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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일서 1장 1-4절) 전하는 기쁨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한1서 Date : 2014. 9. 11. 16:37 Writer : 김홍덕

교회가 가지고 있는 가장 충실해야할 존재 목적이 있다면 그것은 그리스도를 나누는 것이다. 그것이 교회의 근간이다. 교회의 5대 기능이 있는데, 예배, 선교, 교육, 봉사, 친교(교제)라고 한다. 이러한 요소는 다양한 것도 맞지만 알고 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표현들이다.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만날 것인지에 대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이고, 교육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치는 것이며, 봉사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나누기 위하여 필요한 육신의 수고를 드리는 것이다.


그리고 선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교회 밖에 있는 사람에게 전하는 것이고, 교제는 안에서 나누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어쨌든 교회의 모든 활동은 예수 그리스도를 나누는 것이다. 그 나눔과 전하는 방향과 대상에 따라 교회의 표현 양식이 조금 달라지는 것뿐 이라는 것이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과 사람의 사귐에 대하여 형제들에게 전하고자 이 편지를 쓴다고 했다. 하나님과 사람의 사귐은 하나님과 사람이 하나가 되는 것이다. 이는 같은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의를 가지신 하나님이 사람과 만나서 사람이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것이다.


그 첫 사귐, 처음으로 하나님의 의가 육신을 통하여 나타나신바 된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리고 그 예수 그리스도를 가까이에서 본 제자들이 예수님을 보니 자신들도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또한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존재로 살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것은 사람이 사람에게 하나님의 의를 전하고 나눈 것이다. 즉 예수님은 하나님과 사람이 만난 존재이고, 그것을 또한 사람이 보고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는 사건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요한 사도는 그것을 듣고 보고 자세히 보고 만진 바 된 것이라고 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의 의를 사람에게 나타내신 것은, 예수님이 사람이시므로 사람에게 하나님의 의가 어떻게 나타나는가 하는 것에 대하여 가장 잘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사람의 형편을 사람이 가장 잘 알기에 그렇다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시고자 한 대상이 사람이었기에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이 땅에 오신 것이다. 그럴 리는 없지만 개에게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려 하셨다면 하나님의 개를 선택해서 이 땅에 오셨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우리와 같은 육신을 가지고 사람으로 오신 것은 이 육신을 가진 존재가 무엇인지는 몰라도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것을 위하여 예비 되었고, 또한 하나님이 보실 때 가장 적절한 존재라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을 만드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신 것이다.


그래서 오신 예수님,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면 그것을 깨달은 자신도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는 길이 열리도록 하신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인류의 희망이요 빛이요 길이요 진리가 되시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요한의 시대와 같이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육신을 가지신 분이 아니라고 해 버리면 적어도 육신을 가진 인생은 하나님의 아들이 될 방법이 없어지는 것이다. 반대로 예수님께서 사람으로 오셔서 하나님의 의를 보여주셨기 때문에, 이 복음은 사람이 사람에게 전할 수 있는 복음이 된 것이다.


그래서 먼저는 예수님을 가까이에서 본 제자들이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그리스도, 또한 하나님의 아들의 정체성이 무엇인지를 보았고, 그것을 보고 나니 육신을 가진 자신들의 인생이 하나님께서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도록 지었다는 것을 알고 자신이 또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법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제자들은 그것을 전했고, 또 그것을 전해들은 사람들 역시 자신들이 늘 버리고 저주스럽게 여겼던 육신, 마음에 있는 대로 되지 않는 이 육신의 삶이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표현할 형식으로 예비 되었다는 것에 감사하고 그 기쁨을 사람들에게 전했던 것이다.


그래서 요한 사도는 이것을 전하는 것이 기쁨이라고 했다. 필자 역시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에 대하여 이렇게 전해가는 것이 시쳇말로 돈 되는 일도 아니지만 늘 이렇게 전하게 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가진 하나의 유전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한 사도는 이 육신이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형식으로 살아가서 하나님과 하나 되는 사귐을 예수님을 통해서 보았고 그것을 또한 전하는 것이다. 그것은 그럴 수밖에 없는 그리스도의 본성이고 기쁨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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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일서 1장 1-4절) 사귐과 교제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한1서 Date : 2014. 9. 10. 15:51 Writer : 김홍덕

사람이 하나님과 사귀는 사귐의 근간은 ‘제사’다. 이 제사는 제단 위에 몸을 불사르는 것이나 피 흘리는 것이 최종적인 것이 아니다. 즉 구약 성경에 나오는 제사의 예식은 전부 그리스도가 드린 십자가의 제사에 대한 그림자이다.


제사는 결국 신과 사람이 만나는 것이 그 목적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제사에 대한 규례를 주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제사를 드리도록 한 것이다. 그 목적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를 시작으로 사람과 하나님이 만나기 위한 것이었다.


하나님과 사람이 만나는 것은 마치 내용과 형식이 만나는 것과 같다. 콜라 원액이라는 내용물과 콜라병이 만나서 콜라가 된다. 하나가 된다는 것이다. 이동하고자 하는 목적을 가진 사람이 자동차를 만나면 자리를 이동할 수 있게 된다. 이동이라는 목적이 이루어졌고 목적이 자동차와 하나가 된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이다. 하나님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모습은 어떤 이미지의 형식이다. 즉 하나님이라는 신이 가진 이미지 곧 하나님의 성품과 의와 뜻이 사람이라는 형식으로 표현되어야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셨다고 하신 것이다.


즉 하나님의 성품과 의와 뜻을 콜라 원액이라고 한다면 사람은 콜라병과 같은 것이다. 이렇듯 콜라와 콜라병이 만나서 하나의 콜라가 되는 것과 같이 사람도 하나님의 뜻이 사람의 내용이 되었을 때 비로소 사람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제사가 하나님과 사람이 만나는 것이라고 할 때,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의 의가 사람이라는 형식으로 표현되는 만남이 있을 때 온전한 제사가 되는 것이고, 또한 그것이 제사의 본질이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과 사람이 만나는 것을 사귐, 곧 하나가 되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만남과 사귐과 하나 됨의 처음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하나님께서 육신을 가진 사람과 온전히 내용이 형식이 되는 만남을 이룬 분이 바로 예수님이신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을 보고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한 것이다.


이러한 예수님의 정체성이 사람들에게 의미가 있는 것은, 모든 사람이 예수님과 같이 될 수 있고, 되어야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그렇게 이 땅에 오시고 십자가에서 하나님과 사람이 만나는 사귐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신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사람이 하나가 되는 사귐에 대하여 십자가를 지시면서 까지 보여주신 이유가 바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고 육신을 가진 인생이라면 누구라도 그렇게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사귐이 있게 하시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그것을 교제라고 한다. 하나님과 사람이 만나는 사귐을 제사라고 한다면, 사람이 사람을 통해서 예수님이 보여주신 하나님과의 사귐의 제사의 법을 나누고 전하는 것을 교제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전도고 이것이 코이노니아인 것이다.


즉 위로 하나님과 아래의 사람과의 수직적인 사귐을 제사라고 한다면, 사람과 사람이 서로 이 복음을 전하고 나누는 것을 성도의 교제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교회가 필요한 이유이고 교회가 해야 할 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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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하나가 된다는 것을 Unique하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성경에 나오는 하나 됨은 그런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성경에서 하나님과 사람이 하나가 된다는 것은 동일한 존재가 된다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가 된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성경이 말하는 하나 됨은 Equal이나 Synchronize와 같은 개념이 아니다. 하나님과 사람이 하나가 된다는 것에 대하여 신앙적으로 교리적으로 엄청 경계를 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과 사람이 하나가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가 된다는 개념을 Equal이나 Synchronize로 보는 개념 때문에 문제가 된다고 보아야 한다.


기본적으로 창조주와 피조물이 하나가 된다는 것은 그럴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되는 것이다. 그것을 하나님께서 사람과 하나가 되는 ‘신인일치(神人一致)’의 개념으로 보는 것은 성경적 관점이 아주 부족한 생각이다. 그것은 하나님과 사귐을 모르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사람과 하나가 되기 위하여 사람을 만드셨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드셨다고 하셨다. 하지만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이 뱀의 유혹과 같은 ‘하나님처럼 되는 것(이것이 바로 equal의 개념)’과는 의와 법이 완전히 다른 것이다.


분명히 하나님과 사람은 하나가 되는 사귐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것이 존재와 격이 같아지는 equal의 개념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과 사람이 하나가 되는 법은 뜻이 형식으로 표현되는 것, 그것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사람이 하나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의는 보이거나 만져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표현할 형식으로 지으심을 받은 사람이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 곧 하나님의 의는 영이신 하나님을 표현할 형식으로 사람을 만드시고 선택하셨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뜻과 의가 육신을 가진 인생의 삶으로 표현되는 것, 그것을 하나님과 사람이 하나가 되는 것이라 하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과 사람이 하나 되는 사귐이라고 하는 것이다. 


바로 그 사귐과 하나 되는 관계를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라고 하는 것이다. 그것은 아버지의 본성이 아들로 성육신된 그런 관계이듯, 하나님의 뜻이 육신을 가진 사람으로 인하여 표현될 때,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다.


그것을 요한사도는 요한복음에서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라고 했고, 요한 1서에서는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이 생명이 나타나신바 된 지라”라고 표현한 것이다.


한마디로 한다면, 하나님의 말씀, 그 생명의 말씀이 우리와 동일한 육신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육신을 통하여 나타나고 표현되어서 사람이 보고 듣고 만질 수 있는 상태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 상태가 바로 하나님의 형상이 표현된 상태이고, 그 상태가 바로 그리스도의 정체성인 것이다.


바로 그 예수님이 하나님의 의를 표현한 형식이기 때문에 아들이 되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독생자가 되시는 것은 그것이 유일하게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법(法)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 법으로 처음 하나님의 아들이 되신 분이 예수님이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법을 보고 그 법이 하나님의 법이고,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는 사람이 바로 하나님과 사귐이 있게 되는 것이고 하나님을 믿는 것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의 법이라고 믿는 사람에게는 자신도 예수님과 동일한 육신을 가졌기 때문에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자신을 아들 삼기 위하여 만드시고, 아들을 이 땅에 육신으로 보내셨다는 것이 자신의 이야기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하나가 되고 하나님과 사귐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과 같이 되는 사람이 아니라, 영이신 하나님의 뜻과 의를 표현하기 위하여 주신 육신을 가진 자신의 삶을 드리는 것 그것이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라고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선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앞에서 우리는 신과 사람의 사귐의 근간은 제사라고 했다. 하나님과 사람이 사귀는 사귐의 기본이 예배라고 했다. 우리의 예배와 제사는 우리의 몸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이것은 제단 위에서 피 흘리고 불 태워지는 것이 아니라, 영이신 하나님의 뜻을 우리 몸으로 표현하는 것 그것이다.


바로 그것이 제사고, 그것이 예배이며, 그것이 하나님과의 사귐이며, 하나님과 하나 되는 것이며, 그것이 하나님이 나를 만드시고 이 땅에 보내신 이유이고,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삶이 되는 것이고, 그것이 우리가 이 땅에서 육신으로 사는 목적이고 이유며 본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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