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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천국에 들어 갈 수 있다고 하셨다. 하지만 뒤 이어 나오는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고, 귀신을 내어 쫓은 것은 사람들을 모른다고 하시겠다는 것은 그런 것이 무조건 하나님의 뜻대로 행해지는 것은 아니라는 말씀이 아니라는 뜻이다.


예수님의 말씀에는 <노릇>이라는 말씀이 있는데, 노릇이라는 것은 흉내 내는 것과 같은 것이다. 다시 말해서 보여주는 행동과 그 자신이 같은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군인 아닌 사람이 총을 쏘면 그것이 바로 군인 노릇이라는 것인데, 그건 아주 심각한 문제이다. 군인이 아닌데 총 쏘는 사람이 누군가? 나쁜 사람 아닌가?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기적을 일으키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을 오늘날 교회 안에서 본다면, 교회의 일로 많은 것을 이루어낸다고 모두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이라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생각하는 사람과 자신이 인정하는 자신의 모습이 같은 사람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보여주는 행함의 결과는 어떤 것이라도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노릇이 필요 없다. 숨만 쉬어도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이다.


그와는 반대로 해적이 동료를 위하여 목숨을 바쳐 싸우고 나서 서로가 그것을 대단한 것이라 생각해봤자 나라는 그것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이다. 먼저 나라가 인정하는 국민이 되고 나서 다른 사람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야 비로소 제대로 된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도 바로 그런 사람이다. 하나님이 생각하는 사람의 모습과 자신의 모습이 같은 사람이라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유일하고 가장 큰 죄인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부여한 자신의 정체성을 부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을 부인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 죄를 가장 먼저 시인해야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는 것을 사도 요한이 요한일서 1장에서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이것은 정말로 중요한 신앙의 근간이요 뿌리다. 아무리 교회에 충성하고 성경을 수백 번 읽고 다 외운다 해도 사람이 자신의 정체성을 부인했다는 것이 고백되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렇다면,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정체성은 어떤 것인가?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생각하시는 사람의 모습은 과연 어떤 것이기에 그것이 없으면 안 된다는 것인가? 교회에서 또한 기도할 때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고 고백하는 것으로 부족하다는 말인가?


사람은 흙으로 만들어지고 처음에 만들어진 모습이나 지금의 모습이나 크게 다를 바 없다. 설사 진화나 시대적인 요소가 아무리 반영되었다고 쳐도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은 다 하늘을 날 수 없고, 물속에서 살 수 없으며, 사람으로 인하여 화를 내지 않을 수 없는 존재이다.


바로 그런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존재로서 지으신 것이다. 그리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셨다. 그것은 날지 못하고 물속에서 살지 못하며 서로 함께 살면 갈등이 일어나고 마음 안에 여러 가지 이기적이고 욕망에 관한 생각이 있는 존재, 그 존재가 보시기에 좋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한다면 그런 모습이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기에 합당하다고 하나님께서 생각하셨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사람에 대하여 가지신 생각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사람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욕망은 하나님께 죄악이라 여겨서 심한 경우 육신을 괴롭히고 상해하면서 그런 생각을 떨치려 한다. 그리고 사람 사이에 일어나는 갈등 자체를 부인하고 없애려 한다. 하지만 역사 이래로 이것에 대하여 성공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유대인들도 겉으로 보기에는 살인하지 않았고, 또 간음하지 않고 경건한 것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그들도 사람이기 그 안에 그런 생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그렇지 않아야 한다고 가르치고 주장하고 자신의 행위로 그것을 증명하려 했기 때문에 예수님께 도전한 것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율법을 주신 것이 사람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금하고 싶은 욕망과 고상함을 추구하는 사회 앞에 부끄러운 생각들을 감추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행함으로 그것을 극복하려 했기에 그것이 극복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하시기 위하여 주신 법인데, 그것을 껍데기만 지키는 노릇을 해서 경건해지려 하는 사람들을 책망하신 것이다.(그래서 바리새인들을 보고 회칠한 무덤이라고 하셨다.)


그렇게 사람은 율법을 지켜 행하여 사람이 가지고 있는 본성을 억제하는 것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선한 것이며, 또한 육신을 가진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을 해야만 하나님의 뜻을 더 크게 나타내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과는 다른 생각이다.


이것이 가장 큰 죄다. 이 죄를 하나님 앞에 고백해야 한다는 것을 요한 사도가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이 생각이 선악과를 먹게 하였고, 이 생각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고, 이 생각이 하나님 앞에서 불순종하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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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생활이란 것이 어떤 것인가 할 때, 많은 경우 예배에 참예하고 기도하고 성경 보며 또 전도하는 것을 말한다. 신앙생활이라는 것이 원래 그런 것이다. 세부적으로 가서 그것을 어떻게 해야 좋은 신앙이 되는지에 대하여는 의논이 분분할 수 있겠지만 신앙생활의 골자는 그런 것이다.


그런데, 한 번 더 깊은 질문을 던져보자. '신앙생활을 왜 하는가?, 하는 목적이 뭔가?'하는 질문을 해 보자. 그러면 여러 가지 답변들이 있겠지만, 답변들을 모아보면 '천국에 가기 위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와 같은 것들에 수렴하지 않을까 싶다.


앞에서 말한 두 가지 신앙생활의 모습과 목적을 연결해 본다면 그 방향은 신앙생활이라는 행동들의 결과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또한 영광도 되며 죽어서는 천국에 가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방향성을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해서 결과가 신앙생활에 종속된 관계라는 것이다.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이런 보편적인 관점은 온전하지 않다. 신앙생활이라는 것이 그런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라는 것이다. 신앙생활이라는 것이 천국에 가는 것과 같은 결과의 원인으로 해 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성경에 <'~을 하라'> 라고 볼 수 있는 말씀들을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살 수 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성경에 기록해 놓은 것이라는 점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총 쏜다고 군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군인이라서 총을 쏘는 것임을 생각하면 이해가 되리라 생각된다.


바로 이러한 생각이 존재에 관한 생각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사람은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먼저 인식해야 다음이 있는 것이다. 사람에 대하여 하나님과 자신과 생각이 다르면 그 삶이 아무리 영화로워도 출발이 잘못되었기에 다 잘못된 것이 되기 때문이다.


중학교 시절 중등부 전도사님이 하신 설교 두어 개가 아직도 생각이 나는데, 그 중에 하나가 해적에 관한 비유였다.

해적끼리는 대단한 의리를 가지고 있고, 
서로를 위하여 목숨도 바치는 충성과 우정이 있지만, 
그런 것은 다 소용이 없고 
해적에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국가 앞에 자신이 해적이었다는 것을 자수하는 것이다. 


라고 하신 것이 늘 생각이 난다.


그렇다 해적은 아무리 대단한 업적이 있고, 자신들끼리 목숨을 내어주는 사랑과 우정과 충성이 있어도 다 소용없다.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들이 해적이라는 것을 나라 앞에 자수해야 하는 것, 바로 그것이 있어야 다음이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 앞에서 사람도 마찬가지다. 사람이 세상을 살면서 사람을 위하여 목숨을 내어준다 해도 하나님이 생각하는 사람의 정체성과 자신이 생각하는 사람의 정의가 다르면 다 소용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주여! 주여!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고 하셨고, 바울 사도 또한 사랑 장에서 사랑이 없으면 다 소용이 없다고 했던 것이다. 사랑이 없다는 것은 하나님이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 7:2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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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죄는 대부분 사람의 행동에 관한 규범에 따른 것이다. 우리나라 형법에도 거의 모든 형법 조항들이 그런데 이러한 것은 동기만으로는 죄가 되지 않는다. 형법이란 것이 행동에 관한 규범이므로 분명한 행동이 있을 때 죄가 성립이 된다고 한다. 


예를 들면 절도라는 범죄가 성립하려면 훔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고 범죄가 성립이 되는 것이 아니라 실재로 어떤 물건을 훔쳤을 때 성립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마음으로 어떤 생각을 가졌다는 것만으로 실재적인 범죄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단 한 가지 그렇지 않은 것이 있는데 그것은 간첩죄라는 것이다. 그것은 어떤 범죄적인 행동을 하지 않아도 간첩이라는 이유만으로 범죄가 그것도 아주 중범이 된다는 것이다. 이런 것이 바로 존재의 법이 가지고 있는 특징이다.


간첩은 존재 자체가 범죄인 상태이기 때문에 선한 행동을 하고, 또 기부를 많이 하고 사회봉사를 해도 오히려 하면 할수록 죄가 중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존재가 어떠냐에 따라 죄인이 되는 문제를 잘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겠다.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죄의 가장 기본은 이 존재의 죄를 말한다. 존재의 죄라는 것은 대한민국이 추구하고 있는 민주공화국으로서 가지고 있는 의와 법에 동의하는 존재인지 아닌지를 기반으로 간첩이 정의되는 것과 같이,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에서 하나님이 정하신 의와 뜻에 합당한 사람인지 아닌지가 바로 존재의 죄인인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것이다.


왜 이것이 먼저이고 중요한 것이냐 하면, 존재가 정해지고 나야 그 행동이 적법한지 그렇지 않은지를 판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냐 아니냐 하는 것이 그 사람의 행동만으로 단순하게 정의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존재로서 어떤 행동을 하였느냐? 하는 것이 기준이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을 보고 '형제를 미워하는 마음이 있으면 이미 살인한 자'고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은 자는 간음한 자'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는 그 사람들이 행동만으로 죄를 정하는 율법적인 관점에서 살기 때문에 그런 관점에서 보면 행동하지 않았기에 죄가 없다고 주장하는 마음을 꾸짖으시는 것이다.


율법이라는 것이 마치 지금의 형법과 같이 마음에 어떤 것이 있더라도 행동으로 옮겨지지 않았다면 죄가 되지 않으므로 자신들이 선하다고 생각했지만, 예수님께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행위보다 그 존재가 죄인인지 아닌지가 더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또한 율법은 그렇게 존재의 어떠함에 무관하게 겉으로 보이는 행동만 간수하면 의로운 사람이 된다는 것을 말씀하시기 위하여 주신 것이 아니라, 율법이라는 것은 사람이 행동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질 수 없다는 것을 알게 하시기 위하여 주신 것에 반하는 믿음을 책망하신 것이기도 하다.


사람이 행위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될 수 없다는 것은 아무리 행위로 공적을 쌓아도 하나님의 기준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생각하시는 의인의 기준이 사람의 행위에 있지 않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런 말을 하면 반드시 "그렇다면 하나님 앞에서는 어떤 행동도 무관하게 존재만 바로 서면되느냐?, 살인도, 강간도, 절도도 무관하냐?"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마음으로 형제를 미워하면 살인한 자'라고 말씀하셨듯이 하나님 앞에서 그 존재가 회복되면 행동은 따라 오는 것이기에 그런 일은 없다고 할 수 있다.


나 역시 어릴 적부터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서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에 다닐 때 까지 술을 멀리하고 잘 마시지 않았다. 회사 회식 때도 사람들이 싫어하는 안주만 먹는 사람이었다. 그러다가 성경에 기록된 이 복음이 행동에 관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한때는 술을 제법 마셨던 때가 있었다.


그때의 생각은 이랬다. '사람 마시라고 만든 술을 마시는 것이 왜 죄인가?'라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술은 마신다고 죄가 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마셔야 하는 것은 아니다. 술은 마셔도 되고 안 마셔도 되는 하나의 음료일 뿐이다. 그것이 죄가 되고 되자 않고 하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일부러 술을 마시러 다니지 않는다. 그리고 바울이 사람들이 실족하지 않도록 자신을 제어한 것과 같은 목적이 있을 때만 아니면 술에 대하여 특별한 개념을 가지지 않는다. 그리고 일상에서는 그저 건강상의 이유로 또 특별히 필요하지 않다면 술을 마시지 않지만, 또 누군가 나와 사귀기 위하여 술을 한잔 하자고 하면 특별히 금하지도 않는다.


다시 돌아와서 이야기를 이어가면, 하나님 앞에서 죄는 행동에 관한 규범이 아니다. 사람이 행동으로 범하는 죄는 하나님과 상의할 문제가 아니라, 자신이 속한 사회의 규범에 관한 것이다. 왜냐하면 행위는 <세상의 법> 그 아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이 요한 일서에서 하나님 앞에서 고백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는 죄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어떤 행동으로 지은 죄를 고백하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람으로 살게 하시는 목적을 잊고 산 존재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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