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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의 홍수 (15) - 홍수의 핵심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4. 7. 17. 11:48 Writer : 김홍덕

성경을 믿는다는 것


지속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이지만 성경에 기록된 믿기 힘든 것을 믿는 것이 믿음이 아니다. 성경에 기록된 모든 것은 다 사실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교훈을 주시기 위하여 육신이라는 형이하학적 실체를 가진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현상계 내에서 분명한 사건을 주관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원하시는 것은 사람이 가진 상식이나 사람이 만든 학문 세계에서 성경에 기록된 초 자연적인 사건을 의심 없이 믿는 믿음이 아니라, 왜 하나님께서 그런 일을 사람에게 보이셨는지를 아는 것이다.


노아의 홍수도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원하시는 바가 있다. 그것은 '범죄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니 행동에 조심해라'는 경고가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행함을 의로 여기시는 분이 아니시고 존재의 하나님이기시 때문이다.


사람들은 다 지동설을 믿는다. 그건 대단한 것이다. 지구에 먼지보다 더 작은 덩치로 붙어 사는 인간이 지구가 돈다는 것을 믿는다는 것은, 오래 전 홍수가 났다는 것을 믿는 것 만큼이나 힘든 것이다. 그래서 옛날에는 눈에 보이는대로 태앙이 돈다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과학이 발달해서 사람이 우주에도 가고 하니 지동설이 사실이라고 알려졌지만 정작 사람들이 지동설을 믿는다는 것은 계절에 따라 다른 옷을 입기 때문인 것이지, 지구가 도는 모습을 봤기 때문이 아닌 것과 같은 것이다.


계절에 따라 옷을 바꾸어 입는 것과 아침에 일어나고 밤이 되면 잠드는 생활이 지동설을 믿는 믿음이지, 과학자들의 말을 믿는 것이 믿음이 아니다.


이와 같이 노아의 홍수도 성경 말씀을 읽는 사람들이 자기 안에 노아와 같이 홍수를 겪고 그것에 맞는 신앙 여정이 있어 삶의 변화와 자신의 사건으로서의 고백이 있을 때 그것을 믿는 것이 되는 것이지, 홍수의 기록들을 상식을 넘어 무조건 믿는 것이 믿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안에는 홍수 때와 같이 모든 것이 죽어야 하는 것인데, 우리 자아 안에 어떤 것이 죽어야 하기에 하나님께서 노아의 홍수를 통하여 그것을 깨우치시려고 홍수를 일으키시고 또한 기록하여 오늘에 이르게 하셔서 우리가 읽고 묵상하게 하셨는가? 그것이 노아 홍수의 핵심인 것이다.




진정한 세례의 고백이 있어야 홍수를 하나님의 역사로 믿는 것


앞에서 우리는 이 홍수가 개인 신앙의 여정에 있어 <세례>와 같은 것이라고 했다. 세례라는 의식이 사람을 물에 잠궜다가 건져내는 종교적 규레인데, 왜 이것을 사람에게 행하게 하셨고, 지금은 기독교 계통에 있어 신앙인의 증서로 까지 활용되는가를 안다면 홍수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세례 의식과 같이 사람이 물 속에 들어가면 숨을 쉴 수가 없어서 죽게 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물에 빠지면 나오려 하고 또 나와야 한다. 그것은 사람이 물 속에서는 살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것이 세례의 목적이다.


사람이 물 속에서 살 수 없듯이, 하나님께서 만드신 사람은 세상의 온갖 학문과 쾌락 속에서 살 수 없다. 그것을 알게 하시는 것이 세례다. 물 특히 큰 물은 성경에서 늘 세상을 가르키고 있다. 그것은 홍수도 마찬가지이다.


이 홍수는 세상을 뒤덮는 큰 물이다. 사람은 물이 필요하지만 자신이 빠지는 큰 물에서는 죽게 된다. 그 자신이 빠지는 큰 물, 곧 홍수는 하늘의 창이 열리고 땅의 깊음이 터져서 넘쳐나는 물이었다. 그것이 노아의 홍수에 나오는 큰 물이다.


사람들은 "왜 사느냐?" 또는 "나는 누구인가?"와 같은 끝 없는 정체성의 갈증과 배고픔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비단 그런 갈증 뿐 아니라, 돈과 명예와 같은 세상적인 것에 대한 갈증과 배고픔도 늘 넘쳐난다. "나는 아직도 배 고프다"라고 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늘의 물, 즉 신에게 자신의 정체성을 간구하고, 또한 한편으로는 세상의 철학과 학문 그리고 쾌락에서 자신을 찾으려 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 마음은 결국 그 두 가지를 만나게 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을 섬기는 것에 세상에서 좋다고 하는 돈이나 좋은 시설이나 좋은 이론이나 좋은 즐거움을 더하는 것이다.


그것이 돈으로 치장한 좋은 교회를 건축하고, 또한 세상에서 성공해서 교회에서 장로가 되고, 또 교회는 그것을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으로 여기고, 그래서 또 다시 헌금하는 악순환을 만드는 것이다. 그것이 위대함이고 네피림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아무나 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위대함이란 그런 것이다.


이것을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아내로 삼아 네피림을 낳았다고 했다. 그런 사람들의 생각이 또한 하늘의 창이 열리고, 땅의 깊음이 터져서 만나게 된 큰 물로 표현된 것이다. 그것이 홍수다. 그리고 그 홍수로 인하여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위하는 세대의 모든 생명이 죽은 것이다.


그리고 그 홍수 안에서 방주와 같이 살아나는 존재들이 있었는데, 그것은 당대의 <의인> 노아와 그의 가족, 그리고 그가 태운 짐승들이었다. 이것이 세례인 것이다. 그리고 그 세례가 있는 교회인 것이다. 


이는 방주가 사람은 홍수 속에서는 사람이 살 수 없으므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사람이 홍수 속에서 살 수 있다면 방주는 필요 없다. 그러므로 방주는 개인의 신앙에 있어 세례와 같은 것이다. 방주를 만들었다는 것은 홍수 속에서 살 수 없다는 고백이기 때문이다.


세례가 바로 그런 것이다. 사람이 자아 정체성에 대한 갈급함을 채우기 위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것과 세상의 것이 합하여져서 범람하듯 넘쳐나는 세상의 철학과 과학과 유흥과 심지어 종교들 안에선 하나님께서 살았다는 호흡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 세례인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이 이 세상이 주는 것으로는 살 수 없다는 것을 고백하는 과정을 거친 사람은 자기 안에 홍수를 거친 사람이고 그것이 바로 세례를 받은 삶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은 지동설을 믿기에 계절따라 옷을 바꾸어 입듯이, 자신의 삶도 다른 삶을 살게 되고, 당연히 삶을 다르게 하는 가치관도 다르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진정한 세례를 받은 믿음이고, 노아의 홍수가 하나님의 역사라는 것을 믿는 믿음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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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수는 40일간 지속되었다. 40일간 물이 넘쳐 난 것이다. 그리고 물은 150일간 온 지면을 덮었다고 했다. 그리고 물이 15규빗이 차 오르자 천하의 모든 높은 산이 다 물에 잠겼다고 했다.(창 7:20)


이는 이상한 것이다. 한 규빗을 10미터라고 해도 물이 차 오른 높이는 150미터 밖에 되지 않는다. 보통은 규빗을 45센티 정도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겨우 7미터도 되지 않는 물에 천하의 온 산이 다 덮이겠는가? 그런데 그 정도의 물에 천하의 모든 산이 다 덮혔다고 했다.


이런 말씀을 가지고 객관적인 수치로 해석을 하려면 억지가 필요하게 된다. 웬만한 사람이 아는 상식으로 에베레스트는 8,800미터가 넘는다. 그런데 15규빗의 물로 산들이 다 잠길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이런 성경 말씀은 객관적인 수치의 개념으로 보는 것이 아니다. 아니 성경 전체가 그런 것이다. 믿기 힘든 기록들을 객관적으로 있었다고 믿는 것이 믿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산은 높음을 자랑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제사와 같은 종교적 또 영적 행위를 다 산에서 한다. 이는 살아가는 세계의 지식에 있어 '좀 안다' 할 수 있는 것들이다. 그것이 산이다.


그런 산들이 홍수에 잠겼다. 이 홍수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하늘의 창이 열리고 땅의 깊은 샘이 터져서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취한 결과였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에 있어 세상의 좋은 것을 덧입히는 생각들이 위대함(네피림)을 낳았다는 것이다. 


이는 교회를 또한 예배를 드리는 것에 있어 세상에서 비싸고 좋은 것을 아내를 취하듯 했다는 것이다. 그런 마음들이 맘모스형 교회라는 네피림을 낳았다는 것이다.


또, 사람들은 세상에서 성공하는 아름다움을 가지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는 생각을 했고, 그것이 또한 1등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라는 수상 소감을 하는 세계를 낳았다는 것이다.


그렇듯 세상의 좋은 것, 좋은 시설과 성공과 같은 것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하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인하여 신앙은 위대해졌고, 그런 위대한 생각들은 세상의 모든 산과 같은 높은 것들을 다 잠길만큼 높아졌다는 말씀이 홍수에 기록된 산이 잠겼다는 말씀인 것이다.


그렇게 된 세계, 그러니까 세상의 좋은 것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타락으로 인하여 넘쳐나는 물에서는 아무것도 살 수 없다는 것이 홍수를 통한 하나님의 계시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홍수는 세례를 예표하는 것이다. 즉 그런 타락한 세계의 가치관 안에서는 살 수 없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 세례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세계에서 피하는 곳이 바로 방주 곧 교회라는 것이다. 이것이 홍수의 전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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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의 배타성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교회 Date : 2014. 7. 16. 12:47 Writer : 김홍덕

나는 한때, 투철한 신앙이 좋은 믿음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단호하고 삶의 모든 것에 대하여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단호한 결별이나 심판을 하는 것이 좋은 신앙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아주 중요한 신앙이고 아주 필요한 상황이 될 수 있다. 장로이신 아버지는 625를 겪은 세대기 때문에 가끔 "예수 믿는다고 하면 죽일 것이고, 부인하면 살려 주겠다"는 협박 앞에서 죽어도 시인하는 것이 신앙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래서인지 어느 날 큰 아들이 그런 협박 앞에서 자신은 어떻게 할 수 있을까 하면서 페북에 올린 적이 있었다. 나는 "아들, 무슨 소리야, 일단 살고 봐야지"라고 시작하는 답글을 달았었다.


우리나라는 현재 나름 치안과 안보가 어느 정도 보장된 상태라서 그런 협박이 흔한 것은 아니라고 본다. 그렇다고 신앙에 대한 결단과 같은 단호한 신앙을 가진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닌 것은 분명하다. 나도 조금은 그런 사람으로 산 적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목적은 결국은 "너도 나와 같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또 성경을 통하여 사람들에게 십자가를 지시고 보여주신 삶을 표현하는 하나의 표현이 될 수 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도 십자가를 통해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보여주시면서 그 십자가를 보고 그것이 자신의 모습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세계를 보여 주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통하여 예수님과 같은 인격과 삶이 어떤 것인지를 알게 된 사람들을 삶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 <"너도 나처럼">될 수 있게 전해져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복음이고 전도다.


그런 측면에서 볼 때, 신앙의 단호함은 마구 휘두를 수 있는 칼은 아니다. 즉 아무 때나 단호함이 최고의 신앙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짐승 같은 인생'이란 것은 스스로 하는 고백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앙에 대한 단호함이 교회 안에서 높임을 받는 것은 분명한 치우침이라고 생각이 된다. 그러니까 <너도 나처럼> 되게하는 것에 있어 필요한 것인가? 아니면 <"너는 짐승과 같은 존재니 상종을 말자">라는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한 분명한 개념이 있어야 한다.


물론 단호함을 보이는 입장에서는 '이것도 다 사랑'이라고 여기기도 하지만 사랑은 결국 당사자가 느낄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물론 어떤 사랑은 시간이 지나서야 알 수 있는 것도 있다. 그러나 어떤 것은 시간이 지나도 사랑으로 여겨질 수 없는 것도 있다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신앙이 없는 사람들을 짐승이라 표현하기도 한다. 이는 성경에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벌레만도 못하다는 신앙 고백을 하고 있기도 하기 때문이다.(시 22:6)


하지만 기독교인들이 정말로 간과하는 심각한 문제가 있는데, 그것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부족하다고 생각되어 하는 신앙 고백이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을 정죄하는 판결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도 기독교인들은 자신은 하나님을 믿고 있고, 또 어떤 경우는 제대로 된 복음을 알고 있는 것에 반해, 안 믿는 사람이나, 또 성경을 잘 모르는 사람 등을 일컬어서 짐승이나, 또한 그 보다 못한 존재라고 폄하하는 발언을 서슴치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한 현상이 나타나는 것은 하나님을 잘 알지 못하는 것에서 비롯된 것이다. 또한 의로움에 대해서도 모르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세상에서 기독교인이 배척을 받는 결과를 자아내고 있는 것이다. 이른바 기독교인들의 배타성이 그것이다.


이러한 배타성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믿는 것에 대한 거부감을 가지게 한다. 그렇다는 것은 <너도 나처럼>의 기회가 박탈 당한다는 것이다. 물론 결론적으로 본다면 그렇다 해도 믿지 않은 사람에게 신앙적인 책임은 있겠지만, 먼저 믿는 사람의 본분이 그래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세상의 일원으로서 본분을 다하지 않는 것은 영지주의


기독교인들이 믿지 않는 사람들을 무시할 수 있는 근거는 단 하나, 자신은 예수를 믿고 있고 상대는 그렇지 않다는 점 그것 하나 뿐이다. 


하지만 세상에는 세상의 기준이 있다.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옳은 것인가는 근원적인 문제이기는 하지만, 역설적으로 신앙 없는 사람을 세상에 속한 구원 받지 못한 사람으로 규정하는 기독교인들도 세상의 일원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자신도 엄연히 육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고, 그 육신이 속한 세상의 삶을 부인해서는 안되는 존재라는 것이다. 이것을 부인하는 것이 다름아닌 <영지주의>인 것이다.


세상의 사람들을 보고 죄인 취급하는 것은 하나님의 기준을 가지고 하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절대적이지만, 기독교인들이 과연 세상의 일원으로서 세상의 법과 원칙을 잘 준수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기독교인들은 예수 믿는다는 그 하나의 이유 만으로 세상의 일원으로서 지켜야 할 의의 기준인 법이나 도덕 같은 것을 전혀 지키지 않으면서 예수 믿는다는 이유 하나 만으로 자신이 세상에서도 의로운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은 말이 안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신앙을 가지고 있다면,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의로움을 가지고 있는 것은 절대적인 것이지만, 그것이 그렇다면 세상에서 자기 몫을 다하지 못함으로서 발생하는 것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책임을 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도 한때는 교회에 너무 시간을 많이 투자하느라 삶을 제대로 돌보지 못해서 엄청 힘든 시기를 오랫동안 보낸 것이 있었다. 그러다 보니 신앙 생활 하느라 삶이 피폐해졌는지, 아니면 내가 생활을 열심히 하지 않아서 그렇게 되었는지 도무지 구분이 되지 않는 지경에 이르기도 했었다.


그때, 세상에서 성실히 수고하여 그 결과를 누리는 사람들을 향한 내 마음에는 <너는 돈 있냐?, 나는 예수 있다!>는 투철한 마음을 가지기도 했다.


하지만 하나님을 더 알아 가게 되면서, 신앙은 신앙이고, 인간으로서 가진 시간과 육신의 투자 여력을 교회에 사용하면서 삶을 돌보지 못하여 발생한 곤고함은 전적으로 내가 책임지고 감수해야 하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너무나 정상적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육신으로 사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자신이 세상에서 요구하는 것을 전혀 하지 않았는데, 세상에서 루저로 인식되는 것을 교회에 가져와서 영적 전쟁의 전리품으로 내어 놓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냥 그것은 자신이 부족했다고 교회나 사회에서 말하면 되는 것이다. 그것이 정상이다.


그런데 자신은 하나님을 알고 있고, 그것을 위하여 살다 보니 세상에서 쳐지는 삶을 살게 되었는데, 그것을 나무라는 세상 사람들 특히나 가족이나 친구들을 하나님을 모르는 짐승이라는 개념으로 생각하는 것은 말이 안되는 것이다.



세상을 무시하는 것은 십자가를 모르는 것


모든 것을 떠나서 그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데, 그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기준은 어떻게 알겠는가? 그들에게는 그저 세상적 가치관 그 뿐이다. 그리고 그것으로 기독교인을 바라 볼 뿐인 것이다.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그렇게 보는 세상 사람들을 무시하는 것은 십자가를 모르는 것이다. 예수님을 모르는 것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도 당시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가치관이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신 가치관으로 볼 때 완전한 악이었지만, 그들은 그것 밖에 알지 못하므로 그들의 가치관과 법에 의하여 자신이 죄인이 되고 심판을 받고 십자가에 달리셨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 날 기독교인들이 세상 사람들이 자신들에게 세상적 가치관을 요구하는 것에 대하여 오히려 그들을 짐승이라며 무시하는 것은 도무지 십자가를 알지 못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세상 사람들을 봐야 하는 이유는 하나 뿐, <너도 나처럼>을 위해


세상 사람들을 보고 예수 믿지 않는다는 이유로 무시하고, 심지어 가족과 부모를 무시하는 것은 성경적으로 볼 때 무조건 잘못된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것이 그 사람들을 교회로 또한 신앙 안으로 끌어 오기 위한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오만에 불과하다.


그리고 정녕 사람을 이끌어 오고자 한다면, 그들에게 배타적인 모습을 보일 필요가 없다. 만약에 나의 신앙에 대하여 다른 의견을 제시하고 하나님에 대하여 도전하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설득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이라면 나 역시 대상이 누구라도 다시 보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아들이 협박 앞에서 어떻게 할 것인가 고민할 때, 그 상황이 내 신앙의 의지를 시험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정체성을 시험하는 것이라면 목숨을 버려야 한다. 하지만 내 신앙의 의지를 보려 하는 것이라면 살아라고 했다.


왜냐하면 우리는 육신을 가진 인생인데, 내 의지는 한계가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정체성을 무시하기 위한 협박이라면 은혜를 구하고 목숨은 버려야 한다고 답했었다.


즉 사람이 자신의 신앙의 단호함을 보이기 위하여 사람들에게 배타적인 것은 의지를 가진 행위적 신앙이고 가공된 신앙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결코 찬양 받을 일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람들을 대할 때는 최대한 그들이 우리를 보고 하나님을 믿고 싶어지는 마음이 드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지금 예수를 믿지 않고, 교회 생활하는 나에게 걸림이 된다고 무시하고 배척하는 것은 자기 신앙을 자랑하는 것은 될지 몰라고 하나님의 성품을 사람들 앞에서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세상 사람들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 것이다"라고 하셨다.(요 13장) 그것이 우리의 본분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사람들이 볼 때, 참 저런 삶을 살고 싶은, 그래서 하나님을 알고 싶은 삶을 살아야 한다. 그렇지 않고 예수 믿는다는 그 차이 하나고 무조건 사람을 무시하고 관계를 단절시켜가는 것은 잘못된 신앙이다. 


이것이 오늘 날 기독교가 당면한 최대의 문제이고 현실이며, 세상에서 배척 받는 유일무이한 이유이다. 그리고 그것은 예수를 잘못 믿고 있는 결과의 산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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