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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의 홍수 (4) - 하늘의 물과 땅의 샘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4. 6. 19. 16:04 Writer : 김홍덕

노아의 홍수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것을 후회하셔서 땅 위의 모든 것을 다 없애 버리시겠다고 하셔서 생긴 일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렇게 마음을 먹게 된 계기가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아내로 취하고 그래서 '네피림'을 낳게 되는 것 때문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노아의 홍수는 우리 신앙에 있어 어떤 여정일까? 그것은 세례에 대한 예표다. 노아의 홍수는 결국 사람의 타락, 곧 하나님을 섬기는 것에 있어 사람의 방식을 도입해서 위대해지는 것에 대한 반전이기 때문이다. 노아의 홍수가 시작될 때에, 하늘의 물과 땅의 물이 다 나와서 홍수가 났다고 했다.


노아 육백세 되던 해 이월 곧 그 달 십칠일이라 그 날에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 하늘의 창들이 열려...(창 7:11)


이것은 마치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아내로 삼음과 같이, 하늘의 것과 땅의 것이 하나로 합쳐지는 것이다. 성경에서 물은 말씀으로 비유되고 있다. 말씀은 그 의에 대한 언어적 표현이다. 즉 하늘의 의를 가진 말씀과 땅의 의를 표현한 말씀이 넘쳐나서 하나가 되니 홍수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성경을 설명하면 성경의 사실을 전부 의미적으로만 해석한다고 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아니다. 필자 역시 성경에 기록된 말씀들은 실제로 일어난 사건들이라고 믿는 것에는 이의가 없다. 그것을 믿는 것은 하나님께 그런 일은 뭐 기적도 아닌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왜(Why) 그런 일을 일으키셨는가?"에 대한 해답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단순히 지금 시대의 사람들이 보지 못한 옛날의 기적을 남겨 놓고 그것을 사실로 믿으면 천국에 들여주고, 그것을 믿지 않으면 지옥에 보내기 위하여 성경에 기록된 사건을 일으키시고 기록하셨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노아의 홍수 역시 마찬가지이다. 지금에 와서 설사 아라랏산이 어디라는 것이 증명이 되고, 또 노아 방주의 잔해가 발견되면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이 다 하나님을 믿을 것 같지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노아의 홍수가 사실 여부에 대한 믿음의 판단 기준으로 일으키신 사건이 아니라는 것이다.


창세기라는 것이 분명히 물리적인 세상이 어떻게 형성되었는가 하는 것에 대한 기록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기록한 창세기라는 것에 주목하면, 어떤 사람에게 하나님의 가치관과 세계가 열리는 과정에 대한 말씀이 바로 창세기라는 것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된다.


그것은 창세기에 나오는 모든 말씀들이 하나님의 의가 한 사람 안에서 열려서 새로운 세계가 열리고, 그 세계 안에서 자신의 삶에 어떤 일들을 하나님께서 경영하셨는지에 대하여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것이 바로 성경 말씀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아니면, 성경은 그냥 신화나 소설 아니면 역사책일 뿐이다.


또한 노아의 홍수가 아무리 실재했다 하더라도, 오늘 나에게 의미 있는 사건이 아니면 그것은 적어도 나에게는 없는 사건인 것이다. 야구장에서 야구를 매일 해도 가서 보지 않는 사람은 야구장이 실재한 것이 되지 않은 것이듯이 말이다.


그러므로 이 노아 홍수와 방주도, 오늘 나에게 의미가 없다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의 창세기의 흐름은 오늘을 살아가는 개인에게 있어 하나님의 세계가 열리고, 그 마음 안에 어떤 일이 있는지에 대한 말씀으로 본다면 '내 안에도 그 의미가 있는 노아 홍수와 방주'가 될 것이다.


노아 때의 홍수는 분명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서 그것을 아내로 삼고 네피림이 생겨나는 것에 하나님께서 진노하심으로 발생한 사건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에 사람의 방법이 좋을 것이라 생각해서 세상에서 성공하고 세상이 인정하는 일이 신앙 안에서 있으면 좋다고 생각하여 그것과 연합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싫어하심으로 생긴 사건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사람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에 세상에서 좋은 방법을 가지고 오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아내로 삼았다는 것이고, 또한 하늘의 창이 열리고 땅의 샘이 터져서 하늘과 땅의 물이 합쳐지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홍수인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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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의 홍수 (3) - 네피림(Nephilim)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4. 6. 18. 16:22 Writer : 김홍덕


Nephilim figures
Nephilim figures by Leonard John Matthews 저작자 표시비영리동일조건 변경허락  
<네피림은 거인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신앙의 한 단면을 말씀하시는 것>



네피림에 대하여 사람들은 '성경의 최대 난제' 중의 하나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도 그럴 것이라 생각이 되는 것은 실존하는 거인들을 볼 수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이 된다. 물론 '하나님의 아들들'이나 '사람의 딸들'이 무슨 의미인지도 모르기 때문에 더욱 그럴 수 있다 생각이 된다.


사람들에게 네피림과 같은 성경 속의 말씀이나 표현이 어려운 것은, 자기 안에 그것에 대응되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눈을 본 적이 없는 아프리카 사람들에게 '겨울에 내리는 눈'이라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일까를 생각해 보면 된다.


그러니까 성경은 내 안에 말씀과 연결되는 것이 없으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성경의 난제라는 것이 생기는 것이다. 즉, 네피림이라는 것이 어렵게 여겨진다면, 그 사람은 분명히 성경을 문자로 읽고 있는 사람이고, 성경에 기록된 것이 실재 사건이라고 믿는 것이 믿음이라고 여기는 사람이고, 이분법적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성경이 오늘 나의 이야기로 읽혀진다면, 성경에 나오는 사건에 대하여 나의 고백이 뒤따를 수 밖에 없다. 네피림이라는 것 역시 그렇다. 하나님을 믿는 것에 사람의 방법이 아름답게 보여서 그런 방법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자기의 모습을 본 적이 있다면, 네피림은 아무런 난제도 아니다.


왜냐하면 네피림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아들들'로 표현된 하나님을 표현하는 마음이 '사람의 딸들'로 표현된 사람이 만든 문화나 과학이나 재화로 꾸며지면 좋을 것이라 생각하여 화려해진 신앙의 모습을 두고 거인이라고 표현한 것이기 때문이다.


아들이라는 것이 육신으로 낳은 남자 자식이기도 하지만, 성경이 의미하는 것이 '그 부모의 의가 육신으로 표현된 자식'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것들이라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반면에 '사람의 딸들'이라는 것은 성경적 관점으로 볼 때, (성)씨를 가지지 않은 사람을 여자나 딸이라 하듯이 하나님의 의를 가지고 있지 않는 사람들을 여자의 격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딸들'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가지지 않은 방법들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성경 전반에 걸쳐서 나오는 남자와 여자를 이해하는 것에 도움이 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네피림(Nephilim)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에 사람의 방법을 동원한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섬기는 것에 돈이 있으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나, 하나님을 섬기는 것에 고상하면 좋겠다는 것이나, 세상에서 성공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다 네피림이라는 것이다.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 세상에서 볼 때 고상 것이나 부유한 것이 바로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보니 '하나님을 섬기는 것에 저렇게 하면 좋겠다'라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사람의 딸들을 아내로 취했다는 말씀인 것이다.


이것은 실로 엄청난 위대함을 낳았다. 지금의 교회를 보자. 왜 교회가 그렇게 화려해야 하는지 설명할 방법이 없다. 오직 유일한 이유가, '기왕이면 다홍치마'라는 논리이다. 다시 말해서 좋은 것으로 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람의 딸들을 취한 하나님의 아들들의 모습인 것이다.


또한 개인의 신앙도 그렇다. "서울시를 하나님께 바치겠다" 같은 말들이 그렇다. 서울시는 하나님께 바치고 말고 할 것이 아니다. 정말로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기에 굳이 바칠 이유도 없고, 또한 하나님께서 그런 것을 좋아라 하시는 분이 아닌 <존재의 신이신 여호와>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렇게 하면 위대해 보인다. 그것이 네피림이다. 금식기도나 전재산 헌금과 같이 사람들이 듣거나 볼 때 "와~~!" 할 수 있는 것들이 다 그런 것이다. 물론 신앙의 여정에 있어 그럴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이라 생각하고 하면 다 네피림과 같은 것이다.


네피림은 노아 시절에 실존했을 존재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타락한 천사(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이 결혼한 결과물이 아니다. 설령 그렇다면 2,000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무관한 말씀이고 노아의 홍수는 그저 신화나 동화 같은 이야기일 뿐이다. 그렇다는 것은 그것을 사실이었다고 증명하거나 믿는다고 신앙이 좋은 것은 될 수 없다. 과학적 능력이 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라면 몰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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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피림은 어떤 거인들의 이야기가 아니다. 오늘 내가 하나님을 믿는 것에 어떤 마음으로 믿는가에 대한 거울과 같은 말씀이다. 내가 오늘 존재의 신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신앙하는데 있어, 나의 어떤 행위나 감투나 고상한 모습이나 화려한 재화가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것이 다 네피림이고, 이러한 것은 노아의 홍수와 같은 세례를 거쳐야 하는 회개의 대상이라는 것을 깨닫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말씀인 것이다.


변화산에 올라간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는 변화된 예수님과 또 엘리야와 모세를 보았다. 그러자 베드로가 '여기가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고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라고 날 뛰자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는 하늘의 소리가 들려 눈을 떠 보니 예수님만 있었다고 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에는 심지어 모세도 엘리야도 필요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모세가 받은 돌판에 새겨서 사람이 먹을 수 없는 율법이나 아무나 할 수 없는 엘리야의 기적 같은 것도 필요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과 결합하면 좋을 것이라는 것은 다 하나님께서 싫어하신 네피림이기 때문이라는 것이 또한 성경의 말씀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말씀을 읽을 때에, '네피림이 뭐지?'라고 의문을 가질 것이 아니라, "나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에 있어 세상적인 것이 있으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가?"라는 솔직한 질문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내 안에 있는, 또한 오늘날 교회의 모습에서 네피림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진정한 고백을 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알래스카를 다녀온 아프리카 사람이 될 것이다. 그러니까 '눈'이라는 것이 전혀 난제가 아닌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그것처럼 성경의 말씀도 그렇게 알아 가는 것이다. 그렇게 나의 이야기로 들릴 때 성경은 절대로 어려운 말씀이 아닌 내 일기와 같은 책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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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 홍수가 발생하게 된 계기가 무엇인가 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그것을 아내로 삼았다는 것이 출발점이었다. 아내로 삼았다는 것은 그 베필로 더불어 나의 정체성과 의를 표현한 아들을 낳겠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이점이 중요한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고 살아야 하는 사람 그리고 사람 안에 누구나 가지고 있고 그렇게 살아야 하는 본성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아들은 그 아버지의 의가 성육신된 존재이기 때문이고, 또한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이미지가 형상화된 삶을 살도록 지음 받은 인간이기에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면서 사는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아내로 취했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데 사람의 방법을 베필로 삼았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에 인간적인 방법이 좋아 보여서 그것을 아내로 삼아 한 몸이 되어 아들을 낳으려 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성경에서 그 사이에서 난 아들들을 <네피림(용사)>이라는 장대한 사람들이 태어났다고 말씀하시고 있다. 이것은 골격이 큰 사람이 태어났다는 의미가 아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에 위대함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는 의미이다.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과 법이 가진 아름다움이라는 것이다. 즉 이것은 교회로 치면 좋은 건물을 가지고 있으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것인데, 그것을 아름답게 꾸며 봤자 하나님 보시기에는 그게 그것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예배 드릴 때, 수억원의 오르간이 있으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아내로 삼았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것이 이 블로그를 통해 지속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큰 교회>의 모습인 것이다.



Burgos Cathedral – Catedral de Burgos HDR 4
Burgos Cathedral – Catedral de Burgos HDR 4 by marcp_dmoz 저작자 표시비영리동일조건 변경허락



사람들이 그런 생각을 하게 되면 맘모스형 교회가 나오고, 기업형 교회가 나오고, 한마디로 네피림과 같이 장대한 모습의 결과물들이 나온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아내로 삼았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것이 큰 교회 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모든 사람의 마음 안에 이런 본성이 있다는 것이다. 즉 누구나 하나님을 섬기는 것에 있어 금식도 하고, 좋고 비싼 것으로 하나님께 드리려 하고, 가장 고상한 방법으로 신앙생활을 하려고 하는데, 바로 이것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아내로 삼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런 모습을 보고 하나님께서 인간을 땅에서 쓸어버리시려고 마음을 먹었다는 것을 우리는 명심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쓸어 버리려 했다는 것은 하나님께 의미가 없어졌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죽은 목숨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선악과를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하신 그 죽음이란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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