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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일서 1장 1-4절) 사귐(1)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한1서 Date : 2014. 9. 7. 22:29 Writer : 김홍덕

사도요한은 자신이 듣고 보고 만진 바 된 생명의 말씀을 전하는 것은 사귐을 위한 것이고 또한 그것이 기쁨이라고 하고 있다. 이 사귐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리는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사귐’은 fellowship(교제, 공동체, 같은 관심사를 가진 모임)을 말한다. 이것을 성경적 관점에서 보면 같은 “의(義)”를 가진 사람들의 교제와 모임을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요한이 생명의 말씀이신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을 전하는 것은 모두가 같은 예수님을 나누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요한과 이 서신을 읽는 사람들 모두 예수님과 같이 동일한 육신을 가지고 있기에 그런 육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인정함을 받을 수도 있고, 또한 생명의 말씀이 자기 안에서 넘쳐나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본디 신과 사람의 사귐의 근간은 <제사>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육신으로 오시기 이전에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는 유일한 방법이 바로 제사였던 것이다. 제사가 엘리야의 때와 같이 받아들여지면 하나님과 사람이 뜻이 같고, 하나님께서 사람과 함께하는 증거가 되는 것이었다.


또한 반대로 사람들은 자신이 하나님을 믿는 것에 대한 증표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 이것이 하나님과 사람과의 사귐의 원조였다. 즉 하나님과 사람이 소통하는 수단은 제사였고, 그것은 하나님과 사람이 같은 마음을 가지게 되고 하나가 되는 것이 바로 사귐의 목적인 것이다.


그래서 요한 사도가 전하고자 하는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고 한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보고 듣고 만질 수 있는 육신으로 오셨다는 생명의 말씀은 하나님과 사람이 사귐이 있게 하는 것에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존재가 영이신 하나님과 육신을 가진 사람의 사귐의 통로가 되었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사람의 통로가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두신 목적이자, 사람을 통해서 표현하고자 하신 하나님의 성품을 예수 그리스도가 온전히 가지고 계신 존재이기 때문이라는 의미이다.


그 그리스도는 하나님께는 사람에게 나타내시고자 한 하나님의 뜻이 육신을 가진 인생으로 나타나 하나가 되는 분이고,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과 사람이 사귐이 있도록 하는 분이라는 것이다.


그 예수님의 정체성, 바로 하나님의 뜻을 육신을 가진 사람으로서 표현한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이 바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의 사귐이라는 것이고, 그러한 사귐의 실체를 요한이 보았는데, 그 실체는 영과 같이 만질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보고 듣고 만질 수 있는 그런 모습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요한 사도는 하나님의 아들이고 생명의 말씀이신 예수님을 보니 자신과 같이 보고 듣고 만질 수 있는 육신을 가진 존재였다는 것을 알았고, 그 예수님께서 동일한 육신을 가진 자신도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셨듯이 자신도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요한이 알게 된 그 사실, 몸을 가진 인생, 육신을 가진 이 삶이 하나님의 뜻을 표현하기 위하여 지음을 받은 것이고, 이 육신의 삶이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을 표현하는 하나님과의 사귐이 있을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알고 그것을 전하고자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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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일서 1장 1-4절) 하나님의 아들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한1서 Date : 2014. 9. 5. 12:24 Writer : 김홍덕

아들이라는 것은 그 부모의 의와 유전자가 표현되어 부모와 동일한 존재로 나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해서 그 부모가 어떤 사람인지를 표현하는 존재가 아들인 것이다. 그것은 비단 육신에 관한 것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영화 벤허에서 벤허가 사령관 퀸투스 아리우스의 양자가 되는데 이것은 퀸투스 아리우스가 가진 뜻을 벤허가 육신을 가지고 표현을 했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것을 아들이라고 한다. 이것은 세상에 아주 많은 일이다. 즉 어떤 사람의 생각과 뜻을 표현하는 사람을 아들이라 부르는 일이 흔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다. 우리는 육신의 혈통이나 호적을 통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없다. 기본적으로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육신이 없으시므로 혈통으로 아들이 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만약 그것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유일한 방법이라면 우리는 오늘 성경을 떠나서 살아도 된다. 우리가 무슨 수로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단 말인가? 그런 불가능한 신앙을 가지고 사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은 혈통에 의한 것이 아니다.


또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에 공로와 재물이 필요한 것도 역시 아니다. ‘그런 방법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려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하겠지만, 널리고 널린 것이 그런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다.


기도 많이 하고 성경 많이 보고 교회에 봉사해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생각하는 신앙, 돈을 가져야 장로가 될 수 있다는 생각과 정책, 그리고 세상에서 성공해야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는 생각 이런 것 어느 하나에라도 속한다면 이는 공로와 소유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려는 생각이다. 하지만 그건 종이 주인에게 인정받는 방법이지 아버지에게 아들이 되는 방법은 아니다. 즉 한마디로 종의 신앙일 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의 뜻을 표현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사람을 만드신 목적이다. 그것이 사람에게 두신 하나님의 뜻이다. 그 뜻이 있었기에 사람이 존재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 형상은 이미지다. 즉 하나님이라는 이미지를 표현하기 위하여 창조된 존재가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아들이다. 즉 하나님의 생각과 뜻을 표현하는 것이 사람의 존재 목적이고, 누군가의 뜻을 표현하는 것이 바로 아들이기 때문이다.


이는 그 사람을 볼 때 하나님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 다니는 사람을 보면 ‘나는 도저히 너처럼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면, 그 사람에게서 하나님을 찾을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이미지를 느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예수님을 보고 ‘우리는 저렇게 할 수 없다.’라는 생각이 드는 것과 같다. 그러면 우리에게 구원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하신 것은 우리가 할 수 있다. 우리도 십자가에 달리면 피 흘리고 죽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건 누구나 하는 것이다. 그게 육신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모습을 볼 때 우리도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 모습을 보니 내 모습이 저 모습이라는 깨달음이 있으면 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을 믿는 것이고, 육신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법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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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요한은 요한 1서에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에 대하여 듣고 보고 만진바 된 영원한 생명이 나타났다고 했는데 이것에 관해서 요한복음에서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고 했다. 이는 예수님은 생명의 말씀이고, 그 생명의 말씀은 사람이 만지고 보고 들을 수 있는 육신으로 이 땅에 오신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육신을 가지고 오셨다는 것은 사람에게 정말 정말 중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사람의 육신을 입고 오셨다는 것은 구원의 대상이 사람이라는 것이고, 또한 역설적으로 사람은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아들 곧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살 존재라는 것에 대한 방증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오셔서 그 육신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보여주셨다는 것은 이 말씀을 읽고 듣는 사람들도 육신을 입은 삶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약속이고 증거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에게 있어 영지주의와 같이 예수님은 우리와 다른 육신이나 다른 존재라고 말하는 것은 근원적으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과 또한 사람의 삶의 정체성을 상실하게 하고 희망을 져 버리는 것이 되기 때문에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다.


말씀이 육신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로고스가 사람의 몸이 되었다는 것이다. 로고스는 하나님의 말씀을 뜻하는 단어인데 성경에서 ‘로고스’는 하나님의 생각과 뜻 그 자체인 말씀을 말하고, ‘뤠마’ 혹은 ‘쉐마’라고 기록된 말씀이 있는데 이는 육신이 된 말씀을 말하며, ‘케리그마’라는 표현이 있는데 이는 선포되는 말씀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것으로 보면 생명의 말씀이 나타났다는 것과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것은 같은 의미로 하나님의 뜻이 우리와 동일한 육신을 가진 예수 그리스도로 나타났고, 그 예수님, 그 생명, 그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요한 사도는 사람이 만질 수 있고 듣고 볼 수 있는 존재, 즉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생명이라는 것은 생물학적으로 살아 있다고 하는 것에 국한된 의미가 아니라, 존재 본연의 목적을 가지고 있고 잘 수행하고 있을 때를 말하는 것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의가 표현된 사람이어서 살아 있다고 할 수 있다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육신을 가지신 분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표현된 존재, 하나님의 의가 표현된 존재이기 때문에 생명의 말씀이고,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며,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이는 예수님과 동일한 육신을 가진 우리 역시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말씀하시려고 하나님의 아들을 우리와 같은 육신으로 보내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에 관하여 조금이라도 부족함이 있다면 이는 성경을 온전히 아는 것이라 할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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