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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수가 끝나고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더 이상 이런 홍수가 없을 것이라는 언약으로 구름 속에 무지개를 두셨다고 하셨다. 다시 말해서 더 이상은 물로 심판하는 것이 없을 것이라는 말씀을 하신 것이다.



Rainbow Guard
Rainbow Guard by linh.ngan 저작자 표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기실 때 베드로와의 대화를 통해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하신 언약을 다시 말씀 하신다. 이것은 홍수는 물로 죄를 씻는 세례를 예표하는 것이기 때문에, 한번 물세례를 받은 사람은 더 이상 씻지 않아도 된 된다고 하신 말씀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홍수 이후에 더 이상 홍수가 없을 것이라고 하셨다는 것은 자신이 홍수와 같은 세상에서 살 수 없다는 고백이 있는 사람은 다시 물세례를 받지 않는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무지개를 통해서 언약하신 것이다.


하지만 그냥 의식으로서의 세례나 침례를 받았다고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진정한 고백이기 때문에, 자기 안에서 부인할 수 없는 것으로 남아 있어야 하는 것이다. 즉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홍수와 같은 과정을 겪은 물세례의 과정이 있었다는 것을 아무리 부인하려 해도 부인할 수 없는 사람이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그 증거가 무지개인가?


우선 무지개는 빛이다. 무지개는 빛의 여러가지 빛깔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것이 무지개다. 즉 빛이 7가지 색상으로 아니 정확하게는 빨간색에서 보라색 사이를 그라데이션 하듯 연속적으로 변하는 모양을 하고 있는 것이 무지개다.


무지개는 빛이 여러가지 빛깔로 분산되어 나타나는 것이다. 


이러한 무지개가 더 이상 물심판이 없는 증거로 자리한 사람의 특징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다양성이다. 빛은 우리가 아는대로 하나님의 말씀이다. 천지창조도 빛이 있으라 하심에서 시작된다. 이 빛은 인식이다. 빛이 있어야 어떤 것이라도 인식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주신 빛은 그 빛이 있어야 하나님이 인식되고 믿어지는 세계인 것이다. 그것이 빛이고 그것이 하나님의 세계가 시작되는 창세기인 것이다.


그런 빛이 여러가지 연속된 빛깔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무지개를 물심판이 없을 것이라는 증거로 주셨다는 것은 홍수와 같은 세상의 학문이나 모든 것으로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이 존재의 신이신 하나님의 세계가 열리는 것이 빛이고 그 빛이 단순히 하나가 아니라 아주 다양하게 표현될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무지개는 하나님을 표현하는 것이 다양하다는 것을 보여 주시는 것


하나님은 빛이시다. 그런 빛이 다양하게 표현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다양성을 표현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다양한 모습으로 표현되는 것 그것이 바로 물심판이 다시 없을 것이라는 약속의 증거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런 분이다." 규정하는 것은 다시 물심판이 있는 상태라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아무렇게나 표현해도 된다는 말인가? 그것은 그렇지 않다. 일단 빛이어야 한다. 무지개는 잡다하게 다양한 것이 아니라, 빛이 다양하게 표현된 것이다.


빛은 모든 것의 인식이고 시작이다. 빛이 없으면 사람은 어떤 형체도 인식할 수 없다. 최전방 초소에 가면 바로 앞사람 모습도 안보일 정도로 어둡기도 하다. 바로 팔만 펴면 있는 사람도 안 보인다. 그렇게 빛이 없으면 아무 것도 인식할 수 없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라는 빛이 없다면 인생이 무엇인지도 안 보이고, 하나님이 누구신지, 그리스도는 또 누구신지, 교회는 무엇인지, 또 나는 누구인지 전혀 알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빛의 정체이다.


그런 빛이 다양하게 표현된 것이 무지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다양성을 나타내는 무지개를 더 이상 물심판이 없는 사람의 증거로 주셨다는 것은, 온전한 세례를 거친 사람은 하나님을 정형화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동성애자들이 무지개를 다양성이라는 의미에서 그들을 상징하는 깃발로 사용하는데, 그것은 오류가 있다. 왜냐하면 인생의 정체를 밝히는 빛이 다양하게 표현된 것이 무지개지, 기준도 없이 무조건 다양성을 인정하자는 것이 무지개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것은 하나님이 영이시라는 것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한다. 효를 다루는 것에 있어서 심청전이라는 표현 방식만 있는 것이 아니듯이, 영이신 하나님이 다양한 삶의 형태를 가진 사람들을 통하여 표현될 수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 다양성이다.


즉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신, 그러니까 어떤 형태로도 규정되지 않는 분이시기에 다양한 사람들의 모습과 삶을 통해서 표현되실 수 있고, 그것이 또한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이기도 한 것이다.


바로 그런 관계에 대하여 알게 되었다는 것이 세례를 받은 사람이라는 증거라는 의미가 바로 무지개를 주신 의미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세례를 거친 사람은 단 하나의 기준으로 가지고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이나 형태를 심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바로 그럴수 있다는 것이 무지개의 증거를 받은 사람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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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수가 끝나고 가장 먼저 한 것은 제사


홍수가 끝나고 나서 노아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제사(창 8:20)를 드린 일이다. 노아는 방주에 있던 정한 짐승과 새로 번제를 드렸다고 했다. 이것이 노아가 하나님 앞에 의인으로 여김을 받는 이유이기도 하지만, 개인의 신앙에서 본다면 이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만나서 자신이 세상의 것으로는 자신의 정체성을 채울 수 없다는 고백을 한 사람이 고백 다음에 하는 것은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는 것이 당연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세례 따로 제사 따로가 아니라는 것이다.



Noah offering sacrifice
Noah offering sacrifice by Lawrence OP 저작자 표시비영리변경 금지


수동 운전을 배울 때 가장 핵심은 등반이다. 미끄러지지 않게 브레이크에서 발을 떼면서 바로 악셀을 밟아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분리된 것이 아니다. 동작이 다르다고 다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등반이라는 것은 이 두가지 하나로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세례와 제사는 같은 연장선 상에 있는 것이다. 세례를 받은 사람이 하나님께 자신의 삶을 드리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분리되어 있지만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몸을 산 제사로 드린다는 것


사람들은 제사를 하나님께 자신을 바치는 것이라는 것이라 알고 있다. 그렇다면 사람을 하나님께 바치는 것은 어떤 것일까? 사람을 죽여서 제단에서 불 태워야 제사인가? 차마 그렇게 하지 못하니 소를 대신해서 드리는 것인가? 그런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몸을 원하신다. 몸을 원하신다는 것은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그 존재감을 표현할 방법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존재와 또한 성품을 표현할 형체가 필요하신 분이다.


로마서 12장에서 바울 사도는 <"너희 몸을 산 제사로 드리라">고 했는데, 우리의 몸을 산 제사로 드린다는 것은 우리의 몸이 하나님의 존재와 성품을 표현하는 삶을 살아라는 것이다. 즉 영이신 하나님의 형상이 되어라는 것이다. 그것이 제사이고 사람을 만드신 목적인 것이다.


제사라는 것은 그런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통하여 그 성품과 존재를 드러내실 수 있게 우리가 하나님께 자아를 개방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회개고 회개의 증거가 세례이며, 세례를 받고 제사로 드려진 상태를 구원이라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채워지는 성전인 질그릇 같은 사람


사람은 늘 뭔가를 하려하고 자기 안에 무엇이라도 채우려 한다. 하다 못해 감각적 유희라도 채우려 한다. 그것은 사람은 그릇과 같이 속이 비었고 무언가를 채워야 하는 존재이다. 그것을 우리는 갈급함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질그릇 같다고 한 것이다.


예전에 태권도를 하는 로봇인 로보트 태권브이라는 만화영화가 있었다. 그 태권브이가 태권도를 하는 로봇이 되기 위해서 그 안에 태권소년 훈이와 태권 소녀 영희가 탑승할 수 있는 자리가 있고, 반드시 훈이와 영희가 탑승을 해야 비로서 <태권>브이가 되는 것 처럼,



로보트 태권브이
로보트 태권브이 by Steven Ha 저작자 표시비영리변경 금지 
<태권브이는 태권소년 훈이가 조정해서 태권브이가 된다>


사람도 사람을 하나님께서 만드실 때에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으로 지으셨고, 그렇게 하나님께서 거하심으로 창조의 목적인 하나님의 성품이 표현되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가 산제사로 드리라 했고, 또한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한 것이다.


즉 사람의 끝 없는 갈급함은 하나님의 성품이 채워져야 비로서 해갈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 안에서 그치지 않는 갈급함을 학문과 부와 명예와 쾌락으로 채우려 하는 것이다. 그것은 홍수가 난 물을 마시는 것이고 바닷물을 마시는 것이다.


그렇게 세상의 것으로 자아 정체성을 채우는 것은 세상의 것이 좋아 보이기 때문이다. 마치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아내로 삼았던 것과 같은 것이다. 그것은 위대함을 낳고 넘쳐나는 물을 만들었지만 그것은 우리를 살리는 것이 아니라 죽이는 것이다.


즉 육신으로 목숨이 살아 있다고 해도, 하나님의 목적 안에서 보면 가지 않는 시계와 같은 존재일 뿐이다. 바로 그런 상태에서 살 수 없다고 고백하는 것이 세례이다. 즉 넘쳐나는 물과 같은 세상의 학문과 철학과 부와 명예와 쾌락으로는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이 채워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세례인 것이다.


바로 그것을 알게 하시는 말씀이 노아의 홍수에 관한 말씀인 것이다. 그리고 그 홍수에서 피할 수 있는 방주가 교회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세상에서 성공하고 화려하고 좋은 건축자재가 필요한 곳이 아니라, 부정한 상태로도 늘 홍수를 피할 수 있을 때 비로서 교회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홍수가 끝나고 노아가 제사를 드렸다는 것은 세상의 것으로 살 수 없다는 고백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제사를 드렸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되었을 때 비로서 노아의 홍수를 믿는 신앙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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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 vs. 생명


세례가 물 속에서 살 수 없다는 고백을 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 까지는 이해가 어렵지 않지만, 여기서 말하는 물이라는 것이 세상의 지식과 명예와 부와 쾌락이라는 것으로 가면 이해가 되지 않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그런 말을 우리의 육신을 기준으로 생각하면 '공부를 한다는 것이 죽은 것인가?'와 같은 의문을 가지게 된다. 공부든 돈을 모으는 것이든 심지어 쾌락도 다 살아 있어야 가능한 것인데, 그것을 한다는 것이 물 속에 잠기는 것과 같이 죽을 곳이라고 하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살았다, 죽었다 하는 것은 육신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이는 성경이 말씀하는 살았다, 죽었다 하는 것이 목숨에 관한 것이 아니라 생명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실 때도 목숨과 생명이 분명히 구분이 되어 있다.


목숨은 그야말로 육신의 생명, 곧 생물학적으로 살았는가 아닌가의 기준이 되는 관점으로 볼 때 사용하는 것이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생명은 다른 개념이다. 이것은 생물학적으로 또한 의학적으로 살았는가 죽었는가 하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존재 목적을 잘 나타내고 있느냐? 아니냐?' 하는 것에 대한 개념이다. 그러니까 시계는 시간을 가르키지 못하면 죽었다고 하고, 흔한 말로 '맛 갔다'고 한다. 이는 심지어 스포츠 안에서도 흔히 이야기 하기도 하는 그런 개념이다.


그러므로 성경이 말하는 살았다 죽었다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성경을 기록하여 사람들에게 읽게 하신 목적이자 사람을 만드신 목적이 그 사람 안에 있으면 살았다고 하는 것이고, 그렇지 않고 그 목적을 벗어난 상태의 삶을 살면 목숨은 붙어 있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는 죽은 것과 같은 것이라는 것이다.


세례라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세우신 하나님의 규례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이 있는데, 그 목적을 이루려 사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좋다고 하는 학문과 부와 명예와 쾌락을 추구하고 누리는 것이 인간의 본질이고 삶의 목적이라고 여기는 것은 죽은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례는 사람이 자신의 존재 목적을 세상의 것을 추구하고 이루는 것에 있다고 여기며 살다가 그것은 마치 물에 빠진 것과 같이 하나님 앞에서 내가 죽게 된다는 것을 깨닫고 그것을 떠나는 깨달음을 기반으로 하는 신앙고백이 세례라는 것이다.




삶이 허무하다고 하는 것이 바로 생명이 없는 것


사람들은 평생을 살고서 나이가 들면서 허무함을 느낀다. 다시 말해서 갈증이 해갈되지 않았고 배 고프다는 것이다. 더 이상 육신의 힘으로 뭔가를 도모하지 못할 나이가 되어서 삶을 돌아 보면 그저 허무하다고 깨닫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생을 <공수래 공수거>라고 하기도 한다.


사람이 사는 동안 셀 수도 없을만큼 많은 순간 "죽겠다"하고 또 죽고 싶은 마음 드는 순간이 얼마나 많았는데, 그렇게 살아낸 삶의 끝에 그냥 <빈 손으로 왔으니 빈 손으로 간다>라고 한단 말인가! 그것이야 말로 인식 세계 안에서 더할 나위 없는 허무함인 것이다.


그것이 바로 죽은 것이다. 그렇게 죽도록 연명하고 살아 낸 인생의 끝에 아무것도 없다니! 그럴수는 없는 것이다. 분명이 그렇게 힘들게 살아야 하는 목적과 이유는 있는 것이다. 사람이 만든 어떤 기계도 만든 목적이 있어서 엄청난 열을 내고 소리를 내면서 움직이는 것이다. 하물며 그렇게 목적을 가지고 기계를 만드는 사람이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사람이 그렇게 살 수는 없다고 깨닫는 것이 바로 세례인 것이다. 그리고 세례를 하나님께서 만드셨으니 고백은 하나님께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 이전의 방식 안에서는 살 수 없다는 것을 고백한다는 것, 세상을 좇아 살 수 없다고 고백한다는 것은 아주 특별한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은 존재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렇다는 것은 열심하 수고한 결과를 신께 또한 세상에 바쳐서 그 소산을 얻는 세계가 아니라, 하나님과 나의 정체성을 회복하고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존재의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존재의 하나님이라는 것은 사람이 수고한 결과를 받으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저 나는 하나님 앞에서 어떤 사람 또는 존재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을 존재의 하나님으로 아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 세상에서 수고한 결과물인 박사 학위나 돈과 명예를 들고 가서 하니님께서 주셔서 감사하다고 드리는 것은 하나님을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사람은 그저 하나님께 갈 때, 인간이라는 정체성 그것 하나만 가지고 가면 된다.




살았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 인간이라는 정체성만 드리는 것


하나님께 인간이라는 정체성 하나만 가지고 간다는 것에는 신앙도 필요없다. 그러니까 신앙생활 잘했다는 성과도 필요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가장 귀하게 여기시는 것은 그저 하나님 앞에서 나는 죄인이고, 연약한 인간이며, 선악을 판단하던 존재였으며 스스로를 구원하거나 스스로 존재 목적을 알 수 없는 존재였다는 고백 그것이다.


그런 고백이 바로 세례의 고백이다. 그런 고백이 바로 홍수와 같은 세상의 모든 것, 그리고 세상이 추구하는 것, 또한 세상이 귀하게 여기는 명예와 부귀와 쾌락으로는 나의 정체성을 알 수 없었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전에 그것을 하나님께 드리려 했으나 그것이 아님을 알았다는 고백이라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 세상에 빠져서는 죽을 것 같다고 고백하는 것이고, 그렇게는 살 수 없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존재의 하나님께서 만드신 피조물로서 행위와 소유를 드리려 했던 것은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서 볼 때 죽은 것이었다는 것을 아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죽은 것이다. 천지를 만드시고 그것을 표현하고자 사람을 만드신 하나님께서 사람의 수고를 원하시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손수 만드시고 주관하시는 세상에서 수고한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아이폰을 스티브 잡스에게 갤럭시S를 이건희 회장에게 선물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스리라고 주셨지, 세상의 소산을 다시 가져오라고 사람에게 명하시지 않았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고 산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목적 아래서 보면 생명이 없는 것이다. 그것이 세상이고 그것이 홍수와 같은 물이다.


그러므로 그것에서 인간의 정체성을 찾을 수 없고, 나의 갈급함을 채울 수 없다고 고백하는 것이 바로 물 속에서 살 수 없음을 깨닫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것이 바로 세례요, 홍수가 나에게 의미가 있어지고 노아 홍수를 하나님께서 일으키셨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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