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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벨탑 (3)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4. 8. 5. 15:06 Writer : 김홍덕

하나님께서 바벨탑을 쌓고 있는 사람들에게 내리신 재앙은 언어가 혼란스럽게 되는 것이었다. 우선은 영어 불어 이런식으로 갈라졌을수도 있다. 하지만 본질적인 언어의 혼란은 같은 말을 다르게 알아 듣거나 해석하는 것이다.


바벨탑을 쌓는다는 것은, 사람들이 잠 오는 것을 참고 하는 것과 먹고 싶은 것을 참고 하는 것과 같이 사람의 본능을 통제하고 절제하여 공로가 벽돌을 쌓듯 축적하는 모든 노력들이라고 했다. 그런 노력들에 대한 하나님의 대응이 바로 언어의 혼란이라는 것이다.


이는 실재로 우리가 살아가면서 많이 보게 된다. 가장 우스운 말로 "여자의 언어"와 같은 것들이 그렇다. 최근들어서 페이스북에서는 정치인의 말을 해석해 놓은 것을 보았다. "더 나은 모습으로 보답하겠다"는 "좀 더 해 먹어야겠다"라는 의미라고 한다. 


바로 이런 것들이다. 이것이 언어의 혼란이다. 바로 그런 혼란이 신앙 안에 있다는 것이다. 그런 혼란은 행위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모이면 필연적으로 발생한다. 그러니까 회의를 하는 것이다. 총회와 노회를 한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성경에서는 회의를 한 것이 아니라 제비를 뽑았다.


회의를 해야 한다는 것은 의견이 다르다는 것이다. 하지만 알고 보면 다 "잘 하자"는 목적을 가지고 와서는 방법으로 싸운다. 그런 다툼이 있으니 회의로 결정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많은 경우 분열로 치닫는다. 그래서 이 많은 교파가 생긴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잘 믿기 위해서는 이렇게 하는 것이 옳은 것이다"라는 사람이 두 사람 이상만 모이면 그냥 혼란이 생기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가 그렇게 많은 교파가 생긴 것이다. 한 마디로 예수 잘 믿는 방법이 이것이라는 주장이 생긴 만큼 교파가 생긴 것이라고 보면 된다.


바로 그것이 바벨탑과 같은 사건이다. 즉 사람의 공로를 쌓아 하늘에 이르자며 벽돌을 구워서 쌓던 그 마음이 바로 오늘날 교파가 생기고 회의가 생기고, 교회가 갈라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역설적으로 그런 일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을 잘 모르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언어를 혼란스럽게 해야 할 정도로 반대편에 계시다는 것이다. 그것이 오늘날의 현실이다. 그리고 그런 현실은 오늘 많은 신앙이 아직 바벨탑의 과정도 지나지 않은 초보적인 신앙에 머물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한 것이다.



아브람이 떠나야 했던 본토 아비의 집이 바로 공로의 신앙의 세계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 이후에 아브람이라는 사람에게 본토 아비집을 떠나라고 하시는 것이다. 즉 아브람에게 벽돌을 구워 하늘에 닿게 쌓자고 하는 신앙, 다시 말해서 사람의 육신의 본능을 제어하는 공로를 훌륭한 신앙이라고 생각하는 세계에서 떠나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통해서 보여주고자 하신 세계인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순종한 아브람, 사람의 공로와 형식의 아비 집에서 떠나는 순종이 있는 사람, 그 사람의 후손, 그 사람의 믿음이 육신의 자손으로 표현되는 그 자손과 민족의 이야기를 만들어 가시는 것이다.


바로 그리스도 예수의 세계까지 말이다. 



그간 창세기 포스트를 열독해 주신 독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창세기의 다음 내용들은 이후에 주제별로 한번씩 다루기로 하고, 다음부터 <요한 1서>를 포스팅할 에정입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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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벨탑 (2)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4. 8. 4. 18:11 Writer : 김홍덕

바벨이라는 말의 뜻은 '혼돈'이다. 이런 유래는 당연히 탑을 쌓다가 언어가 갈라져서 혼돈스럽게 되어 탑을 다 쌓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Tower of Babel
Tower of Babel by Doeki 저작자 표시변경 금지



성경에서는 원래는 이 땅 위의 모든 언어와 구음이 하나였다고 했다.(창 11:1) 그런데 사람들이 자신의 이름을 온 땅에 알리고 흩어짐을 면하기 위하여 성을 쌓았는데 하나님께서 그것을 못하게 하시려고 사람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셔서 사람들이 오히려 흩어졌다.


사람들은 성을 쌓을 때, 벽돌을 만들어 굽자고 했는데, 이것은 흙으로 만든 사람을 단련 시키자는 의미이다. 그리고 그 벽돌을 쌓자고 하는 것은 그렇게 단련된 사람들의 공적을 쌓고 쌓으면 하늘에 닿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사람들이 "사람이 스스로를 단련하면 하나님과 같이 될 것이다"라는 것이 온 땅에 알려지게 되고 그 앞에 다 모여서 흩어짐이 없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바벨탑은 옛날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도 있는 일


이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다. 오늘날도 사람들은 큰 공적을 쌓으면 사람들이 그 소문을 듣고 모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즉 온 땅에 이름을 알리는 것이다. 그리고 실재로 그렇게 하면 사람들이 모인다. 즉 그런 일을 도모하는 사람이나 모이는 사람이나 다 바벨탑을 쌓는 마음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모이면 이내 흩어진다. 왜냐하면 말이 다르기 때문이다. 정치판에서도 '민의(民意)'라는 같은 단어를 여당과 야당이 다르게 해석한다. 그러면 혼돈스럽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바벨이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세례라는 말은 하나인데, 그것을 기준으로 갈라진 교파가 몇인지 알 수 없다. 그것 역시 바벨이다.


이렇듯 사람들이 공적을 쌓아서 이름을 날리고, 또한 공적을 쌓아서 하늘에 닿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도록 하고자 하는 것은 늘 혼돈스럽다. 허나 그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 어떤 공적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고, 또한 사람을 만족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외모를 보시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이다. 그것은 속사람을 보신다는 것인데, 그것은 내용을 보시겠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사람이 쌓은 공적이나, 벽돌을 굽듯이 단련된 정도나 쌓아진 노력을 보시겠다는 것이 아니라, "너는 하나님 앞에서 누구냐?"하는 것을 보시겠다는 것이다.


성경에 '이렇게 해라', '이것은 하지마라'로 읽히는 말씀이 아무리 많아도, 하나님께서는 행동을 보시는 분이 아니다. 성경에 기록된 해라 하지마라는 것은 정확히 할 수 밖에 없고, 도저히 할 수 없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왜냐하면, 성경에 기록된 모든 '해라'와 '하지 마라'는 생명의 본성에서 나오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기도한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구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두신 원래의 정체성과 생명이 있는 사람은 늘 기도한다. 그것은 아들이 아버지 앞에서 늘 아들스러운 것과 같은 것이다. 그것이 항상 기도하는 것이다. 


전도? 생명은 장성하면 반드시 그 생명을 분화하고자 한다. 자기 안에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계시가 있다면 아무리 뜯어 말려도 하나님에 대하여 전할 수 밖에 없다. 그것이 성경에 나오는 '해라'와 '하지마라'인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성경에 나오는 말씀들을 잘 지켜서 행하고 그것을 쌓고 쌓으면 하늘에 닿아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자신이 죽어 천국에 가면 상급으로 누릴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생각이 바로 바벨탑을 쌓고 있는 것이다.


우선은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성경에 나오는 명령들은 행동의 명령이 아니다. 먼저 생명이 되고 나면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예레미야 선지자도 '다시는 말씀을 전하지 않으려 해도 마음이 불 붙는 것 같다'고 한 것이다. 


즉 개를 '멍멍'이 아니라 '야옹'하게 하려고 아무리 훈련시켜도 안되는 것이다. 그것은 울어도 때려도 안되는 것이다. 하지만 개로 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에 나오는 모든 '해라'와 '하지 마라'는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나기만 하면 다 자동으로 되는 것이지 그것을 훈련하고, 노력하고, 울고 불고, 금식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성경 말씀을 지켜 행하는 것으로 신앙의 업적을 삼으려는 모든 생각이 바벨탑을 쌓는 것



만약 그렇게 벽돌을 구워서 단련하듯 잠 오는 것을 참고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뭔가를 들어 주시고 기뻐하실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바로 그것이 바벨탑을 쌓는 것이다.(금식은 뭔가를 채워져야 할 존재인 사람의 속을 비우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벨탑은 아주 먼 옛날 이라크로 추정되는 시날 평지에서 니므롯이라는 사람이 주동하여 쌓은 찾을 수 없는 성이나 탑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을 그렇게 본다면 성경을 문자로 또한 지식으로 보는 것이다.


바벨탑은 오늘날 신앙의 업적이나 소유의 드림을 쌓아서 죽어서 상급을 받으려 하거나, 그런 결과를 하나님께서 영광스럽게 여긴다고 생각하고 부추기는 모든 것과 동참하는 것이 바로 바벨탑을 쌓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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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벨탑 (1)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4. 8. 4. 16:58 Writer : 김홍덕

노아의 홍수가 끝나고 다시 사람들이 번성하게 되면서 또 하나의 사건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바벨탑> 사건이다. 



Tower of Babel
Tower of Babel by fimoculous 저작자 표시



바벨탑은 시날 평지에 건축된 탑으로 사람들이 모여서 세상에 자기 이름을 내기 위하여 꼭대기가 하늘에 닿는 성을 쌓기로 한 것이다. 그러고 보면 건축물의 정확한 정의는 <탑>이라기 보다는 <성>이지만 '쌓았다'는 의미가 강해서인지 보통은 바벨탑이라고 하는 것 같다.


이 바벨탑 사건에 있어서 중요한 포인트가 있다면 두 가지가 아닌가 싶다. 먼저는 사람들이 성을 쌓은 목적과 방법, 그리고 다음은 하나님께서 그것을 막으신 방법 이렇게 두 가지의 중요한 포인트가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오늘 날 우리의 삶 가운데도 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바벨탑을 쌓으려 한 목적은 <세상에 자기 이름을 내기 위하여> 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방법은 성을 쌓아 하늘에 이르게 한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우리가 쌓은 성이 하늘에 닿은 사람이다'라는 것을 온 세상에 알리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성을 어떻게 쌓았는가 하면, 그것은 진흙으로 벽돌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진흙을 구워서 벽돌을 만들었다는 것은 사람을 단련시켰다는 것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 "흙"으로 사람을 만드셨다고 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에서 흙이나 땅은 늘 사람을 의미한다.


그런 흙을 구워서 벽돌을 만들었다는 것은 사람을 단련시킨다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벨탑을 만들기 위하여 진흙을 구워서 벽돌을 만들었다는 것은 사람을 단련시켜서 그 공적을 쌓아 올렸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예로부터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하면서 이 땅 위에서 뭔가 공로를 쌓으면 하늘이 기뻐하고 감복한다고 믿고 그렇게 신앙을 가져왔었는데, 그것이 하나님을 믿는 것에도 늘 적용이 되고 있다.


하지만 하나님은 가장 중요한 정체성이 <존재>의 신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어떤 행위나 공적을 기뻐하시는 분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가 전부이신 신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새벽기도회를 가고, 금식을 하고, 또 가난한 사람들에게 밥을 퍼 주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서 사람들이 하기 힘든 일들, 그런 것을 많이 하면 할수록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잠이 오지만 새벽기도회를 그리고 철야기도회를 가고, 배 고프지만 금식 기도를 하는 것이다. 바로 그런 모든 생각들이 바로 흙을 구워 벽돌을 만드는 것이고, 그런 것이 모이면 천국에서 상급이 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바벨탑을 쌓는 것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런 것을 원하지 않으셨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에게 언어를 다르게 만드셨다. 이것은 영어, 불어, 스페인어, 한국어와 같은 언어가 달라지게 하셨다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같은 나라에서 말을 해도 "말을 못 알아 듣는다"라고 하기 일쑤다. 즉 언어가 달라진 것이 아니라, 같은 말이라도 다르게 받아들여진다는 것이다. 즉 의미가 달라지게 하셨다는 것이다.



언어가 달라지게 하셨다는 것은 말의 의미를 서로 다르게 받아 들였다는 것


어쩌면 그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하나님께 혹은 신에게 공적을 쌓을 때 일치된 의견을 보이지 않는다. 막상 교회만 가도 어떤 사람은 군 선교가 제일이라 하고, 어떤 사람은 교회학교 교사가 제일이라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성가대가 최고라 한다.


즉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 중에 어느 것이 최고인가? 하는 하나의 언어에 대한 해석이 여러가지라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사람들이 갈라지게 된다. 가장 기본적인 예로 세례라는 것이 있지 않는가? 세례냐? 침례냐? 이것으로 얼마나 많은 교단들이 갈라졌는가?


바로 그런 것이 언어가 달라졌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에 회의가 필요하고, 갈라지는 일이 있고, 흩어짐이 예상된다면 그것은 다 하나님께서 바벨탑을 쌓는 것을 막는 장치라는 것을 깨닫고 빨리 돌이켜야 하는 것이다.


성경에도 사람들이 바벨탑을 쌓을 때, '흩어짐을 면하자'라면서 탑을 쌓았다. 즉 사람들은 갈라지고 흩어지는 것을 면하기 위해서 탑을 쌓았지만, 하나님께서는 벽돌을 굽듯이 사람을 단련하는 것으로 공적을 쌓는 신앙적인 모임 안에는 필연적으로 같은 말을 다르게 이해하는 갈라짐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교회에 조금만 다녀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본 적이 있는 일이기도 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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