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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오신 것을 부인하는 것이 대단한 이단적 생각이 아니다. 육신을 가졌다는 것이 신앙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육신의 본능과 연약함을 극복하려는 모든 것이 다 육신을 부인하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크게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육신이 가진 연약함을 신앙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포기하고 방탕하게 살아도 된다고 생각하면 영지주의고, 육신의 연약함을 기도와 성찰로 극복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율법적인 신앙 공로주의적 신앙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아주 대단한 이단적 발상 같지만, 금식을 많이 할수록 신앙이 좋다고 생각한다면 육신을 부인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육신의 한계를 극복할수록 좋은 신앙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은 육신을 그대로 인정하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즉 영지주의나 율법주의나 뿌리는 같다. 사람이 육신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신앙에 도움이 되지 않는 문제에 있어 이를 극복하려 하는 것이나 육신은 어차피 별거 아니니 그냥 방탕해도 된다는 것이나 육신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점에서는 같다.


그래서 요한 사도는 예수께서 육신으로 오신 것을 부인하면 다 적그리스도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보고 듣고 만진바 되었다고 기록하는 것 역시 예수님은 분명히 요한 자신과 동일한 육신을 가지신 분이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인간의 육신은 어떤 면에서 보면 문제가 많다. 물속에서 살 수 없고, 하늘을 날지 못하며, 또 시간 맞춰 먹어야 하고 자야 한다. 신앙 안에서 봐도 예배드리다 보면 졸리고, 시간 정해서 기도하고 성경 읽으려 하면 까먹거나 시들해지는 육신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런 육신을 만드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했고, 예수님 역시 우리와 같은 육신을 가지고 이 땅에 오셨다. 왜냐하면 우리는 육신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에 이런 존재 자체가 구원의 대상이고 이 육신이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는 유일무이한 증거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영이기에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고 만질 수 있거나 볼 수 있는 육신이나 물리적 생물학적 형체가 없으신 분이다. 세상은 그런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것을 표현하시기 위하여 만드셨고,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 곧 의와 이미지를 표현하시기 위하여 만드신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드신 사람의 정체성이고, 사람이 육신을 가진 이유인 것이다. 그리고 이 육신이 실존적 실체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고 실존적 실체, 곧 육신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그 육신으로는 하지 못하는 것이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영이신 하나님과 같이 이 육신의 한계를 벗어난 어떤 것을 할 수 있어야 하나님과 같이 되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것이 좋은 신앙이며, 그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육신을 부인하는 생각의 시작은 선악과


사람들이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기원은 선악과 사건에 있다. 선악과를 먹을 때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먹었다고 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 만드시고 심히 좋았다고 한 육신을 가진 모습을 아담은 부끄럽게 여겼는데 그것이 바로 육신을 부인하고자 한 시초이다.


아담이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먹은 선악과의 결과는 육신이 벗었다는 것을 알았다는 것과 그 벗은 모습이 부끄러운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선악과를 먹었는데, 그런 목적 안에서 보니 육신은 하나님과 같이 되기에는 부끄러운 모습이더라는 것이다.


하나님과 같이 되려면 육신은 참 부끄러운 것이라는 것은 이 육신으로는 하나님과 같이 되기는 어렵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바로 그런 생각이 육신을 부인하는 것이다. 이 육신으로는 하나님과 같이 되기 어렵다고 생각했다면 당연히 육신의 처리 문제가 발생한다.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 유대인들과 율법주의자들 그리고 성경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육신으로 잘 지켜 행하면 된다고 생각을 해서 금식하고 시장에서 기도하고 각종 규례를 만들어 지키려고 했다.


반대로 영지주의와 같은 사상들은 육신은 어차피 죽고 나면 버릴 것이기 때문에 육신은 구원과도 또 하나님의 뜻과도 무관하니 그저 마음만 하나님을 잘 섬기면 되고 육신의 삶은 방탕해도 상관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러한 생각들은 모두 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육신을 주신 이유를 모르는 것이다. 무엇보다 이렇게 생각하게 된 발단이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마음에서 비롯된다. 그래서 선악과를 먹었고, 그래서 바벨탑을 쌓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육신으로 하나님을 섬길 수 없다고 생각하여 육신을 절제시키고 억제하는 것은 다 창조의 목적을 모르고 자기의 방식대로 하나님을 섬기려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래서 이것을 바로잡고자 요한 1서를 기록하고자 했고,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오신 것이 얼마나 중요한 사건이며, 우리에게 얼마나 축복과 같은 것인지를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도 예수님과 같은 육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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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고 또한 그리스도이시다. 예수라는 이름은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자’라는 의미이고, 그리스도는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의미로 제사장과 왕의 신분을 가진 사람이라는 의미이다.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자’라는 예수라는 이름은 직임이요 ‘기름 부음을 받았다’는 그리스도라는 이름은 신분에 관한 예수님의 이름이다. 이름은 정체성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정체성이 바로 예수고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그런 예수님께서 사람을 구원하시려고 하늘의 보좌를 버리고 오셨다. 그리고 이 땅에 오셔서 사람들이 할 수 없는 기적을 행하시고 끝내는 사람들을 위하여 십자가라는 엄청난 고통을 감수하셨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예수님을 바라 볼 때 ‘과연 그분이 우리와 같은 사람인가?’ 하는 의심을 하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보통 사람은 물 위를 걸을 수도 없고, 죽은 사람을 살릴 수도 없기 때문이다.


더욱이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음을 당하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셔서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하늘에 오르시는 모습을 보여주셨다. 그런 예수님에 대하여 사람들은 육신을 가지신 것이 아니라 신과 같은 존재, 혹은 우리와 다른 육신을 가진 존재라고 생각을 했고, 지금도 그렇다.


그런 생각은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너무나 당연한 생각일지 모른다. 어떻게 사람이 죽었다 살아나고, 또 육신을 가진 상태로 하늘에 오르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으려고 한다면 그 능력의 차별성을 인정하고 싶게 된다.


그러다보니 ‘십자가에서는 잠깐 기절한 것이다’라든가 아니면 ‘원래 신이라서 죽지 않았다’와 같은 이론들이 초대 교회에 은근히 자리 잡게 되었고, 이러한 사상은 결국 영지주의라는 사상이 되어 신앙에 있어서 육신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그런 영지주의 사상은, 단순히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승천하는 모습을 이해하기 힘들어서 예수님이 육신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육신을 부인하고 싶은 마음과 결합된 것이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것이 중요한 점이다.


영지주의는 단순히 예수님의 육신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가 육신임을 부인하는 것


사람들은 자기 안에서 일어나는 욕망들과 연약함 그리고 추함을 배척하고 자신의 삶에서 축출되기를 희망한다. 자기 안에서 잊을만하면 다시 나타나는 성욕이나 분내는 것과 같은 추하다 생각되는 본능이나, 마음으로 원하는 것을 쉽게 하지 못하는 육신이 늘 원망스럽다.


그리고 그러한 요소들은 자신이 하나님을 믿는 것에 있어 장애 요인이라고 생각한다. 즉 그런 마음이 드는 자신을 하나님께서 받아주시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자신을 그렇게 만드셨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인 줄도 모르고 말이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자기 안에서 그런 것이 없어지기를 기도하고 신앙의 힘으로 극복하려고 한다. 하지만 해 보면 그것은 결코 가능한 일이 아니라는 것 앞에서 또 좌절하게 된다. 그 역시 하나님께서 사람을 그렇게 만드셨다는 것을 부정하기 때문에 좌절하는 것이다.


그러다 사람들은 결국 예수님이 우리와 다른 존재라는 말에 현혹된다. 그것은 자신이 육신을 부정하는 것에 대한 명확한 해석과 탈출구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지주의가 각광을 받는 것이다. 육신은 하나님을 믿는 것과 무관하다고 하니 말이다.


바로 이러한 상황에 대하여 요한 사도는 심각한 문제로 봤다. 그래서 자신이 만난 예수님은 그런 신적인 예수님이 아니라 우리와 같은 육신을 가진 존재였다는 것을 전하고자 했다. 왜냐하면 그것은 신앙의 본질적인 요소이기 때문에 그렇다.


요한 사도가 말한 그런 관점은 오늘날도 있는 문제다. 다시 말해서 영지주의라는 것이 초대교회 시대에 잠깐 있었던 이단 사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늘날도 육신으로 오신 예수를 부인하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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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요한은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을 전하고자 요한 1서를 기록했다고 시작한다. 이 말씀에 대하여 요한복음에서는 ‘육신이 된 말씀’이라고 했고, 요한 1서에서는 ‘보고 듣고 만진바 된 말씀’이라고 했다.


이 말씀은 성경을 대하는 모든 이들이 알 수 있듯이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을 만나는 순간이 하나님 세계의 태초라는 것을 기반으로 생명의 말씀이라는 것은 생명이 시작되는, 그러니까 세계를 살고 인식하는 시작이 예수님을 만나는 것에서부터 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영이시고 또한 신이시기 때문에 그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 역시 사람과는 완전히 다른 존재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어떨 때는 예수님은 화장실도 가지 않으실 것 같은 존재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것은 한마디로 예수님은 우리와 다른 육신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은 물 위도 걷고 죽은 사람도 살리는 우리와 다른 존재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도 요한은 예수님에 대하여 설명하기를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분이라고 했다. 그리고 자신은 그 예수님을 보고 듣고 만진바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예수를 전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요한 1서다.


여기서 요한 사도가 말하고 있는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은 우리와 동일한 육신을 가진 존재라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것이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우리와 동일한 존재와 동일한 정체성을 가져야 우리가 예수님과 동일한 신분이 될 수 있는 당연한 이치 때문이다.


만약 예수님의 육신이 우리와 다르다면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은 예수님과 같은 육신을 가진 존재만 된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에 있어서 아주 아주 중요한 문제이다. 예수님이 우리와 다른 존재라면 우리의 구원은 요원한 것이고, 다른 존재로서 우리의 죄를 대신할 요량이었다면 굳이 우리와 같은 육신으로 이 땅에 오실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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