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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과 형식

Category : 김집사의 뜰/복음 담론 Date : 2014. 8. 23. 15:36 Writer : 김홍덕

'믿음장'이라고 하는 히브리서에 "보이는 것이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니라"라는 말씀이 있다. 이것은 언뜻 해석하기 힘든 말씀인데, 한 마디로 하면 보이는 것이 본질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보이는 것을 보이게 하는 무엇인가가 있다는 말씀이다.


또한 같은 믿음장에는 '약속을 받은 믿음'과 '증거를 받은 믿음'이 나온다. 얼핏 생각하면 약속보다는 증거가 더 확실한 것 같은데, 선진들의 증거를 받은 믿음은 약속을 받지 못했다고 말씀하고 있다. 그러니까 믿음은 '약속이 있는 믿음'이 더 온전한 믿음이라는 말씀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의>라는 내용이 사람과 세상이란 형식으로 표현되 책


성경의 모든 말씀은 '하나님의 의'라는 <내용>을 '세상과 사람'의 일이라는 <형식>으로 표현한 책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영이신 하나님,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는, 우리와 같은 육신이나 물리적 현상계의 한 실체로 존재하지 않으시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표현한 것이 세상이고, 그 중에서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 곧 하나님의 이미지를 표현한 존재로서 이 세상과 특히 사람에게 그 내용인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시는 말씀들인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자연스럽게 성경이 <내용과 형식>이라는 구도로 정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다 그렇다는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이 가지신 의를 사람과 세상을 통하여 표현하는 세계인 것이다. 세상이 바로 그런 구조라는 개념이 한 사람에게 열릴 때, 그 사람에게 비로서 하나님의 태초가 열리고, 하나님의 세상이 시작되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자동차의 본질은 모양이 아니다. 컴퓨터의 본질은 하드웨어가 아니다. 시계의 본질도 외형의 고급스러움에 있는 것이 아니다. 지갑도 본질이 아니다. 자동차의 본질은 이동이고, 컴퓨터의 본질은 계산을 통한 사용자의 표현이고, 시계의 본질은 시간을 알리는 것이며, 지갑의 본질은 돈을 넣어 다니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동차의 외관에 집착하고, 시계는 고급스러움을 추구하며, 자기 업무에 비해 필요 이상의 하드웨어를 가진 컴퓨터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고, 선물보다 포장지가 더 비싼 꼴과 같이 들어있는 돈의 수 십배, 수 백배 의 지갑을 들고 다니려 한다. 세상의 풍조가 이처럼 변한 것은 모든 일에 있어서 본질과 내용은 망각하고 형식에 매달리기 때문이다.



<죠슈아 벨>이라는 아주 아주 유명한 바이올린 연주자가 거지차림으로 30억 짜리 바이올린을 가지고 워싱턴 역에서 연주를 하니 아무도 보지 않았다고 한다. 제대로 된 공연은 수백불씩 하는 공연인데도 형식이 거지 같으니 모든 것이 다 거지가 된 실제 사례가 있었다. 



사람들의 이러한 역주행은 세상의 모든 것을 엉망으로 만든다. 우리나라에서 수입차 부품은 생산국의 몇 배에 이른다. 이것을 외제차 판매자는 고치지 않는다. 아니 고칠 수 없다. 우리 국민들이 외제차를 별 거 아니라고 생각하기 전까지는 어림도 없는 일이다. 


그런 일이 왜 일어나는가? 외제차라는 형식에 정신이 혼미할 정도로 매몰되었기 때문이다. 자동차의 본질을 이해하고 자신과 그 본질과의 상관성에 만족한다면 그 사람은 늘 자동차에게 감사하고 만족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미 내용은 망각하고 형식에 삶을 올인하고 있다.



세상이 갈수록 문제가 많아지는 것은 본질을 잊고 형식과 겉모습에 매몰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은 교회도 마찬가지다. 교회의 본질은 이미 찬란한 건물과 화려한 내부 장식에 묻혀 버린지 오래되었다. 어느 것이 교회의 본질인지 기억조차 가물한 상태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런 것도 내용과 형식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사람들이 <하나님의 의>라는 본질을 버린 원죄라는 내용에서 비롯된 형식들이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세월이 갈수록 형식에 집착하고, 교회도 그렇게 되는 현상들도 <하나님의 의>를 버린 내용이 표현된 형식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원죄에서 비롯되는 인간의 모든 죄의 형태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렇듯 내용이 망각된 모든 삶은 북한에서 내려 온 간첩이 국가와 사회에 봉사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한 마디로 하면 할수록 죄가 커지는 것이다.


사람의 죄는 자기 자리를 떠난 것이다. 사람이 떠난 자리는 하나님의 의와 성품이라는 내용을 표현하기 위하여 창조된 자신의 삶에서 내용을 버린 것이다. 즉 간첩과 같은 삶, 내용이 없는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에 아무리 성공적인 결과를 낳아도 그것은 하면 할수록 하나님을 진노케 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40일 금식 후에 받으신 세번째 시험이 '천하 만물에 절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형식이 실체라고 인정하라는 마귀의 유혹이었다. 그것에 대하여 예수님은 '주 너희 하나님만 경배하라'고 하셨다. 만물의 본질은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기자는 이 세상에 보이는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의가 본질이라는 것이고, 본질이자 내용이 바로 약속이라는 것이다. 즉 선지들이 보여준 믿음의 증거들은 그 약속이 표현된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에 대하여 바울 사도는 모든 만물의 고대하는 바는 <그리스도>가 나타나는 것이라고 로마서에서 말씀하셨다.


세상의 모든 만물과 모든 사람의 삶이 고대하고 이 짐진 것 같은 삶을 사는 이유는 오직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존재인 그리스도가 나타나는 것이라고 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런 사람이 바로 창조 목적이 달성된 약속을 받은 믿음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와 우리의 삶의 관계를 바로 아는 것, 살아가는 것에 있어 무엇이 내용이고 본질며, 또한 무엇이 하나님의 약속이고 목적인지를 알면, 지금 사람들이 미친듯이 추구하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다 자연스럽게 표현되는 것일 뿐이다. 생명의 본성은 그렇게 표현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과씨를 씸으면 사과나무가 되는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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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이다. 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정확하게 아는 것은 모든 성경을 아는 것과 진배없는 것이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을 안다는 것이 정통신앙이고 온전한 신앙이 되는 것이다.


사도 요한도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사도 요한 뿐 아니라 당대의 모든 사도들이 다 그러했다. 그래서인지 각자의 표현 방식이 조금씩은 달라 보이긴 해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예수님에 대한 표현들은 다 같다.


그런데, 오히려 지금의 교회들은 이 예수님에 대하여 좀 다르게 생각하는 것 같다. 각종 예배의 의식이 조금씩 다르고, 세례와 같은 의식도 또한 교리도 조금씩 다른 것은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다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각 교단과 종파들 마다 하나님이 다르다는 것이다. 모든 종파의 하나님이 동일하다면 그 하나님을 경배하는 의식이 다를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나님이 조금씩 다르다보니 예수님에 대한 생각도 조금씩 다른 것 같다.


하지만 초대 교회 때는 바울이나 요한이나 베드로나 예수님에 대한 생각은 같았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에 대하여 


생명이 나타내신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바 된 자니라.(요일 1:2)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사도 바울은 빌리보서에서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빌 2:6-7) 라고 기록하고 있다.


두 사도 모두 예수님께서 분명히 우리와 동일한 육신을 가지고 오신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것이 정말 중요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정확히 아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오셨다는 것을 인정하는 믿음은 의외로 찾아보기 힘들다.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오신 것을 인정하고 믿는다는 것은 오신 그대로를 용납한다는 것이다. 그것도 우리와 동일한 육신, 동일한 성정을 가진 몸으로 오셨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오셨다는 것을 믿는다는 것은 오늘 우리도, 우리 자신이나 또한 예수님을 믿고자하는 다른 사람 모두 태어나고 살아온 그대로의 모습을 가지고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런 신앙은 잘 찾아보기 힘들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예수 믿는 사람이라면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것을 많이 제시하고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요구들은 대부분 자연인으로서는 나름의 희생과 절제가 필요한 내용들이다.


금식기도를 하면 신앙이 좋다고 생각하는 것을 생각해 보자. 금식이라는 것이 사람에게 얼마나 힘든 것인가? 물론 금식하지 않는다고 구원 받지 못한다고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금식을 많이 한 사람이 왠지 신앙이 더 좋을 것 같다는 느낌을 받도록 교회의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그것은 분명히 사람이 가진 자연인으로서의 본능을 절제해야 좋은 신앙이 되는 모습이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태어나고 자란 그대로의 모습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좋은 신앙을 가질 수 있다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물론 금식기도는 필요하다. 하지만 좋은 신앙이 되기 위해서나, 육신으로 살아가는 것에 필요한 것이 너무 절실해서 하나님 앞에서 그 절실함을 표현하기 위해서 금식하라고 금식기도가 있는 것이 아니다.


성경에 나오는 금식은 사람의 창조목적이 아닌 다른 것을 그릇과 같은 사람 안에 채우는 것을 금식하듯이 끊는다는 의미의 기도이기 때문이다. 그 마음을 표현할 때 금식기도가 되는 것이지, 금식한다고 하나님께서 육신의 삶에 필요한 것을 잘 들어주시는 것은 아니다.


또한 사람들은 하나님께 어떤 것이 영광이 되는 것인가 하는 문제에 있어서도, 많은 경우 세상에서 성공한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세상에서 ‘이겼다’할 수 있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것인데, 세상에서 이겼다는 것은 세상의 법으로 볼 때 위대한 것이다.


그러므로 수능에서 좋은 성적을 내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교인 중에서 사법고시에 합격하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다고 생각하고 광고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법으로 영광스러운 것이 아니라 세상의 법과 이치에서 볼 때 이기고 성공한 것이 곧 하나님께서도 기뻐하시는 것이라 생각하는 무지함 때문이다.


물론 그것이 하나님께 해가 되거나 나쁜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 자체라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람이 판사나 재벌 회장이 되는 것이 아쉬운 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아쉬운 것은 우리 육신 그 자체이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표현된 형체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당신을 표현하시기 위하여 그 형상을 나타낼 수 있는 사람을 그리고 사람의 육신을 만드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가장 아쉬운 것은 바로 사람의 육신 그 자체이지, 이 육신이 부자가 되거나 판사가 되지 못함을 아쉬워하지도 않으시고, 또 그렇게 되는 것을 영광으로 여기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게다가 판사나 부자는 아무나 되는 것도 아닌데, 판사나 부자가 될수록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면, 공부 못하고 가난한 사람들은 언제 그런 영광 하나님께 돌릴 수 있겠는가? 그렇게 되면 만민을 위한 복음이 아닌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꾸 사람이 뭔가를 이루어야 하나님이 기뻐하신다고, 영광 받으신다고 생각한다.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은 태어날 때의 자연인, 그리고 육신 그 자체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꾸 그런 것을 인생을 치장하려 하고 그 치장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은 이 육신 그 자체가 보시기에 좋았던 같이 이 육신으로 주신 삶을 감사함으로 받는 것이 영광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육신을 주실 때 덤으로 주신 기능들로 육신이 살 동안 열심히 살면 되는 것이고, 그러다 부자가 되거나 판사가 되면 좋은 것이지, 그런 자리에 오르면 더 영광이 된다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사람들이 육신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영지주의도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은 육신이 부족하고 육신으로는 하나님을 섬길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육신을 끊임없이 절제하려 했다. 그래서 수도원이 생기고 신부와 수녀가 생긴 것이다.


사람들이 그런 생각을 하는 것과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오신 것을 부인하는 것은 같은 뿌리다. 우리가 부자가 되지 않아도, 판사가 되지 않아도, 이 초라해 보이는 육신 그 자체로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것을 알고 우리 인생을 육신으로 주심을 온전히 순종하고 고백하면 되는데, 사람들은 그것으로 부족하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런 생각으로 예수님을 보니, 어떻게 그런 모습이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나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그 꼴로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니, 너무 화가 나서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이다.


또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사람들마저도 십자가에서 죽었다가 다시 부활하고 하는 모습을 자신의 육신에 비교해 보니 자신은 그럴 수 없다는 것에서 예수님은 우리와 다른 존재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것이 영지주의다 달리 영지주의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 생각들에 대하여 요한 사도는 예수님에 대하여 보고 듣고 만진 바 된 것이라고 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분명히 우리와 같은 육신을 가진 존재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와 다른 육신이나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에게 희망이 없는 구원이 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은 육신으로 오신 것은 우리에게 있어 절대적인 사항인 것이다.


예수님께서 삶을 보여주신 것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삶이 하나님의 아들의 삶이라는 것을 보여주셨는데, 그 삶을 보는 우리가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시고자 한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예수님은 이 땅에 육신으로 오신 것이다.


영화 같은 곳에 보면 빈민들이 사는 곳에 어떤 사람이 흘러 들어왔는데, 잘 지냈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신분이 다르면 그것에 대하여 배신감을 느끼는 장면을 보여주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것은 분명한 배신이고 갈등이다.


만약 예수님도 이 땅에 계실 동안의 육신이 우리와 다른 몸이었다면 우리는 예수님께 완전히 속은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믿는 믿음이 필요한 것이다. 예수님을 믿기는 믿어야겠는데, 이 육신은 아닌 것 같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영지주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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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오신 것을 부인하는 것이 대단한 이단적 생각이 아니다. 육신을 가졌다는 것이 신앙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육신의 본능과 연약함을 극복하려는 모든 것이 다 육신을 부인하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크게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육신이 가진 연약함을 신앙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포기하고 방탕하게 살아도 된다고 생각하면 영지주의고, 육신의 연약함을 기도와 성찰로 극복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율법적인 신앙 공로주의적 신앙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아주 대단한 이단적 발상 같지만, 금식을 많이 할수록 신앙이 좋다고 생각한다면 육신을 부인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육신의 한계를 극복할수록 좋은 신앙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은 육신을 그대로 인정하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즉 영지주의나 율법주의나 뿌리는 같다. 사람이 육신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신앙에 도움이 되지 않는 문제에 있어 이를 극복하려 하는 것이나 육신은 어차피 별거 아니니 그냥 방탕해도 된다는 것이나 육신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점에서는 같다.


그래서 요한 사도는 예수께서 육신으로 오신 것을 부인하면 다 적그리스도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보고 듣고 만진바 되었다고 기록하는 것 역시 예수님은 분명히 요한 자신과 동일한 육신을 가지신 분이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인간의 육신은 어떤 면에서 보면 문제가 많다. 물속에서 살 수 없고, 하늘을 날지 못하며, 또 시간 맞춰 먹어야 하고 자야 한다. 신앙 안에서 봐도 예배드리다 보면 졸리고, 시간 정해서 기도하고 성경 읽으려 하면 까먹거나 시들해지는 육신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런 육신을 만드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했고, 예수님 역시 우리와 같은 육신을 가지고 이 땅에 오셨다. 왜냐하면 우리는 육신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에 이런 존재 자체가 구원의 대상이고 이 육신이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는 유일무이한 증거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영이기에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고 만질 수 있거나 볼 수 있는 육신이나 물리적 생물학적 형체가 없으신 분이다. 세상은 그런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것을 표현하시기 위하여 만드셨고,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 곧 의와 이미지를 표현하시기 위하여 만드신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드신 사람의 정체성이고, 사람이 육신을 가진 이유인 것이다. 그리고 이 육신이 실존적 실체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고 실존적 실체, 곧 육신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그 육신으로는 하지 못하는 것이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영이신 하나님과 같이 이 육신의 한계를 벗어난 어떤 것을 할 수 있어야 하나님과 같이 되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것이 좋은 신앙이며, 그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육신을 부인하는 생각의 시작은 선악과


사람들이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기원은 선악과 사건에 있다. 선악과를 먹을 때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먹었다고 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 만드시고 심히 좋았다고 한 육신을 가진 모습을 아담은 부끄럽게 여겼는데 그것이 바로 육신을 부인하고자 한 시초이다.


아담이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먹은 선악과의 결과는 육신이 벗었다는 것을 알았다는 것과 그 벗은 모습이 부끄러운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선악과를 먹었는데, 그런 목적 안에서 보니 육신은 하나님과 같이 되기에는 부끄러운 모습이더라는 것이다.


하나님과 같이 되려면 육신은 참 부끄러운 것이라는 것은 이 육신으로는 하나님과 같이 되기는 어렵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바로 그런 생각이 육신을 부인하는 것이다. 이 육신으로는 하나님과 같이 되기 어렵다고 생각했다면 당연히 육신의 처리 문제가 발생한다.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 유대인들과 율법주의자들 그리고 성경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육신으로 잘 지켜 행하면 된다고 생각을 해서 금식하고 시장에서 기도하고 각종 규례를 만들어 지키려고 했다.


반대로 영지주의와 같은 사상들은 육신은 어차피 죽고 나면 버릴 것이기 때문에 육신은 구원과도 또 하나님의 뜻과도 무관하니 그저 마음만 하나님을 잘 섬기면 되고 육신의 삶은 방탕해도 상관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러한 생각들은 모두 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육신을 주신 이유를 모르는 것이다. 무엇보다 이렇게 생각하게 된 발단이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마음에서 비롯된다. 그래서 선악과를 먹었고, 그래서 바벨탑을 쌓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육신으로 하나님을 섬길 수 없다고 생각하여 육신을 절제시키고 억제하는 것은 다 창조의 목적을 모르고 자기의 방식대로 하나님을 섬기려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래서 이것을 바로잡고자 요한 1서를 기록하고자 했고,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오신 것이 얼마나 중요한 사건이며, 우리에게 얼마나 축복과 같은 것인지를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도 예수님과 같은 육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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