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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일서 1장 1절) 세계의 시작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한1서 Date : 2014. 8. 14. 14:22 Writer : 김홍덕

세계의 시작


요한 사도는 <"태초부터 있는 생명에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본 바요......">라고 기록하고 있다. 요한이 어떻게 태초부터 함께 있었다고 하는 것일까?


요한이 지금 보면 아무리 옛날 사람이라도, 육신으로 태초부터 생명의 말씀과 함께 있어서 그것을 보고 만졌다고 하는 것은 성경을 문자적으로만 보면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이다.


우리가 이 요한1서를 알아가기 위해서는 이 시작의 말씀부터 분명하게 알고 가야 한다. 요한 사도가 말하는 <태초>는 언제인지, 또한 그 태초부터 있었다는 <생명의 말씀>은 무엇이며, 그것을 만지고 보았다는 것은 또 어떤 의미인지.


성경을 시작하는 책인 <창세기>에서도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라고 시작하고 있고, 요한복음에서는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이 곧 하나님”이라고 하고 있다.


또한 태초라고 표현되지는 않았지만, 마가복음에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라고 했고, 누가는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처음부터 말씀의 목격자가 되고”라고 누가복음을 기록하고 사도행전에서 “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누가복음)에는 무릇 예수의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시부터……”라고 했다.


사도요한에게 태초는 생명의 말씀이 함께하면서부터 자신에게 시작된 세계이며, 마가는 복음의 세계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서부터 시작한다고 했으며, 누가는 예수께서 가르치시기 시작하는 것이 자신이 그렇게 복음의 편지를 보내는 삶을 시작하게 된 시작이라는 것이다.


이뿐 아니라 바울 사도도 로마서를 시작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라고 시작한다. 즉 로마서를 시작하는 바울의 마음이라는 것이 예수께서 부르시면서부터 라는 것이다.


이렇듯 모든 사도들에게 있어 어떤 세계가 시작되는 시점이 있는데, 모두 하나 같이 다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라는 것이다. 요한 사도는 그것을 <태초>라고 했다. 그리고 다른 사도들도 같은 것을 다르게 표현한 것이다.



모든 사도들의 삶의 시작의 공통점은 단 하나 <예수 그리스도>이다. 



이것은 오고 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있어서도 동일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이 기록되었고 오늘 우리가 읽는 것이다. 즉 오늘 우리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이 새로운 세계의 시작이라는 것을 말씀하고자 하시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 세계의 시작이다. 그 시작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있다는 것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으로 해서 하나님의 세계가 시작이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 세계의 태초가 열리는 것이다.


사도 요한은 그 시작에 <생명의 말씀>이 있다고 했다. 즉 예수 그리스도가 생명이고 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요한 사도는 보았고, 들었고 자세히 보고 만졌다는 것이다. 요한 1서 1장 1절의 시작부분은 바로 그런 의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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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요한이 전하고자 한 것



창세기, 요한복음, 요한 1서 이 세권의 성경의 시작은 "태초"라는 말로 시작이 된다. 이 태초라는 것은 물리적인 세상의 시작이기도 하겠지만, 한 개인의 신앙 안에서 본다면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세계가 시작되는 시작이라는 의미가 더 중요하다.


요한 1서는 요한 사도가 기록했다고 알려져 있다. 특히 이 성경에서는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는 영지주의에 대하여 "예수께서 육신으로 오신 것을 부인하는 것은 적그리스도"(요일 4장)라 정리하면서 심도 있는 경계를 다루고 있다.


그렇듯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오신 것을 신앙에 있어 핵심적으로 보는 관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태초라는 개념을 바라보는 것 역시 육신이 수용할 수 있는 범주에서 바라보고 있다고 봐야 한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육신을 가진 인간으로서는 엄두도 내지 못할 세상을 만드시는 능력을 핵심적으로 말하는 것이라기 보다, 태초라는 것이 육신을 가진 사람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가 더 중요한 점이라는 관점을 가진 요한 사도의 편지라는 것이다.


이러한 것은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요일 1:1)에서 보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육신의 감각으로 접할 수 있는 것이라고 선언하고 있다는 것에서도 요한 사도가 전하고자 하는 것을 일 수 있다.


그러니까 요한 사도는 요한 1서를 통하여 예수께서 우리와 같은 육신을 가지고 오셨다는 것이 정말로 중요한 신앙의 핵심이라는 것을 전하고자 한 것이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에 있어서 예수님의 무엇을 믿는 것일까? 물 위를 걸으셨을 정도로 초인적인 능력을 행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믿는 것인지, 


아니면 죄는 우리가 범하고 벌은 예수님이 받았다는 대속을 믿는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근본적으로 다른 정체성을 믿는 것인지, 아니면 죽고 나면 영혼을 천국으로 이끄신다는 것을 믿는 것인지.


하지만 요한 사도가 믿었고, 또 전하고자 했던 것은 "예수께서 육신으로 오셨다는 것" 그것이었다. 그것이 왜 중요한 것인가 하면, 우리 인생들이 하나의 예외도 없이 다 육신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요한 사도는 요한 1서를 시작하면서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해서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바라"고 기록하고 있다.


생명의 말씀, 즉 예수 그리스도는 듣고 보고 특히 손으로 만졌다는 것은 모두 육신의 감각으로 인지할 수 있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오셨다는 것을 믿는 믿음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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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벨탑 (3)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4. 8. 5. 15:06 Writer : 김홍덕

하나님께서 바벨탑을 쌓고 있는 사람들에게 내리신 재앙은 언어가 혼란스럽게 되는 것이었다. 우선은 영어 불어 이런식으로 갈라졌을수도 있다. 하지만 본질적인 언어의 혼란은 같은 말을 다르게 알아 듣거나 해석하는 것이다.


바벨탑을 쌓는다는 것은, 사람들이 잠 오는 것을 참고 하는 것과 먹고 싶은 것을 참고 하는 것과 같이 사람의 본능을 통제하고 절제하여 공로가 벽돌을 쌓듯 축적하는 모든 노력들이라고 했다. 그런 노력들에 대한 하나님의 대응이 바로 언어의 혼란이라는 것이다.


이는 실재로 우리가 살아가면서 많이 보게 된다. 가장 우스운 말로 "여자의 언어"와 같은 것들이 그렇다. 최근들어서 페이스북에서는 정치인의 말을 해석해 놓은 것을 보았다. "더 나은 모습으로 보답하겠다"는 "좀 더 해 먹어야겠다"라는 의미라고 한다. 


바로 이런 것들이다. 이것이 언어의 혼란이다. 바로 그런 혼란이 신앙 안에 있다는 것이다. 그런 혼란은 행위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모이면 필연적으로 발생한다. 그러니까 회의를 하는 것이다. 총회와 노회를 한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성경에서는 회의를 한 것이 아니라 제비를 뽑았다.


회의를 해야 한다는 것은 의견이 다르다는 것이다. 하지만 알고 보면 다 "잘 하자"는 목적을 가지고 와서는 방법으로 싸운다. 그런 다툼이 있으니 회의로 결정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많은 경우 분열로 치닫는다. 그래서 이 많은 교파가 생긴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잘 믿기 위해서는 이렇게 하는 것이 옳은 것이다"라는 사람이 두 사람 이상만 모이면 그냥 혼란이 생기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가 그렇게 많은 교파가 생긴 것이다. 한 마디로 예수 잘 믿는 방법이 이것이라는 주장이 생긴 만큼 교파가 생긴 것이라고 보면 된다.


바로 그것이 바벨탑과 같은 사건이다. 즉 사람의 공로를 쌓아 하늘에 이르자며 벽돌을 구워서 쌓던 그 마음이 바로 오늘날 교파가 생기고 회의가 생기고, 교회가 갈라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역설적으로 그런 일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을 잘 모르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언어를 혼란스럽게 해야 할 정도로 반대편에 계시다는 것이다. 그것이 오늘날의 현실이다. 그리고 그런 현실은 오늘 많은 신앙이 아직 바벨탑의 과정도 지나지 않은 초보적인 신앙에 머물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한 것이다.



아브람이 떠나야 했던 본토 아비의 집이 바로 공로의 신앙의 세계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 이후에 아브람이라는 사람에게 본토 아비집을 떠나라고 하시는 것이다. 즉 아브람에게 벽돌을 구워 하늘에 닿게 쌓자고 하는 신앙, 다시 말해서 사람의 육신의 본능을 제어하는 공로를 훌륭한 신앙이라고 생각하는 세계에서 떠나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통해서 보여주고자 하신 세계인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순종한 아브람, 사람의 공로와 형식의 아비 집에서 떠나는 순종이 있는 사람, 그 사람의 후손, 그 사람의 믿음이 육신의 자손으로 표현되는 그 자손과 민족의 이야기를 만들어 가시는 것이다.


바로 그리스도 예수의 세계까지 말이다. 



그간 창세기 포스트를 열독해 주신 독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창세기의 다음 내용들은 이후에 주제별로 한번씩 다루기로 하고, 다음부터 <요한 1서>를 포스팅할 에정입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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