 되는 것이 바로 제사이다.


이런 개념을 깊이 묵상하면, 예수님께서 요17장에서 저희가 우리와 하나가 되게 해 달라고 하신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제사가 예수님의 부활 이후에 초대교회를 거쳐서 예배가 되었다. 지금은 사람들이 예배에 많은 순서를 넣고 이상하게 많은 격식을 넣었는데, 그렇게된 이유는 다 내용은 없고 형식에 기울어져 있기 때문인 것은 부인할 수 없는 현상인듯 하다.


초대교회의 예배를 보면, 모여서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힘썻다고 했는데, 여기서 떡은 물론 음식물이기도 하겠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몸을 떡이라 표현하신, 그 떡을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는 예수님의 육신을 나누어 먹는다는 것이 아니라, 유월절을 통하여 제자들이 예수님의 몸을 상징하는 떡을 먹은 것은 제자들과 예수님의 정체성이 하나가 되었다는 것이고, 제자들이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며 살게 되었다는 것이므로


초대교회에서 떡을 떼었다고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자신의 정체성과 삶의 목적으로 삼은 사람들이 그 삶을 나누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자신의 삶 속에서 그리스도로 인한 삶의 변화를 나누었다는 것이다.


또한 기도에 전혀 힘썻다고 하는 것이 있는데, 이 기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하는 것이다. 마태복음 7장에 예수님께서 구하라, 찾으라 하실 때 무엇을 구하고 찾으라는 것이 없다. 다시 말해서 목적어가 없는데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구하라는 것이다. 


즉 너희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정체성, 육신을 가진 사람이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아들이 되는 그 정체성을 구하라는 것이다 그것이 기도이다.


그러므로 예배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삶을 나누고, 또한 그 나눔 속에서 자신에게 더 그리스도의 생명이 넘쳐나기를 바라는 기도를 하는 것이 예배이다. 그렇다는 것은 지금과 같이 예배 때 뭐 각종 형식이 있고, 기구가 있어야 한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예배 혹은 제사는 영이신 하나님의 성품과 정체성을 표현하기 위하여 지어진 사람의 육신 가진 삶이 하나님을 표현하는 존재가 되도록 드리는 것이고, 그 예배의 구성은 그리스도를 나누고 바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지금의 모든 예배들이 온전해지려면, 형식을 강화하고 교회의 건물을 거룩(?)하게 좋은 것으로 짓고, 좋은 음향시설을 갖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본성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나누는 것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예배이고 제사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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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일조에 대하여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교회 Date : 2014. 7. 11. 17:03 Writer : 김홍덕

하나님께서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면 하늘의 복을 넘치도록 부어주시겠다 하셨다.(말 3:10) 그러다 보니 사람들이 다들 세상에서 부자로 살려고 혹은 천국가서 부자로 살려고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리고, 또한 십일조를 내지 않으면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 했다고 까지 한다. 


하지만 이런 모든 관점들은 하나님 앞에 십일조를 금전적인 거래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십일조에 대하여 하나님께 금전적인 문제로 생각하는 결정적인 오류는 <하늘의 보화 = 이 세상의 재물>이라는 터무니 없는 공식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재물을 하늘의 보화로 여기시는 분이 아니다. 심지어 사람들도 사랑은 돈으로 살 수 없다고 하며 돈 보다 가치 있는 것을 수없이 인정하는데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하늘의 보화가 돈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좀 어이가 없다.


또한 설사 목적이 이 땅에서나 죽어서 천국에서나 부자로 살기 위해서 혹은 하나님것을 도적질 해서 혼나기 두려워서 십일조를 한다고 쳐도 하나님의 조건인 <온전한>십일조는 어렵다. 오늘 업체에 방문해서 점심을 대접 받았는데, 이건 십일조를 어떻게 드려야할까? 나는 업체 사장님이 사주신 밥이 얼마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사장님께 "십일조를 해야하니 음식값을 좀 알려 주십시오 할 수 있을까?" 그럴수도 없지만 만약 그런다면 저는 정말로 성경을 문자로만 알지 나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읽는 사람이 될 수 없다. 


이러한 문제만 봐도 적어도 내가 아는 사회 구조상 온전한 십일조를 하기 위하여 자기의 수입을 정확히 계산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이 없을 것 같다.


무엇보다 십일조의 정체성을 이런 관점에 매몰되어서 논쟁으로 삼는다면 그 또한 십일조를 바로 아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것은 이런 관점들로 십일조를 보기 때문에 십일조에 대한 정의가 내려지지 않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우리는 유대인이 아니라서 몸에 베인 관습은 아니지만, 유대인들에게 있어 1/10은 전체의 대표성을 띤다고 한다. 그러므로 십일조를 드린다는 것은 "내 자신이 전부 하나님의 것입니다!"라는 신앙 고백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십일조에 대하여 기록한 말라기라는 성경이 십일조를 다루기 위한 말씀이라고 볼 수 없다. 말라기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훼손되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성경이다.


즉 이는 상한 고기나 가짜 제물을 드렸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제사를 주신 목적을 훼손하였다는 것이다. 이것이 말라기에서 말씀하시는 도적질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제사를 만들어 주신 그 목적은 사람들이 없애 버리고, 형식만 남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제사의 목적을 도적질해갔다고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제사는 우리 자신을 드리는 것이다. 이는 우리의 몸을 하나님 앞에 불살라 제물로 드리자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은 영이시니 표현할 몸이 없으시므로 사람이 그 몸이 되어드리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이기도 한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자신의 몸을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는 것에 사용하지 않고, 그냥 제사만 형식적으로 드리므로 이것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누가 성전문을 좀 닫아 주었으면 좋겠다'고 까지 하신 것이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단 위에 헛되이 불 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말 1:10)


그러므로 십일조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내 자신을 드렸다는 증거로서 드리는 제물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에 대한 규례로 하나님께서 수입의 1/10을 바치라고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1/10을 바치면 복을 주시겠다고 하신 것이 재물의 복을 주시겠다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사람이 하나님 앞에 자신을 하나님을 표현하는 존재로 드리는 그리스도의 삶을 살게 될 때, 주시는 복을 말하는 것이고, 십일조라는 것은 내 삶이 하나님께 속했다는 증거와 같은 것이다. 이것이 십일조의 본질이다. 1/10을 바치는 것은 형식이다. 


그렇다고 형식이라고 무시하면 된다는 것도 아니고 필요없다고 하는 것도 아니다. 이는 본질을 통하여 나타난 바 되어야 하는 것이다. 다시 군복을 입어 군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한번 군인이라서 군복을 입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십일조를 드려서 복을 얻는다기 보다,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복 있는 자가 십일조를 드린다는 것이다.


물론 형식적으로 그 수입의 1/10을 드리는 것도 지키면 좋고 하지 않는 것 보다야 백배 나은 것이며, 또 내용만 따지면서 폐할 법도 아니지만, 그보다 앞서서 해야할 것이 있다면, 십일조를 드리는 자격 있는 삶, 즉 영이신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삶을 사는 것이 먼저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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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일에 대하여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교회 Date : 2014. 7. 11. 16:44 Writer : 김홍덕

안식일의 유래는 천지창조의 7일째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쉬셨던 것을 기념하는 것에서 비롯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런 안식일에 대하여 예수님 당시에도 유대인들과 예수님 사이에 마찰이 있었고, 지금도 안식교라는 교단이 따로 있고, 또 어떤 이들은 그것이 이단이라고 하는 갈등이 있다. 


또한 기독교 내에서도 안식일로 지키는 주일의 규례도 교단마다 다소 차이가 있었는데,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흐릿해지고 있는 상황이기도 하다.


안식일에 대하여 많은 것을 논할 수 있겠으나, 저는 두가지 측면에 주목해 봐야 한다. 하나는 천지창조 과정에서 7일째 하나님께서 쉬셨는데, 그것이 단지 날짜가 7일째가 되어서 쉬신 것인가? 아니면 어떤 조건이 만족되었기 때문에 쉬셨는가? 하는 문제와, 예수님께서 "나는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하신 것이다.


그것을 주목하는 것은 당연히 안식의 유래와 정체성에 대한 말씀들이기 때문이다.


먼저 천지창조의 7일째에 하나님께서 쉬신 것은 창세기 1장 2절에 보면 "그가 하시는 일을 마치고"라는 말씀이 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는 7일이 되었기 때문에 쉬신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마치셨기 때문에 쉬셨다고 하신 것이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라는 것은 세상을 지으신 것인데, 이 세상은 물리적인 세상이기도 하겠지만 무엇보다 한 사람에게 있어 하나님의 세계가 열리고, 그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이 되어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은 존재가 되었을 때, 그 사람에게 있어 세상이 다 만들어지고 하나님이 쉬실 수 있는 상태가 된 것이라는 것이다./p>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쉬신다는 것은 달력의 빨간날 처럼 그냥 어떤 날짜가 되면 쉬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하신 바가 이루어져서 쉬시는 것이며, 이것은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에게 더 이상 할 일이 없어졌을 때 하나님 앞에서 그 사람이, 또한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 대하여 쉬신다는 것이다. 이것이 안식이다.


그러므로 이 안식은 단순히 육체의 노동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일이 끝나는 것이다. 이 일은 육체의 일이 아니라, 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수고하는 신앙이 그치고 안식하고 쉬는 신앙이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또한 이것은 객관적으로 쉬는 날이 정해진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안식할 수 있는 신앙이 되었는가? 하는 문제가 있으므로 각각의 사람에게 있어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안식할 수 있고, 그 사람 또한 수고하지 않고, 일하지 않아도 되는 신앙을 가지는 순간은 다 다른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성경을 자신의 말씀을 보는 것이다.


그리고 이 일을 한다는 것은 신앙으로 보면 종의 신앙이다. 종은 일하는 것으로 주인에게 인정을 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어떤 수고를 해야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다 종의 신앙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이 설사 기도고 전도고 봉사라 해도 마찬가지다.


하나님 앞에 신앙의 모든 모양은 수고로운 것이 아니라 본성에서 비롯 되어야 하는 것이다. 들은 유머 중에 북한의 고위 장교가 늦게까지 일을 하고 집에가면 아내가 자꾸 잠자리를 요구하여 더 힘들었는데, 하루는 자기 부하에게 묻기를 '아내와의 잠자리가 오락이냐 노동이냐?' 했더니 부하가 '오락이지요' 했다. 그래서 왜 그러냐고 했더니, 부하가 말하기를 "그것이 노동이었으면 나를 시켰을 것"이라고 했다.


전도라는 것이 생명을 분화하는 것인데, 생명을 가진 어떤 존재도 종족번식을 위한 관계를 노동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과 같이 전도도 그렇고 영혼의 호흡이라는 기도도 노동이나 일이 아니고, 또한 말씀 또한 밥 먹는 것이 노동이 아니며, 이런 모든 것이 다 본능 즉 생명으로 말미암은 것이듯이 성경에서 어떻게 보면 행하라고 하신 모든 말씀이 이와 같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 이런 일들을 힘들게 수고하며, 또한 하기 싫지만 천국가서 상급 받으려고 하는 것과 같은 모든 것은 다 <일>이고 그런 것을 한다는 것은 안식이 없고, 아직 안식일을 한번도 누리지 못한 신앙이라 볼 수 있다. 


그리고 성경에서 안식일에 일을 하지 말라고 하신 것도 바로 이런 의미이다. 다시 말해서 일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일을 하지 않아도 되는 존재가 되라는 것이고, 성경에 어떻게 보면 Do로 표현된 것들이 일이 아니라 본성이 된 사람이 되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그런 것이 본성이 되셨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사람을 고치는 것이 일이 아닌 것이 되는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본성이라는 것이다. 개가 짖는 것은 일이 아니라 본성이다. 안식일이라고 개가 짖지 않겠는가?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일로 섬기지 말고 본성으로 섬기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생명의 본성을 따르라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 아들이다. 아버지와 같은 생명을 가진 아들 말이다. 그러므로 아들의 신앙을 가진 사람은 안식일이 도래한 사람이고, 그 사람은 달력의 날짜가 언제라도 안식하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주인에게 일로 인정 받는 세계가 아니라 아들과 같이 언제라도 영원히 아들인 것과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의 주인이시다(두번째 관점)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에게 자신을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하셨는데, 이는 예수님이 안식일 그 자체라는 것이다. 이것은 안식이라는 것을 누리려면 하나님께서 조건이 되어 쉬셨던 것 처럼 어떤 상태가 되어야 하는데, 그 상태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과 같은 상태라는 것이다.


이는 창세기에서도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이 나타났을 때,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고 일을 마치셨다고 하셨는데,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쉬게 되시는 조건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역시 하나님 앞에서 안식을 하려면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되어야 하고, 그 상태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으로 사는 상태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안식일은 안식일이 달력에서 어떤 날이냐? 하는 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것을 따진다는 것은 형식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신앙이 아닌가 싶다. 안식일은 나에게 어떤 날이 쉴 수 있는 날이 되었는가 하는 문제이며, 그 날이 내게 임하였는가 하는 문제이다.


그리고 그 조건은 내가 하나님이 쉬신 것과 같이 나에게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된 그리스도의 성품과 인격이 내 안에 있어서 하나님을 일과 수고로 섬기는 것이 아니라 아들의 생명이 있어 그 본성으로 섬기는 사람인가 하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어느날이라도 안식일이고 또 어떤 날이라고 아버지를 위하여 수고도 또한 안식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안식일의 정체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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